#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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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포식자가 식사만 전부 마친다면, ‘근원의 길’은 대성이 원할 때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뭘까.
갑자기 생명 포식자가 대성을 집어삼키더니, 그는 어느덧 어둠의 망망대해를 떠다니고 있었다.
‘지구로군.’
이미 한 번 겪어봤기에 익숙한 압박감, 익숙한 부유감이었다.
대성은 시스템이 말한, 자신을 애타게 찾았다는 누군가의 정체가 ‘지구의 근원’임을 단박에 깨달았다.
갑자기 무슨 용건으로 납치했느냐며 대성이 질문을 건네려던 찰나.
[지구gmkf-rknf가 절대자&!$!%]
[고통을 호소#[email protected]%-하고 있935!]
[시스템을 종-.]
갑자기 시스템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열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마치 데이터 오류라도 생긴 것처럼.
전례 없는 사태를 목격한 대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대체…….”
<면목이 없구나.>
중성적인 음성이 망망대해의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지구의 근원’의 목소리였다.
이전처럼 여유가 흐르고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독한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가쁜 호흡과 신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불길한 낌새를 느낀 대성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면목이 없다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막지 못했단다.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만큼은 이 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침착해. 네가 흥분하면 그 영향이 나한테까지 미친다.”
찌푸려진 대성의 한쪽 눈살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여기는 근원의 품. 지구의 근원이 느끼는 고통은 대성에게도 선명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막지 못했다고? 뭘 막지 못했다는 거야.”
<나도 ‘그것’의 정체는 정확히 모르겠단다. 다만 아주 거대하고, 강력하고, 아, 아아…… 모르겠구나. 모르겠어. 근원인 나조차 그런 건 본 적이 없단다!>
“……아카식 레코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는데.”
<만물과 시간을 아우르는 지식의 보고(寶庫)조차 기록하지 못한 존재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시공간의 인과가 기록된 ‘아카식 레코드’마저 초월한 존재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왜 이런 타이밍에 뜬금없이 그런 게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고.
분명 가장 높은 격을 지닌 상위 차원은 사라졌고, 천상 또한 확실히 멸망했을 텐데.
대체,
“……아니.”
자신이 맞섰던 적. 그리고 앞으로 맞서 싸워야 할 적.
그것들의 리스트를 떠올려, 하나둘씩 소거법으로 지워나가던 대성의 머릿속에.
“설마 그놈이 어쩌면…….”
단 하나의 후보만이 남았다.
***
“갑자기 어딜 가신 거지?”
대성을 한참이나 찾고 있었던 네비아가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바깥 세계의 하늘엔 어느덧 노을이 짙게 깔려 있었다.
몇 시간 후면 뉴멕시코 영지에서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다름 아닌 인류와 이종족의 성공적인 화합을 기원하는 축제였다.
그 축제의 주역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성이 되어야 하건만, 어째선지 아까부터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1급 요리사들이 만든 특선 요리를 먹어보시면 우리를 신뢰할 마음도 드실 텐데…….”
“듣자 하니 인간들의 대다수는 육류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채식밖에 없는 엘프족의 음식 문화를 과연 그분께서 좋아하실지는…….”
“어허. 경솔한 소리 말게, 부관. 지구엔 이런 속담도 있지 않던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네비아는 자신을 호위하는 부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인근을 아무리 살펴봐도 대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시 종적을 감추신 듯합니다. 슬슬 돌아가시죠, 여왕님.”
“그러도록 하지.”
네비아는 부관과 함께, 재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영지의 중심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피의 대지가 그곳에 있었다.
“…….”
“…….”
네비아와 부관은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대성을 찾으러 갔을 때만 해도 멀쩡하게 웃고 떠들었던 자들이, 지금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질기고 비리군.>
콰직-!
