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내 남자를 탐내지 마2021.10.16.
곧이어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했다. 비아나 자작은 시벨롬을 앞세워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 두꺼운 이불에 폭 파묻힌 채 누워 있는 로자먼드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
시벨롬이 서둘러 묻는 질문에 샤기쿤 선생은 재빨리 대답했다.
“틸리 부인이 잘 대처한 덕에 아이는 유산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분간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공작님께서 옆에 계신다면 부인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벨롬은 곧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괜찮았잖아.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로자먼드는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콱 깨물었다.
“제가 그동안 먹은 음식에 낙태약을 넣은 사람이 있었어요!”
심각성을 깨달은 듯 시벨롬이 샤기쿤 선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낙태약이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좀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부인께서 마시던 코코아에서 낙태약 성분이 검출되었더군요. 혹시 짐작이 가는 이라도 있으신지?”
시벨롬의 머릿속에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칼라일. 분명히 칼라일이 그랬을 거야, 내 아이를 없애고 자신의 아이를 후계자에 못 박으려 그런 거라고!”
틸리 부인이 분노와 억울함으로 받아치려는 찰나 로자먼드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에요, 시벨롬 님. 제가 봤어요, 어머님께서 제가 마시던 코코아에 하얀 낙태약 가루를 뿌린 것을요. 처음에는 설탕 가루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매번 어머님이 제게 주신 것을 마실 때마다 낙태약을 마신 거였다고요!”
그녀의 충격적인 발언에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민페이 후작부인과 로자먼드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후작부인이 손자를 낙태시키려 했다는 주장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세상 어떤 이가 자기 손자를 없애려 하겠어?”
“흐흑…… 시벨롬 님, 저는요, 여태껏 어머님께서 절 싫어하셨어도 쭉 참았어요. 그런데 지금 제 아이가 걸려 있으니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머님은 제가 아이를 잃으면 시벨롬 님과 이혼시킬 생각이었다고요.”
로자먼드의 커다란 눈에 악어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시잖아요, 어머님이 저 미워하시는 거, 시벨롬 님과 저를 이혼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나신 거.”
시벨롬의 잘생긴 얼굴에는 충격과 공포가 가득했다. 그동안 저택에서 아내와 어머니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긴 했다. 특히나 어릴 적 유모였던 버르장 자작부인이 슬쩍 말해준 젊은 날 어머니의 전적을 생각하면…….
-선대 칼라일 공작부인에게 공공연히 선물이라면서 낙태약을 넣은 과자를 주셨다니까요.
***
“네 약은 언제나 그 효과가 확실하다고 해서 맡겼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제국 최고의 산파인 틸리 부인이 옆에 붙어 있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으니까요.”
비아나 후작은 포이즈너의 보고를 듣고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결과에 미간을 찡그렸다. 아이만 없어진다면 아들의 미련도 끊어낼 수 있을 것이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다니.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었고, 후작은 일단 현재를 생각하기로 했다.
“낙태약이 발견되었다고 했지, 그렇지만 그게 우리를 가리켜서는 안 되는 건 알겠지. 처리는 잘하고 왔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서 이미 완벽하게 처리도 하였거니와, 시벨롬 공작부인께서는 아예 범인을 지목해 주시더군요. 이참에 제거하고 싶은 분이 따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구냐는 듯한 후작의 시선에 포이즈너는 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삼켰다.
“민페이 후작부인입니다. 이번에 약을 넣은 것도 그분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시벨롬 님께서도 납득하셨다고 합니다. 부엌에서 그분께서 가루를 탔다는 증언도 몇 차례나 나왔었고요.”
“하하하! 그 여자는 민페이 후작부인만 치우면 자신이 시벨롬 공작저를 꽉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하하하!”
비아나 후작의 찡그렸던 얼굴에서 괴상한 웃음이 터졌다. 한동안 배를 잡고 웃다가, 그는 간신히 위엄을 갖추었다.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이제 시벨롬 공작의 보좌관이건 뭐건 우리 아들을 그곳에서 빼내 와야겠군. 그 집에는 정상적인 인간이 없어.”
