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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치료약도 없는 상사병 (42/166)

42화- 치료약도 없는 상사병2021.04.27.

16551915032017.jpg“룬 백작이라니?”

누구였지? 룬 백작? 원작에서 그런 이름이 있었던가?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가 누군지 최대한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옆에 있던 사용인들이 갑자기 불안해하는 듯했다. 나까지 불안해질 만큼.

16551915032017.jpg“일단 내려가 보겠어요.”

16551915032029.jpg“안 됩니다, 마님!”

틸리 부인이 나가는 나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16551915032029.jpg“부디 마님, 그 남자를 직접 맞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인님도 없는 이 마당에, 마님 혼자서 맞이한다는 것이 불안합니다.”

옆에서 마리앤도 한 마디 거들었다.

16551915032038.jpg“마님께서 과거의 기억을 잃었어도 안심할 수 없어요.”

그녀 역시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왠지 불안해 보였다. 룬 백작이라는 남자, 도대체 누구길래 다들 내가 그를 만나는 것을 막는 거야?

16551915032017.jpg“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그럼 솔직히 말해 봐요. 룬 백작? 그 남자와 내가 무슨 관계라도 되나요?”

나의 질문에 다들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물론 나는 그들이 속으로 주고받는 전쟁 같은 텔레파시를 알지 못했다.

16551915032029.jpg‘이거 말해도 되니? 만약에 말했다가 마님께서 바람이라도 나시면 어떡하지?’

16551915032038.jpg‘그래도 말해야죠! 마님한테 숨기면 어떡하냐고요!’

16551915032058.jpg‘기억을 잃으셨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16551915032029.jpg‘원래 없던 기억도 되살리는 것이 감정이라는 거야, 이 멍청이들아. 아예 그 백작님을 들이지 말았어야지!’

그들이 한껏 소리 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그때.

16551915051268.jpg“여기 아무도 안 계십니까.”

밑에서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틸리 부인과 마리앤에게 명령했다.

16551915032017.jpg“일단 만나 봐야겠어요. 둘은 나를 따라와요.”

서둘러 밑으로 내려가자,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자가 모자를 벗고 서 있었다. 옅은 회보라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남자. 페르빈의 숨 막히는 잘생김과는 또 다른 느낌의 수려함이다. 마치 수채화로 그린 한 폭의 그림이 내 앞에 나타난 느낌이랄까. 전혀 현실감 없는 조각 같은 미남이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경외, 애정, 그리고 연모의 감정이 어지러이 얽힌 탓에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보고 무릎을 꿇었다.

16551915051268.jpg“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릴리아스 공녀 전하.”

그 모습을 본 틸리 부인이 옆에서 마리앤과 속닥거리는 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16551915032029.jpg“공녀님이 뭐니, 결혼하신 분한테.”

16551915032038.jpg“그러니까요, 우리 마님은 칼라일 공, 작, 부, 인이신데 말이죠.”

나는 찜찜한 마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16551915032017.jpg“그대의 이름을 다시 한번 말해 주시겠습니까?”

룬 백작이라고 소개했어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누구길래 나를 릴리아스 공녀, 로 부르냔 말이야, 나의 처녀 적 이름으로. 내 앞에 성큼성큼 걸어오는 호리호리한 남자. 한겨울에 내린 눈처럼 하얀 얼굴에 구름을 얹은 듯 이마로 내려온 포근한 회보라색 머리칼. 그는 투명한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16551915051268.jpg“오랜만에 뵈니 제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공작부인. 신 이벨린 룬, 베르마 공국의 대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16551915032017.jpg“……이벨린?”

그 이름을 듣자마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뛰는 거지?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가슴이 더욱 쿵쿵거리며 일렁였다. 마치 고요한 연못에 커다란 돌을 하나 쿵, 하고 떨어뜨린 듯했다. 페르빈으로 가득 찼던 가슴이 이벨린으로 인해 변화가 생겼다.

16551915051268.jpg“저를 기억하시는 겁니까? 역시, 그러시는군요! 주군께서는 부인께서 기억을 잃은 것 같다고 걱정하셨지만, 역시 기우였습니다. 저를 기억하시지 못할 리가 없지요.”

그는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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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얼굴에서 열기가 화끈거렸다.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이건 내 몸이 기억하는 이유 모를 그리움이었다. 이벨린 룬, 베르마 공국의 개국공신 집안의 막내아들. 그는 하녀였던 이르웬이 발견된 후, 그녀를 완벽한 공녀로 교육시킨 장본인. 이르웬의 하나뿐인 가정교사, 그리고 하나뿐인 스승이었다. 상냥하게 웃는 그의 눈빛에서 왠지 진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서도.

