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런 것도 각오한 것 아닌가2020.12.12.
그동안 날 대신해서 문화제를 열었던 셀레스틴 후작부인에게 이번 축제는 내가 준비하겠다고 전달했다. 내 서신을 직접 전달한 마리앤의 말로는, 그녀가 열 번을 거듭 물으며 이게 정말이냐고 반문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반응을 전하는 마리앤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다들 마님의 변화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많아요. 그런데 그게 나쁜 쪽이 아니라 다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게까지는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부담스럽게.”
“이미 사교계의 눈이 마님께 쏠리고 있는걸요.”
예상대로, 나의 변화는 사교계의 관심사에 올랐다. 그동안 저택 안에서만 칩거하며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공작부인이 사교계의 일에 참여한다고 하니 다들 궁금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 저택의 사용인들이 나의 달라진 태도를 알음알음 소문을 냈는지, 몇몇 모르는 귀족가로부터 파티 초대장이 날아오기도 했다. 나에 대한 외부 평판도 슬슬 올라가는 것 같았고, 저택 내 사용인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이런 나의 변화에 대해 페르빈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다. 과연 나의 변화가 그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것인지, 나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바뀌었는지. 하지만 그를 만나야 그의 반응을 보기라도 하지. 집에서는 통 페르빈을 볼 수 없었다. 황제의 오른팔인 그는 중요한 일이면 늘 불려 다녔고, 나와 한 저녁을 마지막으로 그 후로는 저녁조차 집에서 들지 않았다. 저녁잠이 많은 내가 꾸벅꾸벅 현관 앞에서 졸며 그를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늘 나는 침대 안에서 눈을 떴다. 어젯밤도 늦게까지 현관 앞 계단에서 쪼그려 앉아 기다렸지만, 결국 그를 보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늦은 아침, 포근한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또 실패다’라는 한숨만이 터져 나왔다.
“밤새 현관 앞에서 기다리시는 건 그만하십시오, 마님. 몸을 해치십니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러 오는 틸리 부인이 매번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바삐 준비하며 물었다.
“그이의 기분은 요즘 어때 보이나요? 나를 아직도 싫어하는 것 같아요?”
틸리 부인이 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머릿속에는 말하고 싶은 말들이 가득한 듯, 얼굴에 온갖 표정이 확확 지나갔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헛된 노력을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틸리 부인의 보고를 듣고 아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더 노력해야겠네요.”
“마님, 제가 보기엔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주인님께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틸리 부인은 흡, 하고 입을 다물었다. 누구에게 명령을 받은 듯,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삼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억지로 캐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유도신문은 할 수 있겠지.
“알겠어요. 그럼 이제는 더 이상 앞에서 알짱거리지 않겠다고 전해 줘요. 예전처럼 그의 주변에서는 일절 보이지 않겠다고.”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마님.”
“헛된 노력은 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내 말을 들을수록 틸리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결국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슬쩍 말을 꺼냈다.
“이번 주는 내내 늦게 돌아오실 테니, 마님께서 아무리 기다리신다 한들 소용이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럼 내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군요.”
“마님, 현관에서 늘 잠드신 마님께서 아침에는 침대에서 눈을 뜨시는 이유를 정녕 모르시겠어요?”
집사 알프레드가 옮겨 줬겠죠, 라고 답하는 내게 틸리 부인이 답답한 듯 끼어들었다.
“주인님께서 매번 마님을 품에 안아 침대에 옮기신 겁니다. 찬 바닥에서 마님을 오래 있게 할 수 없고, 다른 이들 손에 마님을 맡길 수 없다며 늘 야근 중에 빠져나오면서까지요.”
생각지 못한 보고에 나는 혹시 틸리 부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후련하다는 듯 나를 보는 틸리 부인을 보고 있노라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그렇지, 참 이상하다. 분명 페르빈은 날 싫어하지 않았던가? 나와 엮이고 싶지 않아 했잖아? 그런데 왜 뒤에서는 날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지?
*** 화려한 황궁. 대리석 테이블에 널린 여러 가지 서류를 바쁘게 처리하던 페르빈과 황제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턱을 괴고 쳐다보고 있던 황제가 손가락으로 탁, 탁 소리를 냈다. 페르빈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바쁘게 깃펜을 놀렸다. 결국 황제가 먼저 입을 열고야 말았다.
“요즘 재밌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사교계에서 칼라일 공작부인의 이름이 그렇게 많이 들리는 건 또 처음이야. 알고 있었나?”
“그자들이 그렇게 떠들어대는데, 제가 모를 리 있습니까.”
페르빈은 지난 며칠간 수없이 뒤에서 수군거린 이들을 회상했다. 황궁 곳곳에서, 여러 사교계 모임에서 들려오는 ‘이르웬’에 대한 소문은 그의 귀에 들어온 지 오래였다.
