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집착남주의 전부인이 되었다2020.12.05.
허리까지 찰랑이는 흑발에 별처럼 아름다운 벽안을 반짝이는 여인이 정원 중앙에 앉아 있다. 그녀는 칼라일 공작부인. 예쁘기보다 아름답고, 얌전하기보다 도도하며, 온몸에서 퇴폐적인 미가 철철 흐르는 미녀였다. 맞은편에 앉은 여러 명의 중년 귀족들은 여인의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이 혈연으로 묶여 있는 칼라일 공작저는 황실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로, 30대 황제의 막내 황자였던 에르빈 칼라일이 공작위를 받아 가문을 창설한 것이 그 시초였다. 가문이 다산의 축복을 입을 거라는 황제의 덕담과는 달리, 칼라일 공작저는 초대 공작이 늦둥이 외아들을 본 것을 시작으로, 6대째 간신히 대를 이어오고 있었다. 대대로 칼라일 공작들은 다른 귀족들보다 일찍 결혼을 하는데도 손이 귀했고, 매번 새로운 가주가 공작위를 이을 때마다 혈족들은 후계자에 대한 걱정으로 애를 태웠다. 그리고 현 칼라일 공작 또한 그러했다. 칼라일 가문의 혈족인 그들은, 어제 칼라일 공작과 흐지부지한 대담을 끝마친 참이었다. 마침 공작부인을 마주하니 어제의 대담이 떠올랐다. 대담의 주제는 칼라일 공작저를 이을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4년 동안. 후사에 대해 의문을 던지던 친척들에게, 페르빈 칼라일 공작은 날 서린 시선을 쏟아냈었다.
“국가 간의 협약인 결혼 기간도 아직 다 끝나지 않았소만, 다들 성급하기 그지없군.”
“결혼 4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기미도 들려오지 않았으니 걱정되는 것입니다. 혹 부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으셔서 그러신 거면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면 더 이상 부인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신 겁니까? 그런 거면…….”
“내가 아니라 이르웬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나를 피하는 건 늘 그쪽이었으니까.”
칼라일 공작의 잘생긴 얼굴에 일순간 수심이 드리웠다. 윤기 나는 백금발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었고, 날카로운 녹안에는 그림자가 져 있었다. 남자들은 다들 그의 기분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일 공작부인이 늘 신경질적으로 굴고, 남편은 상대도 하지 않으며 이따금 폭언을 일삼는다는 것은 칼라일 가문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사악한 눈빛으로 남편을 잡아먹을 거라고, 이따금 사용인들이 말한 적도 있었다.
“공작부인의 불같은 성미를 당해낼 자, 누가 있겠습니까. 저희도 잘 압니다. 저희가 황제께 탄원서를 올려 이혼을 촉구하고 다른 분과의 재혼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다들 칼라일 가는 손이 극도로 귀한 것을 알 것이니 폐하께서도 그 정도는…….”
“5년도 안 되어 이혼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요. 아직 1년이나 남았는데, 나더러 국가적 조약을 어기란 말이오?”
“하지만 하루빨리 후사를 보셔야 하는 상황입니다! 대대로 칼라일 공작들은 나이 스물다섯을 넘어 후계자를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전하께서는 당장 올해 스물다섯이 되셨습니다. 점성술사도 내년까지 아이를 가지지 않으면 영영 후계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른 제대로 된 공작부인을 맞아들여 후사를 보셔야 합니다.”
“나는 아버님이 나이가 마흔 되던 해, 태어났다 알고 있소만.”
“그래도 전대 공작님께서는 그 전에 여러 레이디들과 사랑을…… 친분을 쌓기라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공작님께서는 마치 수도사처럼 청렴한 생활을 지속하시니까…….”
