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79화 (179/180)

#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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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희들이 가진 파편을 나눠주겠다고?”

<선택은 어디까지나 너의 몫이다.>

“선택하고 말고의 여지가 내게 어디에 있지?”

지금 이 순간에도 루드라는 폭주 중이고, 숱한 생명이 죽어간다.

무엇보다 혜정과 지수의 목숨이 위태로운 최악의 상황. 어떻게 여기서 저 제안을 거절하겠는가.

대성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파편을 내놓으라고 말하려던 순간.

‘아틀라스’의 근원이 말했다.

<물론 우리들의 파편을 가져가는 것에 대한 대가는 따를 거야.>

“……대가?”

<오해하지 마. 우리가 비싸게 굴어서 불필요한 대가를 내게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 요컨대, 이건 필연(必然)에 따른 결과지.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상위 차원들의 ‘파편’을 무려 5개나 한 번에 받아들이는 일이니 당연하지 않겠어?>

아틀라스의 근원은 말을 이어나가기에 앞서 잠시 간격을 두었다.

그 짧은 정적은, 대성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대가’의 크기가 절대 작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모든 싸움이 끝나고 나면, 너의 육신은 가루가 되어 있을 거야.>

“…….”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막대한 힘은 충분히 루드라를 죽일 수 있겠지. 그러나 동시에 너의 몸도 버텨내지 못할 거고.>

승리를 거둘 순 있겠지만, 싸움의 종지부를 찍고 난 후엔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대성이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 하여도, 다섯 차원의 힘을 한 몸에 욱여넣는 일은 값비싼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우린 당장 네게 ‘파편’을 나눠주겠다. 우리들은 이미 그렇게 합의를 보았으니까.>

‘마해’의 근원이 자애로운 여인의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파편’을 바치는 건 근원들로서도 피해를 감수하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대성의 승리를 위해 자신들의 팔 한 짝을 떼어주는 일이나 다름없는 셈.

하지만.

<우린 네놈이 걷는 여정의 끝을 보고 싶다. 그걸 볼 수만 있다면 파편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

억겁의 세월을 살아가며, 근원들은 처음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그것은 한 인간의 분투였다.

80년을 지옥에서 지긋지긋하게 싸웠는데도 하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피를 뒤집어쓰고야 마는 어떤 인간의 처절한 싸움.

대우주 역사상 그 어떤 존재도 저 인간만큼 굳세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축복하고 싶었다.

인간, ‘한대성’이 걷는 발자취를.

다섯 상위 차원의 근원들이 고요히 대성을 주시하였다.

대성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그럼 얼른 내놔라, 파편.”

<…….>

“내가 죽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나를 지탱해준 인연들이 죽는 건 절대 못 참는다. 죽어도.”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경의를 표하마, 한대성.>

고오오오-!

근원들이 자아낸 환한 빛이 어둠을 갈라내며 대성을 휘감았다.

‘아틀라스’, ‘마해’, ‘부유공장’, ‘헥카르’, ‘환상성’… 대우주의 정상에 군림하는 차원의 힘이 하나둘씩 뭉쳐 대성의 심장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한 줄기 광명이 찬란히 쏟아져 내렸다.

현세와 이어진 통로다. 대성의 몸이 그 길을 따라 조용히 떠올랐다.

승천하는 용처럼 광명을 타고 나아가는 대성을 향해, 근원들이 짧은 작별을 고했다.

<또 보자꾸나. 위대한 인간이여.>

***

콱-!

루드라가 갈퀴 같은 손을 뻗어 멜카논의 목을 옥죄었다.

“……!”

멜카논은 허공에 뜬 발을 버둥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루드라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몸부림치는 멜카논을 비웃었다.

<네놈은 아직도 너희의 군주가 살아 있다고 믿는 모양인데, 헛된 희망이다.>

“끅, 큭……!”

<머리가 좀 똑똑한 놈이면 가축 정도론 써 주려고 했건만, 그럴 가치도 없어 보이는군.>

루드라의 손은 살점과 근육을 뚫고 목뼈까지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대로 목을 부러뜨려 멜카논에게 추하디 추한 죽음을 선사하려고 했다.

그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게 흘러만 갔다면, 그렇게 되었으리라.

파각-!

허공에 붕 떴던 멜카논의 신형이 바닥에 떨어졌다.

파스스-.

그의 목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루드라의 손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

루드라는 느닷없이 잘린 자신의 오른팔을 잠시 바라보다가, 형언키 어려운 낌새를 감지하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짐승만도 못한 년이 가축은 뭔 놈의 가축. 아까부터 계속 느낀 거지만 넌 자의식 과잉이 너무 심하다.”

심장과 머리에 뚫린 구멍이 수복된 대성이 보란듯이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루드라의 눈이 한계까지 크게 뜨였다.

<네놈이 어떻게……!>

하지만 루드라는 곧 대성으로부터 시선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당연하게 재생되어야 할 잘린 팔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니까.

