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122화. 축제를 즐겨라 (1부 완결)
세영은 이필혁이 직접 손질해준 머리가 너무 어색했다.
거울에 비친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옆에서는 호평 일색이었다.
"이봐. 인물이 훨 살잖아요."
"맞습니다. 디자이너님. 처음 오셨을 때랑전혀 다른 분 같습니다. 다만 옷이..."
"우리 제로님. 할머니 병원에 가신다고 하셨죠? 그럼 옷도 제대로 갖춰 입고 가셔야지. 이대로는 50점이야."
그 물음에는 김만우가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이놈은 워낙 답답한 놈이라,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항상 이런 차림일 거에요."
"어머~ 호호호.요즘 그런 사람이 흔치는 않지."
이런 식의 대화가 머리 손질을 받는 내내 이어졌다.
그리고 예약 손님이던 남자는 옆에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다른 디자이너가 열심히 자신의 머리를 손질해 줬지만, 온신경이 그쪽으로 쏠려있었다.
'저 거지 꼴을 한 남자가 대체 누구라고 저러는 거야?'
황당해 따지고 싶었지만, 이필혁 디자이너의 눈치가 보였다.
저 디자이너는 자신이 갑질 할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유명세면 유명세. 돈이면 돈. 인맥이면 인맥까지. 무엇 하나 자신보다 부족한 게 없는 남자다.
자칫했다가 자신만 개망신 당하리라.
그는 디자이너 이필혁이 자신의 머리는 손도 안 대고 제로라는 자를 맡는 걸 보고 기분이 상했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얼마인가요?"
"우리 사이에 무슨 돈이야. 섭섭하게."
"네? 우리 사이요?"
"어머. 이런 말 하려니 조금 부끄럽네. 흠, 흠. 우리 파르도 섬의 영웅을 상대로 어떻게 돈을 받겠어. 안 그래?"
"하하... 그 퀘스트는 다 같이 한 거죠."
"아우~ 겸손까지 하시고, 너무 귀엽다."
이필혁은 세영을 향해 눈을 찡긋 해왔다.
"음? 왜 그러십니까?"
세영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보통 이필혁이 초면인 남자에게 그렇게 하면 기겁하거나 당황하는데, 세영은 그러지 않았다.
"이야~ 이거 반응이 너무 신선해서 자꾸 빠져드네. 아무튼 오늘은 공짜니까 그냥 가도록 해요. 파르도 섬에서 만나면 모른 척 하지나 말아 달라고. 알았지? 그리고 할머니 빨리쾌차 하셨으면 좋겠네요."
"네. 정말 감사했습니다."
김만우와 세영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정말 신기하신분이시네요. 양 팔에도 이상한 그림이 가득하고."
"하아... 뭐 어쨌든 무사히 빠져나왔네."
"네? 무사히 요?"
"아니다. 이제 옷 고르러 가자."
둘은 이어 근처의 명품 의류 브랜드 매장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티와 바지부터 전신의 옷을 구입했다.
"네? 얼마요?"
세영은 결재 할 때 엄청난옷 가격에 크게 놀랐다.
구입을 망설일 정도의 고가였다.
그러나 김만우가어제 팔린 전설 지팡이 '고블린의 눈동자' 낙찰가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설득 당했다.
결국 구입했고, 가게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결코 세련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둘의 모습은 집을 나올 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 사이 바버샵 에서는.
"저기. 사장... 아니, 디자이너님. 아까 그분들 유명한 사람들 인가요?"
"정말, 대한민국에서 가장 트렌디 해야 하는 곳에서 일 하시면서 그것도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네?"
"웹튜브 좀 보세요. 지금 대한민국은 물론전 세계에서 난리 난 상황이니까."
직원인 그는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웹튜브에 접속했다.
그리고 실시간 인기 동영상을 클릭했다.
가장 첫 번째로 보인 동영상.
영상의 섬네일(thumbnail)에는 방금 나간 손님과 똑 닮은 얼굴이 보였다.
'헉. 설마...'
영상 게시가 시작된 지 약 10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조회수가 자그마치 2억을넘겼다.
판게아 행성 플레이어는 물론, 가상 현실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K팝 그룹도 뛰어넘는 엄청난 속도였다.
그는그 영상을 클릭했고, 끝날 때까지 폰 화면에서 시선을 땔 수 없었다.
완전히 몰입했다.
"저기... 저기요. 이봐! 계산 안 받을 거야?"
옆에서 계산하려는 예약 손님의 부름을 듣지 못할 정도였다.
"대체 뭘 보길래..."
궁금해진 남자는 옆에 서서 영상을 함께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은 모든 영상이 종료 될 때까지 그자리에 서있었다.
