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87화. 거울 뒷면의 심연
대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가 소지한 고대 마족의 주머니 안에는, 최하급 마나 포션보다 회복량이 두 배나 되는 하급 마나 포션이 남아 있었다.
그걸 꺼내 마신다면, 한 시간은 더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그 포션을 전부 소모하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이다.
말도 안 되는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반면 좋은 점도 있었다.
커다란 버섯들로 가로 막혀 답답했던 시야가, 이제는 시원하게 뻥- 뚫려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은 이곳이 상상 이상으로넓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천 배 거대해진 자신이 이렇게 느끼는 것이니, 어쩌면 지구의 크기만큼 넓은지도 모를 일이다.
거울 속의 세계라 하기에는 상상을 초월한 크기였다.
뒤이어 눈에 들어온 건, 지면을 뒤덮은 끝이 보이지 않는 버섯들의 향연.
'끝도 없네, 온통 버섯 뿐인가?'
세영은 서둘러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일단은 이 버섯을 채집하는 것.
그 거대하던 버섯이 이제는 자신의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매우 작았다.
맨손으로 간단히 채집할 수 있는 크기다.
[채집에 성공하셨습니다.]
'됐다!'
채집은 제법 간단하게 성공했다.
희귀 등급의 아이템.
지금 세영의 채집 실력이면, 희귀 아이템 정도야 시간만 주워진다면 그 어떤 것도 채집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물론 집채만 한 크기의 버섯은 제외다.
[페어리의 뚱보 버섯]
- 아직은 확인할 수 없는 정보입니다.
- 복용 시 신체가 거대해 집니다. 하나의 버섯을 먹었을 경우 지속 시간은 1분 이며, 다수의 버섯을 먹게 될 경우 최대 5분까지 그 유효 시간이 증가합니다.
페어리의 날개 가루 버섯과 함께 복용 시, 효과가 대폭 증가합니다.
- 타인에게 양도나 거래가 불가능합니다.
뚱보 버섯이라니.
참, 적당한 네이밍이 아닐 수 없다.
세영은 서둘러 여러 개의 버섯을 추가로 채집해 먹었다.
거대화를 유지하는 시간에, 제약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아직은 다시 작아져서는 안 됐다.
마나가 다섯 배나 빠르게 소모하는데도 그런 선택을 한 이유.
그건 간단했다.
뱀의 눈 스킬의 유효 거리가 그의 신체가 커진 것처럼 천 배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거라면 찾을 수 있겠지."
안 그래도 요정 날개가루 버섯의 힘으로, 스킬의 유효 거리가 200미터가넘던 상황이었다.
천 배 증가했으니 200 Km 이상으로 그 범위가 확대된 셈.
이 장소가 지구만큼 거대할 지 모른다고 했으나, 플레이어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 떨어뜨려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영은 일단 뚱보 버섯의 위치를 검색했다.
당연히 그의 시야에 비친 레이더에는 온 사방이 버섯의 위치 표시로 반짝이게 되었다.
'대체 어디까지 버섯인 거야?'
혹여나 버섯이 자라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곳을 향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런 장소가 딱 한 군데 눈에 띄었다.
'저기로 가 보자!'
세영은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달릴 때마다, 발에 치이는 버섯의 포자가 꽃가루처럼 휘날렸다.
그 포자들의 색이 온통 붉은 탓이었는지, 그 모습은 마치 붉은 피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
핑쿠 햄스터가 BI 길드의트래퍼에게 물었다.
"트랩 재료는 몇 개나 남았어요?"
"재료는 아직 많습니다. 마나가 부족할 따름입니다."
BI 길드의 트래퍼는 부길마의 명령에 따라 행동을 시작한 지 오래다.
마법진 주변에 슬라이딩 트랩을 쉴 새 없이 설치하라는 명령이었다.
"이거 받으세요. 저는얼마 안 쓰거든요."
"이것도 드세요."
햄스터에 이어 나비가 자신이 소지한 마나 포션 일부를 건넸다.
트래퍼는 그걸 반갑게 받으며, 한 병을 냉큼 마셨다.
"고맙습니다."
그는 둘의 어린 모습에도깍듯이예의를 차렸다.
트랩의 설치는 매우 간단했다.
다만 마나의 소모가 심각했다.
