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믿을 수 있는 사람들2022.01.15.
“앞으로는 아비의 곁을 떠나지 말아다오, 알았지?”
비아나 후작은 함께 차를 마시던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댔다. 이 말도 벌써 100번째였다. 자작은 아버지를 안심시켜 주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이제 어디 도망 안 갑니다.”
후작이 가늘게 눈을 떴다. 살아생전 아들을 건강한 모습으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칼라일 공작의 비호 아래 있는 아들을. 사실 그들 부자가 시벨롬에게서 자연스레 칼라일 공작에게로 충성을 옮긴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더니.”
후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들을 힐끔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아들은 웬 아기를 데리고 있었다. 아기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기의 어미가 로자먼드라는 것을. 그가 그렇게 없애려고 했지만 결국 이 아기는 아들의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들은 아기와 함께 있을 때 제일 행복해 보였다.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아들의 족쇄로 여겼던 아기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니. 호프라는 이름만큼 아기는 그에게 희망이었다. 아이를 없애려 했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다. 호프가 나타난 이후에 후작은 한 번 더 결심했다. 잔인무도한 시벨롬의 곁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어떻게든 가족을 지킬 것이라고. 내 사람에게도 매정하고 이기적인 시벨롬과는 달리 페르빈은 적에게만 매정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비아나 후작 부자를 보호했고, 최선을 다해 시벨롬의 부정한 면을 파헤치는 중이었다. 페르빈은 여러 언론에 황실의 관계자 자격으로 이번 사태에 대해 인터뷰했다. 덕분에 제국 대부분이 시벨롬과 모드레드의 혈연관계를 의심했다. 이건 시벨롬이 원하지 않는 전개였다.
“황실의 일이라고 비밀스럽게 처리하고 싶었을 텐데, 칼라일 공작이 이 일을 공론화해버렸군. 판을 잘 깔았어.”
후작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자작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데 아버지, 아틸라 왕과 시벨롬간의 관계를 아십니까? 그 둘의 관계가 보통 관계는 아닌 듯싶어서요.”
“글쎄,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겠구나. 워낙에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라. 왜, 뭐가 불안하니?”
“시벨롬 공작이 그를 이용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후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얘야, 아틸라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아틸라가 그를 이용한다면 모를까.”
“그가 시벨롬 공작을 이용해서 얻을 게 뭐라고요?”
아들의 혼란스러운 눈빛에 후작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추측할 뿐이었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제국에는 한 차례 격렬한 파도가 들이칠 것이었다. *** 헤센 아카데미에 들러 테레시아스와 만나 이야기를 한 후, 페르빈은 그와 함께 천천히 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시벨롬과 함께 이곳을 둘러보는 아틸라를 발견했다. 반갑지 않은 상대였지만 아틸라가 먼저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페르빈은 무표정한 얼굴을 빳빳하게 들었다. 인사를 하려는데 시벨롬이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는 아틸라를 잡아끌었다.
“어서 가봐야 합니다.”
“잠깐. 그것보다 칼라일 공이 여기엔 웬일로. 학장과 친한 관계인가?”
테레시아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칼라일 공을 제가 특별히 아꼈습니다. 저는 친하다고 생각하지만 칼라일 공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요.”
“그것참 신기하군.”
아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의가 없어 보이는 말을 계속했다.
“여기 시벨롬 공도 자기가 학장의 특별한 제자였다고 설명했거든.”
테레시아스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페르빈은 그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였다.
“특별하다는 건 여러 의미로 해석되죠. 명석하고 뛰어난 제자도 특별하다고 하지만, 말썽을 피우거나 속을 썩이는 제자도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이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페르빈이 시벨롬을 쉬이 넘기지 않자, 아틸라가 눈을 빛냈다. 시벨롬은 아틸라 뒤에서 이를 갈았다. 예전에는 자신이 지위가 더 높아 그에게 압박을 줄 수 있었지만, 페르빈이 일국의 군주로 승격된 이상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웃는 얼굴에 대고 혼자 성을 내면 그것만큼 우스운 게 없을 것이다. 시벨롬은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들은 곧 헤어졌다. 시벨롬과 아틸라가 시야에 보이지 않자 페르빈은 곧바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전령 매가 끼룩거리며 그의 팔목에 내려앉았다. 칼라일 공작저에서 온 전갈이었다. 페르빈은 서둘러 전갈을 읽었다. 얼굴에 분노가 가득 일었다.
