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귀로 직접 들으니 혼란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때, 자신을 창조주라 밝힌 여인이 이를 씩 드러냈다.
<놀랐나? 아직 만날 때가 아닌데 우리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에?>
“…….”
<한낱 피조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쯤이야 신(神)인 내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
뭔지는 몰라도 이쪽의 생각이 훤히 노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생각을 비운다.’
무념무상(無念無想)!
화르륵-!
대성은 이미 근원의 품을 벗어났을 때부터 최대 화력을 방출하고 있었던 업화대검을 사납게 휘둘렀다.
전방위로 뻗어 나간 불꽃의 검풍(劍風)이 창조주의 그림자들을 집어삼켰다.
<…….>
막대한 열기를 뿜으며 나타난 불의 벽을 창조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한 순간.
팟-!
창조주의 등 뒤로 대성의 신형이 흐릿한 잔상을 그리며 등장했다.
이대로 척추까지 베어버릴 심산!
하지만…… 캉-!
대성의 일격은 돌연히 나타난 검은 장검에 가로막혔다.
허리 뒤로 이동한 창조주의 손에는 검은 불꽃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장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주변에 산재한 클론들을 끌어모아 급조한 무기였다.
그러나 대성이 놀란 대목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이걸 막아?’
더군다나 자세를 제대로 취하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로 가볍게.
심지어 등 뒤에 가해진 기습을 막았는데 시선은 여전히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다.
<머릿속 생각을 전부 비워버렸는데도 몸은 용케도 적의 후방을 파고들다니. 대단하군. 그만큼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이기고자 하는 갈망이 몸에 뱄다는 뜻이겠지.>
“…….”
<하지만 소용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모든 인과와 순리의 형태가 내 손안에 있는 이상, 너는 독 안에 든 쥐에 불과해.>
장황하게 이어지는 창조주의 말이 마침표를 찍기 무섭게, 대성의 표정이 와락 찌푸려졌다.
콰드득-!
대성을 향하고 있지 않던 창조주의 목이 180도로 꺾이며 서로 시선을 마주하는 형태가 되었으니까.
이어서 전신 또한 목을 따라서 반 바퀴 회전하였다.
굳이 이런 방식으로 몸을 돌려야 하나 싶을 정도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
<아직도 너와 나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나?>
창조주가 핏줄이 선 눈을 부릅뜨며 대성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순 혐오감을 느낀 대성의 오른 무릎이 창조주의 복부로 솟구쳤다.
일련의 과정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재빠른 속도였으나,
탁-.
그것을, 창조주는 태연하게 한쪽 손바닥으로 막아냈다.
<얘기 한 번 나누기 어렵군.>
창조주가 손바닥을 슬며시 밀어내자 허공에 멈췄던 대성의 무릎이 중앙 복도 바닥을 찍었다.
쾅-!
커다란 구덩이가 움푹 파임과 동시에, 한쪽 무릎이 꿇린 대성의 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입을 움직일 수 있을 때 대화에 응하는 것이 좋을 텐데?>
창조주가 내민 손바닥이 대성의 빗장뼈를 건드린 순간.
콰드득-!
대성은 몸이 주저앉힌 채로 저만치 뒤로 날아갔다.
바닥에 박혀 있던 무릎이 융단이 덮인 복도의 바닥에 길쭉한 선을 만들었다.
“……!”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렬한 충격.
발라르크의 갑옷이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파바박-!
근처에 있던 클론들이 대성의 사지를 속박해 그를 찍어 눌렀다.
<진정 팔다리가 부러져 봐야 정신을 차리겠나?>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온 창조주가, 바닥에 머리가 처박힌 대성의 앞에 멈춰섰다.
빠직-.
대성의 이마에 두꺼운 혈관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말로는 창조주라 지껄이면서 옷 하나 제대로 챙겨 입을 줄도 모르는 미개한 년이…….”
대놓고 알몸을 드러낸 창조주를 올려다보며, 대성은 이를 갈았다.
