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77화. 잊혀진 세계
파지지직.
"으윽!!"
가벼운 비명이 들렸다.
고대 마족의 탑 앞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주변에 여러 개의 천막이 설치되었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였다.
거대 야영지와 다름없다고 해야 할까.
"부길마님. 준비 끝났습니다."
BI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 BIM.
일명, 빔이라 불리는 중년 기사의 모습을 한 남자가 부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블루 아이템 사의 부사장인 그는, 파르도 섬 내 모든 직원을 데리고 대규모 원정이라도 향하려는 기세였다.
파밍 기업 블루 아이템은, 크게 사장이자 길드 마스터인 박혁을 필두로 한 중앙 대륙에서 플레이하는 팀과 부사장이자 부 길드 마스터인 빔과 함께 파르도 섬에서 플레이하는 팀으로 나뉜다.
그 세력의 한 축이, 지금 이 장소에 모두 모여있는 것이다.
고대 마족의 탑이 보이는 바로 이 장소에.
비명이 들려오던 탑 가까이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테스트 결과, 입장 가능 레벨은 45 레벨이상입니다."
"그럼 42 레벨 이하는 일단 잔심부름이나 하라 해. 43, 44 레벨은 서둘러 지하 동굴 가서 레벨업해 오라 전하고. 괜히 네임드 몬스터 건드렸다가 시간 끌지 말라는 것 역시 단단히 일러둬."
"네! 부길마님."
마족의 탑에 각 레벨마다 한 명 길드원을 준비시켜, 그들의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때 스파크가 튀며 비명을 지르는지 확인해, 탑의 정확한 입장 제안이 몇 레벨까지 인가를 순식간에 파악해 뒀다.
"요리 준비가 끝났습니다."
간이 나무 의자에 앉아있던 빔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45 레벨 이상 집합! 준비된 모든음식을 버프가 생길 때 까지 먹는다. 실시!"
마치 작은 군대라도되는 양 떠들어 댔다.
이들의 여기 모인 이유. 그 기본적인 목적은 당연히 마족의 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길드 자체의 정보 수집은 아니고 파르도 시 의회에서 받은 퀘스트였다.
퀘스트를 받은 건 세영의 파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BI길드나 스콜피온 길드처럼 규모가 거대한 길드에도 당연히 의뢰 내용이 전달됐고, 그 중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이 바로 BI길드이다.
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
"기츠, 현재 인원은?"
"네. 45 레벨 이상인 인원은 총 12 명입니다."
"너무 적군... 딱 두 파티 뿐인가."
"네. 힐러는 저를 포함한 3명. 기사가 3명. 나머지는 마법사 다섯에 트레퍼(trapper)가 한 명입니다."
빔은 음식을 먹으며, 조용히 BI기츠의 이야기를 들었다.
"트레퍼?"
"네. 길드 유일의 활을 사용하지 않는 헌터 클래스 입니다. 함정 설치와 해제에 특기가 있으며 덕분에 입구를 발견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 조합 잘 맞춰서 파티 짜봐. 내가 들어간 파티에 기사는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대신 힐러를 둘 넣어. 자네가 한자리 차지하고. 우리가 메인으로, 나머지 한 파티를 보조로."
"예."
"준비된 포션은?"
"치료약은 한계 무게까지 들게 했습니다. 마나 포션은 마법사와 힐러 위주로 지급하였습니다."
"좋아. 자네도 서둘러 식사하게. 곧바로 출발할 거니까."
깍듯이 허리를 숙이고 뒤돌아가는 기츠.
그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 본격적인 건 이번이 처음이야.'
현재 그가 소속된 블루 아이템 사는 사활을 걸었다.
늘어나던 회사의 매출이 정체되기 시작한 탓으로 성장을 위한모험을 건 것이다.
물을 것도 없이, 마나 포션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마족의 탑.
아니, 마족 네임드 몬스터에게 얻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놈들이 주는 무기에는 마나 회복 옵션이 붙어있기 때문인데,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10억을 간단히 넘어설 것이다.
'게임 아이템 하나에 10억이라니...'
사장 박혁을 필두로 한 대륙 팀이, 마족 네임드를 처치하고 얻은 영웅 등급의 검.
그 검을 통해 얻게 된 정보였다.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직원들. 여섯 개의 파티가 총 동원되어, 가까스로 얻어 낸 결과물이다.
얼마나 아슬아슬한 상황의 연속이었는지, 모든 마나 포션이 거덜 나고 심지어 사망자도 열 명이 넘었다고 전해 들었다.
하지만 마나를 회복 시키는 영웅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같이 기분 좋게 보너스를 받고 휴가를 떠났다.
'나도 대륙에서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괜히 알파에게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들 식사 끝 마치신 후, 포지션 알려드릴 테니 모여주세요."
