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39화. 거목의 주인 누라라
트리얀의 추억 이야기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북쪽 숲의 거목은 모두 정령의 소유라고 한다.
누군가 베려 든다면 저주를 받는다고 들었다.
거목의 주인 누라라. 누라라의 저주.
트리얀은 저주받진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저주를 받는 쪽이 나을 것만 같았다.
그가 받은 건, 사랑이라 꾸며진 지독한 질투에 가까웠으니.
"나의 나무를 베려는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누라라는 자신의 나무를 베려는 인간의 앞에 나타나 저주를 내린다.
저주라 부르는 건 상징적인 의미에서다.
보통은 눈이 멀게 되는데, 누라라가 쏘아낸 독액 탓이었다.
시력을 잃어 화가 난 인간이, 거목을 향해 도끼를 한 번이라도 더 휘둘렀다간, 목숨마저잃게 된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흐음? 그건 설마 작은 요정, 페어리의 날개가 아닌가? 오호호. 페어리가 인간에게 날개를 주다니, 재밌구나. 페어리에게 선택받은 자여. 그대는 어째서 나의 나무를 베려 하는가. 어리석구나."
어찌 된 일인지 누라라는 그날, 트리얀을 향해 저주를 걸지 않았다.
수백 년을 살아온 누라라의 얼굴에 활짝 꽃이 피었다.
"그대. 아름다운 자여. 용서받고 싶다면 나의 사람이 되어라. 평생을 나에게 바치고, 나의 나무를 지키는수호자가 되어라."
"웃기는군. 나무의 마녀 주제에."
트리얀의 입에서 튀어나온 까칠한 대답에, 누라라는 몹시 절망했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선택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나를 바라봐 주질 않는 것이냐!"
그리고 매우 분노했다.
북쪽 숲의 마녀. 혹은, 쉽게사랑에 빠지는 나무의 여인.
거목들의 주인.
드라이어드 누라라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찬트.
나무꾼이 누라라의 거목을 베기 직전에 부르는 노래.
그 찬트의 축복에는 누라라의 저주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모든 나무꾼들은, 찬트의 축복 없이는 절대 누라라의 거목에 손대지 않았다.
시력을 잃는것도, 목숨을 잃는 것도, 드라이어드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도 싫었으니까.
그러나 트리얀은 찬트의 축복 없이, 누라라의 거목을 도끼로 내리찍었다.
오만이었다.
타리뮤의 날개가 있으면, 드라이어드 역시 자신을 보지 못할거라 착각한 것이다.
"오, 아름다운자여. 내 너를 원하노라. 하지만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구나.그렇다면 나는 너의 가장 소중한 걸 빼앗을 것이다."
누라라는 슬퍼했다.
그녀의 볼을 타고 이슬 방울이 흘러 내렸다.
슬픔은 분노로 바꼈다.
그렇다고 트리얀에게 직접적인 해꼬지를 한건 아니었다.
누라라는 트리얀의 가장 소중한벗인 타리뮤에게 질투했고, 그녀의 목표는 작은 페어리가 되었다.
쏴아아아아아아-
숲에 있던 모든 거목들이 춤을 췄다.
바람도 불지 않는 숲에, 폭풍이라도 몰아치는 듯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페어리라고. 하늘도 못 나는 나무의 정령 주제에!"
누라라는 타리뮤를 사로잡았다.
타리뮤는 누라라에게 사로잡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뒤로트리얀은 단 한 번도 타리뮤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
"뭐라고?"
트리얀은 놀란 나머지, 주름진 깊은 눈을 크게 떴다.
"저에게 벌목을 가르쳐 주십시오."
세영의 말을 들은 트리얀은 물론 파티원들도 매우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오빠. 나무를 하시게요?"
"형. 채집, 요리, 연금술에 더해 이제는 벌목까지 배우시게요?"
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내가 나무를 도끼로찍으면, 그 드라이어드가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 그럼 드라이어드에게 페어리를 돌려달라고 하면 되잖아."
세영의 말을 들은 일행은 한 번 더 매우 놀랐다.
"벌목 스킬이 필요하지 않다면, 그냥 도끼를 빌려주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그냥 일반 무기로 나무를 공격해도 정령이 나타날까요?"
"알파. 무슨 생각인가. 그러다 눈이 멀거나, 아니면 나처럼 되면 어쩌려고."
그제야 파티원들이 뭔가 눈치챘다.
게임 내에서 눈이 멀 일은 없을것이다.
그리고 독 공격이라면, 막아 낼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형, 혹시?"
"그래. 너희들도 만약을 위해서 착용해 둬. 아, 저에게 여분이 있으니까 트리얀씨도 사용하세요."
세영은 마족의 주머니에서 주섬 주섬 아이템을 꺼냈다.
히부린의 마스크다.
하급 독 면역.
마스크의 부가 옵션 중 하나이다.
이거면, 드라이어드의 독액 정도는 막아내지 않을까?
"설마, 그 실험실에서 찾아낸 걸 이런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몰랐어요."