진짜 트랩을 매설하는 것이 아니라, 스킬에 의한 설치였기 때문이다.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
기사들이 아무리 도발 스킬을 사용해 시선을 빼앗아도, 키메라들은 하나 같이 일정 주기... 약 1분 간격으로 마법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트래퍼의 슬라이딩 트랩이 없었다면, 퀘스트는 진작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대체 뭐야!"
"아무래도 마법진이나 저 거울이, 일정 주기로 놈들의 시선을 끄는 것 같습니다. 도발 스킬을 사용한 것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빔을 비롯한 BI 길드의 기사 셋은, 쿨 마다 도발을 사용해 키메라들을 멀리 유도하기 바빴고, 오직 핑쿠 햄스터만 트래퍼의 옆에 서서 대기했다.
그가 다가오는 적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면, 트래퍼가 슬라이딩 트랩을 설치할 수가 없었으니까.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설치한 트랩이 분명했다.
[호문클루스 바라만이 스킬 '화염구 Lv. 2'를 사용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세영이 남기고 간 바라만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바라만이 사용하는 화염구와 화염의 비 스킬에 누구도 데미지를 입지 않게 되었다.
퀘스트 수락과 동시에 모두 아군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저게 펫이라고? 주인도 없는데 자기가 알아서 공격하는 데다가, 또 저렇게 강하다니... 우리 길드 마법사들보다도 훨씬 강하잖아! 마나 포션도 안 먹고."
체력이 얼마 안 남았던 쿠아만테는 키메라에게 당해버린 지 오래지만, 바라만은 제법 잘 버텨주었다.
이 역시 그릇의 재료가, 네임드 몬스터인 키메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세영이 떠나기 전 내린 명령대로, 바라만은 마법진의 가장 먼 구석에 가 자리를 잡았다.
건물 벽의 바로 아래서,그 벽을 등지고 선 형태다.
그리고 나서 마법진으로 향하는 키메라들을 향해, 스킬을 퍼 붇기 시작했다.
아무리 바라만이 강해졌다고 해도, 모든 키메라의 다굴을 맞으면 금세 죽어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시로도발을 사용하는 기사들과, 매 분마다 거울과 마법진을 향해 달려가는 키메라들 덕분에, 집중 공격을 당하는 일 없이 아직 건재했다.
"얼어붙은 대지!"
"멈추지 않는 우박!"
"화염구!"
키메라를 한 마리라도 줄여나갈 여건이 되지 않자, 마법사들은 한데 모여 단체로 광역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방어가 약한그들로서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키메라의 다굴이라도 맞았다가는 순식간에 죽고 말리라.
바라만과 이들의 체력 차이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었으니, 비교하는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하지만!
키메라들의 시선으로부터 안전하게 공격을 할 수단이 있다면?
"공격 중지! 마법사님들 공격 중지해 주세요!! 다음 타이밍까지 대기해 주세요. 다시 신호 드리겠습니다!!"
김만우의 신호와 함께, 모든 마법사의 마법이 일제히 멈췄다.
지금은 공격을 멈춰야 할 때다.
이 멍청한 키메라들은 아무리 큰 데미지를 입건 기사들의 도발에 당하건 상관없이, 일정 시간이 되면 시선을 곧장 마법진으로 향했다.
김만우는 그 타이밍을 파악해 타이머까지 설정해 가며 신호를 내렸다.
그 신호와 함께 마법사들은 광역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할 타이밍을 잘 잡기만 하면, 어그로가 튈 걱정 없이 안심하고 최대의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세엣... 두울... 하나~ 공격!!"
김만우는 영혼이 아니라 마법사들을 지휘하는 중이었다.
벌써시간은 20분 가까이 지났다.
"이거, 대체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30분이지."
"그 뒤에는? 갑자기 이놈들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었다.
"1분을 더 버틸 때마다 1골드 추가로 준 다잖아!"
"그러다 치료약도 힐링 포션도 바닥나면? 클래릭들 마나 포션도 다 떨어지면?"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버틴다고 해도 놈들을 전부 정리할 수단 없이는, 이 상황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아니, 그 끝은 자신들이 가진 포션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 아마도 그때가 최후가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때 필요한 건 희망이다.
그 사실을 김만우는 알고 있었다.