“시벨롬 공작부인이 무단침입에 기물파손까지? 미쳤군.”
*** 내가 보낸 전갈에 두 남자가 먼저 도착했다. 시벨롬과 아틸라 왕이었다. 로자먼드는 시벨롬을 보자마자 울먹이며 그의 품에 안겼다. 시벨롬이 그녀를 황급히 밀어냈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나는 마리앤과 알프레드를 대동하고 그들 앞에 나섰다. 시벨롬이 아틸라 왕을 대동한 게 수상했지만, 일단은 단호하게 대처했다.
“보다시피 로자먼드 부인께서 무단으로 집 안에 침입했으며, 비아나 자작을 우리 집에서 찾겠다면서 손톱을 세워 저를 위협했으며, 그리고 귀한 가보까지 저렇게 깨뜨려 버렸죠.”
“거짓이에요, 자기가 깨놓고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있어요!”
끝까지 거짓을 말하는 로자먼드에게 대꾸할 가치는 없었다. 나는 시벨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도자기는 선대 황제께서 칼라일 공작가의 시조이자 6대조 선조인 에르빈 칼라일께 하사하신 도자기입니다. 무엇으로 보상한다 한들 이에 비길 것은 없을 겁니다.”
시벨롬이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마침 내 전갈을 받은 페르빈도 뛰어 들어왔다. 그는 내 설명을 듣고는 모든 걸 빠르게 이해했다. 주변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그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점점 화가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도대체 남의 집에서 이게 무슨 행패요! 더욱이 아내가 혼자 있었는데 이런 위협을 가하다니, 시벨롬 공작부인, 제정신이오?”
로자먼드가 옆에서 짹짹거렸다.
“분명히 칼라일 공작부인이 집에 없다고 했다니까요.”
“그럼 더욱 괘씸하군,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이런 행패를 부리다니! 내 반드시 이 일을 황제께 고하고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오.”
페르빈은 나를 옆에 더욱 붙이며 으르렁거렸다. 시벨롬이 그제야 얼굴색을 붉히며 황제께는 알리지 말라고 빌었지만 페르빈은 미동이 없었다. 그때였다. 가만히 있던 아틸라가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내게 쥐여준 것은.
“내가 더 귀한 것을 주면 해결되지 않겠소? 사막의 열꽃. 이거만큼 귀한 건 없을걸.”
나는 페르빈을 힐끔거렸다. 그는 적잖이 당황한 듯 굳어 있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거절 표시를 하려는 듯 손을 올렸지만, 아틸라가 그를 막았다.
“크루거 왕국의 건국 때 선조가 발견한 붉은 보석으로 가공한 반지지. 마력이 들어 있어 크기가 자유자재로 변화하니 어느 손가락에 끼워도 될 거요.”
“하지만…….”
“이만하면 시벨롬 공작부인이 깨뜨린 도자기에 대한 보상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옆에서 시벨롬이 사막의 열꽃을 내게 준 것을 항의하듯 웅얼댔지만, 아틸라는 그의 입을 막았다.
“남의 집에서 더 소란 피우지 말고, 이만 가도록 하지.”
*** 그날 밤. 쌍둥이를 재우고 난 뒤, 우리는 양옆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웠지만 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편했다. 페르빈은 내가 만지작거리던 붉은 반지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자의 속은 알 수 없어.”
아틸라가 돌아간 후로 지금까지 불안해보이던 페르빈이었기에,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부드럽게 말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명분을 세웠고, 그들은 합당한 대가를 치렀어요.”
“긍정? 이렇게 큰 선물을 받고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 있어.”
아이들이 깰까 봐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내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설명했다.
