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 자도 랭커 077화
예상했던 반응과는 너무 달랐다. 순간 현아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그러나 현성은 여전히 무섭게 노려 보고 있었다.
아까 양아치 놈들을 봤을 때와는 다른 표정이긴 했으나 화를 내고 있 다는 건 분명했다.
꿀꺽.
자신에게 저렇게 화난 오빠를 얼마 만에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늘 아픈 현아에게 친절하고 자상하 게 대해줬던 오빠였다.
저런 표정은 남에게 짓는 것만 봤 다. 아까같이 말이다. 솔직히 그것도 흔치 않았는데, 자신에게 저런 표정 을 짓다니.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 것에 놀라기 도 했으나 화내는 현성을 보니 더 놀랍기만 했다.
“어, 어어? 그, 그게……
“똑바로 말해라.”
“3, 3개월 정도…… 싸늘하게 노려보는 현성을 보자 히 익 하는 작은 비명소리가 절로 나왔 다. 순간 현아는 몸을 떨며 침을 꿀 꺽 삼켰다.
‘진짜 이게 아닌데.’
하지만 저리 화난 현성에게 할 말 은 딱 하나였다.
“……미, 미안해요오?”
사과의 말에도 현성은 여전히 현아 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 컸다며 대견해한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이런 걸 속이고 있을 줄이 야. 게다가 아까 같은 일이 있긴 했 지만 이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 다.
하지만 기분 좋게 즐기자고 들어온 곳에서 화낼 수도 없는 노릇. 게다 가 어떤 심정으로 숨겼을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크게 혼낼 수도 없었 다.
‘하아, 빨리 나아서 다 완치됐을 때 말하려고 했겠지.’
남매다 보니 뻔했다.
자신도 그런 이유로 아수라라는 정 체를 숨기고 있지 않았는가.
신 등급 직업이라는 것도.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른 문제다.
아수라의 정체나 신 등급 직업이라 는 것은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사소 한 것이다. 굳이 알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현아의 다리가 거의 나아갔 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 아닌가.
게다가 현성이 화를 내는 것에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일단 앉아.”
“으응.”
현아는 몹시 시무룩해져 있었지만 현성이 다소 누그러졌다는 걸 눈치 챘는지 다소 안도하며 휠체어에 앉 았다.
그걸 본 현성은 그래도 동생이 나 은 걸 보니 뭉클한 심정이었으나, 그건 그거고 화난 건 화난 거다.
‘그래도 다 나았으니 다행이긴 한 데. 괘씸해, 아주.’
웬만하면 빠른 시일 안에 자신이 아수라인 걸 알릴 생각이었는데 이 제 더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도 알고 계셨지?”
여기서 아주머니가 누구인진 말하 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현아는 아차 싶은 표정으 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누그러졌나 싶었는데 저거 라면 현아라도 기분 나쁠 거 같았 다. 가족인 자신은 몰랐는데 남은 알고 있으니 왜 화나지 않겠는가.
현아가 고개를 끄덕인 걸 보고 다 시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이제 와 어쩌겠는가.
“후우.”
한숨을 내쉬는 현성을 보는 현아.
평상시의 눈빛이다.
현아는 그걸 보고 안도했으나, 현 성은 딱 한 마디 말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어어? 네에.”
옛날 부모님이 잘못했을 때 혼내던 것과 비슷한 모습.
거기에 다소 주눅이 든 현아를 보 며 현성이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으니까 빨리 먹어 봐. 굳겠다.”
“웅.”
약간 시무룩하긴 했으나 그것도 얼 마 가지 못했다.
현성도 놀란 맛인데 어디 현아라고 버틸 수 있겠는가.
순식간에 전채요리를 먹어 치운 현 아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눅이 들어 시무룩 해한 주제에 말이다.
“오오! 오빠 이거 진짜 맛있다. 으 엑, 난 와인은 아닌가 보다.”
와인을 마시며 표정을 잔득 구기는 현아를 보곤 현성도 졌다는 듯이 피 식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역시 현성의 입맛에도 떫었다.
끝에 남는 향이 좋기는 했지만 비 싼 돈을 주면서까지 마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뒤이어 나온 요리들도 끝내주게 맛 있었다.
그러나…….
“오빠, 맛은 있는데 이걸로 배 채 우려면 코스 3번은 돌아야 할 거 같지 않아?”
“난 5번도 먹겠는데?”
아직 메인 요리가 나오진 않았으나 양이 적어도 너무 적었다.
매번 신기하고 색다른 맛이긴 했 다. 맛있기도 맛있었고, 태어나서 처 음 맛보는 맛도 있었으니 혀가 호강 하긴 했으나 반면 위는 혹사당하고 있었다. 왜 양이 이것밖에 안 되냐 고.
“그런데 너 그러면 재활 꾸준히 하 면 나을 수 있는 거야?”
“응? 어, 어. 일단은.”
“그게 언제인진 모르고?”