*** 테레지아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 좀 더 있다 가라는 릴리아스 공작 부부의 배웅에도 서둘러 제국으로 향한 것은 나의 예정일이 점점 가까워져서였다. 가는 길에는 바다가 있다고 해서 들렀는데, 그 풍경이 사뭇 푸르고 아름다웠다.
“모래가 정말 하얗고 고와요.”
내륙에 있는 테레지아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바다였기에 눈에 담기는 이 풍경이 모두 소중하고도 귀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한 손으로 살짝 들고 다른 손으로는 페르빈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하얀 모래에는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이 나란히 나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서 자기들끼리 뛰어놀며 즐기는 마리앤과 알프레드가 보였다. 신발은 진작에 벗어 던지고 발목까지 넘실대는 바닷물을 튀기면서 장난을 치는 게 부러웠다. 페르빈도 내 시선을 따라서 보다가 내게 눈짓을 했다.
“바다에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
“그럴까요, 그럼?”
내가 그의 손을 놓고 양말을 벗으려고 하자 그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나만 벗으면 돼.”
그러고는 자신의 겉옷,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더니 종아리가 보일 정도로 바지를 걷고는 냉큼 나를 자신의 품에 안아 들었다. 그가 찰방찰방 물을 밟고 바닷가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투명할 정도로 시린 바닷물이 그의 발목에 넘실거렸다.
한동안 페르빈은 나를 안고 바닷가를 걸었다. 모래사장으로 돌아와 한쪽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의 평평한 면에 대뜸 앉아버렸다.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니, 쏴, 하고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싸고 있으려니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역시 난 당신하고 둘이 있을 때가 정말 좋아.”
“나도요.”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백금발이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다. 옅은 녹안이 사랑스럽게 반짝였다. 잘생긴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 눈부셨다. 그가 내 얼굴에 애교스럽게 자신의 볼을 비벼대며 소곤댔다.
“사랑해, 사랑해, 죽을 만큼 사랑해.”
애살스럽게 속삭이는 말에 왠지 쑥스러워서 장난스러운 말로 받아쳤다.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던데. 당신은 언제쯤 나한테 질릴 거 같아요?”
“질린다고? 이르웬, 내가 당신한테 질릴 수 있을 것 같아?”
페르빈이 내 머리칼을 숭배하듯 입술을 묻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맹렬한 감정이 일렁였다.
“당신을 사랑하는데 정해진 기간은 없어. 당신이 내게 질리기 전까진.”
*** 여러 사용인들을 조사해 그들로부터 민페이 후작부인과 로자먼드의 불화설을 파악한 시벨롬은 결국 자신의 어머니에게 축객령을 명했다. 시벨롬은 하인들에게 질질 끌려 나오는 후작부인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앞길을 막으려 하다니요, 어머니.”
“너는 어미인 나보다 로자먼드를 더 믿는다는 거냐?”
“제게 도움도 안 되는 어머니보다는, 제게 도움이 될 자식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요.”
로자먼드의 선동으로 민페이 후작부인은 순식간에 손자를 유산시키려 한 몹쓸 여인이 되어버렸다. 억울하고 분통했지만 공작저에서 그녀의 결백을 증언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그녀와 로자먼드의 불화설을 증언하고 심지어 로자먼드가 아이를 잃는다면 그들 부부를 이혼시킬 거라는 설도 증언이 나왔다. 로자먼드 측에서 하인들에게 뒷돈을 먹인 것이었지만 후작부인이 그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로자먼드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뒤뚱뒤뚱 걸어왔다.
“어머님, 저도 여자로서 어머님 마음, 잘 이해해요. 하나뿐인 아들을 제게 빼앗기셔서 질투도 나시고 욱하시고, 그러시겠죠. 그런데 제 아이를 없애려고 했던 건 너무하셨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네가.”
로자먼드는 얄밉게 목소리를 높이며 이죽거렸다.
“아, 제가 잘못 이해했나 보다. 아들을 빼앗긴 것보다 평생을 선대 황제 폐하의 정부로 사셔서 본처로 자리를 잡은 제가 그냥 부러우셨던 거죠?”
