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88화. 거울 뒷면의 심연
마치 살아있는 듯이 생동감 넘치는 두 여성의 조각.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라라와도비교가 안 되는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 심지어 똑 닮아있다.
마치쌍둥이처럼.
하지만 확연히 다른 점이 하나 눈에 띄었다.
'날개?'
조각 된 두 여성 중 한 명의 등에만 날개가 달려 있었다.
새와 같은 조류의 날개가 아니다.
세영이 그동안 익히 봐 왔던, 투명하게 빛나는 페어리의 날개였다.
"우와..."
그 얇고 투명하게 비치는 날개를 어찌 이리 섬세하게 표현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금방 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조각은 이상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얼굴이 거의 똑같음에도, 두 여성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날개가 있는 여성은 매우 분노한 표정으로 오른손에 쥔 창 날을 날개가 없는 여성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고 있다.
반면 자신의 심장을 찔러오는데도, 날개 없는 여성은 환희에 찬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이 날개가 있는 여자의 왼손과 하나로 연결돼있는 기이한 모습.
'둘은 원수인가? 쌍둥이가 아닌 거야? 팔은 왜 붙어있지?"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날개가 있는 여성은 페어리가 분명해 보이는데, 인간인 자신보다도 덩치가 컸다.
물론 이건 조각이니까 만든 사람이 실제보다 크게 만든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럼 날개가 없는 여성은 왜 날개가 없는 것일까?
그녀는 날개를 잃은 페어리인 것일까?
페어리가 아닌 인간이라면, 왜 둘의 체형과 얼굴이 저리도 닮은 것일까?
'저렇게 거대한 페어리가... 설마?'
세영은 바람이 몰아 치는저 너머에 수 없이 존재하는, 거대한 버섯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버섯을 페어리가 먹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저 조각상의 두인물이 실재하는... 혹은 했었던 존재라는 게 돼버린다.
세영은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흠... 그런데 이 조각은 대체 뭐로 만든 거지? 아니야... 그보다 애초에 왜 이런 장소에 조각을 만든 걸까?'
그는 조각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조각의 재질은 돌도, 나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금속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뱀의 눈 스킬을 통해 세상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인가 싶어, 촉감을 느끼려 조각을 향해 무작정 손을 뻗었다.
스윽-
그의 손끝이날개가 없는 여성의 어깨에 닿는 순간이었다.
[고대 마족 '히부린'을 발견하셨습니다. 퀘스트 정보가 갱신 되었습니다.]
파지지직-!!
갑자기 스파크가 튀었다.
슈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불어 닥친 돌풍이 세영의 온몸을 강타했다.
콰앙!
"으윽!!"
강렬한 충격파.
세영의 몸은 뒤로 한참이나 튕겨 나갔다.
생명의 지장은 없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몹시 당황했다.
찌릿찌릿한 전류의 감각이 남아있는 손이 몹시 저렸고, 돌풍에 베이기라도 한 탓인지, 볼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다행히 회오리바람의 밖으로 까지 튕겨 나가진 않았다.
그랬다가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겼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몸은, 회오리 바람의 중심인 이곳에 들어올 당시보다 천 분의 일로 작아져 있으니까.
"뭐야, 대체... 저게 히부린이라고?"
세영은 급히 포션을 꺼내 마시며 조각상이 있던 장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각상이 놓여있는 주변의 바닥이 온통 빛에 휩싸여 있었다.
거울을 발견했을 때처럼, 마법진이 들어 난 것이다.
세영은 급히 시스템 알람을 다시 확인하고, 퀘스트 창을 열었다.
[***퀘스트 : 위대한 선구자 히부린]
- 당신은 드디어 히부린을 발견하셨습니다. 하지만 히부린은 현재 페어리의 마법에 의해 봉인된 상태입니다. 서둘러 바닥의 마법진을 파괴하세요. 그녀를 기나긴 봉인으로부터 해제해야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분류 : 클래스 전용 퀘스트 (연금술 발사자 Lv. 50 이상)
-난이도 : -
-제한 시간 : 29분 18초
-보상 : 연금술 발사자 전용 ????
-목표 4단계 : 마법진을 파괴해 히부린의 봉인을 해제하라.
놀라웠다.
퀘스트 설명의 '그'라 지칭 되던 부분은 '그녀'로 변경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 조각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봉인된 히부린 이었다.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런데 그럼 저 페어리는 누구지?'
