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화. 타리뮤와 트리얀
세영은 통증을 느꼈다.
마법의 힘으로 떠오른 게 아니었다.
분명누군가가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린 것이 분명했다.
"누... 누군가 있어. 모두... 들 조심해."
보이지 않는 자.
혹은 몬스터.
손을 뻗어 허공을 짚었다.
분명 이 앞에 누군가 존재한다.
'이건, 손이겠지.'
세영은 보이지 않는 놈의 손인지 손목인지를 강하게 쥐고, 발버둥 쳤다.
"으윽..."
행운 스텟만 올린 탓일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놈은 힘이 장사였다.
깡, 깡-!
핑쿠햄스터의 도발 스킬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몬스터가 아닌가 본데?"
"나한테 맡겨."
노랑나비가 앞으로 나서며, 대검 '홉 고블린의곡도'를 꺼내 들었다.
상대는 보이지 않지만, 공중에 떠오른 세영의 모습으로 어느 정도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하압-!"
부우웅-
대검은 마치 어두운 밤을 가르려는 듯 큰 원호를 그리며 휘둘러졌다.
카앙!
그러나 그녀의 대검은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놈은 무기를 든 게 분명했다.
"젠장! 안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상대를 하라는거야!?"
뒤에서 지켜보던 레드문이 가세했다.
"비켜봐, 물러나 있어."
"뭐? 으응. 알았어."
쩌저적-
갑자기 냉기와 함께 허공에서 얼음이 얼어 붙었다.
마법사의 기초 스킬 중 하나인 얼음의 화살.
레드문이 사용한 아이스 애로우가 세영의 앞 허공에 존재할 미지의 상대를 향해 발사됐다.
푹-!
"으윽."
거친 저음의 비명이 들려왔다.
공격이 적중했는지, 세영은 비로소 바닥에 내려 앉았다.
"으으... 너희는 대체 누구냐."
남자의 목소리였다.
젊은 남자의 것은 아니었다.
"역시,말을 하는데요?"
"고마워. 너희들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어."
"형. 지금 그럴때가 아니에요."
핑쿠햄스터가 세영을 제촉했다.
방심은 금물.
일행은 보이지않는 존재에 대한 공격 태새를 갖췄다.
"몬스터도 말을 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아니라면 어쩌죠?"
"왜? 뭐가 문제야. 먼저 공격한건 상대방인데."
"그래도 만약 몬스터가 아니라면? 플레이어가 아니라 NPC긴 하더라도, 마을 주민인인간을 죽이면 패널티가 있지 않을까?"
죽이는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불이익 역시 받게 될 것이다.
도시에서 살인자 취급을 받는건당연한 수순.
경비병에게 쫓기거나 현상 수배범이라도 되는거 아닐까?
전쟁 도중이 아니고서야, 살인이 허용될 리가 없었다.
"근데, 이런데서는 죽여도 아무도 모를 걸? 그리고 저 NPC는 범죄자나 마찬가지 아냐? 저놈이 먼저 공격했으니까! 원래부터 게임내에서는, 산적이나 해적같은 집단은 몬스터랑 같은 취급이라고."
"애초에 먼저 우릴 공격해 오면, 정당방위라고!"
험악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런 대화를 마을이나 도시의 주민 NPC들이 들었다면, 오히려 이들을 범죄자나 악당으로 느끼진 않았을까?
그런 이상한 대화 도중에, 얼음 화살에 당한 투명 인간이, 서서히 그 실루엣을 들어냈다.
고통 때문에 더는 능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나무에 무슨 볼일이지."
거구의 남자였다.
그는 젊은 남성 못지않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건장한 체구였지만, 백발을 한 노인이었다.
새하얗게 서리가 내린 머리칼.
다듬어지지 않은 구불구불 긴 수염.
깊은 주름을 통해 그가 살아왔을세월을 엿볼 수 있었다.
어깨를 공격받았는지, 그곳을 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바닥에 꿇었는데도, 세영 보다 눈의 위치가 높았다.
키가 2미터는 훌쩍 넘어 보였다.
"말해라... 이 나무에는... 무슨 볼일이었나!"
그는 분노해 있었다.
쇳소리 나는 거친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저희는 페어리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알파 오빠?"
"형.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대화를 시작한 세영을보고, 일행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이 와중에 적인 상대와 대화를 이어가다니.