“칼라일 공작부인 소식 들으셨습니까? 여태껏 본인이 주관해야 할 문화제를 셀레스틴 후작부인에게 넘겨버리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공작부인께서 직접 문화제를 주관하신다고 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공작저에서 일하는 하인들 말로는 그 끔찍했던 독설도 멈추었고, 무엇보다 찌르듯 고약했던 태도도 우아하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쓰러지셨다가 일어나셨다는데, 그 이후로 머리 쪽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일까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외형에도 변화가 생기셨다고 하던데요. 얼굴 자체가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런 변화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어서 칼라일 공작저에서 열릴 문화제에 참석하고 싶군요. 그래야 직접 이 두 눈으로 공작부인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부군이신 칼라일 공작 전하의 반응이 궁금하군요. 황궁에서 뵈었을 때는 여쭤보았더니 별다른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이르웬이 변했다는 소문에 대한 대화는 늘 남편인 칼라일 공작의 진심이 어떨까, 라는 궁금증으로 끝났다. 그때마다 페르빈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왜 궁금하지? 나도 정확히 모르는 나의 진심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흔들리는 자신의 진심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었지만.
“페르빈. 베르마의 공녀께서 뭔가 좀 바뀐 모양이지? 이제는 악처가 아니라 애처라고 불러야 하나? 이제는 그 독설이 멈추었다면서? 그리고 뭐? 매일 밤 자네를 위해 현관 앞에서 기다린다고?”
웃음기가 가득한 황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페르빈은 자신도 모르게 왼손약지의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상한 여자였다. 쓰러졌다가 깨어난 뒤 모든 것이 바뀐 듯한 나의 부인, 이르웬. 그 앵두 같은 입술에서는 악랄한 독설만을 내뱉었는데, 이제는 부드러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늘 두꺼운 화장으로 “나 건드리면 죽는다!”라는 흉흉함을 풍기던 그녀가 이제는 밤마다 현관 앞에서 꾸벅거리며 졸고 있다. 늘 입을 살짝 벌리고 꾸벅꾸벅 조는 채로, 현관 앞 계단에 앉아 있는 그녀다. 그래서 매번 그 자신이 이르웬을 안아 들어 침실로 옮기고는 했다. 하인을 시켜 옮겨도 되는 것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손수 옮기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일이 바쁠 때면 도중에 말을 타고 저택에 와서라도 그녀를 침대로 옮기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힘든 일을 반복하는 건 왜일까. 잠에 잔뜩 취해 그의 품에 안겨서는 토라진 듯 입술을 오물거리는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일까. 침대에 누일 때마다 흐트러진 듯 입술을 살짝 벌리는 그녀의 유혹적인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일까. 이르웬의 이러한 행동을 회상하던 페르빈의 얼굴은 살짝 발개졌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를 괴롭히려는 신종 수법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사람 자체가 바뀐 걸까? 옆에서 그를 보던 황제는 못 믿겠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아주 표정이 확확 바뀌는구먼. 사랑에 빠진 소년도 아니고, 이것 참.”
여러 해 동안 같이했지만, 친동생 같은 페르빈의 이런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기에 놀라웠다. 하지만 낯선 얼굴도,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니었다. 몇 년 전, 황제는 페르빈의 이러한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베르마의 공녀를 처음 만났던 그 날도, 페르빈은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했었다. 늘씬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당황스러워하는 그에게 황제는 가볍게 말을 던졌다.
“셀레스틴 후작저에서 열리기로 했던 문화제도 이번엔 자네 집에서 하기로 했다면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야…….”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던졌지만, 그의 눈빛은 유독 활기차게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도 참석하기로 했네. 물론 황후도 동석할 걸세.”
“폐하!”
원래는 일정에 없는 황제의 방문. 특히나, 황제가 황궁이 아닌 다른 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자 호의다. 물론, 황제에게 페르빈은 친형제보다 더한 친구, 그 이상이었지만. 총각 시절 종종 칼라일 공작저를 드나들던 황제는 페르빈이 결혼한 이후 한 번도 들락거리지 않았다. 혹 페르빈의 결혼 생활에 방해가 될까 염려되기도 했고, 그의 아내 이르웬의 보통 아닌 성격을 듣고 나서 혹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돼서였다. 페르빈의 날카로운 녹안이 황제의 장난기 많은 눈과 마주쳤다. 황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결례고 뭐고, 나는 그저 베르마의 공녀가 어떻게 변했는지가 궁금할 뿐이야. 특히나 이번 문화제는 그녀가 직접, 처음으로 주관하는 행사가 아닌가.”
“이르웬이 혹 결례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이국에서 나고 자랐고, 결혼 후에도 사교계 활동은 전무했고 집에만 있던 이라, 황궁 예법에 맞지 않는 결례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글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던데.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섭외하는 건 기본이고, 그리고 최고의 노래를 준비했다고 하더군.”
