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81화. 잊혀진 세계
"그대. 나를... 또다시... 불렀는가."
스킬 레벨의 상승덕분인지, 누라라는 제법 말을 잘하게 되었다.
조금 어눌했지만...
그보다 그녀의 몸매는 아직도 야릇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중요 부위를 가려주는 나뭇잎 개수나 크기는, 스킬 레벨이 오른다고 늘어나지도, 커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누라라. 저기 보이는 슬라임에게 생기 흡수를 사용할 수 있겠어?"
호문클루스 누라라는 지난 전투에서 생기 흡수를 두 번이나 사용했었다.
즉 24시간이라는 쿨 타임은, 그녀에겐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우습구나... 그걸 사용하기 위해... 나에게 위기... 찾아와야 하니라..."
"뭐?"
세영은 당황했다.
예상과 다른 대답.
그녀는 체력이 30% 이하가 되지 않으면 생기흡수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몹시 놀란 상태로 지켜보던 BI기츠가 말했다.
"알파님! 대체 이건..."
"비밀이니까 알려고 하지 마십쇼."
궁금해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던 그를 김만우가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이미 패배한 거 아닙니까? 그럼 조용히 지켜보세요. 사실 눈을 감고 있으라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김만우는 짜증이 났다.
그동안 잘 숨겨왔던 정보가, 고스란히 새어 나가게 생겼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자신의 웹튜브에 올려 돈이라도 긁어 모으는 건데.
'하긴, 언제까지 꽁꽁 숨어서 사냥할 수도 없고, 결국은 들킬거였어...'
방송을 하루라도 더 빨리 서둘러 시작해야겠다 생각한 김만우였다.
세영이 가진 특이한 스킬이나 아이템들이 이미 공개된 뒤라면, 방송을 통해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낼 수 없다.
새롭고, 특이하고, 희귀한 정보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없으리라.
'역시, 하루 빨리 콕핏을 사야 하는데... '
김만우가 돈 벌궁리를 할 때, 누라라와 함께 세영이 다가왔다.
"아, 곤란하게 됐어요. 생기 흡수는 30% 이하로 체력이 줄어들어야만 사용 가능한 것 같아요."
"그럼 공격하면 그만이지.니 화염 탄으로 공격해."
"네? 어떻게 그래요. 같은 편인데."
둘의 대화를 지켜보는 BI기츠는 거의 헐벗은 누라라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들릴까 봐 주의해야 할 정도였다.
멀리서 목이 타 들어가는 BI 길드원들 역시,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들과는 상관없이, 둘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음... 저 캡슐 안에 있는 놈. 한 마리만 깨워도 될까요? 처음에는 누라라에게 상대시키다가, 체력이 30% 아래로 내려가 스킬 사용 가능해지면, 저희와 교대하는 식으로."
"꼭,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해야 하겠냐? 니가 정 공격 못 하겠으면, 다른 아이들에게 시켜도 되잖아?"
하지만 세영은 고집을 부렸다.
정말 자신의 펫이라도 되는 양, 누라라를 감싸고 돌았다.
"오빠. 설마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죠?"
노랑나비는 그런 세영을 눈을 흘기며 바라봤다.
매우 차가운 눈빛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마음?"
"아니에요. 흥."
나비는 콧방귀를 뀌며 세영과 누라라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누라라와 그녀의 팔이 서로 부딪쳤는데, 아무래도 일부러그런 모양이었다.
세영은 그런 그녀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키메라를 깨우려 가까이 있던 캡슐에 다가갔다.
그리고 슬쩍 마나를 흘려 보냈다.
'이거, 진공 청소기가 따로 없네.'
캡슐은 놀라운 속도로 마나를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갈증이 찾아와, 급히 마나 포션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등장 메시지는 곧바로 나타났다.
[합성종 no. e-216 '코르민'이 등장했습니다.]
콰자장-!
캡슐이 부숴졌다.
키메라는 하나같이 멍청한 건지, 아니면 캡슐에 처음부터 문을 만들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라라. 부탁해. 놈을 상대하다가, 체력이 30% 아래로 내려가면 저기 보이는 저 슬라임에게 가서 생기 흡수를 해 줘."
"간단... 일이다..."
세영은 자신을 지켜보며 경악하는 BI 길드원의 표정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대로 일을 척척 진행해 나갔다.
*
"커억..."
햄스터의 목에서 듣기 힘든 소리가 들렸다.
입과 목구멍이 심하게 건조해, 목소리조차 내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벌써 다섯 번이나 놈에게 삼켜졌었다.