“어딜 내려다 봐.”
콰아아앙-!
대성을 찍어 누르던 클론들이 거센 풍압에 휩쓸려 날아갔다.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금빛이 대성의 주변으로 휘몰아쳤다.
창조주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보았다.
성창(聖槍) 궁니르를 쥔 대성을.
<내 행색이 문제였나?>
하지만 곧 궁니르로부터 관심을 꺼버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짐승의 털로 이뤄진 옷이 뚝딱 나타나 창조주의 치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렸다.
<이러면 좀-.>
옷에서 시선을 떨어뜨리고 다시 고개를 든 창조주의 눈앞엔 직사각형의 황금색 벽이 전방위로 세워져 있었다.
궁니르의 두 번째 특수 스킬, <억압>이었다.
“눈, 팔, 다리. 셋 중 하나를 바쳐야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것이 어떠한 ‘방아쇠’ 역할을 하는 모양이군.>
쿠구구-.
발동 조건이 충족되기 무섭게 <억압>의 벽이 빠르게 창조주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창조주는 실소를 터뜨렸다.
조금의 걱정도, 두려움도 깃들지 않은 그런 웃음을 말이다.
<이러면 되나?>
그리고 창조주는 서슴없이 오른쪽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뜯어냈다.
<억압>의 벽이 어둠에 잠식당하는 빛처럼 고요히 허물어졌다.
“……!”
즉시 <요격>이 이어졌다.
목표물을 절대 놓치지 않는 백발백중의 투창(投槍)이 창조주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갔다.
부글부글-!
그때, 엉망진창 뜯겨나간 팔의 단면에서 희멀건 살점이 끓어오르는 거품 같은 모양으로 돌출되었다.
새로이 돋아난 살점 덩어리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쇄도해 오는 궁니르를 단숨에 휘감았다.
두근-!
살점 덩어리가 잠깐 요동쳤다.
내부에 있는 궁니르의 창날에서 마력의 가시가 분사된 것이다.
하지만 핏물 몇 방울이 튈 뿐, 살점 덩어리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이윽고, 괴이하게 생긴 살점 덩어리가 작게 수축하며 정상적인 사람의 팔 모양이 되었다.
파스스-.
가루가 된 궁니르의 잔해가 바닥 위로 떨어졌다.
<장난감 자랑은 이쯤하고 슬슬 대화를-.>
콰아아-!
맹렬히 불어닥친 검은 돌풍이 창조주를 덮치며 일대를 뒤흔들었다.
[필드, 귀왕의-dfkal%!3]
[죽음의 군단-fkdalk3%@$]
돌풍이 멎고, 사이한 기운으로 가득 찬 죽음의 황야가 지평선 저 끝까지 광활하게 펼쳐졌다.
대성이 필드, ‘귀왕의 영지’와 ‘죽음의 군단’을 구현한 것이다.
‘지구의 근원’이 타격을 입은 탓인지, 거기서 파생된 파편 중 하나인 시스템이 외계어 같은 문자를 내보냈지만 마력의 전개(展開) 자체엔 큰 문제가 없었다.
“그어어-!”
“그르르-!”
수만에 육박하는 사령 병사들이 대성의 뒤에 도열해 울부짖었다.
군단의 선봉에 위풍당당하게 선 대성이 창조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전세 역전이군. 여기라면 마음 놓고 네놈과 싸울 수 있다.”
<…….>
창조주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팔짱 낀 자세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회백색으로 물든 창공의 중심엔 검은 만월(滿月)이 붙박여 있었다.
창조주가 턱을 매만졌다.
<저게 결계의 핵(核)인가?>
크아아-!
전의에 찬 함성과 함께, 압도적인 수의 ‘죽음의 군단’이 대성을 지나치며 바람처럼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창조주의 팔짱 앞으로 파멸적인 힘이 담긴 기류가 빠르게 모여들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콰아아아-!!