그리고 그 처참하기 그지없는 아수라장의 한복판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한 여인이, 시뻘건 날고기 한 덩이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허리춤까지 길게 내려오는 금발이 무척이나 매혹적인 미인이 입가에 피를 덕지덕지 묻힌 광경은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
네비아와 부관은 어렵지 않게 저 고깃덩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인육(人肉).
여인의 발아래엔 가슴이 한 움큼 뜯겨나간 인간의 시체가 있었다.
퉤-.
네비아와 부관이 말문을 잃은 사이 여인은 씹고 있던 인육을 거칠게 뱉어버렸다.
<나약한 그릇을 지닌 종족이 있는가 하면, 태생적으로 강대한 그릇을 지닌 종족 또한 있었는데…….>
슥-.
여인은 입가에 잔뜩 묻은 선혈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그들의 고기 맛은 하나같이 획일적이야. 재미없어.>
옅은 한숨을 내쉰 여인의 눈동자가 네비아를 향했다.
뼈가 얼어붙는 것만 같은 냉혹한 시선.
부관이 황급히 네비아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당장 피하십시오, 여왕님!”
“부관……?!”
우웅-!
활짝 펼친 부관의 손 주변으로 빛무리가 응집되더니 곧 활 한 자루가 생겨났다.
똑같은 방식으로 화살까지 소환한 뒤, 부관은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이런……!”
감정이 격앙된 탓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씩, 네비아도 부관도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동족이 몰살당했다는, 악몽이나 다를 바 없는 현실이.
<…….>
여인은 초상화처럼 심드렁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관을 향한 걸음이 아니다.
심지어 부관의 말을 듣기는 한 건지, 그에겐 힐끗거리는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발을 옮기던 여인이 멈춰 선 것은 어느 엘프의 시체에서였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시위를 잡아당기는 부관의 손이 점차 떨리기 시작한 그때.
콰직-!
여인은 가뿐하게 엘프의 어깻살을 한 손으로 뜯어냈다.
선연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바라보며 여인은 입술을 혀로 핥더니 말했다.
<엘프 고기는 오랜만인걸.>
“……!”
부관의 인내심이 한계에 봉착했다.
파-앙!
그의 손이 활시위를 놓은 순간, 빛으로 이뤄진 화살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대기마저 메말라 붙을 열기에 휩싸인 화살이 여인의 머리에 박히기 직전.
<분위기를 살려줄 생각이었나?>
돌연 수많은 나비가 여인의 곁을 훨훨 날아다녔다.
뜬금없이 나비라니?
부관과 네비아는 자신들이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방금 부관이 날린 화살이 나비가 되어 흩어졌으니까.
<그것 참 고맙구나.>
허리 뒤로 깍지를 낀 여인이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나비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모여들었다.
<이건 내 답례다. 섭섭지 않게 느껴줬으면 좋겠군.>
화아악-!
나비들은 순식간에 수십 자루의 창으로 변해 부관을 향해 날아갔다.
화살이 날아갔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콰직-! 콰직-! 콰직-!
부관의 온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수한 창들에 꿰뚫렸다.
“부관-!!”
격분을 터뜨린 네비아가 보석으로 장식된 플랑베르쥬를 소환한 뒤, 여인에게 쇄도했다.
지구의 S급 사냥꾼은 아득히 초월한 번개 같은 움직임.
진노가 묻어나는 절규와 함께 네비아가 플랑베르쥬를 휘둘렀다.
<하나는 남겨둬야겠지.>
파삭-!
플랑베르쥬의 검날은 나뭇잎이 되어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일순, 네비아의 눈동자 또한 경악과 허탈함으로 물들었다.
콱-!
여인의 새하얀 손아귀가 네비아의 목을 난폭하게 움켜잡았다.
<그놈이 올 때까지 갖고 놀 장난감은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너, 넌…… 누, 구…….”
네비아가 부릅뜬 눈으로 여인을 노려보았다.
물론 여인은 누구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 하면 네비아를 재밌게 갖고 놀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한 눈치다.
허공에 뜬 발이 허우적거렸다.
