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화. 거목의 주인 누라라
다행이었다.
디버프건 저주건 간에,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면 전투 난이도는 수십 수백 배 상승할 터였다.
"와, 정말 형 덕분에 여러 번 구원받는 거 같네요."
"실험실에서 마스크를 찾아낸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잖아."
레드문의 말에, 가까이 있던 세영이 반문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건 핑쿠햄스터였다.
그는 어느새 난쟁이 나무뿌리 정령의 곁에 다가가 있었다.
뻗어온 나무뿌리를 방패로 간단히 막아내고, 검을 휘둘렀다.
휘익- 터엉.
푸욱- 푹. 푹. 푹.
휘두르고 막고 찌르고.
툭.
시간은 제법 걸렸지만, 쓰러뜨릴 수 있었다.
뿌리에서 퍼지는 수면독은 마스크의 효과로 간단히 저항했다.
[파티원이 나무뿌리 정령 '우디'를 쓰러뜨렸습니다.]
주제에이름이 있다고 네임드 몬스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핑쿠햄스터 혼자서도 간단히 사냥했다.
이유는 우디의 레벨이 겨우12였기 때문이다.
[잠이든 페어리를 확보하였습니다.]
핑쿠 햄스터는 타리뮤를 손에 조심히 들고, 세영의 곁으로 달려왔다.
"형. 이거 어떻게하죠? 잠든 걸 깨워야 퀘스트가 완료될 거같은데. 그리고 아이템은 일단 제가 회수했어요."
"그래.분배는 나중에하고, 일단 페어리는 내가 맡을게."
세영은 페어리를 건내받았다.
근접해서 적을 상대하는 그보다, 원거리에서 공격을 하는 세영이나 레드문에게 맡기는게 적합한건 당연했다.
'잠에서깨운다라... 그걸 써볼까.'
세영은 얼마전 새로 해독 가능했던 레시피로 만든 포션을 꺼내 들었다.
[하급 정화의 포션]
- 마시면 하급 수면, 하급 마비, 하급 중독 등 각종기초 단계의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
- 타인에게 사용 가능합니다.
- 미리 마셔두면 일정 시간 하급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30% 상승합니다. - 지속시간 2시간 -
히부린의 마스크 덕분에 거의 쓸 일이 없어 보였는데, 가지고 있으면 결국 어젠가 쓸 날이 오는구나 싶었다.
세영은 잠든 페어리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하급 정화 포션의 뚜껑을 열었다.
넓적하고 깨끗한 나뭇잎 하나를 구해와, 포션의 내용물을 페어리의 입가에 조심스레 흘려 보냈다.
채집을 할 때처럼 온 신경을 집중했다.
"으... 으음."
몸을 뒤척이며, 페어리의 작은 입에서 신음 소리가 세어나왔다.
"응?"
눈을 똥그랗게 뜬 페어리.
깜짝 놀랐는지 벌떡 일어섰다.
"인간들. 뭘 함부로 보는거야! 버릇 없기는."
언제 잠들어 있었냐는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는 타리뮤.
"여긴 어디? 꽤 오래 잠을 잔 것 같은데."
"여긴 고블린 숲이야. 아, 참! 이걸 마실래?"
세영은 서둘러 뱀 딸기 주스를 꺼냈다.
"흥! 인간이 주는 걸 덥석 받아먹을 줄 알아?"
그러나 타리뮤의 다짐은 몇 초 가지 못했다.
세영이 주스의 뚜껑을 연 탓이다.
침을 질질 흘리는 타리뮤는 결국, 주스를 통째로 들고 마셨다.
꺼억-!
"햐~ 맛있다. 이게 몇 년 만이야! 어라? 몇. 년. 만? 이상하네. 엊그제도 뱀 딸기를 먹었던 거 같은데. 인간. 왜 그런 거야?"
페어리는 하나같이 쾌활한 성격인지, 십여 년 넘게 잠을 자고도 이런 반응이었다.