상처를 입었고, 노인이라지만, 저 거구를 상대 하려면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세영은 팔을 들어올려 그들을 막아섰다.
"얘들아. 나를 믿어 줘. 왠지 이 남자가 내가 찾던 트리얀인거 같으니까."
세영의 말에 다들 눈을 크게 떴다.
거구의 노인의 모습을 살펴봤다.
그의 옆에 놓여진, 말도 안돼는 크기의 도끼가 눈에 들어왔다.
노랑 나비의 대검 공격을 막아낸 그 무기.
아니, 무기라기 보다는 확실히 나무꾼의 도끼처럼 보였다.
그제서야 파티원들은 눈앞의 남자가 세영이 찾던 그 나무꾼일 거라는 생각에 공감했다.
세영의 청명한 목소리가이어졌다.
"저희는 페어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찾고 있었습니다."
인벤 토리에서 버섯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 버섯은 페어리 날개의 가루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버섯을 찾아 이동 중이었습니다."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너희들은 어째서 페어리를 찾고 있지? 구출 하겠다고?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쩔 셈이냐!"
사람을 신용하지 못하는 것인지.
공격적인 태도와 거친 말투는 일행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일 뿐.
무슨 사연이라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저희는 구출이 목적일 뿐입니다. 그후에 페어리를 어찌 할 생각은 전혀없습니다."
"맞아! 우린 바위 동굴에 갖혀있던 페어리들도 구해냈다고! 불빛도 없는 이런 밤중에 우리가 여기 어떻게 있겠어? 페어리들에게 전수 받은 스킬 덕분이라고!"
노랑나비가 거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귀신인 줄만 알았을 땐몸을 떨던 그녀가, 이제는 제일 대장부 같다.
세영은 인벤토리에서 치료약 하나와 목공소의 알라바에게서 받아 둔 소개장을 꺼내 건넸다.
"당신이 트리얀이 맞는다면... 목공소의 알라바 씨에게 받은 소개장인데 읽어 주시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더욱 경계하는 트리얀.
희고 길게 난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신도 혹시, 페어리를 찾고 계시는건 아닌가요?"
"......."
대답이 없었다.
대화에도, 건넨 소개장에도 반응이 없었다.
치료약 역시 마시질 않았다.
결국 세영은 인벤토리에서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이건 뱀 딸기로 만든 주스입니다. 저와 친한 페어리를 위해서만들었는데,어디론가 사라져버려서 아쉽네요. 그녀가 다시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항상 소지하고 있습니다."
트리얀은 자신들과 같은 행보를 보였다.
버섯이 난 거목들만 베어냈다.
그러니 그는 분명 위기에 빠진 페어리와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역시나.
세영의 생각은 옳았다.
뱀 딸기라는 말에, 트리얀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세영의 손 위에 있던 뱀 딸기주스를 가로채듯 빼앗아 들었다.
"맞군... 뱀 딸기야... 이게 얼마만인지."
주스의 향기를 폐 깊숙히까지 빨아들였다.
잠시 후 노인의 깊은 눈은, 보이지 않는 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밤의 숲은 매우 어두웠지만, 상관없어 보였다.
그가 본 건 과거의 추억이었지, 눈앞의 숲이 아니었으니까.
그때까지 주스를 코에 대고, 향기만을 계속 맡아대는 트리얀.
세영은 한마디를 더 건냈다.
"드세요. 주스는 더 있으니."
세영은 한 병을 더 꺼내 그에게 건넸다.
꿀꺽 꿀꺽.
마치 생명수라도 마시는듯 했다.
"하아-. 그래. 이 맛이었지."
주스의 회복 효과로 트리얀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졌다.
고통이 사라진 것 보다는 세영을 신용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나는 트리얀이라고 하네."
"저는 알파라고 합니다."
그제야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영웅 등급의 목재라... 그건 또 엄청난걸 찾고 있었군."
"구하기 어려운가요?"
"그렇지도 않네. 그 쇠뇌라는걸 보여주겠나?"
세영은 자신의 무기를 건넸다.
"호오... 고블린의 무기인가. 놈들도 참 겁이 없군. 누라라의 거목을 사용해 무기를 만들 생각을 다했다니."
"무슨 말씀이시죠?"
"이 쇠뇌의 재료는 바로저 거목이라네."