"맞아! 오빠는 정말 천재에요."
세영은 과도한 칭찬에 쑥쓰러웠다.
"좀 그만해. 길드를 만들면 너희에게 제일 먼저 권유를 할테니까. 이런건 너희들이라도 다 생각해 냈을거야."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녀석들 때문에, 세영은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그 역시 미소를 잃지는 않았다.
*
부웅- 쩌억-!
부웅- 쩌억-!
도끼를 휘두른건 세영이었다.
처음에는 노랑나비가 나섰었다.
자신은 여자니까 드라이어드가 나타나 모습을 확인하면, 유혹할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드라이어드는 아예 나타나지를 않았다.
"넌 여자라서 안오나 보네."
"그런가?"
"아니면, 꼬맹이라서 예외일지도 모르지."
"뭐!?"
레드문의 발언에 또 둘이서 티격태격 하는 사이, 세영이 나서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끼는 무거웠고, 기술도 없었다.
힘 스텟은 1.
그래도 아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트리얀의 조언도 도움이 되었다.
[기초 벌목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때였다.
프스스ㅡ
거목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 이럴 수가. 내가 수백 수천 그루를 벨 동안, 단 한 번도 찾아오지않았는데. 이렇게 간단히..."
트리얀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허망했다.
나무 정령을 찾기 위해 보낸 지난 세월.
이리 간단한 방법이 있었던가.
자신은 대체 그 긴 시간 무얼 해온 것인가.
그가 자책하는 사이. 거목 줄기가 뒤틀리며, 공간의 왜곡이 발생했다.
"뭐, 뭐야?"
"으으, 나무가 뭐 이리 징그러워."
거목의 줄기 안에서 이제 막 태어난것처럼, 인간의모습을 한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쑤욱-
팔이다. 인간과 비슷한 팔.
이윽고 머리.가슴. 다리.
"오우야~"
"허업..."
"흠..."
"다들! 눈 감아! 오빠도 보지 말아요!"
남자들은 얼굴이 벌게졌고, 노랑나비는 괜히 성을 냈다.
드라이어드가 중요 부위만 나뭇잎으로 가려진 알몸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흡사한 여성의 모습.
그러나 인간 같은 온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물의 줄기 같은 머리칼, 초록빛의 눈을 했다는 것.
피부의 색도 인간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빛깔이다.
그럼에도 외형이 지나치게 인간 여성의 모습과 닮아, 남자들은 하나같이 말문이 막혔다.
[거목의 주인, 나무 정령 드라이어드 '누라라'가 등장합니다.]
"뭐지?"
"이건, 고블린 족장 등장할 때 메시지 아니야?"
"설마 보스 몬스터?"
모두의 긴장도가 순간 급상승했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감히 나의 단잠을 방해하다니..."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과 같은 목소리였다.
듣고 있는 것 만으로 묘한 상쾌함을 느꼈다.
"당신이 누라라 인가요?"
"호오... 그대인가. 나의 소중한 나무에 상처를 입힌 자는."
마치 유혹하는 듯한 눈빛으로, 세영에게 가까이 다가선 정령.
마주선 둘의 키는 비슷해 보였다.
"저... 너무... 가까운 데요."
세영은 당황했다.
거의 알몸인 여성이 다가오니, 이런것에 면역이 거의 없는 그의 얼굴은 터질듯 붉어지고야 말았다.
"오빠한테 무슨 짓이야!"
화가난 노랑나비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나섰다.
그러나 그녀의 캐릭터는, 키가 지나치게 작았다.
"음? 왠 어린아이가 이런 곳에?"
"이... 이... 어린 아이라니! 나는 19살이라고!"
부들부들 대는 노랑나비를 왜면한 채, 누라라는 목소리를 냈다.
"그대. 나를 사랑하거라. 나의 사람이 되거라. 그 목숨 아깝다면."
"저기, 그보다요. 타리뮤라는 페어리를 풀어 주시면 안될까요?"
정령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세영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는 표정.
"그대. 무얼알고 있는거지?"
부웅-
갑자기 바람을 가르며, 트리얀의 도끼가 누라라를 향해 휘둘러졌다.
"이 빌어먹을 마녀야! 타리뮤를 돌려 보내지 못할까!"
증오에 찬 노인의 목소리가, 새벽의 숲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간단히 막혀버렸다.
누라라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식물 줄기가, 그의도끼를 칭칭 감으며 빼앗아 버린 탓이다.
"후후후. 그대는 설마 트리얀인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있으나... 이제 늙었구나. 어리석은 자여.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은 이미 주름 속에 파묻혔는가."
"으윽... 이 젠장할 마녀야. 내 목숨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거라. 대신 타리뮤는 자유롭게 풀어줘!"
도끼를 빼앗았던 줄기는 트리얀의 온몸을 칭칭 감았다.
죽일 마음은 없었는지 그저 감쌀 뿐이었다.