"넌 누라라에게 잡혀 있었어. 그걸 우리가 구해준 거야.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아, 맞아! 그 망할 나무 정령이 나를 붙잡았어! 그걸 어떻게 알아 인간?"
세영은 버섯을 꺼내 보였다.
"정말 내 날개의 가루네. 호오. 고마워 인간. 페어리는 절대 인간에게 빚을 지지 않는다고! 보답하게 해줄래?"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이제 보상을받을 차례다.
[당신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칭호가 주어집니다.]
[칭호 : 잠자는 숲속의 페어리]
- 당신은 숲속에서 악한 정령의 손에 붙잡힌 페어리를 구해 냈습니다. 모든 페어리들은 당신을 은인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 이동속도 +2, 타리뮤의 날개 레벨 +1
- * 세 가지 이상의 페어리 관련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은 페어리의 위기를 여러번 해결 하였습니다. 페어리들은 무의식 속에서 당신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 페어리에게 전수받은 모든 스킬의 레벨이 1 상승합니다.
'칭호가 많으면 부가 효과가 있구나!'
하지만 레벨 1차이로 크게 체감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분명한 이득.
그리고 ??? 로 표시되던 보상도 받았다.
[페어리 타리뮤가 당신에게 스킬을 전수하려 합니다. 수락 하시겠습니까?]
"당연한걸 왜 맨날 묻는거지? 아무튼 수락."
"저도 수락."
옆에서 지켜보던 레드문도 외쳤다.
거리가 먼 나비와 햄스터에게도 같은 메시지가 뜬 모양이었다.
[스킬 '타리뮤의 날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스킬 : 타리뮤의 날개]
- 페어리 종족은 타인의 시선을 피해 언제든지 모습을 감출 수 있습니다. 이는 아스트랄계에 그 정신이 온전히 머무는 까닭입니다.
이 스킬을 얻은 당신은 스킬의 숙련도에 따라 타인 또는 몬스터의 시선으로 부터 자신의 몸을 감출 수 있게 됩니다.
- 해당스킬은 공격 스킬을 사용하거나, 공격을 받을 경우 스킬이 해제 되며, 정예나 네임드, 보스 몬스터들에게는 효과가 약해집니다. 또, '간파' 스킬을 보유한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킬의 숙련도에 따라 능력이 향상됩니다. 또한 상대와의 레벨 차에 따라서도 그 효과가 비례하여 증감합니다.
- 해당 스킬은 소리를 감출 수는 없습니다.
스킬을 얻었다.
나무꾼 트리얀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스킬.
다만 트리얀은 요정 날개가루 버섯을 복용해, 스킬의 레벨이 대폭 상승한 상태였다.
트리얀은 세영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고, 레드문의 마법 공격을 받아 어깨에 상처를 입고도, 한참이나 스킬을 유지해 눈에 보이지 않았었다.
지금 이세영이 그와 같은 은신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나도 버섯을 먹으면 그런 게 가능할 텐데, 버섯을 무슨 수로 얻지?'
세영은 그게 못내 아쉬웠다.
인벤토리에 있는 버섯들은 스킬 강화 효과가 없다.
효과를 얻으려면, 채집하고 5분 내로 복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일단 복용한 후에는 지속시간이 6시간. 게임 내 시간이라면 하루다.
이 정도면 채집이나 전투에 충분히 유용하게 이용 가능할 것이다.
"형.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요?"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눈을 멀게 하는 독액이 통하질 않자, 누라라가 크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터엉-! 터터터엉!!
누라라의 손에서 부터 뻗어나온 식물의 날카로운 줄기가, 방패에 부딛치며 굉음을 냈다..
"으윽... 어째, 이거 점점 강해지는데."
어찌나 거센지, 핑쿠햄스터를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는 막을 수 있었지만, 그건 누라라가 한 손으로 공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도 강도와 공격 속도가 점점 상승했다.
"감히 나의 수하인 우디를 죽이다니. 용서치 않겠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는 상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매마른 갈대가바스러지는 듯 했다.