“이 반지 말이야, 크루거 왕국뿐 아니라 대륙에서도 유명한 반지야. 아틸라 왕이 말해주지 않은 게 있는데, 이 반지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해. 그래서 왕가에서 이 반지를 더욱 특별하게 여겼고, 도난당하지 않도록 금고에 보관해 왔다고.”
“어떤 힘이 있는데요?”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 왕은 알지도 모르겠군. 아, 이르웬. 그가 순수한 이유로 이걸 줬으리라 생각되지 않는 건 왜일까.”
그는 이내 나를 자신의 품 안에 끌어당겼다. 연신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그가 속삭였다.
“당신을 더욱 아끼고 지킬 거야.”
내게 하는 말이었지만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그의 얼굴은 생기를 잃어 창백했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나는 내가 몇 번이고 반한 그 얼굴에 대고 속삭였다.
“아뇨,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지킬 거예요. 나는 이르웬 칼라일, 이니까.”
칼라일의 이름을 내세운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지만, 지금은 단 하나였다. 내가 칼라일 가문의 여주인으로서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 그리고 페르빈 칼라일의 아내로서 그와 끝까지 간다는 의미. 페르빈은 내 말을 이해한 듯 얼굴이 굳어졌다.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이런 각오를 보인 적 없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의 입술에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생기가 없는 페르빈의 입술은 차가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달아 키스하자 서로에게서 들뜬 숨결이 뜨겁게 흘러나왔다. 그가 내 허리에 손을 감고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겼다.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는 손길이 한결 가벼워졌다. 날 보는 시선은 나른하게 타오른다.
“그럼 여왕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고마워요, 칼라일 공. 내 그대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사하죠.”
쪽, 그의 입술에 또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페르빈이 입술을 달싹였다. 날카롭던 눈매가 한층 깊어져 있었다. 페르빈을 먼저 침실로 들여보낸 뒤. 나는 반지를 갖고 한참을 고민했다. 아틸라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 사람이 내게 귀한 선물을 주었다. 어떤 힘이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우선 믿음직한 사람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티레시아스 엑터, 아카데미의 학장이자 제일가는 학자인 그라면 분명 무언가를 알 것이다. *** 칼라일 공작저에서의 행패 건을 빌미로 삼아 시벨롬은 로자먼드를 집안에 감금했다. 좋게 말하면 이번 사태에 충격을 받아 요양, 하지만 실제로는 시벨롬의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로자먼드는 모드레드를 보게 해달라 애원했지만 무시되었다. 그녀에게는 방 안에서 책을 읽는 등의 간단한 행동만이 허용되었다. 편지도 허락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외부에 이상한 말을 유출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이따금 밖에서 모드레드의 옹알이와 리벤지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미칠 것 같았다.
“모드레드는 내 것인데!”
혼자 고립된 동안 로자먼드는 고민을 거듭했다. 수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건 그녀의 아들, 모드레드와 관련되어 있었다.
“분명 내가 출산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어.”
하루 동안 기절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로자먼드는 집안의 사용인들을 보석으로 매수해 겨우 쓸 만한 정보를 알아냈다.
“오라버니와 샤기쿤 의사가 왔었다고…… 오라버니가 산실에? 시벨롬 님도 내보낸 마당에 오라버니는 왜?”
이제까지 로자먼드는 라센딜 백작만은 무조건 신뢰했다. 늘 자신에게 최선의 길을 제시했고,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들어준 오라버니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오라버니마저 내친다면, 누굴 믿을 수 있는데?”
지독한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한참의 시간 끝에 로자먼드는 결론을 내렸다.
“내 아이. 내 아이만은 날 배신하지 않을 거야. 분명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아이니까.”
그녀의 아이, 모드레드. 모드레드는 분명 그녀를 도와줄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녀를 지탱한 그녀의 자긍심이자, 그녀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 아내가 들고 온 소식에 라센딜 백작은 말라가는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깨물었다.
“로자먼드가 감금되어 있다니, 차라리 잘되었군. 걔가 어떤 변덕을 부릴지 알 수가 없으니. 문제는 친자 검사야.”