16551915051268.jpg“드디어, 저의 하나뿐인 아가씨를 뵙게 되는군요.”

한동안 이벨린과 나는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리고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의 시선을 묶어두는 그의 절박함 때문에, 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가슴은 쿵쿵 뛰어대지, 눈앞의 이벨린은 울렁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물어볼 것은 많았지만, 신중해야 했다. 이르웬과 이벨린의 인연은 원작에서는 간략하게 설명된 관계였다. 재야에 묻혀 있던 이르웬을 발견해 그녀를 완벽한 공녀로 교육시킨 것은 이벨린 룬, 그였다고. 그 사이에 어떤 감정이 오고갔는지, 나는 함부로 유추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건 있다.

16551915051268.jpg“아가씨.”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 듯한 이벨린의 따뜻한 목소리가 날 간질였다. 나를 바라보는 저 다정한 눈빛에서 몸이 따스해지도록 느낄 수 있다. 그의 눈을 가득 채운 것은 온기, 호감, 그리고 애정이다. 내가 막 깨어났을 때, 페르빈이 나를 보던 눈빛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벨린에게서 이런 눈빛을 받는 지금,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나는 이미 내 전부를 페르빈에게 주었는데, 내 마음은 페르빈에게 뺏겨버린 지 오래인데. 그런데 이벨린, 당신은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길래. 나의 계속되는 침묵에 이벨린의 표정이 아주 살짝 바뀌었다. 그가 내게서 손을 놓고 떨어지자,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16551915051268.jpg“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아가씨. 릴리아스 공작저에 있을 적에는 저를 늘 반갑게 맞아주셨었는데…….”

이벨린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그에게서는 오직 애정, 이 느껴졌다. 예전의 이르웬은 도대체 그와 어떤 감정을 나누었길래 그를 보는 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지.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이벨린은 자신을 반기지 않는 이르웬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자신을 기쁘게 맞이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그 눈빛에서 예전의 따스함을 보여줄 알았다.

16551915032017.jpg“이제 나를 위해 동분서주할 필요 없어요, 이벨린. 내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분명 결혼식 직후, 그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이벨린을 향해, 아가씨는 이렇게 말했었다. 분명 아가씨는 자신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를 응시하던 이르웬의 눈에는 패국의 공녀로서 적장과 정략결혼을 한다는, 혼란스러움과 걱정이 가득했으니까. 그리고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이르웬 아가씨는 칼라일 공작과 4년간의 결혼생활에서 늘 잡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었다. 최근 들어 테레지아에서 들려오는 칼라일 공작부부의 금실에 대한 소식,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 같다는 첩보, 그리고, 부인을 향해 칼라일 공작이 얼마나 구애를 펼치는지에 대한, 그런 확신에 찬 정보들을. 그렇기에 스스로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식 이후, 처음 만난 아가씨의 모습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검은 머리칼도, 늘씬한 몸도, 투명한 벽안도. 정말 생기가 넘쳤다. 칼라일 공작과의 결혼이 결정된 후, 베르마에서 시름시름 앓았던 그때와는 다르게 말이다. 이 생동감 있는 아름다움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가씨는 분명 이곳을 오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 남자를 증오했어, 미워했어. 이렇게 생기가 넘치실 리가 없단 말이다. 아니면, 혹시 연기를 하는 건가? 주변에서 협박을 받는 건가? 자신의 머리가 이성보다는 지나친 감성으로 흔들린다는 것을 간과한 채, 이벨린은 주위를 살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옆에서 그녀를 모시는 틸리 부인이라는 여자, 저 여자는 결혼식 때도 있었던 중년의 여자였다. 대대로 칼라일 공작저에 일생을 바친 사용인이 옆에 찰싹 달라붙는 모습을 보니, 이벨린의 머릿속에는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 분명 아가씨는 칼라일 공작저에 감시를 받고 있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괜찮은 척 연기를 하는 것일 거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를 보는 눈빛이 저렇게 건조해진 것에 대한 대답은 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이 그를 괴롭혔다. 베르마에서는 그를 누구보다도 반겨주었고, 그가 숭배했던 그의 하나뿐인 꽃. 이르웬 릴리아스. 그때, 그의 귀에 난처한 듯 하면서도 딱 부러지는 이르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1915032017.jpg“룬 백작, 내게 자꾸 아가씨라고 하시는데, 그건 삼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대의 진심은 고맙게 여기지만, 비록 내가 베르마에서는 공녀 신분이었으나, 지금은 엄연한 공작부인이고, 칼라일 공작의 부인이니 말입니다.”

