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180
“표정 좀 풀어. 입학 첫날부터 계속 그렇게 꿍해 있으면 친구들이 다 너 음침하고 이상한 애인 줄 알아.”
“…….”
“대성아.”
“……모르겠어.”
“어?”
“……내가 가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자신이 없니?”
“응…….”
“아이고, 우리 아들. 남자가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
“…….”
“대성아. 대성아? 우리 아들. 잠깐 엄마 좀 봐봐.”
“…….”
“옳지. 대성아, 잘 들어. 무서워할 거 하나도 없어. 대성이 넌 중학교 때도 잘 해왔잖아. 어디 뭐 괴롭힘을 당한 적도 없고, 또 친구들이랑도 잘 지냈고. 성적만 조금 더 잘 받았으면 퍼펙트했겠지만.”
“…….”
“대성아, 괜찮아. 주눅들지 마. 넌 지금까지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잘 해낼 거야. 아무렴. 누가 낳은 아들인데.”
“…….”
“가서 만약에 잘못할 것 같고, 무섭고, 자신감이 없으면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얼굴을 떠올려.”
“…….”
“엄마랑 지수 얼굴. 찬호 얼굴. 또 너한테 잘해줬던 사람들 얼굴들. 그럼 좀 숨통이 트일 거야. 무서운 것도 사그라들 거고.”
“…….”
“세상엔 너 혼자만 있는 게 아니란다, 대성아. 많은 사람이 널 응원하고 사랑하고 있어. 너같이 잘난 놈이, 두려울 게 뭐가 있니?”
“…….”
“가서 잘할 수 있지?”
“……응.”
“그럼 됐어. 얼른 가방 메. 밖에 찬호 기다리겠다.”
“갔다 올게.”
“응, 조심하고. 사랑해. 아들.”
“나도, 엄마.”
***
끝을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어둠 속을 떠다니다가, 대성은 눈을 떴다.
그는 문득 시선을 내려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촛불 위로 피어오르는 향처럼 새하얗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전부.
‘혼백(魂魄)…….’
대성은 처절했던 루드라와의 싸움 끝에 자신의 육신이 전부 부서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껍데기가 사라지고, 그 속에 있는 영혼만이 겨우 남은 것이다.
그래.
쉽게 말해서, 자신은 죽었다.
더는 현세에 발을 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몸이 되고야 말았다.
<우리가 네게 무엇부터 경의를 표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너의 싸움, 너의 승리, 너의 희생 중…….>
“…….”
<고맙다. 우릴 대신해 루드라를 없애줘서.>
두 번째로 오게 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상위 차원의 근원들이 대성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했다.
대성은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알 수 없는 어둠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를 위한 게 아니었다.”
<알고 있다. 너의 세계, 너의 소중한 인연들을 위해서였겠지.>
“…….”
<봐라.>
광활히 펼쳐진 어둠 중 일부가 갈라지며 빛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다름 아닌, 현세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눈길을 옮긴 대성은, 거울 너머에서 울거나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제히 소멸하는 루드라의 클론들 앞에서 얼싸안으며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들, 떠나버린 가족과 친구, 연인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사람들.
거울의 장면이 바뀌었다.
탑 바깥,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스한 눈을 올려다보며 혜정과 지수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에 서린 희미한 온기가 누구의 것인지 깨달은 걸까?
그 외에도, 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신초영, 박동혁, 황준영, 성찬호, 박정호 협회장 등…….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운다.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저들 모두가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위대한 인간이여, 보이나? 너의 희생은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루드라의 클론들이 왜 사라진 건지 눈치챈 이도 적지 않았다.
이런 기적을, 이런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많은 이들이 아련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아 ‘동양의 구세주’에게 기도를 바쳤다.
그 기도에 서린 염원과 진심은 대성의 혼백에게도 전해졌다.
따뜻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춥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온실 속에 있는 것처럼 따뜻하고 편안하다.
70억의 인구, 그리고 그들과 상생을 택한 수억에 달하는 이종족의 모습이 거울 너머로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그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도중, 대성은 부탁 하나를 건넸다.
“……내 가족을 한 번만 더 보여줄 수 있나?”
<얼마든지.>
화면이 바뀌었다. 혜정과 지수는 여전히 펑펑 울고 있었다.
대성이 이겼다는 건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지만, 대성이 ‘희생’했다는 건 그의 소환수를 제외하면 오직 혜정과 지수밖에 알지 못했다.
“…….”
대성이 거울의 표면에 손을 갖다 대었다. 둘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려는 것처럼. 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는 것처럼.
하지만 현세와 단절된 이곳에선, 대성의 손은 가족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조차 없었다.
……괜찮다.
살았으면 된 거니까.
대성이 거울로부터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하던 사이, 근원들이 속삭였다.
<오, 지구 왔나.>
<목숨 부지한 거 축하해. 다 저 인간 덕분인 거 알지?>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우린 잠깐 자리를 비워줘야겠군.>
<우린 조금 있다 올 테니 둘이서 편히들 대화 나누시게.>
상위 차원의 근원들이 떠나고 ‘지구의 근원’이 슬며시 다가왔다.