“컥……! 왜, 왜…… 우, 우리들의 땅, 에서 이런, 짓을……!”
<우리들의 땅이라고? 그것만큼은 흘려듣지 못하겠는데.>
“……?!”
바로 그 순간, 네비아의 시야가 아득해졌다.
한끗, 딱 한끗 차이로 더 세게 힘을 줬을 뿐이다.
여인은 그 정도의 힘을 손에 실었을 뿐인데 네비아는 당장이라도 질식할 듯한 고통을 느꼈다.
<여긴 내 땅이다. 너희는 집구석을 빨빨 기어 다니는 해충에 불과하고.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 말에 대답하기엔 네비아의 의식이 이미 저물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본능 같은 것이 그녀의 손을 움직이게 했다.
힘줄이 잔뜩 세워진 네비아의 손이 여인의 팔을 붙들었다.
네비아는 숨이 턱 막혀오는 고통 속에서도,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이, 행성의…… 전역에 분포한, 차원 연합의, 일원들이…… 네게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해줄-.”
<그 멍청이들이라면 이미 나의 ‘클론’들이 정리 중이다.>
“뭐, 뭐……?”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진 모르겠나? 아둔한 것.>
여인의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그와 동시에 땅에 드리운 여인의 그림자가 부채꼴 모양으로 드넓게 펼쳐졌다.
뒤이어 그림자가 땅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맙, 소사…….”
평면에서 입체가 된 그림자들의 ‘군단’을 본 네비아는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확실한 절망을 느꼈다.
본체의 실루엣을 닮은 무수한 그림자들을 등진 채 여인은 말했다.
<창조주(創造主)의 땅을 함부로 탐내지 마라.>
***
“세계는 이제 평화로워졌다며.”
강북 지역.
피로 번들거리는 쌍검을 쥔 채, 신초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근데 이게 다 뭐냐고.”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빼곡히 에워싸고 있는 ‘그림자’들을 보았다.
칼에 묻은 피는 저 그림자들의 피가 아니었다. 신초영 본인의 피가 칼날까지 튀었을 뿐.
애초에 아무리 칼을 휘두르고 안간힘을 써도 그림자는 재생되고 또 재생되었다.
‘라이프베슬’이라는 확실한 약점을 지닌 사령 병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저 그림자들은 문자 그대로 불멸(不滅)의 존재였다.
<헛된 발악은 그만두고 조용히 이 땅의 거름이 돼라.>
<그편이 네 존재를 유의미하다고 증명하는 길이니까.>
“닥쳐!”
신초영의 난도(亂刀)가 태풍처럼 휘몰아쳐 그림자들을 휩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신체를 수복한 그림자들이 신초영에게 달려들어 불끈 쥔 주먹을 휘둘렀다.
두두두두-!!
원초적인 폭력.
아무리 떨쳐내고 저항해도 이 그림자들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때.
[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틀림없이 황준영, 그리고 박동혁의 비명이 중첩된 것이었다.
“선생님? 아저씨! 거기 무슨 일 생겼어요?! 저기요! 두 분, 제발 뭐라 말씀 좀……!”
신초영의 절박한 외침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그것은 실제로 얼굴에 짓쳐 드는 그림자들의 주먹 때문일까.
아니면…….
대성이 세운 탑의 입구.
그곳에서, 멜카논은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의 싸움이 끝나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고…….”
쉬지 않고 밀어닥치는 ‘그림자 군단’과 대적한 채, 멜카논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연쇄를 끊어낼 수 있을까요.”
<너는 그놈의 권속(眷屬)이로군. 주인의 곁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걸 제가 당신에게 알려줄 의무는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탑에 들여보내지 말라는 군주의 명이 있으셨다.
자신의 뒤에는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할 군주의 가족이 계신다.
쾅-!
멜카논은 지팡이 끝을 지면에 힘차게 내려찍었다.
콰가가각…!!
그 순간, 칼날로 이뤄진 폭풍이 그림자들을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림자들은 태연스레 재생되었다.