이벨린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큰 눈을 그에게 고정한 이르웬이 걱정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럽지만 결연한 표정. 확실히 아가씨는 성숙해지셨다. 생애 첫 무도회에서 자신의 손을 잡으며 부끄러워하던 4년 전과는 달라졌어. 치마를 나풀거리며 얼굴을 붉히던 아가씨는 이제 없다. 그를 무심한 듯 바라보는 공작부인이 있을 뿐이다. 그가 기억하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이벨린은 바들거리는 입술을 애써 진정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16551915051268.jpg“아가씨…….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뒤뜰에서 아가씨가 저에게 하셨던 그 말. 저희가 약속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옆에서 틸리 부인이 재빨리 알프레드에게 귀띔했다.

16551915032029.jpg‘어서 주인님께 전갈을 띄워라. 그분이 여기 와 계시다고 전해, 비상사태라고.’

16551915032058.jpg‘알겠습니다.’

이르웬이 그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16551915032017.jpg“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르웬이 예의바르게 한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모르겠다? 정말 모른다고? 창백한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꼭 쥐고 있던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때, 릴리아스 공작이 난감한 듯 그에게 일러준 말이 맴돌았다.

16551915080305.jpg-이르웬은 기억을 일부 잃은 것 같다. 아마 그대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어.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부인하려 했다. 눈으로 직접 그녀, 그의 영원한 아가씨를 보기 전까지는.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줄이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릴리아스 공작이 말한 것이 정말이었어.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있어, 이르웬. 그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16551915051268.jpg“아…….”

16551915032017.jpg“룬 백작?”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 예전처럼 나를 이벨린, 이라고 불러줘. 당신은 나의 영원한 아가씨이자, 나의 사랑하는……. 털썩!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그가 쓰러졌다. *** 이벨린과 이야기를 계속할수록 그가 걱정되었다. 그는 이르웬과 관계가 있는 남자임이 분명했다. 그것도, 깊은 감정을 품은. 내가 그에게 사무적으로 대할수록 그는 창백해졌다.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다. 눈은 벌써 촉촉해진 것이, 눈물을 금방이라도 흘릴 태세였다. 걱정되는 탓에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16551915032017.jpg“룬 백작?”

그가 갑자기 풀썩, 땅에 쓰러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머리를 받쳐 안았다.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틸리 부인이 당황한 듯 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16551915032029.jpg“마님, 룬 백작님께서 지금 기절하신 건가요?”

16551915032017.jpg“기절한 거 맞아요, 틸리 부인. 그러니까 당장 의사를 불러요, 빨리!”

알프레드가 전갈을 보내러 멀리 떠난 터라, 틸리 부인은 서둘러 다른 하인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했다. 그사이에 나는 하인을 시켜 이벨린을 손님방에 옮겨 놓았다. 하녀들이 매일같이 청소한 깨끗한 침대에 그가 누워 있었다. 마음이 괜히 심란했다. 창백한 얼굴에는 생기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막만 한 얼굴에 들어찬 이목구비는 생명을 잃은 듯했다. 나는 옆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강인한 페르빈과는 사뭇 다른 남자였다. 훅 불면 쓱 날아갈 것 같은 연약함은 마치 퇴폐미까지 풍기는 듯했다. 언제 생겼는지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가득했다.

16551915051268.jpg“으으…….”

그가 괴로운지 몸을 살짝 뒤틀었다. 나는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불덩이였다. 나는 서둘러 마리앤을 불렀다.

16551915032017.jpg“마리앤,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서 가져와!”

16551915032038.jpg“예!”

물수건이 도착하자 나는 그의 이마에 수건을 얹었다. 서서히 이마가 식혀졌다. 괴로움이 살짝은 희석되었는지 이벨린이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여전히 슬픈 표정이었다. 살짝 내려간 눈꼬리에 짙은 속눈썹이 팔랑였다. 눈꺼풀이 떨렸다. 그때.

16551915032058.jpg“마님, 부르셨습니까? 환자가 있다고요?”

흰 수염을 휘날리며 온 사람은 공작저의 전속의사, 반드쉬 둴파리.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둴파리 선생은 이벨린을 진찰했다. 이곳저곳을 만져보고, 청진기로 숨소리를 들어보고, 열을 재보았다. 그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16551915032058.jpg“저기, 부인, 잠시 사람들을 물리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16551915032017.jpg“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병명일까요?”