“…….”
페르빈이 그럴 리 없다는 묘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는 자신이 황제보다 이러한 정보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분개했다. 왜 틸리 부인은 내게 이런 것들을 말해주지 않은 것일까, 설마 이르웬에게 충성의 맹세라도 했나? 황제가 페르빈에게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을 반짝였다.
“아니, 같은 집에 사는 남편이라는 이가 남보다도 모르고 있다니?”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무슨, 자네 부인에게 죄송해야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르웬은 지금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변덕을 부리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보게, 페르빈! 그게 아니지.”
자칭 여심 전문가라 자부하는 황제는 당당하게 충고했다.
“이건 자네 부인이 이제부터라도 자네에게 잘해 보겠다는 화해의 악수인 거라고. 그동안은 패악질을 부리며 독설만 내뿜었던 그녀가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신께서 자네의 기도를 들어준 걸세.”
“…….”
황제가 기대된다는 미소를 내보였다.
“그러니까 잘해 보라고, 페르빈. 혹시 알아? 베르마 공국의 핏줄과 칼라일의 핏줄을 얻은 아이가 태어날지. 그럼 국가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경사일 걸세. 우리의 결속은 더욱 강화되는 건 물론…….”
황제의 흥분된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페르빈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그는 왼손에 낀 결혼반지만 말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심란하면서도 동시에 속내가 복잡했다. 굳게 잠긴 그의 속내를 그의 아내가 활짝 열어젖히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는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 3일 후에 열릴 문화제 준비가 거의 끝나갔다. 여러 귀족 가문에 초대장도 돌렸는데, 다들 흔쾌히 온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황제와 황후도 참석한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으랴! 악처가 아닌, 호감형인 이르웬 칼라일을 만천하에 보여 주리라. 방 안에서 바쁘게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는데, 여러 하인들이 들락거리며 보고를 올렸다.
“마님, 대연회장에다 무대 설치를 끝냈습니다. 피아노는 먼지가 내려앉지 않게 일단 커다란 천으로 덮어 두었고요.”
“그래요. 매번 고맙게 생각해요, 다들.”
정말 고마워서 인사를 한 것뿐인데, 하인들이 흠칫 놀라며 다들 나갔다. 아직도 나의 변화된 모습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틸리 부인이 서둘러 뛰어왔다.
“마님, 며칠 전에 주문하신 드레스가 도착했습니다. 방으로 들일까요?”
“그렇게 하세요.”
“그럼 속옷 차림으로 기다리고 계십시오. 곧 입어볼 수 있게요. 혹시라도 꽉 끼거나 헐렁하면 그 자리에서 가봉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틸리 부인.”
“……제가 더 고맙지요, 마님.”
고맙다는 말을 이제껏 300번은 넘게 한 것 같은데, 아직도 틸리 부인은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틸리 부인은 멋쩍은 듯 고개를 푹 수그리며 드레스를 쉽게 벗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떠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나는 옷을 마저 벗기 시작했다. 시중을 받다 보니 옷을 벗고 기다리는 것도 익숙해졌다. 어느새 내 몸에 걸쳐진 건 새하얀 슬립 하나뿐. 나는 문을 등진 커다란 거울 앞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아무리 거울 속 내 외모를 봐도 질리지 않는다. 허리까지 물결치는 흑발에 하얀 피부가 더욱 대조되는 이 아름다움. 들어갈 덴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완벽한 몸매. 정말 완벽하기 짝이 없어. 내가 거울 속 나 자신에 심취해 있을 무렵,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는 거울 속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말했다.
“들어와요.”
끼익. 거울 속에 보이는 커다란 인영. 문이 열리고 페르빈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이르웬.”
나는 몸을 홱 돌렸다. 그의 손에는 내가 주문한 심플한 하얀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페르빈은 황궁에서 막 돌아왔는지 아침에 입은 검은 제복 차림 그대로였다. 내 시선은 그의 창백한 얼굴로 향했다. 몇 주 만에 본 얼굴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더욱 잘생겨져 있었다. 살짝 팬 볼, 오뚝 솟은 코, 그리고 더욱 날카로워진 그의 녹안. 그가 내 옷차림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얇은 슬립에 드러난 내 맨살을 오롯이 바라본 것일까. 그의 시선이 내 얼굴, 목선, 쇄골, 그리고 가슴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의 얼굴이 점점 발개지고, 괜스레 헛기침을 하는 것을 미처 몰랐다. 서둘러 두 팔로 내 몸을 가리며 문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옷 입는데 들어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
“당신의 남편으로서 이 정도 예의는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남편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죠.”
“당신 옆에 늘 틸리 부인이 붙어 있으니 단둘이 있을 시간이 이때밖에 없더군. 아니면, 자는 사람을 붙잡고 옆에서 말할 수도 없고.”
