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90화. 거울 뒷면의 심연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자연적인 바람은 아니다.
페어리 퀸 메르바.
그녀의 가벼운 날갯짓으로 불어온 바람에 세영의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조심해, 메르바!!"
히부린이 쏜 탄환은 메르바의 날개에 적중했다.
그 순간 탄환 안에 있던 액체가 확산되며 날개전체에 튀었다.
"메르바아-!!"
그러나 세영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과거를 사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조금 전까지 세영을안내하던 그녀와는 달랐다.
"큭큭큭, 뭐야. 여왕이나 되는 존재가 그런 간단한 공격조차 회피하지 못하다니."
히부린의 도발에도 메르바는 무표정한 얼굴로 스스로의 날개를 떼내었다.
그녀의 날개는 낙하하며 빛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가루가 되어사라져 버렸다.
"역시... 탐이 나는군. 날개를 잃어도 날 수 있는 능력이라니. 키히히."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시간도 지금 뿐이... 으윽."
날개를 떼내었어도, 몸 여기저기에 튀어버린 액체는 그녀를 좀먹어갔다.
팔이 색을 잃고, 다리가 굳어갔다.
"페어리 퀸이라 해서 무언가 특별한 힘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내가 만들어낸 탈혼의 포션에는 어쩔 수 없나 봐? 끄히히힠."
탈혼의 포션.
히부린 그녀가 페어리의 육체를 빼앗기 위해오랜 실험 끝에 만들어 낸 특수한 약품이다.
닿는 순간 육체와 하나였던 영혼은 분리 되어 흩어져 버린다.
인간과 달리 페어리들은 그 정신이 온전히 아스트랄계에 머물고 있다.
그 때문에 세영이있는 세계로 넘어온 페어리들은 육체와 영혼의 연결이 다소 약해져 있는 상태.
히부린이 만든 탈혼의 포션이 적용되는 건, 페어리를 비롯한 소수의 생명체로 한정된다.
"끼히히히. 지금 당장 너를 먹어주마. 그 육체에 담겨있는모든 능력과 마나. 전부 내 차치야아~~!!"
광기에 찬히부린이 메르바를 흡수하기 위해 다가가 손을 뻗었다.
이제 놈의 강제 융합 스킬은 다른 재료나 마법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만큼 완성되어 있었다.
아무런 도움 없이도, 대상의 영혼이 절반만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스킬 사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메르바는 조금 달랐다.
메르바는 모든 페어리들의 여왕이자 신목을 지키는 자.
"지금이야. 나를 도와주겠니."
세영을 부른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불렀고,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영의 몸에는 아직 메르바의 힘이 남아있던 건지, 섬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페어리트리의 모습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마치 울부짖는 것 같은 나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쿠헤헤. 신목의 힘을 써서 무언가 수상한 짓을 하려는 모양인데 소용없다아~~!! 융합-!!"
히부린의 왼손이 메르바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손끝이 짙은 검보라색을 띠며 하나로 겹쳐지기 시작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히부린은 당혹감에 어쩔줄을 몰라했다.
원래대로면 더 빠르게 육체가 하나가 되어야 했을 텐데, 좀처럼 융합이 진행되지 않았다.
"넌, 이제 끝이야. 더러운 마족아."
메르바의 말을 듣던 히부린은 무언가 수상함을 느꼈다.
계획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
"이익... 아무런 힘도 없는 페어리 주제에!"
그토록 원하던 힘을 스스로 부정하는 히부린.
이미 하나로 이어진 왼팔 때문에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천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아래에 보이는 히부린의 던전을 한번에 뒤덮을 만큼 거대한 마법진.
그 마법진의 중앙에 웬 거울이 나타났다.
"넌 이제 버려진 차원에서 영원히 갖히게 될 거야."
메르바의 목소리와 함께 페어리의 차원 거울이 그녀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히부린은 그걸 보고 당장 도망쳐야겠다 생각했지만, 메르바가 용납치 않았다.
"이, 이년이!! 이걸 놔!! 노라고-!!!"
다급해진 히부린.
이미 융합을 시작한 팔이, 간단히 떨어질 리가 없었다.
소지한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것 저것을 찾기 시작했다.
뭐라도 좋았다.
이 순간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래. 네가 있었구나."
꺼내 든 것은 칠흑의 창.
어디에든 찔러 넣으면 모든 마나를 빨아들여 봉인하는 전설 속의 창.
