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108화. 페어리 가든
'조금 아깝지만...'
각성의 포션은, 경매장에 올린다면 최소 수백 만원, 어쩌면 천 만원을 호가할지 모른다.
매물이 존재 하지 않는 지금이라면, 훨씬 더 비싸게 사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영은 그걸 과감히 마셨다.
할머니 수술비 이상의 큰 돈을 통장으로 보내뒀다.
그간 마음 한 구석에서 그를 억누르던 무언가는 이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꿀꺽. 꿀꺽.
[각성의 포션이 전신에 스며듭니다. 일시적으로 잠재력이 폭발합니다.]
[당신은현재 실체가 없는 영혼 상태입니다. 효과가 대폭 감소합니다.]
- 힘, 민첩, 지능 스텟이 12만큼 상승합니다.
- 이동 속도가 1 상승합니다.
- 효과는 30분 간 지속됩니다. 지속 시간 중, 육체를 되찾더라도 포션의 효과가 원래대로 증가하지는 않습니다.
세영은 전신을 감도는 열기에 깜짝 놀랐다.
환몽의 포션을 먹었을 때와 같은 고통스러운 뜨거움은 아니었다.
'와, 이거 뭐야?'
비록, 효과는 각성 포션이 본래 가진 것의 절반 수준이었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정신적으로도 뭔가 숨겨진 효과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신체가 있었다면 갑자기 근육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무언가가 깊숙한 곳에서 솟아 오르는 듯 했다.
나무 꼭대기를 향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렇게 포션에 도취되었을 때였다.
<알파. 여기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소리는 이전과 다르게 머리 속에서 지잉- 하고 울렸다.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꼈다.
각성의 포션에 환각 증세라도 있는 건가 싶어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었다.
"으윽... 뱀... ?"
<내가 길을 안내해 줄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뱀의 목소리가 틀림없다.
흔들던 고개를 멈추고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뱀? 근처에 있니?"
주변은 온통 빛나는 열매 뿐.
목소리가 도대체 어디서 들려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 들려왔다.
정말 각성의 포션을 마신 탓으로 그런 건가 싶었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여기야. 이리로 와. 서둘러 줘.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슬픈 향기가 묻어 나는 목소리였다.
그 슬픔이 무엇 때문인지 세영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 2 : 11 ]
또 순식간에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고대 마족 히부린이 반복해서 마나 흡수를 사용 중인 탓이다.
저 멀리 새까맣게 변해버린 나무의 가지... 아까 보다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됐다.
"안내 부탁할게. 그러니 뱀! 어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페어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환경에는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페어리트리에맺힌 수많은 열매가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의지를 가진 듯 빛의 밝기가 점점 달라졌다.
그야말로 빛의 예술이 세영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그를 어느 장소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부탁해... 오직 당신만 가능한 일이야. 페어리를... 나무를 지켜줘... 그리고 우리의 터전을 지켜줘.>
'뱀...'
뱀. 너는 무사한 거냐 묻고 싶었다.
다시 만날 수 있는지, 아니면 만나지 못하더라도 너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되는 건지.
그러나 지금은 이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1초라도 서둘러 이동해야만 한다.
세영은 포션을 마시고 각성한 덕분인지, 이전보다 제법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동하며 생각했다.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뱀의 것이었지만, 자신이 알던 그녀와는 어딘가 달랐다.
사실, 거울 속 세계에서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뱀은 매우 밝고, 개구쟁이인 페어리였는데...'
물론, 누구라도 상황에 따라 행동과 말투가 달라지는 법이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언제나 웃고 장난을 친다면, 그 쪽이 오히려문제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세영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들려온 목소리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뱀 그녀가 하는 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뭐라고해야 할까...
무언가... 마치, 페어리 퀸이나 페어리트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세영은 그 이유가, 뱀이 메르바와 정신 동조를 이룬 탓이 아닐까 추측했다.
열매가 반짝이던 구간을 지나 더 높은 곳까지 올라 왔다.
거기서 또 다시 조금 더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음?'
가까운높이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무의 기둥을 마치 꽈배기처럼 감싸며 자라나 있었다.