가신들은 칼라일 공작의 자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단정한 제복 속 숨겨진 짐승 같은 야성미는 제국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을, 왜 본인만 활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울끈거리는 저 목울대, 살짝 걷어 올린 팔뚝에 보이는 탄탄한 잔근육, 밑으로 끌어내린 목깃 아래로 보이는 아찔한 가슴근육을 좀 보라. 그의 눈에 들려고 안달 난 여성들만 수백이었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칼라일 공작이 아내가 있다며 칼같이 쳐내는 것도 현재 진행형이고. 막말로, 마음만 먹으면 그가 여자를 꼬셔 아이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칼라일 공작은 혈족들의 이러한 닦달에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이를 만들 정도의 힘은 있소. 아직 후계자를 맞이할 때가 아닐 뿐이오.”
“하지만 점성술사가…….”
“했던 이야기, 또 듣고 싶지 않으니 어서 나가시오!”
결국 칼라일 공작의 불같은 분노만 뒤집어쓴 채 칼라일 가의 남자들은 성과 없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 칼라일 공작부인이 그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칼라일 가문의 혈족들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면서 그들을 부른 공작부인의 분위기는 살벌했던 평소와는 사뭇 달랐기에. *** 한참 동안 차만 홀짝이며 마시는 사람들.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 이어지자, 결국 가신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부인, 저희를 왜 보자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르웬 릴리아스, 이국에서 시집온 공작부인은 무심히 시선을 찻잔에서 남자들에게 돌렸다. 그 차가운 눈빛에 중년 남자들이 헙, 하고 몸을 떨었다.
‘오늘은 또 무슨 명령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지금껏 공작부인이 그들을 불러 모을 때에는 이유가 분명했다.
‘베르마 공국에 보낼 금붙이를 모아서 대령하라고?’
‘베르마 공국에 보낼 귀한 보석을 모아서 바치라고?’
‘베르마 공국에 보낼 칼라일 영지의 특산물을 모아서 바치라고?’
항상 친정인 베르마 공국에 모든 것을 퍼주고 싶어 하는 공작부인이 아니던가.
‘공작 전하께서는 마님의 이러한 불법적 행동을 아시면서도 왜 눈감아 주시는지.’
다들 한숨을 내쉬는 그때. 이르웬은 그들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앞으로 베르마 공국에 매달 바치는 특산품은 중지하도록 하세요.”
“……예?”
“그동안 베르마 공국에 매달 바쳤던 보석, 특산품, 금붙이 등등 모든 것들을 일절 보내지 말라 하였소만. 그리고 농민들에게 특별히 말하세요, 앞으로도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며, 그동안은 내가 친정에 대한 정이 너무 지극하여 멍청하게 굴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남자들은 서로를 힐끔거리며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너무나도 반가운 소식이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왜 갑자기 공작부인께서 이런 정상적인 사고를 하시는 거지?’
‘드디어 정상적인 무역을 거치지 않고 베르마 공국에 조공을 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아신 건가?’
‘공작 전하께서 언질을 주신 건가?’
‘아니야, 부인께서 남의 말을 들을 성격이 절대 아니지.’
‘그런데 하루아침에 도대체 왜 저런 정상적인 결정을?’
혀끝까지 궁금증이 차오른 남자들이었지만, 공작부인의 서리와 같은 눈빛에 고개를 퍼뜩 수그리고 말았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나가 보세요.”
이르웬은 남자들이 종종거리며 나가는 것을 쳐다보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에 들어섰던 긴장감은 어디로 가고, 그녀는 뻐근한 목을 팍팍 문질렀다. 카리스마 있었던 아까와는 정반대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이제라도 그만두었으니 속이 시원하네. 얘가 했던 멍청한 짓들은 다 그만두어야 살아남을 수 있지.”