프라우스를 상대하기 위해 아껴두고 숨겨뒀던 창을 사용하기로 정했다.
"죽어어어어-!!"
칠흑의 창은 메르바의 심장위치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이미 몸 여기저기가 굳어가던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 창은 아랑곳하지 않고 메르바가 말했다.
"이미 늦었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페어리의 차원 거울은 두 인물을 집어삼켰다.
거울에 삼켜지는 짧은 시간 사이에, 메르바는 세영을 향하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세영이 조금 전까지 보았던 조각상의 날개 없는 여성이 하고 있던, 바로 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날개가 없는 쪽이 메르바였구나. 설마 날개를 가진 게 히부린이었을 줄이야.'
세영은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 한 건 메르바라고 생각했다.
세영이 봉인을 파괴해 히부린을 깨우려는 걸 알고, 그러지 말라 타이르는 듯했다.
쿠구구궁.
세영의 시야에 보이던 고대 마족의 탑이 고블린 숲의 깊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지하에서 누군가 잡아 당기고 있는 듯 했다.
'이것도 페어리트리의 힘인가?'
그리고 천공에 떠올랐던 마법진이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남아있던 히부린의 던전을 감싸더니, 강렬한 빛과 함께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마법진도. 히부린의 던전도.
아마 잊혀진 세계로 사라져 버린 것 이리라.
세영은 내려다 보이는 고블린 숲의 전경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럼 뱀은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귓가를 울리는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뱀의 목소리였다.
"뱀? 어디 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지금 어디 있는데?"
"내가 거울을 파괴하면 넌 어떻게 되는 건데?"
슈슈슈슈-우웅.
시야가 온통 빛에 휩싸이더니 세영은 다시 회오리바람의 중심으로 돌아와 있었다.
조각상과 마법진 역시 그대로였다.
"대체, 뭐였던 거지?"
마치 꿈이라도 꾼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을 했다.
"뱀! 뱀 들리니?"
하지만 이제 뱀의 목소리도 들려 오지를 않았다.
세영은 남은 시간을 확인하려 서둘러 퀘스트 창을 열었다.
그런데 퀘스트의 정보가 갱신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퀘스트 : 위기에 빠진 페어리]
- 페어리 뱀은 페어리 퀸 메르바와 정신 동조를 이룬 상태입니다.
페어리 뱀은 당신이 거울을 파괴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이는 페어리 퀸 메르바 역시같은 생각입니다. 거울을 파괴해 고대 마족의 위협으로부터 다른 페어리들을 구원해 주기를 당신에게 간절히 원했습니다.
- 당신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서둘러 하나의 길을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작게는 당신과페어리들이, 크게는 파르도 섬 전체나 판게아 행성에 영향을 줄 정도로 미래가 변화할 것입니다.
[선택 1. 페어리의 차원 거울을 파괴한다.]
-분류 : 파괴
-난이도 : F
-제한 시간 : 19분 18초
-보상 : 칭호 '페어리들의 구원자'
[선택 2. 히부린의 봉인을 해제한다.]
-분류 : 파괴
-난이도 : F
-제한 시간 : 19분 18초
-보상 : 없음
- 2번을 선택할 경우에만페어리 뱀과 재회할수 있는 확률이 존재합니다.
세영은 다시,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돌아왔다.
'결국...'
하지만 거울 밖에서 단호하게 페어리 뱀의 구출을 선택했던 그때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히부린이 깨어나 파르도 섬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른 페어리들에게도영향이 생겨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강력한 고대 마족의 등장으로 파르도섬은 난장판이 될지도 모른다.
세영은 결코 그런 선택을 선뜻 내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클래스 전용 퀘스트를 포함한 모든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동시에0을 향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남은 시간은 19분.
"어떻게 해야 하지..."
세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시간이 그를 몹시 재촉하고 있었다.
***
이세영이 거울 안의 세계에서, 이 거울을 파괴해야만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때.
거울의밖에서는 거울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을 자처한 게 이세영 자신이니 누굴 탓할 수 있겠는가.
"김갑부님! 마나 포션 없어요!"
BI기츠가 김갑부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마법사들은 구경만 하는 처지였다.
그들이 마나를 회복할 수단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모든 마나 포션은 힐러와 트래퍼의 몫이었다.
1초라도 더 버티기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김만우가 대답했다.
"이제 저도 없어요. 좀 전 드린 걸로 마지막 입니다."
"네? 그럼 이제..."