상관없다.
“누가 이기나 해보죠.”
인고(忍苦)의 싸움에서 물러설 거라면, 애당초 ‘대현자’라는 칭호를 달지도 않았을 테니까.
***
현재 벌어지는 상황은 이미 멜카논과 황준영 일행의 전음을 통해 대성에게 전해진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탑이 침공받았다는 멜카논의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나를 너의 품으로 불러들인 건, 단지 그놈을 막지 못했다는 소식을 내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나?”
<다행히 ‘생명 포식자’가 매개가 되어주어 너를 불러들일 수 있었단다. 그래. 네게 ‘그것’의 존재가 찾아왔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
“멍청한 짓이군. 지금 너랑 이렇게 대화 나눌 시간에 내가 그놈과 싸우고 있었더라면 상황이 한결 나아졌을 텐데. 당장 날 여기서 내보내.”
<……그리고 너를 지키기 위함이었지. ‘그것’은 지금의 너조차 감당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다. 너까지 죽어버리면, 그땐 정말로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
……그런 말을 이어가려던 근원의 말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화르륵-!
어느새 업화대검을 꺼내든 대성이 어둠의 공간을 갈라내고 있었다.
미약한 통증을 느낀 지구의 근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 하는 짓이니?>
“난 여기서 나갈 거다.”
<그만두렴! 섣부른 짓 하지 마!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것’ 앞에-.>
“대책? 사흘도 안 되어 가족이 또 위험에 빠진 판국에, 대책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대책.”
업화대검은 확실하게 근원의 품에 틈새를 만들어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겠으나, 지금은 ‘파편’의 힘이 더해진 업화대검이다.
덕분에 대성은 어렵지 않게 근원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가야!>
다급히 들려오는 ‘지구의 근원’의 외침을 뒤로하고 대성은 다시 바깥 세계, 뉴멕시코로 돌아왔다.
엘프와 인간들의 시체가 마구잡이로 뒤엉킨 핏빛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그것’의 모습까지…….
그것- 여인은 대성을 발견하더니 얼굴에 짙은 화색을 띠었다.
<드디어 왔군.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그럼 나랑 잠시-.>
“네놈은 나중에 죽여주마.”
<뭐?>
그 순간, 여인의 시야에서 대성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전에 탑을 세우면서 설정한 체크포인트를 타고 대성이 장소를 옮긴 것이다.
대성은 눈 깜짝할 사이, 탑 1층에 구현된 블러드 퀸의 고성 내부로 진입하였다.
체크포인트가 설정된 지점은 혜정과 지수가 머무는 방이 서로 마주보는 중앙 복도.
하나 그곳도 이미 그림자 군단의 마수가 뻗친 상태였다.
‘탑 안쪽에 이놈들이 있다는 건.’
입구가 뚫렸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멜카논의 전음이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죽진 않았어.’
그저 의식을 잃었을 뿐.
주인과 소환수는 같은 마력 회로를 공유하고 같은 마력 회로로 얽혀 있기에 알 수 있었다.
‘보아하니 다행히 엄마와 지수는 무사한 듯싶고…….’
화륵-.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할까.
이미 진즉에 이성의 끈이 끊어졌던 대성이 업화대검을 그러쥐었다.
진각을 밟아 그림자들을 휩쓸어버리려던 찰나.
<얘기 좀 하자니까 뭐 이리 급하지? 참을성이란 걸 좀 배워야겠군.>
무수한 그림자 중 하나가 ‘본체’로 뒤바뀌었다.
전라의 여인.
대성의 눈에는 저 모습이 꽤 낯이 익었다.
그래.
2차 대격변 이전, 처음으로 천상을 습격했을 때 만났던 주신(主神)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주신이냐고? 그렇게 물으려고 했나? 미안하지만 아니다.>
“…….”
하지만.
그때 만났던 주신과 지금 저것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가 다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여인은 이내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나는 차원수의 창조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