광선으로 화한 파멸의 기류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굉음과 함께 상승한 붉은 섬광이 검은 만월에 부딪쳤다.
바윗돌에 부딪힌 달걀처럼 검은 만월이 산산이 부서졌다.
핵이 파괴된 ‘귀왕의 영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죽음의 군단’ 또한 한꺼번에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고유 결계가 붕괴하며 배경은 다시 고성의 중앙복도로 돌아왔다.
이때 대성은, 지구로 귀환한 뒤 누군가와 싸우면서 처음으로 ‘식은땀’이란 걸 흘렸다.
창조주 또한 더는 입가에 미소를 띠지 않았다.
<독 안에 든 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나?>
둥-.
대성의 손에 주물러진 ‘지연의 시간석’이 세상을 흑백으로 물들였다.
바닥에 떨어지던 땀방울조차 공중에 고정될 만큼, 시간의 흐름이 극도로 느려졌다.
<소용없다.>
그 안에 유일하게 ‘색깔’을 지닌 존재가 둘 있었다.
‘시간석’을 발동시킨 장본인인 대성과 창조주였다.
창조주는 뒤뜰을 산책하는 듯한 걸음으로 여유롭게 다리를 움직였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저놈은 대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둥-! 둥-! 둥-!
대성은 악착같이 ‘시간석’을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1초가 100배, 1000배, 10000배… 끝도 없이 길어진다.
그러나 창조주의 걸음걸이엔 약간의 경직도, 지체도 없다.
<무의미한 발악이다. 나는 시간마저 초월한 존재니까.>
화르륵-!!
창조주가 하는 말은 이미 조금도 대성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하얀 <멸염>의 불꽃이 대성의 몸을 뒤덮고, 곧이어 하얀 악마의 형상으로 거듭난 그가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창조주는 한숨을 쉬었다.
<참을성이란 게 뭔지 모른다면 내가 직접 알려주마.>
포탄처럼 쏘아진 대성의 신형이 창조주와 충돌하기 직전.
콰드득-!!
갑자기 복도의 바닥, 벽, 천장을 뚫고 은색 사슬이 튀어나왔다.
우뚝!
<멸염>의 십자검이 창조주의 코앞에 1mm의 간격을 앞두고 멈췄다.
순식간에 전신이 사슬에 칭칭 묶인 대성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지에 힘을 줘도, 사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게 참을성이라는 거다.>
“……!!”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차원 그 자체를 옭아맨 사슬이다. 세계의 시공간마저 집어삼킨 그걸 과연 네가 무슨 수로 풀 수 있을까?>
불꽃이 사그라들고 대성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슬이 마력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멸염>이 사그라들어도 대성의 눈에 번들거리는 살의(殺意)는 꺼질 기미 없이 계속 불타올랐다.
창조주는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대성의 뺨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이제야 좀 대화를 할 수 있겠군.>
***
쓸데없는 기력소모란 걸 잘 알면서도 대성은 끊임없이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몸부림칠 기력 한 톨마저 사슬이 앗아갔다.
<필멸(必滅)과 시간마저 초월한 내가 유일하게 극복하지 못한 게 무엇인지 아나?>
창조주는 사슬에 칭칭 묶인 대성의 주변을 빙빙 돌며 말했다.
<‘고독(孤獨)’이다.>
“…….”
<나는 죽음을 피했으나 시시각각 닥쳐오는 외로움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 다른 차원의 근원들과 마찬가지로, 대우주의 의지가 만들어낸 ‘나’라는 존재는 탄생 때부터 지금껏 쭉, 고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성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창조주 또한 ‘근원’과 같은 존재임을.
다만 추상적인 개념으로 남은 여타 근원과는 다르게, 창조주는 지금 보다시피 사람의 모습을 빌려 이곳에 현신하였을 뿐이다.
<대우주를 떠다니며 고독을 떨쳐낼 방법을 갈구하던 나는, 다른 차원의 땅에 정착하려 했다. 그 땅에 자리한 유기물들과 함께 공존하려 했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면 분명 외로움도 덜해질 테니까.