칼라일 공작이 판을 벌인 게 틀림없는 형국에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긴밀하게 처리하기 위해 손을 쓸 시간도 없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제국민들이 모드레드와 시벨롬의 친자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백작은 몇 달 전 그날, 로자먼드의 출산에 개입했던 이들을 떠올렸다. 붉은 펜으로 종이에 그들의 이름을 적고는 중얼거렸다.
“진작에 치워버렸어야 했어. 일단은 샤기쿤 선생부터 처리해야겠군. 멜리나도 물론이고, 그리고…….”
그가 이를 까득거렸다.
“그놈의 자작 놈부터 없애버려야지.”
*** 다시 한번 열린 황궁 회의. 이번에는 시벨롬도 제때 참석했지만, 분위기는 더욱 싸했다. 얼마 전에 로자먼드가 무단으로 칼라일 공작저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귀한 가보까지 깼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던 시벨롬과는 달리, 페르빈은 이 일을 롸이터에게 제보했다. 로자먼드의 무례함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머지 충동적으로 이 일을 공개해 버린 게 아니겠냐는 수군거림이 퍼졌다. 안 그래도 안 좋았던 여론은 더욱 안 좋아졌다. 제국민들은 이미 시벨롬 공작부인의 복잡한 사생활에 질려 버렸는데, 이제는 폭력성까지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황실의 권위는 이제 바닥으로 떨어졌어. 시벨롬, 너는 네 가정조차 돌보지 않으면서 무슨 국정을 돌보겠다는 거냐?”
황제는 기가 찬 듯 시벨롬의 앞에 신문을 집어 던졌다. 시벨롬은 페르빈을 죽을 듯이 노려보았다. 헤드라인에 실린 ‘시벨롬 공작부인의 엇나간 분노와 폭력, 찔리는 자가 더 난리라더니?’라는 제목이 더욱 잘 보였다. 시벨롬은 바짝 엎드려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로자먼드에게 공개적 사과를 하라고 시키겠습니다.”
“아니야, 네 아내는 이미 칼라일 공작부인을 수없이 모욕했던 전적이 있어. 믿음이 가지 않아.”
“어떻게 감히 그랬겠습니까, 그럴 깜냥이 되는 여인도 아닙니다.”
페르빈이 황제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네 피로연 때 일부러 공작부인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어 망신을 주려던 일을 내가 잊은 줄 아느냐?”
황제의 대노에 시벨롬은 입을 다물었다. 칼라일 저 여우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다. 페르빈은 묵직한 목소리로 건의했다.
“시벨롬 공작 본인이 있으니 이참에 친자 검사에 관해 물어보시지요, 폐하.”
시벨롬이 사색이 되었다.
“안 됩니다, 그건 저의 명예를 침해하는 일입니다.”
“여론도 최악이고, 황실의 권위도 최악인 상황입니다. 개인의 치욕스러움을 따지기에는 이미 일이 너무 커졌습니다.”
“일을 키운 건 자네잖아, 칼라일! 어디 뻔뻔하게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처럼 말해? 자네가 언론에 그런 인터뷰만 안 했어도…….”
좌중이 고요해졌다. 시벨롬은 자신에 대한 적의를 느꼈다. 다들 그가 한심하다는 듯,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적의감이 없는 건 페르빈이었다. 그는 시벨롬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분노와 적의가 아닌, 승리의 미소였다.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은 맹수의 미소.
“그대가 확실한 증거만 보여주었어도 내가 황실을 대표해서 그런 변명을 할 일도 없었겠지. 그러니까 자네가 확실히 보여주게. 친자 검사를 해서 모드레드가 자네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란 말이야.”
도발하는 페르빈의 눈빛에 시벨롬은 악에 받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한다고! 내 아들인 걸 만천하에 증명하면 되잖는가! 대신, 나만 검사를 받는 건 억울하네. 그러니 로자먼드도 같이 검사를 받아야 해. 그 여자도! 친자 검사를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치욕을 혼자 겪을 수는 없다고!”
테이블 끝에 앉은 라센딜 백작이 입술을 콱 깨물었다. 시벨롬을 이때만큼 죽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