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0화 〉80화. 잊혀진 세계 (80/122)



〈 80화 〉80화. 잊혀진 세계

"와... 이거 언제 만들어진 허브 티인데, 아직도 이렇게 멀쩡한 거예요?"
"이건 완전 그 유명한 반찬 통 같네요. 김치 통이었나? 아무튼."
"그거랑 같냐? 이건 평생~ 그대로 일지도 모르잖아?"
"으이그. 멍청한 꼬맹이들아. 이건 게임이라고! 정신들 차려."

김만우의  마디로 아이들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특히 노랑나비는 싸늘한 표정으로 김만우를 쏘아봤다.

"그런게임가지고 생방송 출연해서 유명해지셨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되죠. 아. 저. 씨!"
"흥. 시끄럽다, 꼬맹아."

김만우는 귀찮은 표정을 하고,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후벼 팠다.

그가 귀를 후빈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먼 곳에서 계속 반복되는 비명 탓이다.

세영이 몇 개인가 항아리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으아악-!

또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번이나 들려왔던 비명이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제법 가까이서 들려온 것이다.


"아무래도 위험한데? 점점 가까워 지는  같고."
"모두 전투 준비하자. 드디어 마족 상대하는 걸까?"
"그런데...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가 이 항아리들 죄다 깨지기라도 하면..."


 단단한 외 뿔 마수의 덩굴에도 멀쩡했던 항아리이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걱정이었다.
확인한 것만 해도  개의 항아리에서 가득 찬 마나 허브 티를 발견했다.
돈이 돈이니 만큼  조심하게 된 것이다.

"형. 그거 인벤에  들어가요?"
"맞아.  마나수 항아리도 들고 다니셨잖아요?"
"아! 그렇지. 좋아 한번 넣어보자."

다행이 항아리는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눈앞의 항아리의 개수는  30개.
빈 항아리 하나를 제외하고 스물 아홉 개의 항아리를 집어 넣어야 했다.
공간이 부족한 게 당연했다.
결국 노랑나비의 인벤토리 공간까지 빌려야 했을 정도다..

"그래도 어떻게 다 집어넣었어요. 오빠. 헤헤."
"그래. 고마워."
"뭘 요. 이걸로 포션 만들어서 다 저희 나눠주시고 하시는데, 이 정도는 거들어야죠."
"야, 니들 적당히 해라.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거 같으니까."


밖의 사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비명에 이어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 때문이다.
아까 전 들었던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키메라 실험체가 들어있던 캡슐의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흡사했다.


**



아직 지지 않았다.
아직 누구도 죽지 않았으니까, 패배를 선언하기란 너무 이른 시간이다.
심각한 데미지를 입은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승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승리는 절대 불가능.
마음은 이미 꺾인 지 오래다.
이들에게 희망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으악... 제발, 그만..."


거대한 녹빛의 물 덩어리는 BI 길드원들을 삼켰다가 다시 뱉어내길 반복했다..
이미 열 두  모두, 한번 이상 놈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상황.

"도망쳐야..."

마나 포션은 거의 바닥난 지 오래다.
애초부터 그리 많은 양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하다.


놈은 누군가 마나를 회복하면 덮쳤고, 회복하면 다시 삼켰다.
마치 방전된 배터리를 갈아 끼우듯, BI 길드원들을 농락했다.

"어떻게... 든... 도망칩시다..."


마나가 바닥나며, 어느 누구갈증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켁, 켁.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하라는 거야!"

성을 내봐도 소용 없었다.

"쿨럭. 저는 몇 개 남아있긴 하지만, 놈만 좋은 일 시키는 것이니... 켁."

BI기츠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개수의 마나 포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클래스가 힐 담당인 클래릭 클래스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포션을 마실 엄두가 나지 안았다.
그랬다가는 또 다시 놈이 덮쳐 올 테니까.


그때 조용히 있던 길드 유일의 트레퍼(함정 사냥꾼)가 말을 꺼냈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길드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아끼던 마나 포션까지 마셨다.

"저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놈을 상대로 승리하기 위한 작전은 아니었고, 단순히 도망치기 위한 시간을 벌 목적이었다.

"그게... 뭔... 가."