시간은 금세 지나, 45 레벨 이상 길드원들의 식사가 끝났다.
모두 두세 가지 이상의 소소한 버프를 얻었다.
그러고 나서 BI기츠의 의견으로 두 개의 파티가 만들어졌다.
부 길드 마스터가 나타났다.
"자, 다들 긴장들 해! 저 징그러운 탑 안에 똥이 들어있을지, 된장이 들어있을지, 아니면 금덩이가 들어 있을지 누구도 모르니까 말이야!"
네!!
"그럼, 출발!"
블루 아이템사이자, BI 길드의 두 파티, 총 12인의 사람이 탑의 안으로 진입했다.
입구의 위치는 이미 찾아둔 지 오래.
길드에 있던 트레퍼가 특유의 함정 간파 스킬을 사용했더니, 간단하게 위치가 발견 된 것이다.
고대 마족의 탑 앞, 허공이 마치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BI 길드원들은 그 안으로 한 사람씩 사라져 갔다.
이번 전투에 회사의 진정한 명운이 달렸다.
탑 아래에서 남아 지켜보던 인원들 역시 비장한 표정을 한 채였다.
*
탑에 진입한 마지막 길드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고대의 탑이 있는 민둥산에는 새로운 방문객이 있었다.
바로 이세영과 그 일행이다.
"뭐지? 아까는 전혀 보이지 않던 텐트가 있는데요?"
아직도탑 주변에는 BI길드의 사람들이 서른 명 가까이 남아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봤다.
"뭐야? 구경 왔나?"
"글쎄? 어? 저 사람 설마?"
탑에 진입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이들 중에는 회사에서 영입하려 했던 연금술사 알파나 김갑부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없었다.
단지 웹튜브를 통해 유명해진 김갑부의 얼굴만 어렴풋이 눈치챘을 뿐이다.
"와,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야?"
"맞는 거 같네. 저 파티가 그럼? 그 대족장을?"
"우리 길드에서도 엄두도 못 내던 걸 저 파티에서 단독으로 잡았다고? 말도 안돼."
"전설 지팡이 공개된 거 못 봤어? 진짜라니까."
이미 익숙해진 김만우는 들려오는 반응에 턱을 살며시 들고 자랑스럽게 걸을 뿐이었다.
"와, 아저씨 이제 유명인사네요."
"흥. 당연하지."
"덩달아 우리까지 주목 받는 거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저는 원래 얼굴로 할 걸 그랬어요. 지금은 꼬맹이 캐릭터라..."
"웃기시네. 그 못난이 면상 전국에 까발려지고 웃음거리 되는 거 아니야?"
"넌 진짜 오늘 내 손에 죽자."
다들 가벼운 발걸음으로 탑을 향할 때, 가장 앞에선 세영 만큼은 마음이 급했다.
'뱀...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주변에 누가 쳐다보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오로지 탑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의 위치는 어떻게 찾지?"
"제 생각에는 버섯을 발견한 근처일 거예요. 그쪽으로 가보죠."
정답!
BI 길드의 파티가 지나간 통로를 향해, 세영의 파티원 역시 하나둘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들이 도착한 곳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장소였다.
**
[잊혀진 세계에 진입하셨습니다.]
- 차원의 경계. 버려진 세상.차원의 감옥. 시간이 뒤섞인 공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불려진 적 없는 장소에 진입하셨습니다.
- 마나가 자연 회복되지 않습니다.
- 체력이 자연 회복되지 않습니다.
- 이곳에서 사망 시, 당신의 시간은 이 장소에 진입한 시점으로 되돌아갑니다. (획득한 모든 경험치와 아이템 역시 사라집니다.)
- 목표를 분명히 하십시오. 목표를 잃는 순간 당신은 영원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싹 한데요?"
"정말... 이런 거 너무 싫다."
"마치, 세상에서 색을 몽땅 뽑아 낸 것 같아."
주변은 스산했다.
온통 회색 빛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매마른 대지 위에 마른 나무나 풀이 보인다.
손이라도 가져다 대었다가는 금세 바스라져 버릴 것 같다.
그리고 거대한 건물.
단단하고 딱딱해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려있어요."
BI길드가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형. 부탁해요."
김만우는 피리를 불었다.
산들바람의 시.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 버프를 받고 출발할 작정이었다.
[스킬 사용에 실패하셨습니다. 주변에 바람 정령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뭐라고? 뭐 이딴..."
욕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헐... 그럼 아저씨 데려오지말걸.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뭐? 이 망할 꼬맹이가!"
"히히. 농담, 농담. 농담이에요."
이제 아이들은 김만우를 향해서도 농담할 정도로 제법 사이가 가까워졌다.
물론 김만우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문 안으로 들어가 보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저 건물 안이 수상해 보이네요."