나무의 연한 줄기 같기도, 덩굴 같아 보이기도 했다.
페어리트리의 두께와 비교한다면, 초라해 보일 정도로 매우 가늘었다.
하지만 세영에게는 충분히 두껍게 느껴졌다.
페어리트리가 지나치게 거대한 탓에 그리 보인 것이지, 실제로는 세영의 몸통 만큼은 되어 보였다.
심지어 얼핏 보기에는 거대한 아나콘다 인줄 착각이 들 정도였고 말이다.
세영은 가까스로 그 줄기를 붙잡고 위로 올라섰다.
이제 나무의 꼭대기가 멀지 않았다.
'이쯤 아닐까? 열매가 나무 맨 꼭대기에서 자라날 리도 없고...'
그때였다.
세영이 밟고 올라선 그 줄기가, 갑자기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줄기보다 더 가는 수많은 줄기가 그를 향해 뻗어 오기 시작했다.
"뭐, 뭐지?"
당황한 세영은 급히 전투 태세를 갖췄다.
누라라와 벌였던 전투를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
줄기는 세영이 아닌 메르바를 향해 뻗어온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를 숨이 막힐 듯이 칭칭 감더니, 저 위로 데리고 올라갔다.
세영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 : -- ]
퀘스트의제한 시간은 더 흐르지 않더니, 갑자기 종료되었다.
'뭐지? 이 걸로 클리어 한 건가?'
우우웅-
퀘스트 창을 확인 하려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시작됐다.
마치 나무가... 페어리트리가 울기라도 시작한 줄 알았다.
이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나무가, 선선한 바람에 흔들리듯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저 위에선 메르바를 감싼 줄기가, 페어리트리와 그녀를 칭칭 감더니 스윽 하고 나무 기둥으로 스며들었다.
스며든 건 줄기 뿐만 아니었다.
메르바도 함께 모습을 감췄다.
'뭐지?'
세영이 당황해 그곳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무엇보다 영롱한 빛을 내는 하나의 열매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아마도 저 열매가 페어리 퀸의 열매이리라.
"와..."
무심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만큼 신비한 열매였다.
오색 빛깔?
아니 그 이상이었다.
정말 수 많은 빛이 아름답게 스며 나오고 있었다.
드드드드드.
이윽고 진동과 함께, 페어리트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김갑부님! 이건... 대체 뭐, 뭐죠? 갑자기 땅이..."
"저도 모릅니다. 저라고 다 알겠습니까?"
생방송 도중 갑자기 대지가 떨려왔다.
마치 섬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지진 아니야? 여기 화산 섬 같은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야, 그게! 화산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고."
"그건 모르지. 휴화산 같은 거였을 수도 있잖아? 흉악한 마족이 화산을 다시 폭발 시킨다! 게임 스토리로 그럴 싸 하지 않냐?"
아이들은 배운 그대로 머리를 양 손으로 가리고 지하 묘지 건물에서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입은 쉼 없이 떠들고 있었다.
다양한 의견을 쏟아 냈지만, 정답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놀랐는지, 먼 곳에서 도시 주민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그쪽은 난리가 난 모양이다.
이들이 있던 장소가사람이 뜸한 궁전의 뒤편인 것이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전히 상공의 히부린을 비추던 생방송 화면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저, 저것 좀 보시죠."
"너무 흔들리는데, 화면 떨리는 것 좀 어떻게 안됩니까?"
"네? 하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생동감이..."
"됐고,빨리요! 토할 거 같으니까."
"아, 네."
그제야 화면에 선명히 보이는 고대 마족.
히부린은 손으로 잡았던새까만 나무의 줄기를 놓았다.
"뭐가 달라요? 이제 마족 씨앗인가 뭔가 꺼내는 건 똑같잖아요?"
"아닙니다. 벌써 몇 초 동안 저러고 있습니다."
노랑나비가 끼어들었다.
"BJ아저씨. 화면 멀리 해 봐요. 줌 아웃이요."
"아... 네."
BJ군만두가 콕핏의 설정 값을 변경하자, 화면에 비친 히부린이 점점 멀어지며 작게 보였다.