세영은 날개가 없는 쪽이 히부린일 거라 짐작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날개가 있는 쪽은 누구인지, 그것이 무척 궁금해졌다.
페어리가 분명해 보이는 그녀는 뱀과도 무척 닮은 외모였지만, 결코 뱀은 아닐 것이다.
머리 길이도 다르고, 무엇보다 덩치가...
그런데 최종 단계로 접어든 퀘스트에서 이상한 점이 있었다.
[ 29 : 15 ], [ 29 : 15 ]
페어리 뱀을 구출하는 퀘스트와, 마법진을 파괴하고 히부린의 봉인을 해제 하라는 퀘스트.
두퀘스트의 제한 시간을 알리는 카운트가, 똑같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뭐야?'
세영은 주위를 둘러봤다.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마법진과, 그 중앙에 놓여진 두 여성의 조각상.
페어리 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배엠~! 뱀, 여기 있어~?"
크게 소리 내 불러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뱀의 눈 스킬을 사용해, 혹시 요정의 날개 가루 버섯이라도 어딘가 자라났는지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 동시에 시간이 흐르는 거지... 히부린과 뱀이 무슨 관련이 있나?'
마법진을 파괴하면, 분명 히부린이 깨어날 것이다.
그것부터 세영은 고민이었다.
마족의 종자인 쿠아만테가 그 정도로 강했으니, 진짜 마족인 히부린은 훨씬 더 강력할 것이다.
자신의 신규 스킬, 혹은 새로운 무기를 얻을 욕심으로, 히부린을 마음대로 깨워도 되는 건지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나는 마족과 계약한 상태니까 죽이지 않겠지만...'
깨어난 히부린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전투는 커녕 손 한번 재대로 못 써보고 당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바람에 밖에서 목숨을 걸고 거울을 지켜주던 동료들이 죽게 된다면, 그들에게 그것보다 미안한 일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게임이니, 결국은 레벨이 오르고 더 좋은아이템을 얻어서 언젠가 처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민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저 마법진을 파괴해야만 뱀을 구할 수 있는 거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세영은 망설일 생각이 없었다.
단지 확신이 필요할 뿐이다.
그녀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
확실하게 그녀를 확보하고, 그 뒤에 최선을 다해서 히부린에게서 파티원들을 지키면 그만 이다.
그러다 누가 죽게 되면 무척 미안한 거야 당연하겠지만, 그게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니까.
24시간 접속 불가 페널티를 받는 만큼, 다음에 더 좋은 아이템으로 보답하고 사과하면 모두 흔쾌히 받아줄 것이다.
그리고 동료들을 히부린으로부터 안전히 지켜낼 방법 역시, 한 가지 생각해 둔 게 있었다.
'하지만 뱀은...'
뱀을 지금 구하지 못하면, 아마 영원히 볼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존재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릴 확률이 높았다.
이 프로젝트 클라우드라는 우주에서, 판게아 행성이라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그녀는 오직 이 가상 세계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확신을 얻을 만 한 증거가필요했다.
하지만 세영에겐 시간이 없었다.
[ 28 : 53 ]
아직 그가 죽지 않았다는 건, 밖의 동료들이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위해 희생해 주는 덕분이다.
28분 남은 퀘스트의 제한 시간을 모두 소모할 때까지, 더 시간을 끄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 다운 발언.
세영은 마법진 위에 발을 올렸다.
손바닥을 마법진에 가져가며 허리를 숙였다.
아마 봉인을 해제하던 것처럼 마나를 흘려보내면 머지않아 이 마법진은 파괴되리라.
'제발, 뱀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 하며 마나를 흘려보내려 던 찰나.
<안돼! 그만둬!>
익숙한 목소리.
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세영의 머릿속에서 애달프게 메아리쳤다.
"뱀? 뱀, 어디 있어?"
더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지? 갑자기?'
마법 같은 일이었다.
마치 누군가 몰래 촬영한 것처럼, 뱀의 모습이 눈앞에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영은 그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더욱 선명하게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
뱀은 하늘을 날 수 있다.
날개를 가진 페어리이니 당연한 소리다.
그런 그녀라면, 히부린이 만든 키메라들이 득실거리는 건물에 굳이 진입할 필요가 없었다.
도넛 모양의 건물 위를 뛰어넘어, 그 중앙에 있던 페어리의 차원 거울을 간단히 발견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분명 페어리의 날개 가루 버섯은 건물의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세영은 거울의 위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는 소리는 뱀역시건물의 안을 배회했다는 소리가 된다.
