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92화. 거울 뒷면의 심연 (92/122)



〈 92화 〉92화. 거울 뒷면의 심연

히부린은 봉인 직전 메르바를 향해 '융합' 스킬을 사용한 상태였다.
봉인이 깨어난 지금도, 놈의 왼팔은 메르바를 서서히 좀먹고 있었다.
융합의 진행이 느린 이유는 역시, 메르바가 페어리 퀸이기 때문일 것일까?

"으윽..."


메르바는 결국 신음을 터트렸다.


칠흑의 창은 사라졌지만, 메르바의 가슴 한쪽에서 흘러내리는 무언가는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메르바는 얼마  가 자신의 존재가 소멸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는지 초연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혼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봉인이 풀려도 좋아질게 없어. 어리석은 마족아... 페어리를 얕보지마!"

세영을 바라보던 히부린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깜짝 놀랐다.


"이... 이년이"


융합을 사용한 건 분명 자신인데, 갑자기 시야가 뿌예졌다.
당황스러웠다.
육신에 깃든 영혼이 빨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과거 자신의 영혼 일부를 잘라내 호문클루스를 만들  경험했던 그 고통과 너무나 흡사했다.


히부린의 스킬은 대상의 육체에 머물던 영혼을 강제적으로 빼내고, 남은 육체를 자신의 몸과 하나로 만드는 것이었다.
탈혼의 포션에 의해 페어리들의 영혼이 빠져나가게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서... 설마."


왼손.
페어리 퀸과 하나가 돼가는 도중인 왼손에서 시작된 이 이상 현상은, 눈앞의 페어리가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


"네년의 영혼은 대부분 흩어졌을 터! 어.... 떻게  것이냐!"


메르바는 고통 속에서 미소 지었다.

"내 영혼은 하나 뿐이지만, 모든 페어리들의 영혼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페어리 뱀.
그녀의 영혼이, 지금 메르바의 몸 안에 머물고 있다.


칠흑의 창과 탈혼의 포션에 당했지만, 아직 메르바의 의지와 혼의 일부는 남아있었다.
거기에 뱀의 영혼이 더해져 강력한 혼의 힘을 발휘했다.
히부린이 제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영혼의 힘은 기껏해야 마족 단 한 마리 만큼도 되지 못했다.
간단하게 육체의 주인 자리를 빼앗길 리가 없었다.


특히 자신의영혼과 정신 일부를 잘라내 호문클루스를 만들었던 탓으로, 더욱 영혼의 힘이 부족했다.

"크윽...  벌레들 주제에 감히."

히부린은 급히 쇠뇌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왼팔을 겨눴다.
이대로는 육체가 하나가 되어도, 자신의 영혼이 완성된 육체의 유일한 주인이 될 거라는 확신이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자신의 영혼 일부가 어디로 인가 증발한 듯한 감각을 느꼈다.

퍼엉-!


"끄아아악-!"

쇠뇌에서 날아간 탄환이 팔의 살을 파고들며 폭발했다.
자신의 왼팔을 잘라냈다.
피가 튀었지만, 그건 아주 잠시 뿐.
흉측한 팔의 단면이 괴상하게 꿈틀거렸다.
이미놈의 팔은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더 빨랐을지 모르나 지금은 영혼의 힘이 약해진 탓인지 회복이 무척 더딘 것이었다.


세영의 눈에는 히부린이 무언가를 꺼내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포션인 모양이었다.


"하아, 하악. 빌어먹을.  히히히."

그런데도 놈은 웃고 있었다.
영혼의일부를 잃더니 미치광이 증세가 더욱 심각해진 듯이.



이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지켜보던 세영은 시스템 알람 음을 확인하고 퀘스트 창을 열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히부린과 계약 상태이니 공격이 전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확인한 클래스 전용 퀘스트는 어느덧 최종 단계에 진입해 있었다.



[***퀘스트 : 위대한 선구자 히부린]


- 당신은 히부린의 봉인을 해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히부린은 현재 페어리 퀸과 뱀에 의해 그토록 꿈꿔왔던 육체를 얻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심지어 영혼의 일부가 손실 되는 손해까지 입게 되었습니다. 분노한 그에게 플라스크에 담긴 영혼의 존재를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히부린은 인간인 당신의 말에  기울일 것입니다.

-분류 : 협상, 클래스 전용 퀘스트 (연금술 발사자 Lv. 50 이상)
-난이도 : -
-제한 시간 : -
-보상 : ???? (상황에 따라 원하는 보상을 히부린에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과도한 요구는 당신의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지 모릅니다.)
-마지막 단계 : 히부린에게 플라스크에 담긴 영혼을 주입하라.



'드디어...'

그리 기쁘진 않았다.
놈은 자신이 쓰러뜨려야 할 존재이니까.
하지만 받을 건 받아야 한다.
요구할 건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요구가 한 가지  늘어났다.