"어리석구나. 아직도 그 페어리를 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다니. 좋겠지. 죽기 전 한 번 만나게 해주겠노라. 그리고 더욱더 깊은 절망의 심연에 빠지거라."
거목이 다시 뒤틀리며, 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그러다 멈췄다. 뒤틀림도 소음도.
그리고 나타났다.
그건 작은 나무뿌리의 난쟁이였다.
난쟁이의 외형은, 온몸이 나무의 뿌리처럼 보였다.
머리칼도, 다리도, 심지어 손까지.
그 손. 뿌리에 휘감긴 작은 요정이 보였다.
"타... 타리뮤..."
트리얀의 감격에 겨운 목소리.
그러나 페어리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
"후후. 우디는 나무뿌리의 정령. 그 뿌리에 닿는 모든 것은 잠이들게 마련이니라."
우디는 누라라의 수하이다.
누라라의 명령으로 트리얀이 두번 다시 타리뮤를 찾지 못하게, 매일 밤 새로운 거목으로 이동했다.
정령답다고 해야할까.
전혀 걷지 않고, 방금 전 처럼 고목의 안에서 다른 고목의 안으로 순간이동 할 뿐이었다.
그 동안 잠이든 타리뮤의 날개에서 가루가 흩날리는 줄도 모른 채.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다. 그녀를... 타리뮤를 풀어주거라."
애절한 트리얀의 말에, 누라라는 오히려 분노했다.
"나를 더 화나게 만들다니. 그대는 진정 어리석구나."
온화한 미소를 짖고있던 드라이어드가, 처음으로 표정을 차갑게 식혔다.
질투에 미쳐버린 마녀가 화를 낸다면 저런 얼굴일 것이다.
"크윽..."
트리얀을 감싸고 있던 식물의 줄기들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그래도 직접 죽일 마음은 없던 모양인지, 줄기에 묶여 신음하고 있을 뿐이다.
목을 감아 조였다면 숨이 막혀 죽었을 텐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랑의힘인가?'
이세영은 아직 사랑이 뭔질 몰랐다.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
세영은 파티원들과 드라이어드를 공격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래도 정령이지만 몬스터에 가까운거 같네."
"맞아요.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 뜬거 보면, 보스 몬스터 같아요. 이름도 있으니까 네임드인건 분명하고, 부하도 있으니까 틀림없어요. 그러니 신중하게 가죠!"
까앙- 깡!
핑쿠햄스터가 검으로 자신의 방패를 후려쳤다.
귀를 찢는듯한 소음이 새벽의 숲에 퍼져나갔다.
"시끄럽구나. 어리석은 인간이여."
트리얀을 붙잡은 손은 하나뿐.
남은 손을 핑쿠햄스터를 향해 뻗어왔다.
손은 녹색의 줄기로 변했고, 방패를 향해 일직선으로 덮쳐왔다.
터엉!
줄기는 예상외로 핑쿠햄스터의 방패 앞에서 쉽사리 가로막혔다.
"생각보다 약한 거 같은데요? 고블린 족장에 비한다면."
"우리가 강해진 거 아니야?"
자신감에 찬 노랑나비.
핑쿠햄스터에게 신경을 팔고 있는 누라라의 등 뒤에서, 그녀가 대검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휘둘러진 대검은 누라라의 등 깊이 파고들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어리다고 용서할 줄 아느냐."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노랑나비를 쏘아보는 드라이어드.
그러나 이미 뻗어 나간 줄기를 되돌리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공격하고 싶어도, 누라라에겐 손이 부족했다.
노랑나비는 그 틈을 타 간단하게 거리를 벌렸다.
"다음은 나야!"
레드문이 어느새 생성해 둔 얼음화살을 날렸다.
쉬이익- 푸욱!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누라라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오! 정확한데?"
"하하. 당연하지. 어렸을 때부터 괜히 모든 게임에서 마법사만 해온 게 아니라고."
허세를 부리며 자신감 넘쳐 하던 레드문.
그의 허세는 금세 경악으로 변했다.
"어리석구나. 내가 너희 인간들과 같을 줄알았더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팔을 사용해, 가슴에 박힌 얼음 화살을 간단하게 털어냈다.
누라라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남지 않았다.
[누라라가 스킬 '나무의 저주'를 발동합니다.]
그녀의 몸이 온통 녹빛으로 차올랐다.
남자들은 더는 그녀를 보는게 부끄럽지 않았다.
외형이 전혀 인간다움을 느낄수 없게 변해버린 탓이다.
그녀의 머리칼이 마치 수십 마리의 뱀이 된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끝에서 액체를 쏟아냈다.
액체는 사방으로 비내리듯 쏟아져 나갔다.
"조심해. 이게 그 독인거 같으니까."
"마스크로 막아 지겠지?"
"아마도... 그게 아니면 큰일이지."
피할 방도는 없었다.
이걸 피한다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피할 수 있으리라.
나무 뒤로 숨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믿을건 히부린의 마스크 뿐.
다행히 그 효과는 발군이었다.
[누라라의 저주 독에 저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