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9화 〉89화. 거울 뒷면의 심연 (89/122)



〈 89화 〉89화. 거울 뒷면의 심연

"기다리고 있었어. 알파, 당신을."
"네? 저를요?"
"시간이 없어. 내 손을 잡아 주겠어?"

이야기에서나 나왔을 법한 아름다움을 소유한 그녀.
히부린의 방에 걸려있던 액자나, 조금 전까지 지켜보던 조각상의 모습보다도 더욱더 눈부신 미모였다.
그런 그녀가 세영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저...저기, 갑자기 왜?"
"정신 차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뱀을 구출해야 하는 퀘스트의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손은  잡으신 거예요?"
"당신에게 보여주고싶은 게 있어. 나를 따라와 주겠어? 당신의 마음이 거부하면 손을 잡고 있어도  마음대로 데려갈 수 없거든."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상 밝고 쾌활하며 조금 버릇이 없는 장난꾸러기 페어리.
그런 페어리의 여왕답다고 해야 할까.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그녀는 친근하게 반말을 해 왔다.
다만 장난은 전혀 없었다.

그저 또래의 여인처럼 느껴졌다.
인간인 세영보다도 키가 컸으니, 페어리라 생각하기가 좀처럼 쉽지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아, 아닙니다."
"일단, 이걸 봐줄래?"


그녀는 세영의 손을 잡고 연회실의창가로 향했다.
거대한 창문이 열렸다.

"이, 이건..."
"처음 보지? 이건 페어리들의 어머니라 불리는 나무야. 모든 페어리가 이 나무에서 태어나지. 그리고 죽게 되면 이 나무로 그 영혼이 되돌아온다고 해. 인간들은 이 나무를 페어리트리라 불러."


궁전의 바로 옆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자라있었다.
뚱보 버섯이나 누라라의 거목과도 비교가 안되는 무척 거대한 나무.
파르도 섬 전체를 뒤덥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풍성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왜 조금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지?'


"놀란 표정이구나? 이 나무는 인간들은  수 없어. 오직 페어리만 볼  있다고."
"그럼 왜..."

희미하게 미소지은 메르바는 세영을 잡은 손을 꼭 쥐며 살짝 들어 올렸다.

"나와 손을 잡고 있으니까."


세영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 또한 그녀의 능력인 듯 보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페어리트리가 내려다 보이는상공으로 날아 올랐다.

하늘 위에서 본 페어리트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게임을 시작한 처음부터 파르도 섬에 저 나무가 보였다면, 사람들은 이 환상적인 광경에 사로잡혀 한동안 멍하니 나무를 올려다봤을 것이다.


"지금 어딜 가는 거야?"
"음... 너도 알고 있는 장소야. 조금 서두를까?"

갑자기 시야가 전환됐다.
마치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이동한 장소는 온통 암흑 천지였다.

"우읍..."

작은 멀미 기운이 올라왔다.


메르바가 세영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괜찮니?"
"으응. 괜찮아. 고마워."

세영도 그녀의 화법에 제법 익숙해졌는지 점점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야? 온통 새까만데..."
"넌, 페어리의 눈을 가지고 있잖아. 그걸 사용해봐."


세영은 카스나의 눈 스킬을 발동했다.
그리고 눈치챘다.
이 어둡던 장소가 대체 어디였는지 단숨에 깨닫게 되었다.

"여긴..."
"그래. 바위 동굴이야. 네가 우리 동료들을 구해내 준."


메르바와세영이 서있는 장소는 세영이 전직 퀘스트를 얻은 바로 그 동굴이었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그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알파라는 세영의 캐릭터명을 시작해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때, 작은 비명이 들렸다.

"무서... 워. 살려 줘..."
"꺄악-! 거미 싫어!!!"

비명은 작은 페어리들의 것이었다.
세영과 메르바는 소리가 들려온 장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커다란 거미줄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페어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페어리를 포식하려는 듯, 거대한 바위거미가 다가오고 있었다.


"위험해!"

세영은 급히 쇠뇌를 꺼냈다.

"잠깐, 손을 놔 줄래? 서둘러구하지 않으면..."


하지만 메르바는 슬픈 표정을 해올 뿐, 손을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소용 없어."
"무슨 소리야. 화염 탄 한 발이면 저런 거미 쯤!"

세영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거미를 향해 화염 탄을 발사했다.


퍼엉-!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화염탄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불꽃은 보이지를 않았다.
거미는 멀쩡했고,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했다.


"뭐지?"

세영은 급히 다른 쇠뇌를 꺼냈다.
화염 탄이 안 통하니, 평범한아기살을 쏴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다급한 그의 손을 메르바가 급히 막아섰다.