그가 가리킨 것은 바로 그 나무였다.
세영과 파티원들이 찾던, 버섯이 자라난, 트리얀이 투명해진 몸으로 베어내던 그 나무.
트리얀은 긴 시간을 들여 나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단지 나무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누라라의 거목에 대한 정보를 일부 획득하셨습니다.]
[누라라의 거목]
- <희귀 등급> 파르도 북쪽 숲 전체에 걸쳐 자생하는 거목입니다.각종 가구나 집. 무기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 정령의 수호를 받는 나무입니다.벌목 시 자칫정령의 저주를 받게 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직접 나무를 벤 건 아니었지만, 트리얀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도 일부 정보를 얻게 되었다.
"나는 나무꾼이었지."
"지금은 아니신 건가요?"
"나무꾼은 필요에 의해서 필요한 만큼만 나무를 베는 자이지. 나는 이제 나무꾼이라 떠들어 댈 자격이 없다네. 전혀 필요치도 않은 나무를 마구 베었으니 말이야."
트리얀은 얼굴을 한번 훔치더니 말을 이어갔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이야기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무꾼은 가장 나무를 잘 베는 자가 무리의 리더가 되지. 자네는 찬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무꾼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래. 그 찬트의 효과를 증폭하려면 말이야, 리더가 무척 중요하지. 동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자신도 동료들을 신뢰해야만 신의 축복이 내리는 법이니까."
파티원들은 트리얀과 세영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어. 난 무리의 리더가 됐지만, 어째선지 그 때부터 아무리 찬트를 불러도 하늘에서 축복을 내려 보내질 않는 거야. 빌어먹을! 대체내가 뭘 잘못했길래, 신의 미움이라도 산 것일까? 그런 생각 뿐이었어. 뭐, 다음은 불 보듯 뻔하지."
트리얀의 거칠고 커다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며칠 전 일어난 일처럼 분노했다.
그는 그 이후로 나무꾼 무리에서 나왔다.
사실 리더의 자리만 넘겼으면 될 뿐이었지만, 그 때는 아직 젊었던 시절.
어린 치기에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그게 시작이었지. 나는 홀로 나무꾼일을 시작했어. 그건 몹시 외로운 나날이었지.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 그러나 남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지. 그때 까지도 어렸던 게야."
트리얀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다 그 아이와 만났지."
그의 눈에 작은 빛이 보인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느날 혼자 나무를 하다가 고블린과 마주쳤어. 정예만 아니라면 한 두마리 쯤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거든. 그런데 세 마리가 넘고 네 마리째가 되니, 목숨의 위협을 느꼈지. 도끼도 어딘가에 내팽겨치고, 온몸은 상처 투성이인 채로 간신히 도망쳤어.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의 나무 옹이 속에 숨었다네."
처음으로 미소를 띄운 트리얀.
"그 나무 옹이 속에서 만났어. 나의 유일한 벗이자 은인인 페어리. 타리뮤와 말이지."
그는 타리뮤에게 도움 받아, 고블린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그 페어리는 은인이자, 외롭던 그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 이후부터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자주 만났다.
타리뮤는숲을 날아다니다 심심해지면 트리얀을 찾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사흘에 한 번이되고, 결국 매일이 되었다.
기다렸다.
트리얀은 나무를 하며 타리뮤를 기다리지 않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작은 요정을 기다리며외롭고 고단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둘은 매우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타리뮤는 트리얀에게 선물을 했다.
고블린의 위협으로부터 트리얀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트리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받은 선물은 스킬이었는데, 무엇보다 나무꾼에게 필요했던 스킬이었다.
보답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던 나무꾼 일을 며칠이나 쉬고, 들판을 뒤져 거대한 바구니 한가득 채집했다.
가득 채워진 건 페어리가 무엇보다 좋아한다던 뱀 딸기였다.
타리뮤는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양의 딸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기뻐했고, 그 뒤로도 점점 둘의 유대는 깊어져만 갔다.
"하지만 내게는 역사에 남을 만큼 위대한 나무꾼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 욕심을 부렸어. 타리뮤에게 받은 스킬 때문에, 혼자서 뭐든 가능할거라 착각을 한게야. 찬트의 축복도 없이 누라라의 거목에 손을 댔으니 말이야."
그의 주름이 다시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