"다들 조금만 버텨요. 알파가 돌아오면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김만우의 발언은 무책임하고 근거가 부족했지만, 사람들에게 묘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알파? 그가 누구인가.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파티원들은 말 할 것도 없고, BI 길드원들 역시 짧은 시간이었지만 괴물 같은 그의 능력을 지켜봤다.
키메라의 시체를 변형시켜 아군을 만들어 내고, 고가의 포션을 선뜻 나눠 주며, 퀘스트까지 만들어 내는 말도 안 되는그를.
그가 거울에서 나올 때까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뭔가 될 것 같았다.
그가 모두의 구세주가 될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희망 고문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발언을 꺼낸 김만우조차.
**
"허억, 헉."
세영은 달렸다.
한참이나 쉬지 않고 달렸다.
'정말 끝도 없이 온통 버섯 밭이네.'
산도, 바다도, 호수도, 강도,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작은 언덕 하나 없었다.
평평한 대지에, 온통 버섯만이 가득했다.
이러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던 건,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뱀... 조금만 기다려.'
세영은 그녀가 보고 싶었다.
물론 친분이야 있었지만, 그렇게 깊은 정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페어리 뱀은 NPC일 뿐이었으니.
하지만 매번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뱀 덕분에 얻은 스킬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던 가.
그가 게임에 적응하고, 이만큼 돈을 모을 수 있던 건, 모두 첫날 만났던 그녀 덕분이다.
심지어 지금도 그녀가 준 스킬이 없었다면, 이 버섯 투성이의 세계에서 아무것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목표를 잃지 않고 달려가는 중이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저기다!'
레이더에 버섯이 보이지 않던 장소에 도착했다.
세영의 눈에, 드디어 버섯 이외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식물이나 동물 따위가 아니었다.
쿠르르릉-
바람이 불었다.
세영이 입고 있던 옷 자락과 머리칼이 심하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회색을 넘어선 매우 새까만 구름이 하늘 위에 모여있었고, 무시무시하게 성을 내고 있었다.
벼락이 내려치고, 천둥이 울렸다.
그 구름 바로 아래, 거대한 회오리가 불고 있었다.
자리를 고정한 채 전혀 이동하지 않는 그 바람은,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가까이 오지 말라 외치는 듯 세차게 몰아쳤다.
'거대화 하지 않았다면, 저 바람에 날려갔을지도 모르겠네.'
세영은바람의 중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날카로운 바람이 옷깃을베었다.
여기저기 날카롭게 베였다.
중심에 가까워질 수록 더욱 강렬했다.
"으윽..."
체력과 방어력의 도움으로 멀쩡하던 피부에 날카롭게 베인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참았다.
그에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더는 없었으니까.
[상태 이상 '출혈' 1단계에 빠졌습니다.]
[상태 이상 '출혈' 2단계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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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메시지가 시끄럽게 울려 댈 때,
갑자기 불어오던 바람이 멎었다.
중심부에 들어온 모양이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장소.
작은 조각상 하나가 세영의 두 눈에 들어왔다.
"이런 장소에 조각상?"
[멈춰버린 시간의 조각을 발견하셨습니다.]
세영은 조각상을 자세히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지나치게 크기가 작았다.
페어리들 보다 더 작게 느껴졌고, 손으로 들어 확인 해 보기에는 부서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하지?'
방법이 없었다.
결국 1분 가까이를 기다려야 했다.
버섯의 효과로 거대해진 몸이,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오기만 기다려야 했다.
[ 32 : 44 ]
세영은 기다리며, 페어리 구출 퀘스트의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거울 안으로 들어온 지, 30분 가까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조각상은 그렇다 치고, 뱀은 어디 있는 거지?'
그런 걱정중일 때.
그의 몸이 다시, 원래의 모습처럼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 얼굴은...'
원래의 크기로 되돌아온 그는, 자신보다 몸보다 약간 큰 크기의 조각상을 바라봤다.
여성의 조각상이었다.
하나가 아닌 둘.
왜 인지 두 여성의 얼굴이 무척 서로 닮아있었다.
게다가 익숙했다.
'어디서 봤더라... 응? 저 귀는?"
페어리와 닮은 귀.
저 얼굴은 분명, 아까 전 히부린의 방에서 보았던 액자 속의 여성이 틀림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