어느덧 팔을 회복한 히부린이 분노의 공격을 퍼부으려 던 때였다.
그 대상은 당연히 페어리  메르바였다.


"멈춰! 히부린."

세영은 플라스크를 꺼내 히부린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너 지금 이게 필요할 걸?"


메르바와 똑 닮은 히부린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을 가늘게 하고 세영을 바라봤다.

"그건, 뭐지?"
"자기 것도 몰라 보다니. 이거 너의 영혼이라 던 데?"

그제야 히부린은 세영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걸 어디에서 구했지?"
"그 왜, 꾸물꾸물하는 슬라임에게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인간이 무슨 수로..."


세영은 대답 없이 플라스크를 흔들었다.

"설마... 네놈도 연금술사인가?"
"맞아. 스승님."


세영은 TV에서 보았던 서양 귀족 흉내를 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가 가진 연금술 레시피 대부분은 히부린이 남긴 두루마리를 통해 배운 것이니, 그녀가 스승이나 다름 없었다.
히부린의 마스크를 착용하고, 클래스 전직 퀘스트를 시작하게 해 주었던 개조 쇠뇌를 꺼내 보였다.
 정도면 눈치 챘겠지.

"호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인간이 있었을 줄이야. 네놈... 그 쇠뇌를 보니, 나의 숨겨진 동굴을 찾아낸 모양이군. 키히히히히."


히부린은 다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고 갑자기 정색했다.


날카로운 표정으로 세영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걸당장 내놓지 못할까!"

플라스크를 내놓으란 소리였다.


"공짜로 줄 수는 없지. 그리고 너의 봉인을 풀어준 것 역시 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


하지만 히부린은  말을 듣지 않고, 다짜고짜 쇠뇌를 사용해 세영을 공격했다.
영혼을 잃더니, 사고력이 부족해진 모양이다.

키이이잉-!


역시 이번에도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날아오던 탄환은 허공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다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끄아아악-!!


오히려 비명을 지른 것은 그녀였다.
얼마나 고통 스러운건지,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이리저리 굴렀다.
시끄럽게 쿠릉 거리던 천둥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 탓에, 그녀의 비명만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알 수 없는 전류에 휩싸여 끊임없이 신음 했다.

파지지직-.


한참이나 지속되던 그것은, 갑자기 정전이라도  마냥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히부린은 자신의 육체를 통해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포션을 마셔도 고통은 전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는 서로를 공격할 수 없어. 네가 모르는 동안 우리는 계약을나눈 사이거든."


히부린은 조용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인간과 계약을  마음이 없다..."

전기 쇼크 때문인지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쳐있다가 갑자기 제정신이라도 차린 것일까.


세영이 다시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린 이미 계약한 상태야. 하지만 걱정 마. 계약은 간단해. 내가 너에게 이걸 건네주면, 넌 나에게 반대로 보상을 준다. 쉽지?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봉인된 너를 움직이게 만들어   바로 나야."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지금부터 중요했다.
원하는  받지 못하면 모든  수포로 돌아갈지 모른다.

"좋다... 원하는 게 뭐지?"
"일단. 나에게 뭘 줄 수 있는지 말해줘. 스킬이나 특이한 연금술 제작 법 이라 든 가."

띠링!

[보상을 선택해 주세요. 선택과 동시에 계약은 종료됩니다. 다만 보호 상태는 1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을 부린 뒤 되돌아오는 후폭풍을 감당해야 하는  역시 당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아이템은 타인에게 양도 및 거래가 불가능합니다.


1. 히부린의 개조 쇠뇌 -<전설 등급>
2. 마력 탄환 및  부가 재료 연금 레시피
3. 폭독 탄환 및 그 부가 재료 연금 레시피
4. 히부린의 로브 - <전설 등급>
5. 키메라 및, 관련 재료 연금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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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보상들.
무엇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종류의 아이템 목록이 보였다.


"전부 줘."
"키히히히. 역시, 인간이란 그런 족속이지."

히부린은 당연하단 듯이 웃어 댔다.


"미안... 농담인데믿었어?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건데."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전부 다 탐이 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다른 거야."
"그게 무엇이지?"

세영은 말을 이어갔다.

"일단, 밖에 있는 내 동료들을 공격하지 마. 적어도 오늘 하루는. 그리고 메르바를 포함한 페어리들 역시 마찬가지야. 이걸 계약하자. 너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마족이 하는 말을 믿을 수는 없으니까. 가능하면 파르도  전체를 손도 대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대신 우리도 네가무얼 하든 건들지 않을게. 어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히부린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빨리 선택해 줄래? 바쁘니까."


결국 히부린은 세영의 말대로 계약을 했다.
지속 시간은 앞으로 24시간.
게임 시간으로 4일 이다.