이런 곤욕스러운 일을 도맡아 해야 하다니, 기사 클래스를 선택한 결정이처음으로 후회될 지경이었다.
마나는 세영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회복됐다.
어차피 이 마나는, 다시 슬라임에게 빼앗길 것이기 때문에, 가득 회복시킬 필요는없었다.
"형... 저,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요?"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에 세영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세영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누라라는 이전보다 체력과 방어력이 월등해져 있었다.
이유는 너무 당연했다.
40레벨 근처의 정예 고블린에서, 50레벨의 네임드 키메라로.
호문클루스 누라라의 영혼을 담아낼 그릇의 포텐셜이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직... 생각보다 누라라가오래 버티네. 공격도 하지 말고 맞기만 하라 했는데도..."
"빨리 좀 부탁드려요..."
햄스터는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누라라가 키메라를 공격해 데미지를 많이 누적시키면, 나중에 어그로를 되찾아 오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공격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놈의 공격을 그냥 당하기만 하라고 명령했다.
키메라로부터 공격당하며 야릇한 비명을 지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어 너무 다행(?)이었다.
"야. 가만이 서서 몬스터에게 처 맞으라고 하는 거나, 니가 직접 화염 탄으로 체력을 소모시키는 거나, 대체 뭐가 다른 거야?"
김만우의 질문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일.
번복은 없다.
이미 누라라는 한참 키메라에게 쳐 맞고 있었으니까.
슬라임은 핑쿠햄스터 혼자, 키메라는 누라라 혼자서 상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반면, 나머지 파티원은 매우 여유로웠다.
"이거, 나는 한가하네."
"아저씨는 원래 한가하시잖아요? 가끔 피리만 불고. 근데, 지팡이는 언제 팔아요?"
김만우는 나비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구겼다가, 지팡이 얘기에 무언가 생각이 난 모양이다.
"아! 맞다. 지팡이 올려야 하는데 깜빡했네."
그소릴 들은 노랑나비는 깜짝 놀랐다.
"아저씨? 욕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이백만 명 앞에서 한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해요?"
"아닌데? 대족장 지팡이는 아까 경매장에 올렸는데? 내가 깜빡한 건, 피히히 지팡이라고, 이 꼬맹아!"
"흥. 헷갈리게 말해 놓고선."
나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파티는 한가로웠다.
세영 역시도 간간이 햄스터에게 마나 회복 탄을 쏠 뿐이니, 여유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BI 길드의 모두를 향해서도 한 발 씩 발사해 주었다.
"이, 이럴 수가..."
"마나가 멋대로?"
"말도 안 돼. 쇠뇌로 이런 게 가능하다니."
눈으로 멀리서 지켜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있다.
탄환이 자신의 몸을 관통한 것처럼 느꼈는데, 전혀 데미지도 고통도 없었다.
거기에 마나의 회복이라는 놀라운 효과.
회복량 역시 포션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모두 갈증이 해소된 기쁨보다도, 세영의 말도 안되는 능력에 몹시 놀란 기색이었다.
마나를 회복하고 극심한 갈증으로부터 벗어난 부길마 빔이 다가왔다.
그리고 세영에게 한 마디 했다.
"고맙습니다. 저는 BI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 빔이라고 합니다. 블루 아이템 사의 부사장 역시 맡고 있습니다. 저희직원인 기츠의 말로는 당신이 알파라고 하시던데,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요?"
"제가 알기로 알파는 연금술사인 게..."
세영은 눈을 꿈벅꿈벅 하고 그를 쳐다봤다.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빔은 제법 눈치가 빠른 사람인지 세영의 표정에 금세 눈치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가 선을 넘었군요. 아무튼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일은 꼭 답례 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세영은 그가 허리를 90도 굽혀 인사해 오는 통에, 자신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캐릭터는 중년의 기사.
회사의 부사장이라고 하니, 실제 나이도 캐릭터의 외모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른이 인사하는데, 가만히 서있을 수는 없었다.
"중요한 정보일 테니,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원래의 장소... 고블린 숲으로 돌아갈 때까지, 저희 길드가 합류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영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김만우를 돌아봤다.
김만우는 그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 같아 조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조금 곤란하네요. 전투를 지켜보시는 것 만으로도, 많은 정보 수집이 가능한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별거 없습니다. 깔끔하게 정보 누설 금지 계약서 하나만 써 주십쇼. 여기 계신 모든 분 각각 한 장. 그리고 블루 아이템사 전체를 대표해서 추가로 한 장. 어길 시 보상금은 50억."