“……2주면 근력이 제법 붙어서 도 움 없이도 혼자 걸어 다닐 수 있을 거라고 했어.”
현성은 정말이냐는 듯 현아를 봤 고, 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년에 대학 갈 수도 있겠 는데?’ 심리적인 요인은 이미 사라졌다. 단지 그동안 다리를 사용하지 않아 퇴화되었던 근육만 회복된다면 걷는 데는 이상이 없다. 그렇다는 건 내 년에 대학도 갈 수 있다는 얘기.
‘워낙 머리가 좋으니까 공부는 좀 하면 될 거 같고, 늦어도 내후년에 는 대학을 갈 수 있지 않을까?’
당장 수능을 준비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이제 곧 9 월이 되어가는 시기이다 보니 11월 에 있는 수능을 준비하긴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었다.
그렇다 한들 포기할 현성이 아니었 다.
특별전형이나 다른 전형도 있지 않 은가.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현아가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 방면 으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대학 문제로 현성이 고민하 고 있을 때, 현아가 걱정 어린 목소 리로 물었다.
“……오빠 화 많이 났어?”
여태 밥을 맛있게 잘 먹기는 했지 만, 그래도 걱정은 되었나 보다.
“당연히 화났지. 너는 내가 암이라 는 걸 숨기다가 쓰러지면 어떨 거 같니?” “그, 그거야‘ 예시로 든 상황이 다르긴 했으나 그게 어떤 기분알지 잘 알았기에 현 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푹 고개를 숙인 현아.
그런 현아를 보며 현성이 입을 열 었다.
“그러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줘.”
“응응! 당연하지. 무슨 부탁?”
“수능 공부하자.”
“??????뭐?”
“수능 공부하자고.”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수능 공부란 말인가.
멍한 표정으로 현아가 현성을 보 자, 현성은 진지한 표정으로 현아를 보며 말했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성적도 좋 았었고, 머리도 좋은데 항상 집에만 있었잖아. 수능 공부하면 금방 대학 갈 수 있을 거 같아서.”
“……어, 그, 그런가?”
“뭐, 싫으면 안 해도 돼.”
더 고민되게 만드는 말.
현아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현성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 다.
“나도 회사를 다닐 때 보니까 시간 이 점점 갈수록 또래 친구들을 만나 기가 힘들어지더라고. 마음 맞는 친 구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고. 더더군 다나 너는 중학교도 중간에 나오게 되었고,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땄 는데 갈수록 친구 사귀기도 좀 그래 지니깐 하는 말이야. 또래 애들하고 지낼 수 있는 마지막 시기일 수도 있으니까.”
다 맞는 말이다.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언 제 친구를 만나겠는가. 그나마 있던 친구들과도 소홀해지는 것이 태반이 다.
거기다 현성의 말대로 현아는 중고 등학교 때 친구들도 없다. 아직 20 살. 내년에 대학을 간다 해도 21살 이다. 그리고 내후년에 간다 해도 22살.
3수를 했다고 생각하면 흔치는 않 겠지만 이상할 거 없는 나이이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생기겠는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거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시기.
그 말에 현아도 수긍할 수밖에 없 다.
“응. 나도 대학 가보고 싶어.” 친구.
현성이 가끔 재환이라는 친구나 다 른 친구 얘기를 했던 때가 있었다. 회사를 다닐 때 피곤해하면서도 고 마운 친구들 얘기를 하며 행복해 보 이는 미소를 지을 때가.
그때는 철없는 마음으로 내심 서운 해 했으나 이제 현아도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현아의 말에 현성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때 현아가 검지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단, 조건이 있어.”
“조건?”
그 말에 현성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현아를 봤다.
그래도 무슨 조건인지 궁금했다.
지금 현아가 조건을 달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대학을 가고 싶다는 아 이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현성이 아니었다.
“오빠도 같이 가자.”
“뭐? 아니 내가 왜?”
“오빠가 말했잖아, 마지막 시기일 수도 있다고. 그러면 오빠도 마찬가 지 아니야? 오빠 나이 25살인데. 빨 라도 내년에 간다고 쳐봐. 그럼 26 살이고, 졸업식을 서른에 하는 거야. 지금이 아니면 오빠도 늦어져.”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현아 를 봤다.
맞는 말이긴 했으나 현성이 뭐라 반박을 하려 할 때였다.
“오빠도 회사 다니면서 늘 가방끈 짧다고 구박받고 살았잖아. 그거 만 회할 수 있는 기회 아니야?”
“아니, 이제 게임으로 돈을 버는데 무슨……
현아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곳에 가는 거지!”
현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테블 릿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고는 현성에 게 보여줬다.
그리고 그걸 본 현성은 의문이 가 득한 눈으로 물었다.
“가상현실학과?”
“응, 요즘 이 학과가 대부분 추세 야. 이데아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 거나 고레벨일 경우 특기자 전형으 로 응시할 수 있는 제도가 있더라 고. 그것도 한국대학교에서 말이 야!”