<이건 대체…….>

“확실히, 동격(同格)의 존재가 가하는 공격엔 버틸 수 없나 보군.”

<동격이라고? 네놈이 나랑?>

“불만 있나? ……아니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은 대성은 이내 비릿한 미소를 띠며 중지를 꼿꼿이 세웠다.

“네년은 아까부터 쭉, 내 발끝에도 못 미치는 머저리였어.”

<다시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군……! 이 쓰레기 같은 미물-.>

눈을 깜빡인 것도 아니었다. 루드라는 계속, 악에 찬 눈을 부릅뜨며 대성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덧 그녀의 코앞까지 대성의 주먹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콰아아앙-!

일격에 안면이 뭉개진 루드라의 신형이 바닥에 깊숙이 처박혔다.

대성은 주먹을 떼지 않고 그대로 손목에 힘을 실어 상체를 굽혔다.

파멸적인 거력(巨力)이 한 치의 분산도 없이 모조리 루드라의 얼굴에 작렬했다.

파스스-.

제자리로 돌아간 주먹에서 흙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컥……!>

얼굴이 엉망진창 뭉개진 루드라가 입으로 피를 울컥 쏟아냈다.

대성은 온 사방이 요동칠 만큼 섬뜩한 살기를 쏟으면서 루드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어나. 넌 더 처맞아야 해.”

<인간인 네놈이 어떻게 창조주인 내게 타격을 입힐 수가……!>

대답해줄 의리는 없었다.

본체의 위험을 감지한 루드라의 클론들이 대성을 빠르게 에워쌌다.

퍼어어엉-!

대성이 클론들을 노려보며 안광을 쏘아냈다.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실체가 있는 힘이 파동처럼 흩어지며 클론들을 날려보냈으니까.

해일에 지워지는 불꽃처럼 그림자들이 흔적 하나 없이 사그라졌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마주한 루드라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잘린 팔도, 뭉개진 얼굴도, 사그라진 클론들도, 더는 재생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면 설마,

<네놈, 정말로 나와 같은……!>

콱-!

이번에도 대성은 루드라에게 말을 할 여지 따윈 주지 않았다.

개미를 밟듯이, 대성의 발바닥이 루드라를 내리찍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함께 루드라가 고통에 겨워하는데, 모든 클론이 사라져서 깔끔해진 일대를 돌아보며 대성은 생각했다.

‘여긴 해결되었어도 바깥엔 아직 놈의 클론이 남아있겠지.’

놈의 그림자가 세계를 지옥처럼 물들이는 꼴을, 대성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재빠르게 스킬 하나를 발동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최근에 상급 영지의 영주가 되면서 보상으로 얻은 스킬이었다.

<10만 전생>.

무한한 ‘가상 우주’에서 스러져 간, 10만에 달하는 시전자의 전생을 현세로 불러일으키는 스킬.

탑의 외부.

대성과 닮은 10만 영령들이 밤하늘 위로 비산(飛散)하는 유성우처럼 전 세계에 흩어졌다.

‘지켜라.’

뒤이어 대성의 염(念)이 세계 각지에 퍼진 영령들에 명령했다.

같은 시각.

대한민국 강북에서 클론들을 상대하던 신초영은 보았다.

검은 그림자들을 걷어내는 새하얀 영령들의 난입을.

구름처럼 뭉글거리는 영령의 모습을 본 신초영은, 저것이 누구를 닮았는지 떠올리곤 중얼거렸다.

“……대성 씨?”

신초영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클론들로부터 살아남고자 맞서 싸우는 이 별의 모든 존재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찬란한 순백을.

콰아아앙-!

루드라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대성은 한 번 더 주먹을 내려찍었다.

오만했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 형편없는 꼬락서니를 충실히 눈에 담아준 뒤, 대성은 곁에서 아연하게 선 멜카논을 돌아보았다.

“멜카논.”

“구, 군주시여…….”

“마지막으로 ‘부탁’하겠다.”

“……마지막이라니요?”

그 순간.

멜카논은 대성의 주먹을 타고 퍼져나가는 균열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은, 위태로운 그 주먹을…….

“……구, 군주시여.”

“내 가족을 부탁한다. 짧은 인연이지만 그간 고마웠다.”

멜카논이 무어라 외치기 전, 대성은 바닥에 엎어진 루드라의 멱살을 쥐어 들어올린 뒤 말했다.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콰지직-!!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찢어지는 천 조각처럼 갈라졌다.

찢어진 허공 너머, 한 줄기 소용돌이가 스파크를 뿌리며 휘몰아쳤다.

강대한 격과 격이 충돌하는 싸움을 여기서 계속했다간 그 여파가 다른 이에게까지 미치고야 만다.

그러니 장소를 바꿀 필요가 있다.

<이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싫다.”

대성은 울부짖는 루드라를 소용돌이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동시에 그의 신형 또한 거칠게 휘도는 소용돌이 속에 잠겼다.

……잠기기 직전. 1초가 될까 말까 하는 아주 짧은 찰나.

