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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시벨롬의 몰락 (133/166)

133화- 시벨롬의 몰락2022.03.12.

16551934187966.jpg“페르빈. 혹시…….”

나는 책을 내려놓고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부부 사이에 숨기는 건 없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남편도 알고 있어야 나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고통을 건드리는 일이라면, 나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16551934187966.jpg“폐하께서 당신 아버님과 민페이 후작부인이 나눈 연서를 가지고 계셨대요.”

페르빈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16551934187982.jpg“정말이야?”

16551934187966.jpg“오늘 낮에 쌍둥이 황녀들이 놀러 왔는데, 셀리아가 멋모르고 폐하의 집무실에서 그 편지를 가져왔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알았어요.”

내 손을 꾸욱, 만지작거리며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16551934187966.jpg“별 내용은 아니었어요. 보통 연인들이 하는 낯간지러운 말들이었어요.”

혹시 민페이 후작부인이 명시한 ‘선대 칼라일 공작과 그녀의 아이’까지 이어서 이야기하면 페르빈이 충격을 받을까 봐 그 점은 잠시 숨겼다. 이미 페르빈은 충분히 충격을 받은 듯 보였으니까.

16551934187982.jpg“왜 폐하께서 그 연서를 감추고 계셨던 거지?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16551934187966.jpg“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16551934187982.jpg“도대체 무슨 이유? 아버지가 저지른 추잡한 일이 두고두고 간직할 거리는 아니잖아.”

그가 숨을 쉴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16551934187982.jpg“분명히 날 견제하려는 목적이겠지. 여태까지는 내가 폐하를 잘 모시고 제국을 위해 늘 앞장서 가만히 있었지만, 만약 내가 시벨롬처럼 들고 일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당장에라도 그 편지로 내 목을 조였겠지.”

16551934187966.jpg“페르빈,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어요.”

16551934187982.jpg“도대체 아버지는 왜 죽어서도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모르겠어. 민페이 후작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으면 둘 사이에서 끝냈어야지, 왜 그런 편지는 써 가지고 약점을 잡게 만들어. 칼라일 공작가 망신을 왜 사서 시키냐고.”

아버지에 대한 페르빈의 분노는 생각보다 정도가 깊었다. 선대 공작부인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들과 평생을 놀아난 선대 공작을 아직도 용서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곧 내게 얼굴을 고정했다.

16551934187982.jpg“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 당신한테는 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아버지에 관해서는 그게 잘 안 돼.”

16551934187966.jpg“괜찮아요. 모든 사람이 제각기 마음에 약한 부분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 법이에요.”

나는 페르빈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페르빈은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내게 물었다.

16551934187982.jpg“폐하께서 이걸 가지고 계셨다고 했지. 날 견제하기 위한 방책일 수도 있지만 시벨롬을 견제하는 방책일 수도 있겠어.”

16551934187966.jpg“왜요?”

16551934187982.jpg“평생을 민페이 후작부인과 그 자식인 시벨롬을 견제하셨던 분이야. 그동안은 선대 황제의 유지로 시벨롬을 봐줬지만, 지금은 한계에 다다르신 것 같더군.”

16551934187966.jpg“그러고 보면 황제 폐하께서는 늘 시벨롬 공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던 것 같아요. 물론 어미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정 많으신 그분이 늘 이복동생한테만은 차가우셨죠.”

16551934187982.jpg“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16551934187966.jpg“그 이유가 뭘까요?”

페르빈이 머뭇거리며 내게 말해주었다.

16551934187982.jpg“예전에 몬태규 백작한테서 지나가는 소리로 들은 적 있어. 시벨롬 공작의 친아버지가 선대 황제가 아니라 고위 귀족 중에 하나라는 소문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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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밤. 민페이 후작부인은 묵고 있던 숙소에서 나와 산책을 하다 그대로 어딘가로 납치당했다. 커다란 천에 휩싸여 어딘가로 이동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바닥에 자신의 몸이 닿고 천이 치워지자마자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1655193421781.jpg“감히 날 납치한 자 누구냐! 난 황실의 고귀한 피를 이은 시벨롬의 어미란 말이다!”