그 소리를 듣던 BI 길드원들의 한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는 이제 1분도 못 버텨!"
"버티는 게 아니라 1분 후면 전멸할지도 모른다고!"
"역시, 이 퀘스트를 하는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무리였다고!"
무려 40분 넘게 마법진을 지키고 있다.
다행히 아직 사망자는 없었으나, 상황은 전혀 나아진 게 없었다.
마나 포션은 바닥을 드러냈고, 처치에 성공한 키메라는 단 세 마리에 불과했다.
"대체 알파 이 녀석은 언제 나오는거야! 답답해 뒤지시겠네."
김만우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괜한 불평의 소리만 뱉을 뿐이다.
"형, 아직 살아는 있는 거겠죠?"
"당연하지! 오빠가 설마 죽겠어? 그렇게 강한데."
아이들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나 포션은 이미 이미 트래퍼에게 나눠준지 오래다.
"아, 이놈들 체력량이라도 알면, 가장 피가 적게 남은 놈 찾아서 죽일 텐데. 레벨이라도 오르게!"
세 마리의 키메라를 쓰러뜨리며 레벨이 올랐었다.
덕분에 체력과 마나가 가득 회복되어,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무려 16명의 인원이 있는데도 레벨이 오를 정도로 키메라들이 주는 경험치는 제법 짭짤했다.
"모두 마음의 준비들 해 둬라."
BI 길드의 부길마 빔은, 이제 체념이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결국 이번 퀘스트는 실패로 돌아갈 모양이다.
단순히 퀘스트의 실패가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과 거울 안으로 향한 이세영 까지... 모두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
"부길마님!"
그렇게도 최대한뒤로 미뤄두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래릭들의 마나가모두 바닥났다는 신호였다.
"부길마님. 마나 포션이 전부 바닥났습니다. 김갑부님도 더 없다고 합니다."
아직 소지한 치료약에는 여유가 있었으나, 위급할 때 도움을 주던 부하들이 써주는 힐을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나!"
키메라들의 시선이 거울을 향하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는 물음이었다.
"아직 20초 있어야 합니다."
벌써 빔에게는 10마리의 키메라가 공격을 퍼 붇고 있었다.
힐 없이는 견디기 힘들었는데, 놈들의 어그로가 풀리기까지는20초나 남았단다.
'역시제일 먼저 죽는 건 탱커란 말이지... 그런데 그게 왜 하필 나야! 젠장!빌어먹을! 부사장이 되어서 제일 먼저 죽다니!!'
부하들에게는 절대 들려줄 수 없는 마음의 소리.
빔은 이제 몇 초 남지 않아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 먼저 가겠다. 모두 나를 따라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빔은 괜히 멋 부리는 말을 뱉었다.
스스로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세 얼굴이 화끈거리게 되었다.
몹시 후회가 든 것이다.
[호문클루스 바라만이 스킬 '불의 비 Lv. 4'를 사용합니다]
바라만이 난사한 스킬 덕에, 빔을 덮치던 키메라들이 불의비로 강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체력이 바닥이던 몇 마리의 키메라가 쓰러지며 경험치의 폭풍이 몰아쳤다.
띠링.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와! 체력과마나가 모두 회복됐다!"
"부길마님! 아직 1분은 더 버틸 만 하겠습니다. 하하."
"그...그렇군."
머쓱해진 빔은, 바라만이 쏟아 낸 불의 비를 맞고 불타오르는 키메라들을 향해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래. 덤벼라. 어디 갈 때까지 가보자!"
하지만 키메라들은 빔을 외면했다.
이제 거울과 마법진을 향해 고개를 돌릴 타이밍이었다.
빔은 다시 한번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저씨. 트랩은요?"
"이번은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럼, 다음번은요?"
"마나가 회복 됐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그 다음은요?"
트래퍼는 입을 닫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레벨이 올라 마나가 회복한 덕에, 1분은 어떻게 더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뿐.
아마 2분 후면...
그렇게암울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우와. 저것 봐!"
"형이 나오나 본데? 하아... 이제살았다."
"내가 뭐랬어. 우리 알파 오빠는 절대로 죽지 않을거라니까!"
키메라가 중앙의 거울을 향하는 도중이어서,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다.
새까만 거울면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쑥- 하고 인간의 팔 비슷한 것이 튀어나왔다.
"오빠... ?"
나비는 그 팔을 보며 세영을 부르다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튀어나온 팔이, 여인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고대의 마족 '히부린'이 등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