나는 페르빈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깨어난 이후, 저택의 여러 것들을 새로 익히고 배우는 통에 틸리 부인이 내 옆에 꼭 붙어 있던 건 사실이다.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페르빈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칼라일 공작저가 행사로 들썩이는 것도 몇 년 만이군. 그런데 말야, 궁금한 게 생겼어.”
그가 들고 있던 하얀 드레스를 화장대 옆 의자에 살짝 걸쳤다. 의자에 손을 얹고는 이마 위로 쏟아지는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창백한 얼굴에 유일하게 색이 도는 입술은 사과를 베어 문 듯 붉었다.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길쭉한 몸을 의자에 오롯이 기댄 그는 이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노을 지는 석양이 그의 얼굴로 나른하게 떨어지자, 조각 같은 얼굴에 마치 색이 돌아온 듯했다. 정말 조각은 조각이다. 원작에서 괜히 제국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우는 게 아니었어. 그와 단둘이 방에 남아 있는 것이 긴장되어서 죽을 것 같으면서도,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는 순간만큼은 나도 모르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연신 입술을 깨물던 그. 답답한지 목을 단정하게 잠그고 있던 단추를 풀었다. 그 바람에 격한 감정으로 울렁거리는 쇄골이 오롯이 드러났다.
“도대체 당신은…….”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페르빈은 내게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르웬, 안 하던 일을 하는 이유가 뭐야? 나랑 잘해보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아니죠, 잘해 보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도 안 되는 소리?”
갑자기 그가 화가 난 듯 날카로운 눈매를 내게 고정했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먼저 말머리를 가로챘다.
“왜 굳이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군. 굳이 문화제를 당신이 할 필요는 없었어. 예전처럼 셀레스틴 후작저에 미뤄 두고…….”
“공작부인으로서 공식적 소임은 다하겠다고 했잖아요. 내 임무를 다하겠다는데, 왜 당신이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혹시, 내가 일도 안 하고 망나니처럼 구는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라는 거예요? 취향 참 이상하네요.”
당당하게 말은 해 놓고서 발걸음은 뒤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페르빈이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을 쓸어내리는 게 보였다. 커다란 휘장이 쳐진 침대로 몸을 숨겨야 일단은 안심이 될 것 같아서,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게 다가오는 그를 피하려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순간 침대 모서리에 다리가 걸려 버렸다. 페르빈이 뒤로 넘어지는 내게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앗!”
포근한 침대에 풀썩, 등을 대고 쓰러진 순간. 페르빈이 내게 손을 뻗는 모습과 함께, 내 몸 위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 몸 위에 남자의 온기와 무게감이 오롯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어느새 내 얼굴 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방황하듯 흔들리다, 결심이 선 듯 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취향이 이상한 게 아니야.”
“맨얼굴보다는 분장 같은 화장을 좋아하고, 공작부인으로서 소임을 다하겠다고 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좀 일어나죠, 무거워요.”
내가 그의 가슴을 슬쩍 밀어내자, 페르빈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내 몸을 압박하는 건 아니었지만, 두 다리로 나를 가두고, 두 팔로 나를 감싸는 자세인 건여전했다. 왜 이러냐는 듯한 나의 시선에,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러지 않으면 당신, 나를 피할 거잖아, 예전처럼.”
그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던 것 같다.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진 듯, 파동이 요동쳤다. 왜 저런 얼굴을 하는 거야, 어차피 나를 싫어하면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삼키고 차분하게 응수했다.
“아무런 기대도 없으니까, 내가 당신을 피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그가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정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 내가 여태껏 내 마음을 숨겼다고 당신에게 기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그러니까 해주겠다는 거잖아요, 당신이 내게 기대하는 것. 공작부인으로서 제 일을 하겠다는데 왜 당신이 불만을 품냐고요.”
“당신, 정말 나를 모르는군. 내가 당신한테 기대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
당연히 모르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자, 그가 나른한 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그가 내 목에 진하게 입술을 묻었다. 마치 사과를 깨물 듯 나의 목에 진득하니 입술을 문지르고는, 곧이어 얼굴로 슬며시 올라왔다. 조각 같은 얼굴을 유혹적으로 들이대는 그에게 빠져들 뻔한 것도 잠시, 그의 옷깃을 움켜잡고 인상을 쓰며 눈을 마주했다. 단정했던 제복이 내 손길에 한껏 흐트러진 게 보였다.
“갑자기 이런 짓을 하다니, 왜 이래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페르빈. 그가 고개를 숙이자 홀릴듯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나를 응시하는 그 녹안을 마주하니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더욱 쿵쿵거렸다. 눈에서 시선을 내려 입술을 보고 있노라니, 진득하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부인으로서 공식적 소임을 다한다면서. 소임을 핑계로 결국 얻고자 하는 건 이런 것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