16551915032058.jpg“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면 안 될 부끄러운 병명이 도대체 뭐길래? 아무튼, 나는 둴파리 선생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내보내지 않으면 다음 진도가 나가지 않을 것 같으니.

16551915032017.jpg“모두 나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틸리 부인, 병자에게 좋은 부드러운 죽을 준비하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속은 든든하게 해서 보내야 할 것 같아서요.”

16551915032029.jpg“그냥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님. 마차에 실어서 보내면 그 댁 사람들이 어련히 간호해줄 텐데요.”

틸리 부인은 마치 천하의 적을 보듯 이벨린을 노려보았다. 둴파리 선생이 그녀를 보고는 엄중히 경고했다.

16551915032058.jpg“틸리 부인, 의식을 잃은 사람을 그대로 백작저에 돌려보내면 우리 마님께 더욱 폐가 된다는 것, 모르십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칼라일 공작부인께서 손님 대접 하나도 못해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 어떤 헛소문이 생성될지 모릅니다!”

16551915032029.jpg“사심에 물들어 제가 잘못된 판단을 하였습니다. 속히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물러가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풀지 않는 틸리 부인이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둴파리 선생이 침대에서 먼 곳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작게 속삭였다.

16551915032058.jpg“이건 치료약이 없는 아주 악성적인 병입니다, 마님.”

16551915032017.jpg“아니, 도대체 뭐길래요?”

16551915032058.jpg“상사병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침대에서 꿈틀거리는 소리가 났다. 둴파리 선생이 확신에 찬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15032058.jpg“역시 전적이 있던 만큼 발병도 빠르군요.”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상사병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페르빈과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요즘, 나는 다른 남자의 애정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다.

16551915032017.jpg“둴파리 선생,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백작이 제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 리 없습니다. 공국을 대표해서 왔고, 한때 저의 가정교사로서 최선을 다했던 이였습니다.”

16551915032058.jpg“그럼 이건 뭐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 마님?”

둴파리 선생은 예전에 내게 임신을 진단하러 왔을 때보다 더한 자신감을 보였다.

16551915032058.jpg“백작께서 나타내는 모든 증상들이 다 상사병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 하얗게 질린 입술, 부쩍 수척해진 저 몸, 그리고 무엇보다 저 뜨거운 가슴. 마님, 죄송하지만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나는 둴파리 선생의 손길에 이끌려 이벨린 옆에 다가갔다. 심장 압박을 하느라 느슨하게 흐트러진 그의 가슴팍. 하얗게 드러난 그의 쇄골, 그리고 진찰을 하느라 살짝 열린 가슴팍에 둴파리 선생은 내 손을 얹었다. 뜨거웠다.

16551915032017.jpg“어머, 이게 무슨!”

16551915032058.jpg“마음의 일렁임은 곧 몸으로 나타나는 법. 저는 마님께서 믿지 않으시니 직접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생각은 숨길 수 있어도 마음은 숨길 수 없다지요.”

내 손에 온전히 느껴지는 쿵쿵거림. 시체처럼 창백한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뛰는 것, 바로 그 심장. 내 손길이 닿자 더욱 쿵쿵거리며 세게 뛰는 가슴에, 내 심장 또한 일렁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기절했던 이벨린의 얼굴 또한 오묘하게 변한 듯했다. 분명 무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처연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눈을 감았음에도 그의 투명한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는 듯했다. 그의 감정을 읽었는지, 둴파리 선생이 혀를 차며 덧붙였다.

16551915032058.jpg“마님, 저걸 보십시오. 저게 상사병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눈치 없는 알프레드도 이걸 보면 상사병인줄 알 것입니다.”

16551915032017.jpg“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는 저희 오라비의 충신, 그리고 저는 한때 그의 섬김을 받는 아가씨였고, 지금은 칼라일 공작의 하나뿐인 아내입니다.”

상사병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건 나만 그런 걸까. 나는 이벨린을 살짝 흔들어 보았다.

16551915032017.jpg“룬 백작, 어서 일어나서 해명해 보십시오. 지금 둴파리 선생께서 이상한 말을 하고 계시는데, 아니지요? 그대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 아니라고 어서 말해 보십시오!”

아무리 흔들어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그의 입술이 그저 사르르 벌어지고, 다물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발개진 얼굴에서 참을 수 없는 듯한 부끄러움이 가득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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