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91화. 거울 뒷면의 심연
주르르륵.
슬라이딩 트랩을 밟은 키메라들이 뒤로 한참 밀려났다.
몇 놈은 뒤따라오다가 앞에서 미끄러지는 키메라와 부딪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키메라를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이 온통 그녀에게 쏠려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하늘하늘 찰랑거리는 머리칼.
눈부시게 빛이나는 눈동자.
매끈한 피부나 완벽에 가까운 몸매는 덤이었다.
페어리와 똑같은 날개를 달고, 백옥같이 하얀 살결을 가진 요정의 모습.
그녀를 보고 그 누가 마족이라 생각하겠는가.
"아... 아름답다."
BI 길드원 중 누군가 그런 감탄사를 내뱉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인외의 존재.
천사니, 요정이니 하는 매력적인 존재는 일명 중세 판타지를 즐기려는 뭇 남성들을 끌어들이는 포인트 중 하나다.
그러나 페어리는 작디작은 신체 크기의 한계로 장난꾸러기로 표현되기 일수.
그러나 그 크기가 인간과 비슷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뭐야. 거인 페어리야? 아니면 엘프 같은 건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흥. 다들 헤벌쭉 해져서! 니들 못 들었어? 히부린이라잖아!"
오직 나비만이 다른 열다섯 명과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BI 길드원들도 죄다 남자였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일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끼히히히. 적당한 먹잇감들이 보이는 군!"
외모와 다르게 튀어나온 목소리는 무언가에굶주린 듯 했고, 그게 무언지는 곧장 알 수 있게 되었다.
히부린은 천천히 이동했다.
거울을 빠져나와 희미하게 반짝이는 마법진을 밟고, 서서히 이동했다.
마법진 위에서 대기하던 트래퍼와 아이들은 무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턱-
슬라이딩 트랩을 밟았다.
"끄히히. 재밌는 걸 깔아 놨네."
전혀 미끄러지지 않았다.
트랩의 효과에 완벽히 저항한 것이다.
마나를 아껴가며 어렵게 설치한 트랩 몇 개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히부린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자신을... 아니 마법진을 향해 다가오는 키메라들을 비릿한 미소로 반겼다.
"나의 아이들아. 보아하니 제대로 된 마나도 못 얻고 깨어났구나. 큭큭. 불쌍한 것들."
덥썩.
히부린은 키메라 한 마리의 목덜미를 들어 올렸다.
[고대 마족 히부린이 스킬 '마나 흡수'를 사용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이 장소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들려왔다.
[합성종 no. e-97 '드코만'의 마나 코어가 모든 마나를 잃고 기능을 정지하였습니다.]
띠링.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모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야? 왜 우리가 레벨이 오르지?"
"그야, 우리가 준 데미지가 많이 누적되어 있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보다, 저 키메라로부터 마나를 흡수하다니. 다시 아까 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걸..."
히부린은 멈추지 않았다.
다가오는 키메라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려 모든 마나를 빼앗았다.
바라만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누적시켜둔 데미지 때문에, 그럴 때마다 모두의 레벨이 상승했다.
그야말로 공짜 경험치 파티나 다름없었다.
"버... 벌써 레벨이 5나 올랐는데? 이게 대체 뭐야? 왜 우리는 공격하지 않는 거지?"
"나도 의문이야. 부길마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빔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 역시 질문을 할 뿐이다.
김갑부에게.
"김갑부님. 이게 어찌 된 영문이요?"
김갑부는 어버버 할 뿐.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오히려 핑쿠햄스터가 나서서 대답했다.
"저희도 모르겠어요. 알파 형이 들어간 뒤에 나왔으니까. 형과 관련이 있겠지만... 설마..."
그런 그를 지켜보며 나비가 대꾸했다.
"뭐가 말하고 싶은 거야? 오빠가 저런 여자에게 질 리가 없잖아!"
"그건 모르지. 저건 저래 보여도 고대 마족이라고? 형이 아무리 쌔다고 하지만 마족 네임드를 혼자서 상대할 정도는 아니지 않아? 겨우 마족의 종자인 쿠아만테를 상대할 때도 얼마나 애먹었는데. 아까 전의 슬라임이랑 차원이 다를 거라고."
나비는 짜증이 난 표정으로 햄스터를 쏘아봤다.
하지만 쉽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햄스터의 발언 중 틀린 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 죽었어!"
김만우가 겨우 입을 뗐다.
"그래. 죽었으면나한테 말 했을 거야. 걔 엄브렐라는 바로 내 옆에 있으니까."
세영은 아직 죽지는 않았다.
그럼 왜 히부린만 거울을 빠져나온 것일까.
김만우는 그게 의문이었다.