"그래."
높이 3m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철문을 통과했다.
끼이이- 철컹!
"뭐지?"
쾅! 쾅!
"뭐야. 문 잠겼는데요?"
"이상한데? 그럼 왜 열려있었던 거지?"
"자동문인가 보지 뭐."
온통 수수께끼투성이였지만, 게임이니 그러려니 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먼 장소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남자의 목소리였다.
"뭐야, 싫다. 이것도 다 연출이야?"
"그... 그러게. 조금 무섭네."
이번에는 남자 아이들도 무서워 했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당장 어디서 살인이라도 벌어지는 건 아닌지, 음침한 환경 탓에 모두가 겁쟁이가 되었다.
"일단, 가까이 가보자."
"네에..."
일행은 유일한 통로를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겨우 통로가 양 갈래로 나누어지는 장소에 도달했다.
"비명이 들린 건 왼쪽이었지? 어떻게 하지? 왼쪽? 오른쪽?"
"오, 오른쪽이요."
"저도 오른쪽..."
결국 오른쪽을 향했다.
누구 하나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등 뒤에 누가 갑자기 나타나는지 봐줘요. 제가 앞장설게요."
혹시 모를 갑작스러운 상황을 경계하며 파티는 통로를 계속 이동했다.
그리고 그 통로의 끝은,매우 넓은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러 개의 커다란 캡슐 형태의 무언가가 보였는데, 누구 하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이건. 완전 생체 실험 현장 같은데?"
"저 안에 들어있는 거 살아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으으... 싫다."
투명한 캡슐의 안에는 액체와 함께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기괴한 형체에, 캡슐마다 하나 하나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크기도 어린아이 정도부터 시작해, 큰 건 김만우의 캐릭터보다도 몇 배나 거대했다.
세영은 혹여나 이 캡슐 중 하나에, 페어리 뱀이 들어있을까 봐 마음을 졸이며 확인해 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중 하나에서 부글부글 물이 끓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쩌저적 금이 가며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흐이익!! 뭐야."
"모두 제 뒤로 피해요."
"미안해요. 제가 유리에 손을 댔더니, 갑자기 마나가 빠져나가면서..."
캡슐은 마나를 흡수해 내용물에 마나를 전달하는 특수 장치였다.
마치 세영이 만들어낸 호문클루스용 플라스크와 비슷했다.
주르르륵.
액체는 흘러내려, 파티원들의 신발 바닥을 적셨다.
점성이 있을 거 같았지만, 생각보다는 물과 흡사했다.
그리고.
쾅!
굉음과 함께 캡슐이 산산이 조각나며, 놈이 등장했다.
[합성종 no. e-231 '베놈'이 등장했습니다.]
흉측한 놈의 신체가 모두의 눈에 드러났다.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이 게임은 미취학 아동이 해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으아악- 저게 대체 뭐야."
"키메라 같은데?"
"갑자기?"
"딱 봐도, 이것 저것 짬뽕시켜서 만들었나 본데? 팔, 다리, 얼굴, 전부 따로 놀잖아."
한둘의 생명이 섞인 형태가 아니었다.
적어도 넷. 아니 그 이상이었다.
"얼굴은 알겠네. 얼굴만 고블린이야."
"그나마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거야?"
"더, 덤벼라! 괴물아!"
말을 알아 듣기나 하는 건지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베놈은 다짜고짜 일행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터엉!
방패로 막았다.
"우웁..."
햄스터는 한 발 뒤로 밀려났다.
베놈은 어찌나 힘이 강한지, 오른팔을 가볍게 휘두른 단순한 공격임에도 방패는 해머로 두드린 듯 부르르 떨렸다.
"어때? 많이 강해?"
"방패를 뚫고 데미지가 들어올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웬만한 고블린 네임드보다는 강할 거 같아요."
그건 착각이었다.
놈은 공격보다 방어력이 뛰어난 모양이다.
이쪽에서 시도하는 공격이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뭐 이리 단단해. 손목이 저릴 정도야."
노랑나비가 푸념했다.
"얼음 화살도 관통하기는 커녕, 상처도 못 주고 그냥 부서지는데요? 이거 영웅 등급 지팡인데..."
레드문의 마법 역시 마찬가지다.
"오른팔이야. 오른팔이 단단한 거 같아. 거기만 피해서 공격해 보자."
"OK. 해보자."
그 말은 정답이었다.
놈은, 공격도 방어도 오른팔로만 했다.
뒤에서 자신을 베어 들어오는 대검도, 가까스로 오른팔로 막아냈다.
저 오른팔이야 말로, 놈의 공격 수단이자 방패였다.
"그것 봐. 역시, 키메라인 만큼 부위 별 강점이 있는 거 같아. 약점도 다 다르지 않을까?"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빠를지.
그것이 관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