새까만 페어리트리의 나뭇가지 전체가 화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
"저것 봐요. 새까만 나뭇가지가 흰색으로 변하고 있어요. 저거 원래대로 돌아오는 중인 거죠?"
이들 중 페어리트리의 본래 색을 아는 이는 없었다.
"글세. 그래도 검정색 보다는 보기 좋네. 검정 색은 꼭 하늘이 쪼개진 것 같더니."
변화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히부린이 뭔가 시작했어요!"
[고대 마족 히부린이 스킬 '화염구 Lv. 10'을 사용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히부린의 머리 위에 거대한 불덩이가 나타났다.
그 불덩이는 점점 더 크기를 불려 가더니, 결국 히부린 보다 서너 배나 거대해 졌다.
슈웅-
완성된 거대한 그 불덩이가 던져 졌다.
마치 거대한 운석이라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콰앙-!!
지켜보던 모두는, 그 불덩이가 공중에서 갑자기 폭발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히부린의 목표는 다름 아닌 페어리트리였던 모양이다.
화르르르-
지금껏 사람들에게는 페어리트리의 극히 일부분.
마나를 빨려 새까맣게 변했던 부분과, 다시흰색으로 되돌아간 나뭇가지가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히부린이 쏘아 낸 거대한 불덩어리가 폭발하며, 불타고 있는 페어리트리의 나무 기둥이 인간 세계에 그 형상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
가히 놀라운 장면이 아닐수 없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꺼져 버렸고, 그을렸던 부분이 사라지며 흰색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뭐야... ?"
"자가 치유라도 하는 모양인데요? 정령수? 세계수? 하는 나무만의 능력 뭐 그런 건가 봐요."
"그런데, 왜 일부만 보이는 거지?"
"그야, 본체가 아스트랄 계에 있어서 그런 거겠죠. 그러니까 알파 오빠도 거기로 떠난 거고."
[고대 마족 히부린이 스킬 '마나 흡수'를 발동했습니다.]
히부린은 다시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 또 저거야? 대체 뭐냐고! 정말로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알파 이놈은 왜 또 깜 깜 무소식이야!"
김만우는 외쳤다.
이대로 가다가 이번 방송은 망할 판이었다.
물론 당장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 시청자들은 열광 중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어떻게 변화할지 전혀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는 상황.
그것이 그의 심기를 강하게 건드렸다.
'이런 이벤트가 맨날 오는 것도 아니고. 이 기회에 콕핏 살 돈 마련해야 하는데...'
"저기... 김갑부님. 이제 놈은 씨앗을 전부 써버린 걸까요? 마나 흡수를 멈추지 않는데요?"
"예?"
화염구를 날린 히부린은, 간간히 반복하던 고대 마족의 씨앗을 발아 시키던 걸 멈췄다.
그저 하염없이 마나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나뭇가지가 검게 물들고 있다.
하얗게 회복되었던 부분은 순식간에 다시 검게 변했고, 이윽고 불덩이가 폭발했던 나무 기둥까지 번져갔다.
페어리트리의 거대한 나뭇가지 하나가, 통째로 새까맣게 변해 버린 것이다.
"이제, 저게 나뭇가지라는 사실이 만 천하에 공개 됐네요. 그나 저나 엄청 거대한 나무네요. 겨우 가지 하나가 이렇게 거대할 줄이야."
새까매진 나뭇가지는 파르도섬 일부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다.
"대체, 마나를 얼마나 빨아들인 거야?"
"나도 그게 더 걱정이야. 우리가 저걸 상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잡았던 네임드랑은 차원이 다른 것 같은데..."
우우우웅-
"뭐지?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뭇가지를 타고 간 검은 물결이, 페어리트리의 나무 기둥에 퍼지려 할 때였다.
섬 전체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웅장했지만, 고막이 떨리는 형태의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마음을 흔드는 그런 울림이었다.
[페어리의 신목. 페어리트리가 새로운 여왕의 탄생을 알리는 축복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저 먼 곳에서는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고막을 찌르는 비명.
마나를 흡수 중이던 히부린이 바닥으로 추락 중이었다.
놈의 전신은 새하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