세영이 공격에 가세했다.
쉭- 쉭- 쉭...
아기살을 장착한 쇠뇌를 끊임없이 발사했다.
소지하고 있는 건, 무려 1만 발.
한 발당 데미지를 1포인트만 입혀도, 모두 적중하면 1만이나 된다.
푹! 푹! 푹...
"그대는 오늘 나의 소중한 나무를 베어낸 자. 설마 그대마저 나를 거부하는것이냐!"
분노에 찬 누라라가 세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굶주린 하이에나 같은 눈빛.
쇠뇌 공격은 연사가 빠른 만큼, 기사의 도발 스킬 유지시간과 다음 도발 사이의 틈새에 데미지를 입혔다.
그 탓에 누라라의 시선을 끌고 만 것이다.
캉! 캉!
"이쪽이야. 아줌마!"
곧바로 이어진 햄스터의 도발.
그러나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이... 이놈들!"
드라이어드의 아름답던 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분노에 휩싸인 초록 괴물 같은 얼굴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멀쩡히 나타난 타리뮤.
페어리의 모습이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에 담긴 것이다.
"나비야. 트리얀 아저씨부터 구해 내야 해."
"네. 오빠-!"
노랑나비는 세영의 외침에, 곧장 누라라의 반대 팔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정령의 팔은 나무가 아닌 식물의 줄기.
날카로운 대검의 공격에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공격이 적중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어림없다!"
누라라의 머리칼이 움직였다.
아까도 그랬지만 뱀과 흡사한 움직임.
그녀의 시선이 세영에게서 노랑나비에게로 옮겨졌다.
"꺄악- 징그러!"
나비는 대검을 방패처럼 들어 올렸다.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파티원의 공격이 멈춘건 아니다.
레드문은 온 마나를 쏟아부었다.
수십 발의 얼음 화살이 만들어졌다.
타겟은 트리얀을 붙잡고 있는 누라라의 팔.
엄청난 양의 마나 소모로 인해, 포션을 가득 마셔야했다.
놈은 보스 몬스터.
잡기만 한다면, 분명 최하급 마나포션의 가격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수십 또는 수백 배의 돈을 벌게 될 테니 아낄 필요가 없었다.
"끄아아아악- 이놈드을-!!"
고결한 나무의 정령님께서, 처음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감히 고블린의 족장들 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간 따위가.
누라라라의 분노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심장을 공격했던 얼음 화살은 간단히 털어 냈었다.
거기에 심장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데미지를 전혀 입지 않았던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수십 발이나 빗발치는 마법 공격에, 누라라는 어찌 해볼 방도가 없었다.
역시, 마법사.
단순 공격에만 있어서는 최강의 클래스 답다고 해야할까.
특히 보스 레이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누라라의 한 쪽 손의 줄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쿠웅.
"으으..."
지금까지 그녀의 손에서 뻗어나간 줄기들이 강하게 쥐고 있던, 트리얀의 거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이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고, 잘려나간 식물 줄기들은 말라 비틀어져 증발했다.
트리얀은 이미 의식이 희미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때문에 그토록 찾아 해메이던 타리뮤의 모습도 확인하질 못했다.
"넌 계속 공격해. 마나 포션 더 필요하면 얘기하고. 난 트리얀님 구하러 갈 테니까."
"네, 형. 조심하세요. 포션 아직 2개밖에 안마셨어요. 충분 하니까 걱정 마세요."
레드문의 목소리를 다 듣기도 전에 세영은 트리얀에게 향했다.
거구의 몸에근육이 울퉁불퉁해도 일단은 노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트리얀. 괜찮으십니까? 치료약 입니다. 정신 좀 차려보세요."
세영은 치료약을 아끼지 않고, 그의 입 안에 흘려보냈다.
"으윽... 난 괜찮네. 고맙군."
트리얀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판타지 세상이다.
치료약의 효과는 발군이었다.
타리뮤가 트리얀의코 앞으로 날아들었다.