모두는 말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서도, 한껏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다.
그만큼 마나 부족으로 인한 갈증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목구멍이 건조해, 소리를 내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남은마나 포션을 입구 반대쪽으로 몽땅 던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놈이라면 분명 반응할 겁니다."

저 슬라임 녀석을 마나 포션으로 유인해, 그 틈을 타 자신들은 출구를 향해 도망치자는 이야기였다.
놈의 특성을 파악한 제법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길드원 모두는 동의했고, 마지막으로 부길마빔의 허락이 떨어졌다.


마법사 일부와 힐러들은 인벤토리에 남아있던 포션을 각자 꺼내 들었다.
그리고 트레퍼의 신호를 기다렸다.


"지금!!"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최하급 마나 포션 병은, 바닥과 부딪치며 산산이 깨져 버렸다.
희미한 푸른 빛이 감도는 투명한 액체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하지만 매우 적은 양이었다.


촤악-!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슬라임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 같은 움직임.

"지금이다! 모두 튀어!"


앞다투어 달렸다.
서둘러 출구로 빠져나가야만 했다.
조금만 더.
몇 걸음이면 갈림길.
오른쪽으로 돌아 달리면 입구가 보일 것이다.


"으악!!"


하지만 이 미친 슬라임인지 히부린인지 하는 놈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흡수한마나의 양 만큼, 더 빠르게 진화라도 하는 모양이다.
놈은 길드원들보다 빠르게 앞질러가, 출구를 향하는 방향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이럴 수가... 유일한 퇴로가..."

부사장 앞에서 차마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죽고 24시간 페널티를 이용해 하루 쉬고 싶은 마음들 뿐이었다.

"어쩔  없어. 다들 반대 통로를 향해 달려. 먼저 달려가서 문을 닫아버리자고!"


결국 이들이 향한 건, 세영의 파티가 향한 그 캡슐이 놓여있던방이다.
모든 힘을 쥐어 짜내며 달렸다.
제발 먼저 달려가 문을 닫고, 히부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기만 간절히 소망 했다.
하지만 소망이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소망인 것이다.


콰앙-!


"으아악! 제발 저리 가란 말이야!!"

문을 어떤 방식으로 닫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놈은 홍수처럼 덮쳐왔다.
이제 모두는 가지고 있는 마나 포션이  하나 없었다.
또, 마나가 1이라도 회복된 길드원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다.
유일하게 마나 포션을 마셨던 길드의 트레퍼는 지금 놈의  속에 있으니까.



*

히부린의 비밀 창고를 나선 일행은, 캡슐이 놓여있던 방까지 되돌아왔다.
그곳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수상한 모양의 액체 덩어리는 덤이다.


"쿨럭, 너, 너희는..."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데다, 표정 또한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것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보나 마나 위급한 상황에, 무슨 그런 질문을 느긋하게하느냐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질문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리 심각한 상황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녹색의 덩어리는 몰캉몰캉해 보였지만, 전혀 미동도 없었다.
깨져 버린 캡슐 탓에 바닥을 뒹구는 키메라인지 뭔지 모를 존재 역시, 마네킹처럼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다... 당신은... 알파?"

그때 BI기츠가알파의 모습을 알아봤다.


"기츠님? 여기서 뭐하시는 거에요?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길드원들은 세영의 무신경한 반응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갈증 때문에 입을 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오직 기츠가 한 마디를 꺼냈다.

'마나... 포션 좀..."

세영은 파티원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며, 눈빛을 맞췄다.
다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고블린 족장 잡을 때, 힐로 도움 받은 기억도 있으니까요. 그냥 드리는 거에요."


세영은 최하급 마나 포션을 건넸다.
물론 기츠에게만 주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가장 먼저 그에게 줬을 뿐이었고, 이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건네줄 생각이었다.

꿀꺽 꿀꺽.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듯이 숨도  쉬고 급히 마셔 대는 기츠.
그가 내뱉은 첫 마디는 경고였다.

"조, 조심하세요. 놈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네?  가요?"
"저, 슬라임입니다. 히부린이라는 네임드 몬스터입니다."


사실 설명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영과 파티원들에게 곧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으니까.

[히부린이 마나의 향기를 맡고 행동을 시작합니다.]