아무도 없는 화려한 방. 그녀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곧 근위대를 동반하고 나타난 황제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1655193421781.jpg“이렇게밖에 모실 수 없는 것을 이해하시오, 부인.”

1655193421781.jpg“황……황제 폐하.”

그는 옥좌에 앉아 피곤한 안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눈만큼은 안광이 비치듯 번뜩였다.

1655193421781.jpg“이제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시오.”

후작부인이 두려움에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한숨 크게 들이마시었다. 그도 이 질문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듯, 몇 번을 망설였다. 그가 민페이 후작부인에게서 시벨롬과 똑같은 얼굴을 발견했을 그때.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1655193421781.jpg“일전에 시벨롬이 친자 검사를 받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기록에는 없지만, 그 자리에 선대 칼라일 공작도 있었던 것을 알고 있소.”

1655193421781.jpg“폐하!”

민페이 후작부인이 몸을 바싹 엎드렸다. 황제의 눈이 그녀를 찢어 죽일 듯 번뜩였다.

1655193421781.jpg“아버님과 시벨롬의 혈연관계가 과연 일치했소?”

민페이 후작부인은 바닥에 몸을 엎드려 벌벌 기었다.

1655193421781.jpg“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요. 이미 그 일은 25년 전에 다 끝난 일인 줄 압니다.”

1655193421781.jpg“당신은 25년 전에 그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아직도 의문을 가지고 있소.”

황제가 그녀의 턱을 확 치켜들었다. 시퍼런 눈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1655193421781.jpg“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해. 당신과 아버지, 그리고 3명의 대신관들이 신전에서 비밀리에 그 검사를 진행했었지. 그날 아버님이 황궁 사람들의 식사에 수면제를 넣도록 지시해 다들 깊은 잠에 빠졌지만 나는 몸이 안 좋아 그것들을 다 토해냈고, 새벽에 몰래 들어오는 당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소.”

민페이 후작부인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1655193421781.jpg“아버지가 당신을 귀여워했던 건 천하가 다 알고 있소. 당신이 어떤 짜증을 부려도, 당신이 다른 남자와 몸을 부벼도 멍청한 아버지는 당신을 품에 안으며 어쩔 줄 몰라했지. 그런데 친자 검사를 받고 온 그날 밤, 아버지가 당신 뺨을 때리더군?”

황제가 후작부인의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귀 뒤에 움푹 팬 흉터가 보였다.

1655193421781.jpg“그래, 흔적이 남았었어. 당신이 뺨을 맞을 때 매번 주렁주렁하고 다니던 귀걸이 때문에 이곳이 팼었잖아.”

1655193421781.jpg“폐하, 저는 정말로…….”

1655193421781.jpg“그래서 시벨롬이 아버지 자식이 아니요, 내 형제가 아닌 걸로 알았었지.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아버지는 당신의 치마폭에 다시 빠져들더군. 아버지께 재차 친자 검사의 결과를 물었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똑같았고. 네 형제를 잘 돌봐주라고, 네가 형이니까 잘해야 한다고. 죽기 전까지 아버지는 시벨롬 걱정뿐이었소. 죽기 전 아버지는 내게 맹세하게 했소. 시벨롬을 제 1 후계자로 지정하고, 그는 하나뿐인 나의 형제이니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해주라고. 그의 모든 것을 품어주고 용서하라고.”

너른 방 안에는 소름 끼치는 침묵이 흘렀다. 시벨롬과 똑 닮은 민페이 후작부인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1655193421781.jpg“그럼 아버님의 말씀을 잘 따르셨어야죠. 폐하께서는 부모의 속을 한 번도 썩이지 않는 착하고 어진 아드님 아니셨습니까.”