하지만 대성의 시선은 이런 순간에도 오직 가족만을 향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선 대성에게 ‘지구의 근원’이 제일 먼저 꺼낸 첫마디는 감사 인사가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뭘 말이지?”
<전부 내가 못난 탓에, 네게 괜한 희생을 치르게 한 것 같아서.>
“지금 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어차피 다 끝났으니. 그리고 딱히 후회하지도 않아. 난 이미 이렇게 될 거라고 각오했고, 또 내가 원하던 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렸으니까.”
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인연들을 지켜냈다. 가족, 그리고 친구.
그럼 된 거 아닌가. 적어도 후회나 미련은 남지 않으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 너는 왜 울고 있는 거니?>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렴. 지금 너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단다.>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대성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흘렀다.
대성은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
“울지 말라고 다독이고 싶어. 나 때문에 엄마랑 지수가 저렇게 울고 있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후회가 없다고? 미련이 없다고?
왜 마지막까지 와서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걸까.
후회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미련이 남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그가 지켜낸 인연은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의 죽음을 깨닫고 슬퍼하겠지만, 그렇기에 그 숭고한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성이 선사한 삶이었다. 그들이 앞으로도 살아갈 힘을 준 건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어질 그 삶에 자신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대성은 소리 없이 그저 눈물만 흘렸다.
아무리 80년을 지옥에서 구르고, 지구로 귀환한 뒤로도 죽고 죽이는 싸움을 거듭한 그라 할지라도 ‘작별’이란 단어의 무게는 견디기 힘들었다.
‘지구의 근원’은 그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고 안타깝다는 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현세를 살아갈 육신이 없다면, 저기로 돌아갈 방법이 없단다.>
“…….”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을 줄까? 나는 그동안 다른 근원들과 앞으로 너를 어찌하면 좋을지 얘기를 나누고 있을 테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것을 또 다른 형태의 대답이라 받아들였는지, ‘지구의 근원’은 말없이 대성의 곁을 떠나갔다.
아니, 떠나가려고 했다.
“그럼 그 육신만 있다면,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떠나려던 ‘지구의 근원’이 거체를 돌려 대성을 보았다. 격 높은 에너지의 덩어리가 그를 마주보았다.
어느덧 눈물이 말라붙고 총명하게 빛나는 대성의 두 눈이 ‘지구의 근원’을 향하고 있었다.
‘지구의 근원’은 그가 얼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했다. 그렇기에 더 안타까웠다.
<네가 아닌 다른 이의 육신은 소용없단다. 혼백이 오롯하게 깃들 수 있는 육신은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 너란 존재가 현세에 두 명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있어.”
<……뭐라고?>
“있다고. 완벽하게 ‘나’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육신이.”
<그게 무슨…… 그럴 순 없단다. 어떻게 하나의 세계에 같은 존재가 두 명이 동시에-.>
“있다니까.”
언제였던가.
‘발아의 탑’에 갇힌 멜카논을 구하기 위해 대성이 떠나기 전, 헥카르의 한 노인이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비술’ 하나를 건넨 적이 있었다.
분신(分身), 그 완성형.
분신이란 단순히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존재다.
모든 요소가 완벽히 ‘본체’와 들어맞는 또 다른 몸.
또 하나의 자신이었다.
‘지구의 근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현세를 살아갈 육신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 그럼 지금 당장 나의 혼백을 분신에 집어넣을 수 있나?”
<유, 육신만 준비되었다면야, 그건 나와 ‘헥카르의 근원’이 힘을 합친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단다. 다만…….>
“다만?”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영원히 그 몸으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된단다.>
혼백이 분신과 합쳐지는 순간, 그때부턴 ‘분신’이 아닌 ‘본체’가 된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대성이 묻기 직전, ‘지구의 근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가 말했던 그 분신은…… 너무나 약해. 본체와 비교하면 너무나 나약한 육신이란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로 말인가?”
<그건 아무 문제없지. 내 말은, 지금까지 판테온을 왕복하며 얻어왔던 모든 것들을 연동(聯動)할 만큼 강인한 육신이 아니라는 뜻이란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한 마력, 시스템의 산물, 구현의 인(印)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소환수, 그리고 판데모니움의 마수들까지.
그것들 전부를, 본체에 비하면 100분의 1 정도의 힘밖에 지니지 못한 분신이 받아들이는 순간 무너지리라.
요컨대, 양동이 하나에 바닷물 전부를 담을 순 없듯이.
<‘분신’으로 살아가겠다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단다. 그렇게 되는 순간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리는데 그래도 상관없니?>
“바보 같은 질문이군.”
대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0.1초의 간격도 없이 바로 튀어나온 즉답이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허풍이 심한 아가구나.>
“마음대로 생각해. 기다리는 건 질색이다. 얼른 해줘.”
다행히 이거라도 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을까.
‘지구의 근원’은 지체하지 않고 대성의 혼백을 그의 분신에 깃들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떠다니는 대성의 혼백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무수한 외침이 들려온다.