놈은 왜 인지 잠시 멈춰 있다가,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히부린?"
"저 슬라임이 마족이라고요?"
"네? 마족? 아닙니다. 놈은 아무리 봐도 슬라임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아는 히부린은 마족 인데..."

BI기츠와 세영의 대화는 무언가 어긋나 있었다.

"그렇지만 오빠. 메시지에는 분명 히부린이라고 떴어요."
"이상하네."
"뭐... 강력한 마족에 비하면 야, 슬라임이 더 약할 거 같으니까... 사냥하기에는 훨씬 쉽겠네요. 후딱 처리하죠."

파티원들은 전투태세를 갖췄다.
세영도 마찬가지다.


"기츠님 미안해요. 다른 파티원들도 마나가 바닥나신  같은데, 놈을 처리하고 드릴게요."
"아니... 그보다 놈은 너무 위험합니다. 놈은 마나를 흡수하는데..."

그런 설명만 가지고, 상황을 모두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직접 경험하는 수밖에.

가장 먼저 놈에게 삼켜진 건 가장 앞서 나갔던 핑쿠햄스터였다.

"그것 보십시오! 놈은 저런 식으로 물리 공격도 마법 공격도 안 통하는 데다가, 마나를 빨아들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뒤에는 더 빨라지고 거대해 집니다!"


그제서야 조금 심각함을 느꼈다.

"그럼 핑쿠햄스터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마나를 모조리 빨리고 나면, 놈이 뱉어  겁니다."
"생명은 ?"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였다.
물리 공격은 물론, 레드문의 마법 역시 전혀 통하지 않았다.
화염 탄은 놈의 몸을 파고들며 속도가 느려지더니, 아무런 폭발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커억, 컥."


겨우 숨을 쉬게 된 핑쿠햄스터.

세영은 곧바로 그를 향해 탄환을 발사했다.

"아... 알파님?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아군에게..."

기츠는 놀랐지만, 파티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저 탄환은 그런 게 아니란 걸.

[최하급 마나 회복 탄]


힐링 포션처럼, 마나 포션 역시 탄환으로 만들어 두었다.
그동안은 체력 회복이 급했지, 마나가 부족해 곤란한 상황은 없었기 때문에 이제서 처음 사용한 거였다.

"고마워요. 형!"


순식간에 벌떡 일어난 핑쿠 햄스터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기츠는 그 모습에까무러치게 놀랐다.


"지... 지금은?"
"아, 이런 건 비밀이니까, 너무 떠들고 다니지는 말아 주세요."
"아... 네."


이미 BI 길드의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지만, 일단 그런 말을 건네두었다.

파티원의 체력과 마나를 원거리에서 회복 시켜주는 능력.
힐러? 세영의 능력은 클래릭 클래스인 기츠의 능력을 이미 아득히 넘어섰다.
다만,  번 사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전 준비와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히부린이라 불리는 저 슬라임을 상대로, 이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오히려마나가 회복된 핑쿠햄스터를 또다시 삼키려 할 것이다.

"엄청난 능력에 놀랐습니다 만,  슬라임은 쉬지 않고 마나를 탐식 합니다. 이대로는 방법이..."

세영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생기 흡수 스킬 한 방이면 끝장날 거 같은데요?"


눈을 부릅뜨며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인지를 가늠하려는 BI기츠.
그때 뒤에서 귀를 후비던 김만우가 나섰다.

"야. 너 그거 아까 썼잖아! 24시간 쿨 타임 잊었어?"
"맞아요, 오빠. 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진짜 아깝다.  놈을 먼저 사냥했어야 하는데. 항아리 방이야 다음에 가도 되고..."


아이들도 거들었다.
모두 아쉬운 모양인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세영의 표정은 그대로 였다.


"저기... 모두 잊고 있는 거 같은데..."


생기 흡수 스킬은 원래 세영의 것이 아니다.
애초에 전설 반지를 착용하지 않으면 사용 자체가 불가능 했다.

"생기 흡수 스킬을 쓸 수 있는 건, 나 뿐만 아니잖아?"

세영은 그런 말을 하더니, 부서진 캡슐 아래 널브러진 하나의 키메라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호문클루스가 들어있는 플라스크였다.


"연성!"


[합성종 no. e-222 '베스투'의 신체를 호문클루스 누라라의 그릇으로 사용합니다. 연성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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