대성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정신이 든 혜정과 그런 그녀를 부축하는 지수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외치려는 듯, 둘의 입술이 동시에 떨어지려고 했지만.

대성은 그 목소리를 듣지 않는 대신, 미소 지으면서 기원했다.

-행복했으면 좋겠군.

그리고… 슈우우우-!

허공에 열린 균열은 완전히 대성과 루드라를 집어삼켰다.

***

<으아아아아-!>

루드라는 중력을 따라 끝없이 추락하고 또 추락했다.

어째서일까.

하늘을 비행하는 것쯤이야 그녀에게 있어서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몸을 비틀며 발악해도 추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쿠후우웅-!

루드라는 추락에서 벗어나는 대신 단단한 돌바닥과 충돌해야만 했다.

<커헉……!>

온몸의 뼈와 관절이 비틀리는 고통이 엄습했다.

루드라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 건지 확인했다.

<여, 여기는…….>

괴기한 기계 장치가 어지러이 설치된 수수께끼의 장소였다.

거친 바람이 핏물로 엉겨 붙은 루드라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루드라는 이 수수께끼의 장소가 아득하리만치 높은 고도(高度)에서 부유하는 중임을 눈치챘다.

같은 장소에 있는 대성이 말했다.

“널 직접 족치려고 내가 마련한 무대다.”

부유 공장.

행성에 둘러쳐진 대기권과 맞닿을 만큼 높은 상공에, 대성은 ‘기신족’의 세계 중 일부를 창조했다.

물론 그가 어떤 술수를 부렸든 간에 루드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주제도 모르게 기어오르는 저 인간을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루드라가 지면을 박찬 순간.

일대를 에워싼 기계 장치가 한꺼번에 섬광을 방출했다.

지구의 밤하늘을 일순 낮처럼 만들 만큼 환한 섬광이었다.

퍼버버벙-!!

전방위에서 발사된 수만 줄기의 섬광이 루드라를 찢어발겼다.

<끄, 끄아아아아……!!>

온몸이 분해되는 듯한 뜨거움과 격통에 루드라가 비명을 질렀다.

청각이 마비될 만큼 커다란 굉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섬광은 멈추지 않고 루드라를 계속 불태웠다.

세계 그 자체가 의지를 지니고 멸악(滅惡)을 행하는 것처럼.

“…….”

대성은 섬광에 잠겨 불타는 루드라를 바라보았다.

쩌저적-.

섬광이 창천에서 번뜩일 때마다 대성의 전신엔 균열이 퍼져나갔다.

저 기계 장치를 가동하는 것 또한 자신이 받은 ‘근원’의 힘의 일부다.

루드라가 불탈 동안 대성의 육신 또한, 조금씩, 그리고 빠르게 깎여나가고 있었다.

후회 따윈 없다.

곧 섬광이 멎고, 전혀 고요하지 않은 정적이 세계에 내려앉았다.

대성은 형체조차 제대로 분간할 수 없게 된 루드라를 향해 걸어갔다.

루드라는 아직 살아 있었다.

죽음의 계곡 끄트머리에 손 하나만을 걸친 채 매달려 있었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건 그 손을 떼어내는 것.

콰지지직-!

대성이 주먹을 휘둘러 루드라를 내려찍은 순간, 그의 팔이 부서졌다.

루드라는 얼굴 반쪽이 사라진 채 유언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만…….>

“…….”

<그만, 해…….>

무시했다.

콰지지직-!

대성의 오른팔이 어깻죽지까지 산산이 으깨졌다.

그는 남은 왼팔로 루드라를 내리쳤다. 그 시점에서 루드라는 목소리를 뱉을 얼굴이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 하여 아직 루드라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같은 격을 지닌 존재로서, 대성은 끈질기게 맥동하는 녀석의 고동을 똑똑히 들었다.

“멈추게 해주마.”

그래서 그는 멈추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남은 왼팔마저 전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콰지지직-!

계속.

콰지지직-! 콰지지직-!

‘부유 공장’이 빠르게 붕괴했다.

난폭하게 섬광을 쏟아내던 기계 장치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언제부턴가 더는, 루드라의 고동 소리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쩌적-.

희미하게 울려 퍼진 그 소리가, 조각나 허물어지는 대성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잠에 빠지듯이, 대성의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목 아래쪽의 몸은 온통 균열로 뒤덮여 있었다.

더는 ‘근원’의 격을 버티지 못한 육신이 제 역할을 다한 끝에 고요히 무너졌다.

그의 힘에서 파생된 ‘부유 공장’ 또한 빛이 되어 흩어졌다.

“…….”

최후의 순간에 대성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조각난 자신의 육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찬란한 광휘였다.

그 광휘 속에서 눈을 감고, 다가오는 소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대성은 옅은 미소 하나만을 세상에 남긴 채 사라졌다.

전 세계의 하늘에서.

한 인간의 온기가 서린 빛이 눈처럼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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