메시지도 안되는 게 몹시 답답했다.
그런 와중에도 모두가 히부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하아아... 실망스럽네. 고작 이 정도란 말이야?"
고개를 휙 돌려 마법진 옆에 모여있던 일행을 바라본 건, 히부린이 거의 모든 키메라들의 마나를 빨아들였을 때였다.
"끄히히히. 아깝네! 아까워."
모두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큭큭."
소름 돋는 미소를 보이던 히부린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주머니였다.
고대 마족의 주머니.
거기에서 쇠뇌를 하나 꺼내든 것이다.
"계약은 계약이니까.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이런 차원의 구석에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으니까. 키히히히."
지켜보던 모두는 당황했다.
빔과 핑쿠햄스터가 급하게 앞으로 튀어나가 모두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손에 쥔 방패를 앞으로 들어올렸다.
갑자기 히부린이 모두를 향해 쇠뇌를 겨눠왔기 때문이다.
"다들 내 뒤로! 기사들 빨리 앞으로 나와서 막아!"
"마, 마법진하고 거울은 어쩌죠?"
갑자기 돌변한 히부린의 태도에 모두는 당황했다.
과연 놈의 공격이 얼마나 강력할지 벌써 지레 겁먹은 길드원도 있을 정도였다.
"마법진이고 자시고, 우리가 죽으면 모두 끝장이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놈이 대부분의 키메라를 처치해준 것이다.
덕분에 일행들은 사람마다차이는 있었지만 일곱 번에서 여덜 번의 레벨이 오른 상태였다.
마나와 체력 역시 가득 회복한 상태.
철컥.
히부린의 쇠뇌에 무언가 탄환이 장착됐다.
그걸 지켜보던 햄스터는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근데... 저 마족이 형하고 같은 클래스 이면 어쩌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과연 히부린의 탄환에 어떤 특수한 능력이 있을지가 무척 걱정이었다.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쇠뇌 용 화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 돌아가자! 크히히히."
결국 놈의 쇠뇌가 탄환을 뱉어냈다.
"모두 조심해!"
햄스터가 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놈이 쏜 탄환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것이다.
"뭐지?"
"어디에 쏜 거야?"
"설마... 거울에 쏜 거 아니야?"
다들 당황해서 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거울은 아직 멀쩡했다.
빔이 말했다.
그는 가장 앞에서 탄환을 정확히 지켜본 것이다.
"큰일이군. 탄환은 마법진 위에 떨어졌다. 저길 봐라."
모두는 희미하게빛나는 마법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작은 탄환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변화가 눈에 띄었다.
마법진의 빛. 그 색이 점차 붉게 변하고 있었다.
"끄흐흐흐. 너희는 다음에 먹도록 할게. 그럼 안녕~"
히부린이날갯짓을 하더니 가벼운 몸짓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뚱뚱한 몸으로 입구에 껴있던 키메라를 향해 날아갔다.
"흠, 너희는 어차피 마나도 얼마 안되니, 저자들이라도 상대하도록 해."
히부린은 자신의 던전 안으로 사라졌고, 문에 끼워졌던 뚱보 키메라와, 그에 가로막혀 건물 안에 있던 다섯 마리의 키메라가 더해져 이쪽으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뭐야.같은 편이 맞긴 한 모양인데?"
"맞아요. 아마도 지금까지는 마나를 흡수하기 위해서 같은 편인 걸 상관 안 했었나 봐요. 그러다 지금 마음이 바뀐 거고."
그래도 여섯 마리 정도야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 부길마님. 마법진이..."
색이 변하던 마법진이 어느덧 온통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내렸다.
비라도 내리는 줄 알았다.
하늘이 온통 회색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하지만 떨어져 내린 건 비가 아닌 무언가였다.
시스템 알람이 울렸다.
[잊혀진 세계가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둘러 빠져나가시기 바랍니다. 빠져나가지 못할 경우, 붕괴 종료와 동시에플레이어는 사망하게 됩니다.]
"뭐? 이게 무슨..."
"빠져나가다니 어떻게?"
"입구다. 우리가 왔던 입구로 나가면 고블린 숲으로 가는 환영을 찾을 수 있어."
트래퍼가 말했다.
그의 함정 간파 기술을 사용하면, 분명히 이 세계의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마족의 탑 앞에서도 이 장소에 진입하는 입구를 찾아냈었으니까.
"문제는 알파네. 이새끼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안에서 대체 뭘 하길래!"
"일단 저놈들이 먼저예요. 키메라!"
모두는 키메라를 상대해야 했다.
레벨도 많이 올랐고 마나도 가득 회복됐다.