"이거... 아까 싸인 좀 받아둘 걸 그랬네..."
예약 손님이 비용을 계산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
"아이구 이게 누구야, 우리 손주~. 며칠 새 못 알아보게 달라졌네?"
"응. 할머니. 머리도 하고, 옷도 새로 샀어."
과일 바구니를 내려 놓은 김만우는그 모습을 지켜 보며 조금 부러웠다.
자신도 저렇게 응석 부리고 싶었다.
할머니는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그런 김만우를 불러 꼬옥 안아주었다.
"우리 손주 친구. 세영이 도와줘서 고마우이."
"아, 아닙니다. 항상 제가 도움 받는 입장이라서... 하하."
김만우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렸다.
할머니가 여성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세영은 그런 그를 놀렸다.
"우리 할머니도 여자긴 하지만... 형 진짜 그거 문제 아니에요?"
"시끄러워 인마! 할머니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앗?간호사 누나. 오셨어요?"
"뭐?"
김만우는 급히 입원실의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연 건 세영이었다.
"너, 진짜... 이,"
욕을 하려다 급히 멈췄다.
"형 욕하려고 그랬죠? 할머니~ 형이 욕했어."
"아, 아닙니다. 할머니 오해세요."
할머니는 조용하게 미소 지었다.
"둘사이가 정말 좋은 모양이니 다행이구나."
이곳은 병원이었지만 김만우도 이세영도 이 장소가 서울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라고 느꼈다.
"그래. 어인 일로 이렇게 금방 찾아왔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 할미야 손주 얼굴 자주 봐서 반갑지만."
세영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실은 할머니 수술비 전부 마련 했거든. 이제 할머니 보러 매일 올 거야."
"그새? 그 큰 돈을?"
"야, 할머니 놀라시겠다. 앞뒤 자르고 말하면 어떻게 해."
김만우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입원실에 놓여 있던 대형 TV를 사용해 웹튜브의 영상을 틀었다.
"조금 번쩍거리고 시끄러우실지도 몰라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우리 손주가 나온다는 데 시끄럽고 눈 아파도 봐야지."
영상이 시작됐고, 화면에는 세영이 등장했다.
하늘을 날기도 하고, 괴물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께서 놀라시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김만우가 먼저 생각한 일이었지만, 이세영이 방송에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건 오직 할머니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위험한 짓 하지 않고, 게임 해서 돈을 벌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우리 손주. 게임 한다고 해서 어떻게 돈을 버나 걱정했더니, 아주 영화배우가 따로 없네? 섬 사람들이 알면 깜짝 놀라겠어."
"헤헤. 안 그래도 며칠 안으로 섬에 갔다 오려고. 빌린 돈도 돌려드려야 하고."
"잘 생각했구나. 우리 손주 다 컸어. 이 할미는 이제 걱정이 없어요."
할머니는 세영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세영은 조용히 눈을 감고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그럼 대화 나누세요. 저는 수술비 완납 하고 올게요."
김만우는 그렇게 말하고 문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가득 피었다.
"자! 수술비 내고 남은 돈으로 콕핏을 사 볼까?"
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수술비를 내고도, 콕핏을 사고도 더 많이 남을 만큼!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이 벌게 될 것이다.
"음? 수술비 완납 하러 오신 거 아니셨어요?"
"..."
원무과에있는 여직원이 물었다.
김만우는 딱딱하게 얼어버렸다.
그는 아직도 여자 앞에만 서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
파르도 섬에는 축제가 한창 이어졌다.
도시도, 헌터 마을도, 그리고 풍차 마을도.
축제의 분위기로 한껏 달아오르고 있었다.
"건배!"
"하하하. 술 끊은 지 2년 인데, 게임 안에서 마시게 될 줄이야."
"술을 마시긴 한 것 같이 알딸딸 한데, 취한 게 아니라는 게 더 신기하지."
"꺄아-! 페어리 너무 귀여워!"
"춤도 추네? 나도 날개 갖고 싶다."
"불꽃놀이는 오늘도 하나? 성벽 위에 올라가서 보고 싶은데 아마 자리 없겠지?"
"포기해라. 어제도 자리 없더라. 그리고 가봐야 다 커플이다."
여기저기 시끌벅적함은 계속 되었다.
즐기는 사람은 즐기고, 이 기회를 틈타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레벨을 올리기도 했다.
파르도 섬은 현재, 사냥터도, 도시도, 마을도 붐비지 않는 곳이 없었다.
김만우의 예상과다르게 신규 플레이어들은 온통 파르도 섬으로 몰려 들었고, 정기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찾아 온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정기선은 마나를 사용하는 특수 제작 배라서, 생각보다 빠른 운항이 가능하다고 한다.