“아까 격투 게임 하는 거 보니까 오빠도 실력 대박 좋던데? 게다가 오빠 영웅 등급 이상 직업이지?”
“어, 뭐 그렇지?”
“그러면 당연히 시험 볼 수 있을 거고, 앞으로 오빠가 돈을 버는 가 상현실게임에 대해 모르는 것도 이 상하잖아. 그런데 그걸 한국 최고의 대학교인 한국대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혹시 그게 싫 은 거는 아니지?”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현성.
그는 내심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가상현실학과라고 해서 단지 게임 만 잘한다고 입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현아가 말한 것도 시험에 응 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거지, 그게 결코 쉬우리란 보장도 없다. 어찌 되었건 공부는 해야 한다는 뜻 이다.
‘가만 보니까 내가 안 간다고 하면 안 갈 기세네.’
현아의 그런 열의 넘치는 모습에 현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 다.
“좋아. 합격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최선은 다해 볼게.”
“오케이! 나도 그거면 됐어!”
극적으로 협상을 한 현성과 현아.
현성은 설마 자신이 공부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나쁜 기회는 아니긴 하다.
‘게임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으니 까, 관련 학과에서 공부까지 하고 있으면 달라 보이긴 하겠지.’
남들이 봤을 때 그냥 게임으로 돈 을 버는데 고졸인 사람과 게임으로 돈을 버는데 한국대학교 가상현실학 과를 졸업한 사람은 달라 보이지 않 겠는가.
특히 한국 사회는 그런 게 심했다. 학벌인 낮으면 얕잡아 보는 것이.
그간 현성도 겪어오지 않았던가.
‘나쁠 건 없네. 뭐 떨어져도 가상 현실에 대해 공부한 거니까 도움이 안 될 거 같진 않고.’
현성이 수락하자 현아는 헤헤 웃으 며 태블릿으로 뭔가를 검색하더니 됐다는 듯 현성에게 말했다.
“문제집들 구매했으니까 내일쯤 을 거야. 내일부터 그거 같이 공부하자. 아! 그리고 오빠, 내일 나 재활치료 가는데 거기 같이 가자.” “뭔가 굉장히 할 일이 많아졌지만, 좋아.”
어차피 대회 전까지 할 것도 없던 차다.
기사 아수라의 보스 레이드 영상도 사실 하루면 끝날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사룡의 분신과 싸우는 영상도 있으니 급할 것도 없었다.
그때 웨이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 왔다.
똑똑.
드디어 고대하던 메인 요리!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가 나왔고, 냄새도 엄청나게 먹음직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먹고 싶은 스테이크.
다만…….
‘내 주먹보다 작네.’
‘너무 작다.’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며 현성과 현아는 디저트까지 먹은 주제에, 그 날 집에 들어가 라면까지 끓여 먹고 서야 식욕을 겨우 잠재울 수 있었 다.
재환은 이데아 홈페이지에서 나온 정보글들을 보고 있었다. 곧 있으면 몬스터 군단이 들이닥칠 거라는 글 들.
현실 시간으로 고작 3시간 후면 공성전이 시작될 것이다.
재환은 피식 웃으며 자신이 편집하 고 있는 영상을 봤다.
그리 긴 영상은 아니었다. 고작해 야 15분짜리 영상.
혹시 몰라서 프로그램을 쓰지 않고 다 돌려봤지만 어디 한 곳 자를 구 석이 없는 완벽한 영상이었다.
‘이번에도 시점 전환하는 편집만 해도 될 거 같네.’
오히려 그래서 더 편했다.
이렇게 짧은 영상일수록 편집에 손 이 덜 가는 것이다.
저번처럼 19시간짜리 영상들의 경 우 자를 곳이 없다 보니 어디까지 올려야 할까 고민이 돼서 오래 걸렸 었다. 하지만 이런 짧은 영상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뭐, 카락 영상이 아쉽긴 해도 더 좋은 영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했으 니까.’
그간 일한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 말이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만든 편집이 다. 그런데 그것을 보류하게 되었으 니 아쉽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재환은 이해했다. 현성은 더 좋은 영상을 만들 수 있는 녀석 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번엔 다른 기대감도 컸 다.
‘이 영상이 올라가면 베네아에서 공성전하는 애들이 고마워하겠네.’
현성 덕에 몬스터 군단이 약해졌을 테니까.
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 부분의 유저들은 전율할 것이다.
몇 천이 모여 있는 공성전 규모의 군단들을 농락하고, 보스들과 정예 들을 철저히 사냥하는 영상.
이런 영상에 전율하지 않는다면 어 떤 영상에 전율한단 말인가.
재환은 장담할 수 있었다.
‘빨리 편집해야겠어.’
시간에 맞춰 올리려면 분주히 일해 야 한다. 물론 그렇다 해서 사소한 실수도 해선 안 된다. 이런 영상에 실수가 들어가서야 어디 말이 되겠 는가.
‘이번에는 반응이 어떨지 기대되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