하지만 마나 포션도 없이 저 키메라 놈들을 얼마나 상대 가능할지... 또, 이 붕괴하기 시작한 세계의 남겨진 시간은 얼마나 되는 건지 모두의 숙제였다.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이 간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하늘이었다.
하늘이 마치 유리처럼 금이 가며, 그 틈새에서 떨어져 나간 알 수 없는 가루들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잊혀진 세계가 머지않아 붕괴합니다. 서둘러 빠져나가시기 바랍니다.]
***
시간을 잠시 거슬러 올라간 거울 뒷면의 심연.
세영은이런 저런 생각을 짜냈다.
그러다 눈치챘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 한 가지가 더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의문에서 시작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물며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퀘스트의 카운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르지 않고 시간이 종료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퀘스트가 실패할 테니, 굳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달랐다.
퀘스트에 실패하더라도 올바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히부린의 봉인을 해제하라는 퀘스트에 왜 제한 시간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제한 시간 안에 봉인을 해제하지 않으면, 히부린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거나, 깨어나더라도 약해진다거나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뱀은 말했었다.
메르바의 심장을 찌른 저 칠흑의 창 때문에 봉인이 약해져 있다고.
그래서 자신이 메르바와 동조해 힘을 보태고 있는 거라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거울 그 자체를 파괴해 달라고 말이다.
그 의미를 세영은 이렇게 받아들였다.
제한 시간이 종료되면 칠흑의 창 때문에 봉인이 스스로 풀려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현재 거울의 역할은 이 공간의 출입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걸 파괴하면, 봉인이 풀리더라도 히부린은 이 버섯 투성이세계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뱀도...'
세영은 그런 선택을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삭막한 장소에서 페어리들이 두려워하고증오하는 히부린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게 만들다니.
도저히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뒤부터 떠오른 생각들은 온통 자신의 선택을 변명하는 것들 뿐이었다.
'그래. 어차피 히부린이 아니더라도...'
이 판게아 행성에는 훨씬 강력한 마왕이나 드래곤은 물론 흉측한 괴물들이 수없이 존재할 것이다.
마왕보다도 약한 히부린.
지금은 무리일지 몰라도, 머지않아 더 강해지게 되면 간단하게 처치하리라.
지하 동굴의 고블린을 생각했다.
처음 그곳에 굳어버린 불꽃을 채집하러 갔을 때,네임드도 아닌 일반 고블린 몇 마리의 공격에 죽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화염 탄 한 발이면 놈들은 접근조차 못하고 쓰러진다.
'그래. 내가 쓰러뜨리면 그만이지.'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생각들.
그렇다.
세영은 무의식 속에서 이미 결정을내리고 있었다.
그 결정을 이제야 겨우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안. 뱀... 너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을 거 같아. 하지만 걱정 마. 히부린은 내가 어떻게든 쓰러뜨릴 테니까."
봉인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세영은 손을 마법진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고대 마족 히부린과 페어리 퀸 메르바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끄아아아악- 커헉. 여긴 어디냐! 빌어먹을 페어리이이이-"
히부린은 모든 사건이, 마치 조금 전 벌어졌던 것처럼, 갑자기 크게 소리 질렀다.
반면 메르바는...
"왜... 왜, 그런 선택을..."
하염 없이 슬픈 눈으로 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에서 왈칵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
페어리인 탓인지 혈액은 아니었다.
빛나는 흰색의 무언가...
그것은 페어리 퀸의 영혼과 다름없었다.
"끄히히히.그래. 죽어! 죽으라고!"
히부린은 손에 쥔 창을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걸 본 세영은 다급하게 히부린을 향해 쇠뇌를 겨눴다.
"그만! 멈춰! 메르바에게서 떨어져!!"
하지만 완벽하게 무시 당했다.
마치 과거의 영상을 지켜보던 그때와 비슷했다.
철컥.
세영은 못 참고 쇠뇌를 갈겼다.
키이이잉-
하지만 탄환은 히부린의 눈 앞에서 멈춰 섰다.
그제야 놈은 세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넌... 네놈은 누구지? 대체 무엇이냐!!"
히부린은 메르바를 찌르던 창을 뽑아 세영에게 강하게 날렸다.
허공을 쏜살같이 가르며 날아온 새까만 창이, 세영의 심장을 향해 일 직선으로 들이닥쳤다.
그 빠른 공격에 당황할 새도 없었다.
'이런...'
회피를 포기한 순간.
또 다시 키이이잉-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은 세영의 몸 바로 앞에서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음?? 뭐... 뭐냐! 대체 뭐가..."
당황한 히부린.
그건 세영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의 힘이 발동했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공격을 반복할 경우 심각한 페널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를 통해 만들어진 계약.
그 계약의 힘이 서로의 공격을 무효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