"트리얀... 괜찮아? 왜 이렇게 쭈글쭈글해 졌어?"
"?..."
트리얀의 표정에 여러가지 감정이 피어올랐다.
반면 울상을 한 타리뮤.
"타... 타리뮤."
"응. 나야. 트리얀.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거야? 난 조금 잠을 잤을 뿐인데... 혹시 저 나무 정령의 짓이야?"
트리얀은 타리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페어리가 아닌 인간이니까. 어느덧 늙어버린 게야."
슬픔에 젖은 아련한 눈빛. 그래도 입가는미소를 띠었다.
그 말을 들은 페어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트리얀... 미안해. 내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나 봐."
"괜찮단다. 이렇게 무사히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정말 다행이구나."
트리얀은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미소를 보였다.
그의 앞에 봄이 찾아온듯 했다.
세영은 그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얼마 전 병문안을 하러 갔을 때, 할머니가 자신에게 보였던 미소와 비슷하게 느껴진 것이다.
'할머니...'
세영은 화가 났다.
행복한 둘 사이를 이렇게 슬프게 만들다니.
저 나무 정령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철컥-!
쇠뇌에 아기살이 장착돼 있는걸 확인했다.
게임답게, 몇 발 쏠 때마다 재장착할 필요는 없었다.
인벤토리에 있는 화살이 전부 소모될 때까지는 쉬지 않고 발사되리라.
마족의 주머니에 넣어뒀던 화살들을, 굳이 인벤토리에 옮겨 둔 이유이기도 했다.
'넌, 나무 정령이 아니라 몬스터일 뿐이야.'
쇠뇌를 들어 드라이어드를 겨눴다.
나무의 정령인 탓인지, 나무로 만들어진 아기살을 사용한 종 전에 했던 공격으로는 거의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지만, 달리 방도도 없었다.
데미지가 0은 아니었으니까. 연사로 승부를 보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모두, 잡을 수 있겠어?"
"네. 형. 점점 힘들어 지긴하는데, 아직 물약도 거의 안마셨고, 보스전 치고는 할만 해요."
"나도요. 오빠. 아니, 저도..."
"전 멀리서 마법만 쓰면 되니까 문제 없어요. 주신 마나 포션도 많이 남았고."
파티원의 대답을 들은 직 후.
세영은 공격을 시작했다.
*
10분은 지났을까.
"왜 안죽는 거야?"
"데미지는 분명히 입히고 있는데."
몇 분 전부터 누라라는 공격을 시도조차 못한 채, 방어 일변도 였다.
식물의 줄기처럼변했던 손은, 어느덧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로지 머리칼을 움직여, 일행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쇠뇌 공격은 피하지도 않고 받아냈다.
아기살은 그녀의 몸에 박혔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일수였다.
"내 공격은 전혀 효과가 없나?"
"네. 그런거 같아요. 형은 좀 쉬세요."
핑쿠햄스터의 말대로였다.
세영은 어쩔 수 없어, 트리얀과 타리뮤를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킨 뒤, 레드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 죄송해요. 포션 거의 다썼어요. 그런데도 못 잡다니... 너무 아까워요."
"걱정마. 아직 더 있으니까."
세영은 다시 30개의 최하급 마나 포션을 레드문에게 건넸다.
그때였다.
쿵. 쿵.
쩌저저적.
쿠웅. 쿠웅. 쿠웅.
가까운 숲에서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진동했다.
"뭐... 뭐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날이 밝아 오는지 울창한 숲의 나무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을 때였다.
[누라라가 스킬 '트렌트 소환'을 사용하였습니다.]
쿠웅. 쿵. 쿠웅. 쿵.
[트렌트 '나르파쉼'이 등장했습니다.]
[트렌트 '이라누안'이 등장했습니다.]
[트렌트 '쿠가닌'이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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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등장 메시지와 함께, 수십 마리가 넘는 트렌트가 등장했다.
전부 이름이 있는 네임드 몬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