그 말에 후작부인의 이성이 끊어졌다. 후작부인이 누구보다 빠르게 로자먼드의 머리채를 냅다 낚아채자 단정하게 틀어올린 짙은 금발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이 막돼먹은 년, 이런 추한 년! 나를 뭐로 보고 감히 범인으로 몰아!”
“아악! 교양 없게 왜 이러세요, 어머님!”
“교양? 교오~양?”
그 말에 민페이 후작부인은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내 교양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어쩔래!”
굵은 머리채가 후작부인의 손에 잡혀 풀리지 않는 실타래보다 더 헝클어졌다. *** 며칠 후. 침대에서 절대 안정만 취하던 로자먼드는 병문안을 온 친정 식구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늙은 여우가 없으니까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라센딜 백작은 주위를 둘러보며 주의를 시켰다.
“민페이 후작부인을 네 편으로 포섭할 생각은 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내쫓다니. 아군을 적군으로 몰아넣는 건 좋은 수가 아니었다, 로자먼드.”
“왜 그래요, 여보. 우리 아가씨가 이곳의 진정한 공작부인으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진작에 후작부인을 쫓아냈어야 하는 거였는데. 잘되었어요. 후작부인이 공작님의 어머니란 이유로 우리 아가씨한테 장부도 맡기지 않았잖아요. 이제는 우리 아가씨 천하란 말씀이죠.”
라센딜 백작부인은 오히려 로자먼드의 편을 들었다. 라센딜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틸리 부인에게 빚을 진 건 좀 그렇구나. 칼라일 가에 빚을 져서 좋을 건 없는데.”
“그래도 틸리 부인이니까 우리 아가씨의 유산을 막을 수 있었죠. 이제 훌륭한 공자님만 낳으면 앞길이 탄탄하게 열리는 거예요.”
“그런데 로자먼드, 도대체 틸리 부인은 왜 불렀던 거냐?”
오라버니의 추궁에 로자먼드는 입을 쭉 내밀었다.
“나중에 우리 아들이 태어나면 유모로 와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죠.”
“그 여자는 뼛속까지 칼라일 가에 충성한 몸이야! 칼라일 가의 전속 하녀장을 데리고 협상을 시도하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지.”
라센딜 백작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이미 유모는 버르장 자작부인으로 구해 놓았다. 예전에 시벨롬 공작님의 유모였던 분이니까 더욱 잘해줄 거다.”
“아, 그건 그렇고 여보. 슈발 백작이 사교계에 돌아온다네요.”
“그 바람둥이가 돌아온다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 돌아오는 거지?”
“이번에 황실에 후계자들이 태어나니까 줄도 설 겸 수도에 온 것 같아요. 그런데 웃긴 건 뭔지 알아요? 글쎄, 그이가 민페이 후작부인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래요! 이제까지 오려고 했는데 후작부인이 자기 평판 나빠질까 막았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로자먼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라센딜 백작이 그녀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그는 여동생에게 또다시 주의를 주었다.
“아이 낳기 전까지는 처신 똑바로 해라. 슈발 백작은 이 집에 들일 생각 꿈에도 말고.”
“제 마음이 품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에요.”
로자먼드는 이불 속 안고 있던 작은 액자를 만지작거렸다. 이제는 밤낮이건 마음껏 감상하는 페르빈의 초상화였다. *** 베르마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칼라일 공작저로 귀환했다. 나는 공작저에 남아 그동안의 일을 살폈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압권은 이것이었다.
“라센딜 영애가 낙태약을 먹고 유산할 뻔했다지 뭡니까.”
“낙태약을 넣은 것도 민페이 후작부인이라잖아요. 지금은 공작저에서 나와서 자기 별장으로 갔다고 하는데, 그게 어디예요, 수도에서 쫓겨나지 않은 게 신기한 거지.”
옆에서 틸리 부인이 점잖게 끼어들었다.
“선대 황제 폐하의 유언이라네요. 후작부인이 어떤 죄를 짓든 한 번은 무조건 넘어가라고 폐하께 부탁하셨대요. 게다가 시벨롬 공작님의 어머니시니까 그냥 조용히 넘어간 것 같습니다.”