"왜 그러는 거야? 너희는 같은 페어리잖아?"
"알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당신도 저 아이들을 구할 수 없어. 저건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모습일 뿐이니까. 우리는 지켜보는 것 외에는 어떤 개입도 하지 못해..."


세영은 눈을 크게 뜨며, 그녀의 손을 재차 뿌리쳤다.
그리고 쇠뇌의 방아쇠를 당겼다.
여러 발의 아기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하지만 이 역시 거미를 지나치고, 심지어 동굴 벽을 뚫고 파고들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큭...'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소지했던 낡은 단검까지 꺼내 들었다.

메르바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거미에 가까이 다가가, 어설픈 흉내로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미는 그의 반복  공격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의 공격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거미는 그런 세영을 무시하듯 거미줄에 사로잡힌 페어리들을 향해 다가갔다.
실을 뽑아내 칭칭 감았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어디론가 이동하기시작했다.


슬픈 표정을 한 메르바가 망연자실  있는 세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세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시금 화면이 전환되고, 공간은 히부린의 비밀 실험실로 바뀌었다.
그곳에는 새장에 가둬진 페어리들과, 방금 보았던 거미가 보였다.

거미는 테이블 위에 거미줄로 칭칭 감겨있는 페어리들을 내려놨다.


"크흐흐. 잘했다."


웬 로브를 뒤집어  인물.
그가 바로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고대의 마족.

히부린. 그녀가 등장했다.

*

그녀는 연금술 실험을 하는 도중이었다.
테이블 위에 이런저런 재료들과 휘갈겨 쓴 글과 그림이 빽빽한 종이들.
이상한 약품들이 널려있다.

"머지않았어..."

뭐라 중얼거리며 실험을 하기 바빠 보였다.

로브를 두르고 있어, 그녀가 여자인지도, 사람인지 마족인지도  수는 없었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세영은 그녀가 분명 히부린일 거라 생각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히부린은 거미줄에 감싸여 꼼짝  하는 페어리 한 마리를 핀셋으로 집어 들렸다.


"키히히히,  나에게 페어리의 능력을 전수해 줄래? 아니면 실험의 재료가 될래?"
"더러운 마족에게 페어리의 능력을 나눠줄 리가 없잖아! 바보 마족!"
"키히힉. 그럴 줄 알았어. 너희는 하나같이멍청하니까. 하지만 능력은 너무 탐이 난단 말이지."

미치광이 같은 히부린의 웃음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관없어. 키히힉. 이제 실험도 거의 끝나가니까."


히부린은 액체가 담긴 투명한 비커에 거미줄 째로 페어리를 담갔다.
그 액체에 닿는 순간 페어리의색이 물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번져갔다.
마치 잊혀진 세계처럼, 페어리의 몸에서 색이 사라져갔다.


"그러게 고분고분하게 굴지 그랬니. 어리석은 페어리야. 키히히히."


히부린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제법 거대한 그 종이는, 희한한 문자와 도형이 새겨진 일종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히부린은 그 중앙에 이런저런 약품과 색이 사라져 버린 페어리를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단검으로 긋더니 흘러나온 검붉은 피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마법진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이어 흉흉한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키히히히히. 피다... 피야... 피는 싫다고! 프라우스!!"


연금술 발사자 퀘스트를 진행할 때, 히부린은 피를 싫어한다고 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손을 스스로 벨 정도로 중요한 무언가를 진행하는 도중이었다.
심지어 마왕이라던 프라우스를 증오하는 듯이 느껴졌다.

"융합-!!"

과거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그랬는지, 시스템 메시지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영은 히부린이 연금술 스킬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눈치챘다.
처음 보는 거였지만, 저 빛은 연금술 스킬을 사용할 때 보이는 빛이 분명했다.


히부린이 머리까지 뒤집어쓴 로브가 연금술의 여파로 발생한 바람 때문에 뒤로 넘어갔다.
흉측한 형상의 머리와 얼굴이 보였다.
인간이라 하기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런 히부린의 머리가 기이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짧고 거칠던 머리에 조금 윤기가 도는 것 같았고,길이도 길게 자라났다.
또, 칠흑같이어둡던 두 개의 안구 중 하나가 이채를 띄었다.
마치 그 눈만 페어리의 눈과 닮게 변이한 것 같았다.


"끄히히히... 아프다. 온몸이... 하지만 보여. 보인다고!"

히부린은  순간, 세영이 소유한 뱀의 눈과 같은 식물을 찾아내는 페어리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아직은 불안정한지, 페어리를 닮은 그녀의 한쪽 눈알.
그 동공이 이상하게 왔다 갔다 흔들렸다.