하지만 얄궂은 일이 벌어졌다.
<그 어떤 세계도, 차원도, 천지도, 나의 신격(神格)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무너져 내렸다.>
마치 안개로 이뤄진 발판처럼.
발을 딛는 순간, 그대로 허망하게 흩어져버린 것이다.
<필멸을 극복하면 뭐하지? 시간을 초월하면 뭐하나. 정작 설 자리가 없으면 그 전능함조차 나를 고독한 존재로 몰아넣는 저주에 불과할 뿐인데.>
“…….”
<그래서 나는 직접 창조하기로 했다. 내가 두 발로 딛고 설 수 있는, 나의 신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세계를.>
오만하게 대성을 굽어보던 창조주는, 그의 이마를 검지로 쿡 찔렀다.
지척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시야가 점멸하며 무수한 장면이 대성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별이 흩어진 우주였다.
그리고 그 우주를 쓸쓸히 방황하는 창조주의 과거였다.
<나는 신격을 바쳐 종자(種子)들을 낳고 땅과 하늘을 만들었다. 피와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는, 눈물이 흘러넘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창조주의 육신이 분열과 재생을 반복할 때마다 세계가 형태를 이루고 그 위로 생명이 싹을 틔웠다.
숫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득한 억겁의 세월이 지난 끝에 마침내 하나의 별이 탄생했다.
바로 천상(天上)이었다.
하지만 대성이 보았던, 싱그러운 자연이 만발하고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땅과는 거리가 멀었다.
창조주가 만들어낸 생명은 피골이 상접했고, 대지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으니까.
<그래. 아직도 부족했지. 내가 바라던 세계의 형태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어. 하지만 여기서 더 신격을 바쳐 나 자신을 혹사하긴 싫었다.>
얼어붙은 대지 어딘가에 창조주가 망연히 서 있었다.
창조주는 땅에 쪼그려 앉아, 씨앗 하나를 말없이 심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내 신격을 뜯어내어, 나무 한 그루를 심었지.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차원수(次元樹)’라 불렀고.>
그 후.
라미쉬의 기억에서 보았던 장면들, ‘지구의 근원’이 언젠가 해줬던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그물처럼 뻗은 차원수의 가지들은 대우주에 흩어진 차원들을 마구잡이로 집어삼켰다.
창조주의 명을 받은 종자- ‘천상의 군단’과 ‘사도’들은 숱한 존재들 얼어붙은 시간 속에 가뒀다.
거대한 나무의 줄기가 점점 커지고 가지들이 하나둘씩 뻗을 때마다 창조주의 세계는 약동했다.
<자의식을 가진 나의 종자들은 아마 납득 못 했겠지. 이 모든 것이 그저 나의 ‘고독’을 해소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이미 막대한 신격을 바친 창조주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는 자신이 만들어낸 종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다.
또 그들에게 자신의 이상과 목적을 강요할 자신도.
<그래서 나는 나의 대리자 행세를 해줄, 적당히 그럴싸한 ‘클론’ 하나를 내세웠지. 그들은 내가 내세운 클론을 주신(主神)이라 부르며 칭송하고 떠받들었다.>
적당히 만들어낸 ‘가짜 신’이 사도들을 선동할 동안 ‘진짜’는, 세계의 이면에 숨어 신격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요양했다.
<‘클론’은 대리자 역할을 아주 잘 해내주었다. 녀석들은 사도들에게 속삭였지. 이 모든 건, 필멸에 얽매인 불쌍한 어린 양들을 천상으로 이끄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어찌나 귀가 얇은지, 의심도 안 하고 곧잘 믿더군. 자신이 하는 일이 전부 대업(大業)을 위한 것이라고.>
‘고독의 해소’라는 사소한 이유 하나로 수억에 가까운 생명이 희생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사도들은 ‘대업’을 부르짖었고 자신들의 행동이 진정으로 옳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모든 게 내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더군.>
창조주는 대성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너는 나의 변수였다.>
지옥에서 돌아온 생명 하나가 창조주가 만든 세상을 위협했다.