1655193421781.jpg“나만 속인 거면 어떻게든 내 선에서 처리하려 했소. 그런데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마저 속였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지지.”

황제의 으스스한 목소리에 민페이 후작부인은 몸을 떨었다.

1655193421781.jpg“저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

1655193421781.jpg“당신이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도 다른 귀족들과 놀아난 것을 알고 있어. 그리고 일각에서는 그런 소문도 파다했던 걸 알아, 시벨롬이 아버님의 자식이 아니라 어떤 고위 귀족의 자식이라는 걸. 그러니까 말해. 시벨롬이 아버지의 친자인지, 아닌지.”

1655193421781.jpg“그건…….”

1655193421781.jpg“지금 말하지 않아도 좋소.”

황제가 광기에 어린 눈을 번뜩였다.

1655193421781.jpg“말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1655193421781.jpg“폐하, 지금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1655193421781.jpg“그래,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오. 아니, 내가 제정신일 수 있겠소? 나는 사랑하는 황후를 잃었고 아끼는 페르빈을 잃을 뻔했소. 그런 와중에 시벨롬은 입을 닫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지. 그러니까 당신 아들의 죄는 당신이 갚아야겠소. 도브레 경!”

그는 도브레 경을 불렀다.

1655193421781.jpg“부인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감시하라. 이 정보는 어느 데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16551934273111.jpg“예, 알겠습니다.”

양쪽 팔을 근위병에게 붙잡힌 민페이 후작부인이 억울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황제와 딱 눈이 마주쳤다.

1655193421781.jpg“혼자만 벌을 받는 게 억울하면 지금이라도 진실을 털어놓든지.”

하지만 후작부인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든 건 그녀의 아들, 시벨롬을 위해서였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1655193421781.jpg“하여튼 모자가 쌍으로 징글징글하군.”

  *** 시벨롬의 재판 당일. 법원은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로자먼드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북적였다. 좌석이 비치된 법원 내부는 물론, 밖의 복도에도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한참 있어서야 나타났다. 시벨롬의 오만한 얼굴은 여전했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허름했다. 오늘은 수수한 옷을 입고 왔는데, 그마저도 여기저기 솔기가 터진 것을 기운 상태다. 너덜너덜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시벨롬이 이러한 옷을 입은 이유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기 위함이다. 황제의 동생인 자신이 이렇게 바닥으로 추락했는데, 자신의 비참함에 사람들이 동정하면 재판에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가 재판정에 들어서자 구깃구깃한 종이 뭉치들이 마구 쏟아졌다. 관리원들이 사람들을 저지했으나 폭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1655193421781.jpg“천하의 죽일 놈!”

1655193421781.jpg“감히 황후 폐하를 죽이고도 저렇게 뻔뻔해!”

1655193421781.jpg“제 부인도 죽인 남자야, 형수라고 못 죽이겠어?”

1655193421781.jpg“칼라일 공작님을 죽일 생각을 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제국을 정말로 망하게 할 생각인가?”

시벨롬은 교도관들의 안내로 겨우 제 자리에 앉았다. 방청객으로 참석한 시민들을 죽일듯한 시선으로 노려본 건 덤이었다. 역시 시민들은 우매하고 멍청했다. 황제와 칼라일 공작, 그리고 재판장이 들어왔다. 시벨롬의 죄는 총 3가지로, 로자먼드 부인의 독살, 황후의 독살, 그리고 칼라일 공작의 독살 혐의였다. 심증은 확실했지만, 물증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오늘의 재판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페르빈은 시벨롬 맞은편에서 증거물들을 제출했다.

16551934187982.jpg“시벨롬 더럽의 첫 번째 죄목은 로자먼드 부인의 죽음에 관여한 죄. 지금은 고인이 된 라센딜 백작이 그의 사주를 받고 로자먼드에게 살구 씨앗이 숨겨진 초콜릿을 주었고, 로자먼드 부인은 살구 씨앗을 지나치게 섭취해 결국 독살당했습니다. 참고로 살구 씨앗은 독성이 있으며, 먹으면 독이 되어 죽습니다.”