***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지만 피곤함에 찌든 삶을 살고 있었다. 현생에서의 불규칙적인 식사, 쉴 새 없는 알바, 새벽까지 이어지는 고된 일상에 쓰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죽을 듯 기절해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일어났을 때, 무언가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꽃내음, 내가 입고 있는 고급스런 잠옷, 내 몸을 포근히 감싸는 부드러운 이불. 모두가 처음 보는 고풍스러움이었다. 마치 소설 속 귀족저에서나 묘사될 듯한 화려함에, 당황스러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짝 열린 커튼 틈 사이로 달빛이 들어와 방 안을 은은히 비추었다. 혼란스러운 내 시야에 비친 건 붉은 휘장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침대, 나를 덮고 있는 거대한 이불, 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한쪽 팔에 얼굴을 비스듬히 기댄 남자. 나는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찡그렸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과 단추를 푼 늘씬한 상체, 그리고 탐스러운 백금발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잠이 든 듯했다. 경계심에 가득 찬 채로, 침대 저편으로 피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이런 서양풍의 침실은 뭐고, 나는 왜 이런 데 와 있고, 침대 한편에서 자고 있는 이 남자는 또 뭐고? 불안함에 가득 차 이불 속에서 나도 모르게 덜덜 떨고 있던 그때. 참는 듯한 하품 소리와 함께 남자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부자리를 봐주는 듯, 남자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에서 이불을 벗겼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내 머리를 한동안 쓰다듬더니, 곧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어나기만 해, 제발…….”
그의 목소리에서는 체념, 분노, 애정, 집착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는 듯했다. 이불을 잘 정돈해주고, 베개를 바로 해주던 손길에는 다정함까지 묻어 있었기에, 도대체 이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그래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불안감에 떨면서 별생각이 다 들었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잘생긴 것으로 보아, 아마 외모도 잘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눈을 감고 그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나가면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할 요량이었는데, 내 볼에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놀라서 눈을 번쩍 떴는데,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르웬?”
시리도록 차가운 녹안이 흔들리듯 내게 꽂히던 그 순간. 이르웬, 이라는 이름이 내 마음속 깊이 박히던 그 순간. 묵직한 불안함과 혼란스러움이 나를 강타하면서, 시야가 암전되었다. *** 며칠 동안 기절해 있다가, 간신히 깨어났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키자 눈부신 햇살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또다시 똑같은 침실 안이었지만 그 남자 대신 고용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그들의 안내로 의사 둴파리 선생의 진찰을 받고, ‘칼라일 공작부인의 몸에는 이상이 없다’라는 진단을 받았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 몸을 살피면서도, 함부로 내게는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내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황궁에 전갈은 보냈지? 주인님은 언제 오신다니?”
“지금 오시는 중이랍니다.”
주변에서 울려 퍼지는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몇 번이고 생각을 정리했다. 기절하기 전 보았던 남자는 나를 ‘이르웬’이라 불렀고, 의사는 ‘칼라일 공작부인’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현실도 아니요, 꿈도 아닌, 소설 속 상황이 분명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가수를 지망하며 열심히 고군분투하던 연습생이었던 내가, 이야기 속 인물이 될 줄은. 내가 빙의한 ‘이르웬 릴리아스’는 인기 로판 ‘페르빈과 스텔라’의 초반부에 등장하고 죽음으로서 퇴장하는 악처였다. 그녀는 패국의 공녀로 테레지아 제국 황실에 바쳐진 제물이었다. 테레지아 제국과 5년간 전쟁을 하다 패전한 베르마 공국에서 화친의 제물로 내건 베르마 대공의 유일한 딸이자 사생아였다. 