사도들마저 지레 겁을 먹을 정도로 강인한 생명.
급기야 사도 중 하나는, 인과의 성배로 시간을 되돌리는 금기까지 범하고야 말았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너라는 변수가 있는 이상 천상은 결국 멸망하리란 사실을. 그때부터 난 천상을 포기했다. 어차피 답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창조주는 인과의 성배가 시간을 뒤틀든 말든 상관치 않았다.
예전에 르뮈에가 인과의 성배로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성역으로 갔을 당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창조주 자신이었다.
<인과의 성배로 인해 차원수가 지구와 이어지고 나서야 결심했지. 저 별을 나의 터전으로 삼자고.>
창조주는 말했다.
<수많은 차원의 시공간이 중첩된 저 별이라면, 아마 나의 신격도 버텨낼 수 있을 테니까.>
창조주는 요양을 끝내자마자 천상을 떠났다.
그때가 대성이 멜카논이 만든 석상을 타고 천상을 재침공하기 직전이었다.
아르마간은 대성의 칼에 맞아 죽는 그 순간까지 주신을 원망했다.
천상이 멸망하는 순간에도, 침묵밖에 하지 않는 주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침묵한 게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그곳엔 주신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
<이 별의 근원은 나를 쫓아내려 안간힘을 쓰더군. 가소롭게도.>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보아라. 내가 이렇게 발을 딛고 있음에도 이 별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중 차원의 시공간으로 한껏 다져졌기에 나의 신격을 버텨낸다! 정말…… 정말 황홀한 별이야!>
“…….”
<신이 사는 세계엔 그 격에 걸맞은 존재가 주민이 되어야 하는 법. 하지만 이 땅에 자리한 생명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시시하군.>
창조주의 한숨이 이어졌다.
<주변에 바닥을 기는 개미가 많다 하여 고독이 덜어지나? 나에게 있어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짧은 정적이 스친다. 창조주는 대성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넌 개미들과는 다르다. 나의 신격으로 세워진 세계를 무너뜨리고, 내가 만든 종자를 거뜬히 죽인 너라면 충분히 이 몸과 동등한 위치에 설 자격이 있다.>
섬뜩한 이채가 창조주의 부릅뜬 두 눈에 서렸다.
턱-.
창조주는 손을 뻗어, 대성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나와 함께 신세계를 세우자꾸나. 한대성.>
환희가 묻어나는 달뜬 숨이 창조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창조주는 말했다.
<나는 너를 ‘신’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나와 같이, 신세계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창조주의 좌(座)를 나눠줄 수 있다. 거기엔 죽음도 고뇌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극도의 쾌락과 평안만이 영원토록 너와 함께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창조주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제는 대답할 차례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다려주겠다는 것처럼.
어느덧 대성은 두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으나,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창조주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신이 되자는 그 제안까지 전부.
어째서일까?
그 순간만큼은, 창조주조차 대성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머릿속엔 공허만이 가득하다.
뭐지?
창조주가 고개를 갸웃한 그때, 대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본인도 잘 모르리라.
“X까, 난 인간이야.”
<…….>
“개소리가 어찌나 긴지 하마터면 듣다가 졸 뻔했다.”
그것이 대성의 대답.
생각을 거치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가장 솔직할 수밖에 없는.
본능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다.
<…….>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모멸감’이란 감정을 느낀 창조주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래.>
촤르륵-!
두 갈래의 사슬이 바닥을 뚫고 튀어나왔다.
콰직-!
<그리 대답하는 걸 보니 확실히 넌 하찮은 인간이 맞나 보군.>
한쪽 사슬은 머리를.
나머지 한쪽은 심장을 뚫고 그 너머의 천장까지 콱 박혔다.
팔다리가 축 늘어지고, 대성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저물었다.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