16551934301516.jpg“라센딜 백작이 로자먼드를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해 죽인 것이오. 감히 그의 죄를 내게 뒤집어 씌우는 건가? 내가 그에게 명령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고!”

시벨롬의 항의에 페르빈은 조그만 몸집의 하녀장을 증인으로 불러왔다. 라센딜 백작저에서 일하던 하녀장이었다. 그녀는 시벨롬을 단번에 알아보고 분노를 터뜨렸다.

1655193421781.jpg“분명 저 남자였어요! 로자먼드 아가씨께서 돌아가시던 전날 밤, 저희 저택에 오셔서 주인님께 초콜릿 상자를 전해주시더라고요.”

1655193421781.jpg“백작이 직접 독극물을 제조해 로자먼드 부인을 죽인 것이 아니란 말이오?”

1655193421781.jpg“돌아가신 주인님께서는 저 남자의 꼭두각시였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에요!”

시벨롬이 항의할 새도 없이 재판장은 다음 혐의로 넘어갔다. 황후와 페르빈의 독살 건은 하나로 묶어 다루었는데, 그들이 당한 독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페르빈은 검은색 독이 회오리치는 투명한 유리병을 시벨롬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시벨롬은 그 독을 알아채고는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 독을 처음 보는 군중들이 놀라 수군대는 것과는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16551934301516.jpg“아니, 그걸 어떻게…….”

16551934187982.jpg“자네도 이미 알고 있는 독인가 보군.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이 독을 알아보는 자는 극히 드문데 말이야.”

재판장은 미리 제출받은 독약을 증거물로 살펴보며 질문을 던졌다.

1655193421781.jpg“이게 시벨롬 공작이 황후 폐하와 공작을 독살할 때 사용한 독이오?”

16551934187982.jpg“네,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의 몸과 제 상처에서 검출되었던 독으로, ‘사르페’라 합니다. 재판장님께서는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1655193421781.jpg“아니, 나는 처음 보는 것이오.”

16551934187982.jpg“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이건 크루거 왕국의 왕족들 사이에서 긴밀히 유통되던 것으로, 정적을 죽이는 데 쓰인다고 합니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독약으로 비싼 값에 팔려 귀하다 합니다.”

1655193421781.jpg“그런 비밀스러운 독약을 시벨롬은 어떻게 얻은 것이오? 여기 서류를 보면 이 독은 우리 제국 내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극독이라고 적혀 있는데.”

재판장의 표정이 더욱더 엄해졌다.

1655193421781.jpg“크루거 왕국은 우리와 수교를 하였으나 이런 흉물스러운 극독을 교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소. 시벨롬 그대가 직접 말해 보시오. 어떻게 된 일이오?”

시벨롬은 머리를 재빨리 굴려 보았다. 분명 이곳에 오는 도중에도 수만 가지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었었다. 그러나 몸이 굳어버린 것 같다.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거렸다.

16551934301516.jpg“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 독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페르빈은 공작저의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편지 뭉치들을 재판장에게 건넸다. 그동안 시벨롬이 아틸라와 주고받은 편지들이었다. 주로 시벨롬이 도움을 요청하면 아틸라가 그에 답하는 식이었다.

16551934187982.jpg“당신이 아틸라 왕에게서 얻어낸 독약이라는 걸 다 알고 있소. 당신이 이 독의 효능을 의심하자 아틸라가 시궁쥐들에게 먹여 실험해 보라고 했다면서? 독의 효험이 입증되자 당신이 기뻐하며 아틸라에게 편지를 보냈었고.”

재판장과 함께 편지를 읽어보던 황제는 벌떡 일어났다.