베르마 대공의 성, ‘릴리아스’도 그녀의 나이, 그녀를 찾아낸 이복 오라비의 추진으로 몇 년 전, 겨우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마 대공의 피를 받은 유일한 딸이기에 테레지아 황실은 화친의 선물로 그녀를 받아들였고, 칼라일 공작과 결혼시켰다. 베르마 공국을 멸망 직전에까지 밀어붙인 잔인한 무법자, 황제의 오른팔이자 제국의 실세, 페르빈 칼라일. 칼라일 공작이 이르웬과의 결혼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통에, 모든 것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소설에서는 이르웬이 페르빈을 증오하다시피 미워했다고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베르마 공국과의 화친의 의미에서 그들 부부는 적어도 5년 동안은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결혼 초기부터 삐걱거린 결혼 생활은 4년 내내 삐걱거렸다. 제일 중요한 후사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건 물론, 이르웬이 공작부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소임을 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이르웬이 집안 하인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건 일상, 사교계에도 일절 모습을 비치지 않고, 심지어는 칼라일 영지의 최고급 특산물을 불법으로 베르마 공국에게 보내고는 했다. 그리고 결혼 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정복자라 불리우던 황제의 오른팔, 칼라일 공작이 침실에서 와인을 마시다 갑자기 쓰러졌다. 그리고 그 배후로 공작부인, 이르웬이 지목되었고, 그녀는 억울함을 항의했지만, 이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베르마 공국에 불법으로 칼라일 영지의 물품을 빼돌려왔고, 늘 남편에게 폭언을 퍼부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유력한 용의자로 만들었다. 그녀가 베르마 공국과 결탁하여 칼라일 공작을 죽이고 그 재산을 빼돌리려고 했다고 제국은 결론지었다. 황실의 친척이자 테레지아 제국의 영웅인 페르빈 칼라일을 죽이려고 한 이르웬 릴리아스가 처형되는 건 시간문제. 억울하다 치를 떨던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약 결혼으로 연이 맺어진 그녀의 남편, 칼라일 공작마저도. 결국 이르웬은 죽음으로 파멸을 맞았지만, 페르빈 칼라일은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던 스텔라 벨 백작 영애와 재혼했다. 왜 하필이면 이르웬의 몸에 들어왔을까, 나는 수없이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이렇게 멍청한 악처의 몸이라니, 그것도 죽음이 예정된 악처라니! 하지만 이르웬의 몸에 들어온 이상 이렇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사용인의 말을 듣자 하니 지금은 결혼 생활이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1년만 조용히 살다가 이혼하고, 위자료로 별장 하나를 받아서 평화롭게 사는 게 목표였다. 그래, 나는 그저 칼라일 공작의 전부인으로 남으리라, 그래서 내 목숨을 보전하리라. 첫 발걸음을 내디디니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것은 속전속결이었다. 현재 내가 ‘이르웬’으로서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잘 살아남을 계획을 세우는 게 급선무였다. 수없이 생각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 일단은 주변에 인덕부터 쌓아, 나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의 시선을 바꾸는 것. 그때, 문이 부서질 듯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빤히 쳐다보는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몸은 좀 어떻나?”
남자는 내 옆에 다가와서는 놀란 듯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급히 달려온 듯 입고 있던 외투는 단추도 다 잠그지 않고, 머리는 바람결에 풀어 헤쳐 엉망이 된 남자. 눈부신 백금발에 큰 키, 늘씬한 체구, 그리고 매혹적인 녹안. 이르웬의 남편인, 이제는 내 남편인 페르빈 칼라일 공작이 분명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침대 한 켠에서 내 곁을 지켰던 게 이 남자였나? 가만히 그를 보고 있노라니 페르빈의 얼굴이 확 굳어지는 게 보였다. 눈을 마주치는 것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제야 소설 속에서의 이르웬의 위치가 위태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추후에 독살사건의 배후로 의심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인물이 아니던가. 겨우 살아났는데 또다시 죽을 수는 없지. 다시는 그런 끔찍한 기분을 맛보고 싶지 않아. 그럼, 일단은 ‘남편을 죽일 만한 여자’라는 악명을 떨치는 게 우선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페르빈이 불편한 듯 눈을 피했다.
“괜찮은 것 같으니, 이만 가도록 하지.”
“저기…….”