대신 요금이 비싸다나 뭐라나.
온 섬이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세영은 하늘에 뜬 거대한 달의 은은한 빛을 받으며, 혼자 조용히 자신의 밭을 향했다.
보상으로 받은 열매를 심기 위해서였다.
'와, 정말 넓구나.'
개간을 끝마친,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된 거대한 땅.
그 가운데에 메르바에게서 받은 열매를 심고자 나왔다.
"여기가 딱 중앙이려나?"
지도와 레이더 시스템을 열어 확인하니, 얼추 맞는 것 같았다.
"뭐가 자라날 지 모르겠지만... "
세영은 그 장소에 조심스레 열매를 뭍고, 물을 주었다.
그냥 물이 아니라, 연금술 제조에 들어가는 마나수였다.
"빨리 자랐으면좋겠네. 게임이니까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진 않고."
세영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게임을 시작하고 겨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많게 만 느껴지던 할머니의 수술비를 모두 모았다.
김만우라는 좋은 형도 알게 되었고, 게임을 통해 한 살 어린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고마워."
세영은 허공에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건강해지실 거라는 게 감사했다.
"흥. 날 잊어버린 주제에."
세영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뱀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그 어디에도 페어리가 보이지 않았다.
"뱀?"
대답이 없었다.
세영은 혹시나 싶어 발밑을 확인했다.
열매를 심은 장소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정령의 나무가 싹을 티웠습니다.]
[농사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마나를 주입하면 성장 속도가 증가합니다.]
"뭐지?"
세영은 소지한 마나 포션을 꺼내, 땅을 뚫고 솟아난 작은 새싹에게 부었다.
놀라웠다.
마나를 머금은 새싹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세영은 포션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리 많은 포션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포기했거나 시간을 들여 자연스럽게성장하길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영은 어떤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성장을 촉진 시켰다.
새싹은 어린 나무가 되고, 어린 나무는 점점 자라났다.
그리고 그 크기를 키우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나무가 자라났다.
[성장 중인 정령의나무]
- 마나를 머금고 빠르게 성장 중인 정령의 나무입니다. 마나를 충분히 머금은 상태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단계 성장을 끝마칠 것입니다.
세영은 나무가 자라나길 기다렸다.
나무는 놀라운속도로 성장했고, 어느덧 누라라의 거목 만큼이나 거대해 졌다.
"우와..."
[정령의 나무가 1단계 성장을 끝마쳤습니다. 2단계 성장을 위해서는 조건을 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였다.
하늘 먼 곳에서 작은 빛이 반짝거렸다.
빛은 둘이 되었고, 셋, 넷이 되더니 수없이 늘어났다.
그 빛은 하늘높이 보이는 페어리트리의 빛과 닮아있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 빛은 세영이 있는 장소로 다가왔다.
그 빛의 뒤로 불꽃이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도시에서 불꽃 놀이를 하는 모양이네."
세영이 그런 감상을 하는 동안 빛은 어느새 세영의 곁으로 날아왔다.
날아온 건 다름 아닌 페어리.
수많은 페어리가 아름다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안녕."
"이런 장소에 정령수라니. 네가 심은 거야?"
"인간이 심었다고?"
"안녕, 인간?"
페어리들은 인사하며 세영이 심은 정령의 나뭇가지에 걸터 앉았다.
아직 밋밋했던 나무가, 페어리의 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나무의 꼭대기 근처에, 또 하나의 작은 빛을 내는 열매가 맺혔다.
페어리 가든에서 보았던, 페어리 퀸 메르바의 열매와 비슷했다.
크기는 한참이나 작았고, 수십 가지의 영롱한 색을 뿜어대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나 닮은 열매였다.
이윽고 나무에 내려앉았던 수많은 페어리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페어리트리의 노랫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새로운 정령수의 주인이 탄생하였습니다. 페어리트리가 탄생을 축하하며 축복의 노래를 부릅니다.]
세영이 심은 정령의 나무.
그 열매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
온 몸이 눈부시게 빛나던 그 존재는 가장 먼저 세영의 앞으로 날아왔다.
한 동안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알파."
"뱀?"
"그래. 위대한 뱀 님이야. 뭐하고 있어? 얼른 뱀딸기를 달라고!"
세영은 놀라 큰 눈으로 뱀을 바라보다가 치아가 가득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 안 그래도 만들어 둔 뱀 딸기 주스가 수백 병이나 있다고! 넌 아직 주스는 못 먹어 봤지?"
"흥. 내 입맛에 안 맞기만 해봐. 바보 인간!"
뱀이 돌아왔다.
그것도 세영의 허브 농장 가운데에 심은 정령의 나무. 그 나무의 수호자가 되어 다시 태어났다.
-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