1655193421781.jpg“가증스럽고 경멸스러운 놈 같으니라고. 남의 힘을 빌려 대체 몇 명을 죽인 것이냐! 라센딜 백작을 시켜 로자먼드 부인을 죽이고, 아틸라의 힘을 빌려 황후를 죽이고 페르빈을 죽일 뻔했어! 너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재판장의 판결을 기다리기도 전에 황제가 자신이 직접 분노에 찬 판결을 내렸다.

1655193421781.jpg“죽음으로 네 죄에 대해 속죄해!”

시벨롬은 그 순간 세상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판결을 받은 이후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뜨문뜨문 기억이 났다. 재판장은 시벨롬의 항의에도 황제의 판결을 인정했다. 시벨롬은 간수들에게 양팔을 붙들려 재판정을 떠났고, 사람들의 비난과 저주를 온몸으로 맞았다. 이 순간이 꿈이기를 바라며 정신없이 간수들을 따라간 곳은 바로 지하감옥. 음산한 돌바닥에 그를 내팽개친 간수가 말했다.

1655193421781.jpg“여기가 로자먼드 부인이 죽은 곳이오. 저기 벽에 튄 피들은 다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이지.”

그때, 시벨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자먼드? 그녀가 죽은 곳? 그는 창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16551934301516.jpg“찜찜하고 더러운 곳에 날 가두다니, 나는 이곳에서 못 있겠다!”

1655193421781.jpg“거기도 감지덕지한 줄 아시오. 쥐가 득시글한 곳보다는 귀신이 있는 이곳이 낫지. 그럼 죽기 전에 마음 수양이나 하고 있든지.”

교도관이 매정하게 돌아섰다. 시벨롬이 창살에 바싹 붙어 그를 불렀지만 이미 그는 없어지고 난 뒤였다. 시벨롬은 울상이 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16551934301516.jpg“아아…… 아아…….”

벌써부터 등 뒤에 서늘한 귀신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코끝에는 로자먼드가 쓰던 장미 향수가 맡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16551934301516.jpg“제발 내게 이러지 마…….”

그가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건 귀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등 뒤에, 묵직한 로자먼드의 귀신이 붙어서 그를 누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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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193421781.jpg“이제 떠나봐야겠소. 국경이 심상치 않아.”

몬태규 백작은 부인과 현관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시벨롬의 재판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국경으로 한시라도 빨리 떠나기 위해서였다. 백작부인은 그의 품에서 한참을 안겨 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부드럽지만 곧은 눈길이 반짝였다.

1655193421781.jpg“그래요, 아틸라가 본국에 돌아갔는데 당신은 이곳에 남아 있으면 안 되잖아요. 별명이 아틸라 사냥꾼인 사람이.”

1655193421781.jpg“당신은 여기서 안전하게 콕 박혀 있어. 요즘에 크루거 왕국이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는데 도적떼가 자주 쳐들어오는 게 여간 심상치 않아. 몸도 약한 당신이 거길 따라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1655193421781.jpg“나는 여기서 있을게요. 수도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네요.”

그녀가 주변을 살피며 남편의 귓가에 속삭였다.

1655193421781.jpg“민페이 후작부인이 요즘 수도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네요.”

1655193421781.jpg“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현명한 일이지. 지금 시벨롬이 황후와 페르빈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 형국인데 어디 자신도 덩달아서 돌을 맞고 싶겠어? 당신은 칼라일 공작저나 자주 들여다 봐. 페르빈과 그 부인이 제일 필요한 건 친구의 지지야.”

몬태규 백작은 부인에게 신신당부했다.

1655193421781.jpg“그리고 또 하나. 혹시 수도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면 즉각 편지로 알려줘. 시벨롬 측 동태를 자세히 살펴주고.”

1655193421781.jpg“그게 정말이에요? 시벨롬이 크루거 왕국과 결탁해 왕위를 찬탈하려는 게?”

1655193421781.jpg“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어. 당신도 알잖아.”

백작 부부는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1655193421781.jpg“시벨롬 그놈,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뭣도 안 가린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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