나도 모르게 무작정 그의 소매를 잡아서 끌어당겼다. 주변에서는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침묵의 시선들이, 페르빈에게서는 왜 이러냐는 듯 차가운 시선만이 돌아왔다. 아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얼굴은 어디로 간 채, 지금은 적을 보듯 냉랭한 눈빛만이 나를 마주할 뿐이다. 얼어붙을 듯한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왜?”
단답형의 낮은 목소리로 겨우 대꾸하는 그에게,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살고 봐야지.
“고마워요, 이렇게 와줘서.”
용기를 끌어모아 내뱉은 말에 주변에서 놀라서 쓰러지는 소리가 여럿 들린다. 사용인들은 ‘마님께서 어떻게 저런 말씀을…….’, ‘세상에 마님 입술에서 저런 문장을 들을 줄이야.’ 등등의 말을 속닥거리고 있다. 페르빈도 예외는 아닌 것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미쳤냐는 듯 나를 황망한 눈빛으로 보다가, 순간 그의 눈동자가 세게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곧 다물었다. 그는 홱 돌아서 방에서 나가 버렸다. *** 페르빈은 서재에 도착해 벌게진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그녀가 쓰러진 이후에, 밤에 몰래 찾아가며 깨어나 달라고 수없이 속삭였던 것이 이런 결과로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람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잖아. 그는 서재로 따라 들어온 틸리 부인에게 대뜸 물었다.
“기억을 잃은 것 아닌가?”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고 의사는 그랬지만, 마님께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시는 건 확실합니다. 성격도 유해지셨고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하신 점이 그 증거입니다.”
“왜 이제 와서 변한 거지?”
페르빈은 초조한 듯 입술을 베어 물었다. 이르웬이 쓰러진 이후부터 깨어났을 때까지 쭉 간호를 도맡은 하녀장 틸리 부인에게 부인의 상태를 묻고, 또 물었다. 공작부인의 변화된 상태를 궁금해하는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택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몸에 가시를 박은 듯 화난 기운을 늘 두르고 있던 이르웬이 돌연 친절해졌으니, 당연한 것이리라. 게다가 남편은 상대도 안 하던 그녀가, 칼라일 공작을 보고 ‘와줘서 고맙다’라는 말까지 했으니. 초조한 듯 창가를 서성이던 주인을 보고, 틸리 부인이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혹시 마님께서 큰 결심을 하신 것 아닐까요?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사람이 아프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이요. 그동안 본인도 가시에 둘러싸인 삶이 지치셨을 수도 있고, 그래서 주인님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쓸데없는 희망일 뿐이야.”
창가를 통해 들어온 노을빛이 페르빈의 수려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덕분에 얼굴에 물든 그의 요동치는 마음까지 가릴 수 있었다. 며칠 사이 흔들리던 그의 마음은 쉽게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반해 청혼했고, 각오와 함께 결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녀의 냉대로 인해 굳어버린 그의 마음이었다. 4년간 딱딱하게 얼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상처는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얼었던 마음에 한 줄기 금이 간 것 같다. 냉철한 이성을 배신한 심장은 이내 쿵쿵 뛰기 시작한 지 오래다. 이르웬이 그 푸른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본 그때부터다. 당황스러웠지만, 밀어내고 싶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온몸을 지배한 듯,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치겠군.”
*** 그 후 며칠은 평화롭지만 바쁜 나날을 보냈다. 푹 쉬기도 쉬었지만 하녀장인 틸리 부인에게서 저택에 관한 여러 가지 업무를 배웠고, 사용인들을 직접 눈으로 익히고 이름을 불러주며 친절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들은 나의 변한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기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나를 꺼리지는 않았다. 페르빈에게도 나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통 기회가 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오늘 저녁, 오랜만에 칼라일 공작저가 북적였다. 평소 아침을 제외한 식사는 밖에서 해결하고 오는 칼라일 공작이, 오늘은 집에서 먹겠다고 한 탓에 부엌이 분주했던 것. 한솥밥을 먹어야 친해진다고, 그래서 나는 저녁을 그와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마님.”