세영은  시간 안에 놈을 쓰러뜨릴 채비를 갖출 생각이었다.

"이제, 당장 나의 영혼을 내놔라."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이미 계약은 시작되었다. 주지 않는다면 당장, 이 페어리 퀸의 목을 자를..."


히부린의 말을 급히 막아 서며 대꾸했다.


"걱정 마. 계약은 따를 테니까. 아까  보상 있지? 그거 전부 줘. 그럼 바로 너의 영혼을 건네줄 테니까."

히부린은 얼마나 황당했는지, 전혀 마족 답지 않은 표정을 해왔다.
애초에 아름다운 페어리의 외형이지만 그 표정은 세영을 심히 경멸하는 듯하였다.

"설마... 그걸 노리고 계약을 먼저 진행 한 것이냐?"
"맞아."
"크흐흐흐흐흐. 역시 인간이란..."


세영 답지 않은 속임수였지만, 김만우가 방송 출연한 모습을 지켜보며 배운 것이다.
순수한 그는 뭐든지 빨리 흡수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게임 속의 적을 상대로는 매우 냉혹했다.


히부린은 비릿한 미소를머금고 말했다.


"이봐 인간.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쿠히히히. 물론, 지금 당장 나에게는 영혼이 필요하지만,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야. 후히히. 그건, 계약에도 없던 이야기. 난 이대로 계약한 시간 만큼 여기서 지체해도 그만 이야. 그럼 너는 계약을 어긴 셈이 되니 죽게 되겠지. 난 그 다음에 네 손에 들린 영혼을 얻으면 그만 이고."
"내가 플라스크를 파괴하면?"
"그럼, 넌 죽게  텐 데?"

여유를 찾은 히부린은 머리가 제법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법은 사용하지 못해도, 두뇌가 뛰어난 마족이었다는 이야기는 진실인 모양이다.

하지만 세영 역시 모든 걸 가질 욕심은 없었다.
아니, 욕심은 있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일이 진행될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럼, 하나만 안돼? 쇠뇌..."
"크후후후.  그 정도야 주겠다. 이제야 고분고분해졌군.귀여운 인간. 이히히히히."

결국 전설 등급의 개조 쇠뇌를 받기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신규 스킬이 없었던 점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만우형 말이 옳았어. 먼저 크게 지른 뒤에 나중에 불쌍한 척 최소한의 요구를 하면, 없던 떡도 굴러온다는 말...'


이미 계약을 끝마쳐, 히부린이 세영에게 추가 보상을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김만우의 조언대로 행동했더니 무려 전설 등급의 무기를 얻었다.
세영은 좋은 형을 얻은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오전에 할머니 병원비도 그렇고 말이다.

[플라스크의 영혼을 히부린에게 주입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다가가 호문클루스 연성 스킬을 사용하면 됩니다. 자신의 영혼을 다시 합치는 능력은 히부린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꼭 당신이 직접 사용해야만 합니다.]

세영은 히부린에게 다가갔다.
이제 협상이 종료되었으니, 시간이 급했다.
밖의 상황도 전혀  수가 없었고, 동료들이 언제까지 거울을 지켜낼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이제 1초도 낭비할 수 없었다.

"연성!"


[히부린의 육체에 플라스크 안의 영혼이 빨려 들어갑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연성 하는 것은 금기 입니다. 스킬 사용의 부작용으로, 연성 중인 영혼의 일부가 당신에게도 흡수되고 있습니다.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뭔 소리야 이게?'


퀘스트라고 시키는 대로 했더니 이게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세영은 몹시 황당했다.

[영혼이 히부린의 몸에 제대로 정착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마족과 나눈 계약의 달성도가 상승합니다.]


24시간 동안 공격 불가 계약 조건은,히부린 뿐만 아니라 세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영도 앞으로 24시간 동안은 히부린을 공격해선 안 된다.
그 탓으로 영혼을 주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계약의 달성도는 일부만 상승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부작용.
말이 부작용이지 사실은 히든 보상이나 다름없었다.

[호문클루스 '히부린'의 영혼 일부를 흡수한 부작용으로 신규 스킬이 강제 추가되었습니다.]



[ 스킬 : 마나 탐식(도핑, doping) ]

- <전설 등급>
- 스킬 발동 시 일정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주어진 시간 동안 마신 모든 마나 포션의 수치 만큼 최대 마나량이 증가합니다. 증가한 마나량은 사용하기 전까지 그 수치를 유지합니다.
다만, 사용하는 양 만큼 최대 마나량은 다시 감소하며, 최종적으로 원래의 수치까지 되돌아옵니다.
- 스킬 사용 후 후유증으로,일정 시간 마나의 회복이 불가능해집니다. (포션이나 스킬을 사용한 회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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