"아파... 히히히. 안정제를... 특수 안정제를 먹어야 해. 그래야 다른 능력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키히히히."


그녀는 특수 안정제를 꺼내 먹었다.
세영은 비로소 자신이 만들어 냈던 안정제가 어디에 쓰이는 용도인지 알게 되었다.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세영은 분노했다.
자신의 친구인 페어리. 그것도 살아있는 페어리를 연금술의 재료로 사용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히부린은 손을 뻗어도 만질  없는 존재다.
이 모든 건 과거에 벌어진 일들이니까.


"그만 볼래? 보기 힘들지?"
"응..."


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히부린이 하는 짓을...
이제 놈은 새장에 들어있는 페어리들을 한 마리  마리 꺼내, 자신의 몸에 섞어갈 것이다.


그 장면을 더 보고 싶지는 않았다.



*




세영의 주변이 다시 변했다.
이번에 도착한 장소는 고대 마족의  바로 위.
수십 수백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고대 마족의 탑은 그가 알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저건...'


"당신이 알던 모습과 달라서 놀랐어?"
"응..."

페어리 퀸 메르바는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고대 마족의 탑은 마계의 문을 여는 일종의 매개체야. 그걸 히부린이 조작해서 자신 소유의 거대 던전만을 소환한 거지."


히부린의 던전.
잊혀진 세계에서 보았던 검고 단단해 보이는 도넛 모양의 그 건물이다.
그 건물이 고블린 숲의 한복판에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페어리의 차원 거울이 놓여있던 건물의 정 중앙에, 흉측한 고대 마족의 탑이 자리 잡고 솟아있었다.
처음부터 그걸 염두에 두고 건물을 만든 것인 듯.
고대 마족의 탑이 손가락이라면, 건물은 거기에 끼여진 반지와 다름없었다.


"왜? 왜 이런 장소에?"
"그건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우리의 대화를..."
"우리라니... 메르바?"


메르바는 세영을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풀었다.


"여기서 지켜봐 줘. 나의 마지막을."

세영은 움직이려 했지만, 공중에  있는 상태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페어리 처럼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녀의 말처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족의 탑이 무언가를 토해낸 것처럼 보였다.
히부린이 마족의 탑 어딘가에서 밖으로 나온 것이, 세영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히부린이 고대 마족의 탑 안에서, 공중을 날아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이다.

놈에게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날개가 생겨나 있었다.

페어리의 날개가.

"결국... 날개까지 얻었네."
"키히히. 이거정말 나와  닮았잖아? 아니지, 내가 너를 닮게 된 것일까? 페어리들의 여왕님. 키히히히."

히부린이 많은 페어리들을 자신의 몸에 섞어갈 수록, 그녀의 외형은 점점 페어리와 닮아갔다.
오직 영혼만 마족인 자신을 유지한 채, 그녀는 인간 크기의 커다란 페어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얼굴까지도 페어리의 퀸과 비슷해져있었다.


"페어리의 적. 너를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키히히. 다른 페어리들도 다 그렇게 말 했지만, 결국 나의 먹이가 되었지. 후후. 이제 마지막으로 여왕인 당신의 몸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어. 당신의 몸이 그렇게 마나로 가득 차 있다며? 키히힉."


히부린은 많은 융합을 통해 수많은 페어리들과 몸을 섞었지만, 선천적으로 마나를 생성하지 못하는 육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외형만 바뀌었을 뿐이다.

"너를... 키히히.너를 먹으면 나도 이제 마법을 사용할  있지 않겠어? 으흐흐흐."

히부린은 혀로 입술을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게다가, 페어리트리? 쿠히히히. 나 이제 그게 보여. 설마 이런 작은 섬에 저런 거대한 신목이 존재하고 있었을 줄이야. 후히힠. 너를 먹고, 신목에서 나오는 마나까지 전부 내 차지로 만들면, 내가 새로운 페어리의 퀸! 아니, 마왕 프라우스조차 넘보지 못하는 강력한 존재로 새로 태어날 지도 모르지 않겠어?"

메르바는 조용히미소 지었다.

"너 따위가 페어리 퀸? 흥. 넌 페어리 조차 아니야. 그저 모습만 변한 괴물에 불과해."
"그건 모르는 소리. 쿠히히."

히부린이 갑자기 움직였다.
어디에 숨겨뒀었는지, 개조 된 쇠뇌를 꺼내 들었다.


철컥!

"이거나 먹으라고!"


탄환이 발사됐다.
페어리의 색을 빼앗던 액체.  액체가 담긴 탄환이 페어리 퀸 메르바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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