바구니에 갓 딴 꽃들을 가득 담은 젊은 하녀가 들어왔다. 이르웬의 몸에 들어온 첫날, 모든 하녀들의 이름을 외워버린 나는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이곳 시녀장, 틸리 부인의 조카, 마리앤이라고 했나. 그녀에게 생긋, 웃어 보이자 마리앤은 오히려 불안감에 내 눈을 피했다. 그리고 황급히 자신의 할 말을 전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주인님께서 계시니, 저녁 식사는 언제나처럼 이곳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같이 먹는다고 전해 줘.”
“예……. 예?”
“왜, 같이 먹는 게 이상하니?”
“아뇨, 그건 아니지만…… 두 분이서 같이 식사하시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아니지, 거의 처음일지도 모르겠어요.”
마리앤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하게 손을 떨었다. 나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 입을 준비를 했다. 옷장에서 여러 가지 옷을 뒤적거리다 내 손에 걸린 건 화사한 붉은 드레스. 그래도 처음으로 같이 하는 저녁 식사인데, 좋은 인상을 남겨서 나쁠 것 없겠지. 브이 자로 패인 붉은 드레스를 들고 마리앤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는 거 도와줄래?”
“아…… 예!”
마리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으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이곳에서 눈을 뜬 후로 놀란 표정을 한두 번 보는 건 아니지만, 마리앤은 유독 심하게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내가 무섭니?”
“아니……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마님께선 늘 검은색 드레스만 입으셨었는데 다른 색깔을 고르셔서…… 혹시 마님, 저희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면 의상으로 표현하지 마시고 직접 말씀을 해주세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마리앤이 용감하게 말을 꺼내는 모습에, 나는 깊은 한숨을 애써 삼켰다. 그런 것 아니라고 수없이 말해도 사용인들은 나의 변화된 모습에 지레 겁을 먹었다. 앞으로 행동으로 나의 변화된 모습을 증명할 수밖에 없겠지. 마침내 화장을 할 차례였기에, 화장대에 앉아서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렸다. 마리앤이 조심스럽게 분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이나 분을 찍는 것이 왠지 이상했다. 그리고 눈썹은 숯 검댕으로 진하게 열 번이나 덧바르고. 입술에는 피 칠갑을 하지 않나.
“왜 이렇게 하얗게 칠하는 거니?”
“평소 마님께서 그렇게 화장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썹은 뭐, 숯 검댕도 아니고. 너무 짙은 거 같은데.”
“늘 이렇게 하셨는데요…….”
내가 자신을 시험한다 여긴 듯 마리앤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왔다. 소설 속에선 전혀 묘사되지 않았던 이르웬의 괴랄한 화장법에 나는 치를 떨었다. 차라리 화장 안 하는 게 더 낫겠네. 결국 나는 밀가루에 갠 물에 화장을 몽땅 지웠다. 그사이 마리앤은 바구니에 든 꽃들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머리에 꽂을 꽃을 골라주셔요, 마님.”
“……꽃?”
나는 천천히 꽃을 살펴보았다. 정원에 피어 있던 수많은 꽃들이 바로 이 꽃들이구나. 수많은 꽃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어 나는 잠시 망설였다. 마리앤은 내 눈치를 보더니 새빨간 장미를 집어들었다.
“장미로 꽂아 드릴까요?”
“음……. 그것도 좋지만…… 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구석에 놓여 있던 은방울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향기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좋아하는 나의 꽃, 은방울꽃. 은방울꽃 다발을 집어 반 묶음을 한 머리칼에 꽂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제법 괜찮은 듯했다. 적어도 분장 수준의 화장보다는 맨 얼굴이 낫지. 나는 긴 드레스 자락을 들고 응접실로 내려갔다. 마리앤이 옆에서 내 맨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힐끔거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께 마음의 준비라도 하시라고 전갈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