“아주머니께서 거기 불려가셔서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이마에 힘줄이 솟은 채 열변을 토하는 마리앤 옆에 서 있는 틸리 부인. 아까 내게 조심스레 보고한 바에 따르면 불려가서는 시벨롬가 아이의 유모를 맡아 달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었다고 했다.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찰나 로자먼드가 코코아를 먹고 유산기를 보였다고.
“주인님과 마님의 부재 시 이런 불미스런 일에 휩싸여 버린 점, 정말 죄송합니다.”
죄책감 어린 얼굴로 나를 보는 틸리 부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차라리 잘되었어요. 이참에 시벨롬 공작저에 빚을 지워준 셈이니까, 그쪽도 이제 우리에게 함부로는 못하겠죠.”
상식이 있다면 틸리 부인에게 고마워하고 칼라일 공작저에 감사해야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의심스런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나는 민페이 후작부인을 초대해 진상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부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가족보다 이웃사촌이 낫다더니, 부인께서는 정말 자비로우세요.”
“부인께서 갑작스럽게 시벨롬 공작저에서 나오셨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죠. 제 초대가 자그마한 위로가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어요.”
“저야 너무 감사드리죠.”
그녀가 틸리 부인을 보고서 차마 눈을 못 마주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게 이상했지만 그래도 내 앞에서는 말을 잘 이어나갔다.
“사실은 틸리 부인이 로자먼드가 유산하지 않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로자먼드가 답례의 선물을 보내지 않던가요?”
“깜빡했나 보죠, 뭐.”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자 민페이 후작부인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내가 나가니까 완전히 일이 엉망이네. 진작에 감사 선물을 보내도 모자를 판에 일을 이런 식으로 하다니.”
“괜찮아요. 원래 임신하면 건망증도 온다고 하더라고요.”
잔뜩 힘을 주고 옆을 지키던 틸리 부인도, 내 눈치를 살피던 후작부인도 쿡쿡거렸다. 세간에는 그녀가 로자먼드의 아이를 죽이려 낙태약을 몰래 먹였다는 소문과 로자먼드가 그녀를 내쫓으려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대립하고 있었다.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아직은 몰랐다. 다만, 민페이 후작부인이 내 초대에 감명을 받았는지 내부 정보를 술술 털어놓았다는 게 중요했다. 거기에는 내가 관심 있게 대화를 들어준 것도 한몫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를 털어놓았다. 비아나 자작은 로자먼드를 싫어함과 동시에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시벨롬은 결혼을 했는데도 아직도 밖으로 돈다는 것, 로자먼드는 시벨롬 공작저의 재산에 관심이 많다는 것 등등. 그러나 가장 압권인 것은 따로 있었다.
“로자먼드 걔가 세상에, 칼라일 공작님의 초상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태교를 한답니다. 물론 칼라일 공작이 눈부시게 잘생긴 건 내 알고 있지만…….”
왜 남의 남편 얼굴로 태교를 하고 난리야? 순간 화가 확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도가 지나친 로자먼드에게 본때를 보여줄 좋은 생각이 나서였다. 상식에 어긋난 그녀의 행동에는 상식적인 행동으로 응수하면 되는 일이었다. *** 침대에 누워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로자먼드에게 한 개의 소포가 도착했다.
“칼라일 공작부인에게서 온 선물입니다. 후계자 임신 축하선물인 것 같아요.”
“어머, 그쪽에서 웬일로 이런 선물을 보냈대. 드디어 예의를 갖출 생각을 한 모양이야.”
로자먼드는 멜리나가 건네준 소포를 흥분한 듯 뜯었다. 소포의 작은 크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보석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뭐야, 이게!”
그녀는 손에 든 작은 초상화를 내던졌다. 시벨롬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주변에서 다들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가운데. 포장지에 남아 있던 편지가 팔랑,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로자먼드는 이르웬의 편지를 읽었다. -아무리 내 남자가 부러워도 그렇지, 남의 남자 그림을 품고 다니는 것 아니에요. 특히 그 뜻이 불순한 거면 더더욱요. 부인께서는 잘나고 멋진 시벨롬 공작님이 있으니 그 얼굴로 태교를 하시면 좋을 겁니다. 자기 남자는 자기가 챙기자고요, 남의 남자 탐내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