"흠... 뭐, 좋습니다. 저희가 어디 가서 여러분에 대해 떠벌릴 생각은 없으니까."
50억에도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걸 보고, 김만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기업의 부사장 쯤 되니,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계약을 어길 마음 자체가 없기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사실, 빔의 생각은 달랐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대체 연금술사라던 그의 진짜 클래스는 무엇인지.
아까 보았던 수상한 스킬들은 또 무엇인지.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세영과 일행들의 전투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
모든 게 순조로웠다.
지금 계속되는 전투를 비롯한 상황들은, 그 어떤 것도 위기라고 말 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 잊혀진 세계에 도착한 뒤, 음침한 분위기에 조금 싫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투는 매우 안정적이었고, 위기 다운 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실망일 정도였다.
고대마족이라는 이름이 울고 갈 것이다.
히부린이 저따위 슬라임일 줄이야.
물론, 물리 공격이고 마법이고 안 통하는 난감한 상황이지만, 놈은 마나를빼앗아 갈 뿐 전혀 데미지를 주지는 않았다.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뱀은 어디 있는 거지...'
한 가지 걱정거리는 있었다.
뱀은 커녕, 그녀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급해졌다.
하품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누라라. 아직이야?"
"이제... 되었느니라..."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이제 순식간에 히부린을 처치하고, 뱀을 찾으러 가자.
"햄스터. 위치 바꾸자. 키메라 어그로 확보해 줘."
세영은마나 포션을 온몸에 뿌렸다.
일단은 자신이 슬라임에게 먹힐 생각이었다.
그동안 햄스터가 어그로를 확보, 다른 파티원들과키메라 코르민을 상대할 것이다.
세영의 옷은 마나 포션으로 흠뻑 젖어있다.
뿌린 양이 고작 한두 병이 아니었다.
축축한 옷에서 흘러 내리는 포션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놈을 향해 돌진했다.
"바통 터치다!"
앞에 서 있던 햄스터의 옆을 지나치며 슬라임을 향해 달렸다.
히부린이라는 슬라임은 그런 세영을 지켜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액체 덩어리의 표면에 잔 물결이 일었다.
그렇게도 세영의 몸에서 나는 마나의 향기에 끌린 것일까?
마나를 얼마나 흡수했는지 웬만한 대형 버스 크기 이상으로 거대해진 놈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세영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삼켜진 탓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움직여 보지만, 소용없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으윽... 정말, 마나가 쭉쭉 빨리네.누라라빨리 좀 부탁해.'
고통스러웠다.
마나를 빨리는 게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다.
숨을 쉴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 탓인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햄스터야. 형이 미안하다.'
이런 걸 여덟 번이나 참아냈다니.
그에게는 정말이지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라라! 제발, 빨리 좀!!'
견디기 힘들어 찾게 된 건 누라라 뿐이었다.
조금만 더 서둘러주기를 간곡히 애원하는 마음이었다.
설마 그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일까?
[호문클루스 누라라가 스킬 '생기 흡수'를 사용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거대한 히부린의 육체는 그녀의 힘으로 서서히 줄어들었다.
마치 수분이 증발하는 것처럼.
제법 시간이 필요했는지, 세영은 얼마간 놈의 몸 안에서 더 버텨내야 했다.
"더... 더..."
놈은 끝까지 더 달라는 소리만 했다.
하지만 차츰 차츰 줄어가는 부피.
놈의 마지막이 머지않았다.
"허억, 헉."
겨우 빠져나왔다.
공기가 이리도 달콤할 수가 없다.
놈의 크기는 이제 세영의 캐릭터를 품을 수 없을 만큼 작게 줄어 있었다.
"고마워. 누라라."
고마움을 표시하며 바라본 누라라.
그런데 그녀가 조금 이상했다.
온 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 피부가 징그럽게 볼록 튀어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녀의 몸 속에 들어있는 무언가가 밖으로 나오려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누라라?"
세영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오른 팔을 슬라임에 대고, 끝 없이 생기를 흡수 중이었다.
히부린은 이제 사람의 머리 크기 까지 줄어들었고, 점점 더 작아지더니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이와 동시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레벨이 상승하셨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셨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셨습니다.]
[히부린의 영혼을 담아 내던 그릇이 소멸하였습니다. 새로운 그릇이나 호문클루스용 플라스크가 필요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준비하지 못하면, 영혼은 소멸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