바로 군주의 죽음으로 인해 인(印) 속으로 돌아온 소환수들, 그리고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보내는 작별 인사였다.
그들은 오열하며 이렇게 말했다.
-군주시여, 부디 행복하소서.
그들이 전하는 인사를 들으며 대성은 피식 웃었다.
지긋지긋한 놈들이지만 나중 가면 문득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지.
“너희도 행복해라.”
이별 뒤엔 녀석들이 어디로 가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딜 가던, 진심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대성은 기원했다.
다시 현세로 흘러가는 대성의 혼백을 향해, ‘지구의 근원’은 기뻐하면서도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언제나 너를 축복하고 있을 거란다.>
***
혜정과 지수는 쉴 새 없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을 움켜쥐며 울고 또 울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평생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이 눈에 서린 온기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하늘에선 더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것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인 것만 같아 혜정과 지수가 안 된다고, 가지 말라고, 애절하게 소리치던 그때였다.
“엄마, 지수야.”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
환청일까?
혜정과 지수가 동시에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울지 마.”
따스한 손길이 뻗어와 둘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짧은 이별이 끝나고 재회의 순간이 싹을 틔우는 가운데.
화륵-.
마지막 한 줄의 메시지가, 돌아온 남자를 배웅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절대자시여.]
***
1년이 흘렀다.
아무 일 없이.
“알겠니? 가서 괜히 눈에 띄는 행동하지 말고. 선배님들 보면 깍듯이 인사하고! 요즘 아무리 좋은 대학이라도 똥 군기 잡는 이상한 것들 많다고 뉴스에 나오더라!”
“엄마도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오빠한테 똥 군기? 무슨 자살 희망자도 아니고…….”
막 일어난 탓에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지수가 실소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한때 ‘구세주’라 불렸던 남자에게 군기 같은 걸 잡을 수 있겠는가.
학생뿐일까. 아마 교수들도 함부로 눈을 못 마주치리라.
하지만 혜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걱정이었다.
“대, 대성아 가서 잘할 수 있지? 엄마는 왜 자꾸 불안할까…….”
“걱정도 팔자야.”
거울 앞에 선 대성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에 나 고등학교 입학할 땐 사내새끼가 뭐 그리 자신감이 없냐고 뭐라 하더니.”
“아, 얘도 참. 고등학교랑 대학교랑 같니?”
“주책맞기는. 이따 끝나고 연락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밖에 찬호 기다린다. 이만 나가볼게.”
완벽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 대성은 혜정을 한 번 포옹해준 뒤 현관문을 나섰다.
뒤에서 지수가 키득대며 외쳤다.
“가서 아싸되지 말고! 상남자답게 예쁜 여친이나 만들고 오셔.”
“이 년이 오빠한테 까분다, 또.”
“아, 왜 때려!”
닫힌 현관문 너머 들려오는 둘의 대화에 대성은 한 번 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타워팰리스 부지 정문에 휘황찬란하기 그지없는 슈퍼 카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가며 훤칠한 인상의 미남이 얼굴을 내밀었다.
“목적지까지 태워드리겠습니다, 동양의 구세주 씨!”
“닥쳐. 쪽팔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대성은 따가운 눈총을 성찬호를 향해 쏘아 보낸 뒤 조수석에 탔다.
슈퍼 카가 부드럽게 도로를 타고 나아갔다.
잠시 후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섰을 때 성찬호가 물었다.
“너 정도 되는 놈이 지금 와서 꼭 대학을 가야 하냐? 그냥 이 형아 인맥으로 한 방에 취직시켜준다니까 그러네.”
“됐어. 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아니, 누가 들으면 내가 네 걱정하는 줄 알겠네. 난 너랑 같이 학교 다녀야 하는 신입생들이 불쌍해서 그렇지. 에고, 걔들 어깨는 펴고 다닐 수 있으려나.”
“너의 그 개소리가 듣기 싫어서 첫날은 내가 내 발로 걸어가고 싶다고 한 건데.”
“어허,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고 그러시나. 대성이 너 가는 길엔 나도 무조건 따라가야지!”
“미친놈.”
실없는 대화도 잠시, 슈퍼 카가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대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지그시 주시했다.
1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엔 아직 과거의 잔재가 조금씩 남아있었다.
출근길을 오르는 인파들 사이로 이종족 무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본래는 마천루가 있어야 할 자리엔 중세풍의 건축물이 부자연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상생, 그리고 공존의 결과다.
‘지구’라는 새로운 터전을 찾은 이종족들은 나름 훌륭하게 인류의 문명에 녹아들었다.
물론 시대의 급변은 처음엔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경제, 통념, 종(種) 간의 차별과 분쟁 등…….
하지만 점점 나아졌다.
결과적으로 인류와 이종족의 화합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고, 전문가들은 매스컴에 나와 입을 모았다.
누군가의 분투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고 덧붙이면서.
새로운 시대가 밝았다.
동시에…….
“야, 거의 도착했다. 저기 보이네. 와, 이 대학 건물이 예전에도 원래 이렇게 컸었나?”
“괜찮군.”
한 남자의 인생 또한, 새로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주 멋진 인생이 말이다.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