그녀 이외의 또 다른 페어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세영이 조용히 눈을 감고 보는 광경에는, 건물 안에 진입한 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건물의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페어리의 능력으로 투명해질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몬스터는 캡슐이나 유리관 안에 들어있었으니, 그녀를 위협하는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뱀.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무언가를 찾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문이 열려있거나 그녀가 통과할 수 있는 통로가 보이면, 하나 하나를 확인해 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수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저건 뭐 하는 거지?'
뱀은 스스로 자신의 날개 가루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되돌아올 길을 표시하기 위해 빵 조각을 떨어뜨리듯.
빵 조각은 새들이 먹어버렸지만, 그녀의 버섯은 세영이 채집했다.
결국 뱀은, 마지막으로 거울의앞에 도착해 양 날개를 힘껏 털었다.
'그래서 거울 근처에 버섯이 많았구나. 그런데 길은 왜 표시한 거지? 날개가 있으니 날아가면 될 텐데... 설마 내가 찾으러 올 줄 알았나?'
날개를 한참 털던 뱀은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버섯을 발견한 그녀는 온몸이 반짝 반짝 빛났다.
이윽고 몸 전체가 점점 크게 변해갔다.
'페어리는 뚱보 버섯을 먹지 않아도 거대해지는구나...'
주변 버섯들의 크기와 비교하면, 뱀은 아직도 작았다.
세영이 보기에는 딱 인간 크기 정도로 커진 것 같았다.
그녀는 버섯의 갓을 요리조리 피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힘찬 날갯짓을 반복하며 세영이 도착한 조각상이 있는 이곳까지 날아왔다.
신기하게도 회오리바람은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도, 그녀만은 피해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부터였다.
이제 세영에게는 영상 뿐만 아니라, 뱀의 생각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다.
그녀가 느꼈을 생생한 감정들 역시 함께 느껴지기 시작했다.
'뱀...'
슬픔과 분노.
두 감정과 함께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전해져 왔다.
"메르바... 당신 여기서 잠들어 있었구나... 우리들의 왕."
뱀의 목소리다.
이 잊혀진 세계에 진입한 순간부터.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이 잊혀진 세계에도착한뒤에야,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떠오른 기억은 그녀가 직접 경험했던 기억이 아니다.
모든 페어리들의 영혼에 각인되어진 기억.
왜 그동안 그 모든 걸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일까.
모든 진실은 오직 거울 뒷면의 심연에 잠들어 있던 그녀만이 알고 있다.
메르바.
모든 페어리들의 여왕.
그녀의 조각상을 발견한 뱀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슬픔의 감정이 세영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졌다.
하지만 무엇을 왜 슬퍼하는지 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날개 달린 쪽이 페어리 퀸 메르바, 아닌 쪽이 히부린 인 건가?'
뱀의 몸은 원래의 크기로 되돌아왔다.
작은 페어리의 몸.
이제 조각상은 그녀보다 몇십 배는 거대한 상태가 되었다.
뱀은 조심스레 날아가 날개가 없는 여성의 조각, 그 가슴에 박혀있는 창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기억의 폭풍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날아들었다.
아니, 마치 세영의 머릿속으로 날아드는 듯했다.
세영은 난생 처음 보는 그 풍광이,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왔다가 머리 뒤로 사라져 버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을 정도다.
'어?'
뒤돌아본 장소에 뜬금없이 건물이 나타나 있었다.
세영의 기억에도 있던건물이다.
파르도의 궁전.
전혀 낡지도, 부서지지도 않은 깨끗하고 새하얀, 아름다운 궁전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네?"
"서둘러 들어 오십시오."
처음 보는 기사가 갑자기 세영을 불렀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급히 기사를 뒤따르려 했다.
그런데 또 다시 화면이 전환되더니, 얼마 전 참여했던 시 의회의 대표자 회의가 있었던 장소. 파르도 궁전의 연회실 안에 모습으로 변했다.
현 시장의 취미인 실용적인 가구들은 사라졌고, 온통 화려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 곳엔 조금 전 까지 보고 있었던 조각상... 아니, 살아있는 페어리가 보였다.
이름은 메르바.
그녀가 모든 페어리들의 여왕이라는 모양이다.
"어서 와. 알파."
"?"
세영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부르는 그녀 때문에, 너무 크게 놀란 나머지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