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 자도 랭커 267화
용암이 득실거리는 화룡의 둥지.
그곳으로 가는 길.
생각보다 간단했다.
“저기로 쭉 가시면 됩니다.”
퉁명스럽게 말하는 윌.
아무리 그런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까칠하다.
건방지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런 꼬맹이의 도발에 넘 어가는 것이야말로 민망한 일.
그냥 두었다.
딴지를 걸어봐야 발뺌할 게 분명하 니.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상대가 퉁명스러운 만큼 마찬가지 로 대해줬다.
아무리 유리아에게 당한 게 있다고 해도 그렇지.
그걸 왜 현성에게 푸는가.
듀라셸도 용서하는 것을.
심하긴 했지만.
‘심하긴 했어.’
유리아만 생각하면 골이 썩는 황제 가 아니다.
진짜 힘만 믿고 설치는 것도 아니 다.
그만큼 황제가 보상도 해주지 않 나.
듀라셸도 그래서 용서한 것.
그러나 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 다.
하기야 그럴 수 있다.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갔다.
좌우로 용암이 득실거리는 동굴로.
지름길이라 그런지 길이 꽤나 험했 다.
원래라면 산 천지에 올라가 던전에 입장했어야 하니.
차라리 이게 나았다.
조심만 하면 되니까.
‘연계 퀘스트도 오랜만이네. 화룡 잡는 건 라이브로 가야겠다.’
이데아를 플레이한 지 약 4개월. 방송을 시작한 지는 대략 3개월.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
하지만 현성에겐 꽤 의미가 있었 다.
우선 현성의 생활이 변했고, 상황 이 많이 나아졌다.
현아는 이제 걸어 다닐 수 있고, 친구도 생겼다.
현성도 더 이상 회사에 나가 조롱 받지 않아도 되고, 편히 즐거운 일 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
인기도 생겼으며, 친구의 회사도 잘된다.
없던 여유도 생겼고, 웃음도 생겨 났다.
그러기에 길었다.
길게 느껴졌다.
‘좋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직업.
허구한 날 잠만 자고, 중요한 순간 에 쓰러지기나 하고.
이제는 그것도 적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기면증은 가끔만 터지지 않던가.
용암길.
그곳을 걸으며 생각했다.
예전 생각을.
‘너무 좋다.’
도중에 몬스터도 만났다.
가볍게 처리했다.
예전 생각도 난 김에 예전 복장으 로.
철검에 가벼운 가죽 갑옷.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준이 높?긴 했으나 어려운 몬스터 는 아니었다.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후우. 이제 던전인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을 때.
눈앞을 반긴 건 다름 아닌 한 메 시지 였다.
그것도 처음 플레이했을 때 나왔던 메시지.
[타나노스의 기면증 스킬이 발동됩 니다.]
[강제로 수면 상태에 빠지게 됩니 다.]
[강제로그아웃 때까지 캡슐이 망가 져도 캐릭터는 게임에 남아 있으니 접속을 해제해도 됩니다.]
[타나노스의 알람시계 설정을 하시 겠습니까?]
‘아, 그럼 그렇지.’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알람을 맞춘 뒤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현성이 자고 있는 그곳에 한 사람 이 나타났다.
아그니라는 랭커가.
‘이게 내 시작점이다.’
각오를 다진 모습.
하지만 그런 아그니의 앞을 막는 건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가면도, 그리고 신기도 착용이 되 어있지 않은 상태.
거기다 갑옷들도 다 해제하여 초반 그 모습과 비슷하나 전설로 도배되 어 있다.
그러기에 아그니는 알 수 없었다.
저기서 호구처럼 자고 있는 놈이.
그 대단한 아수라라는 것을.
‘저 전설 아이템 중 아무거나 나왔 으면 좋겠군.’ 결국 그 욕심이 화를 부르고 말았 다.
“이, 이게 뭐야? 으아아아악!”
* * *
까앙! 까아아앙
묵묵히 철을 두드리는 듀라셸.
그런 그 옆에 묵묵히 서 있었다.
작은 아이가 신경 쓰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듀라셸의 망치가 허공에서 멈칫거 렸다.
“허허, 무슨 일이 있나 보구나?”
스승이 제자의 고민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저리 티를 내는데 모른 척을 하기 도 힘들다.
고민과 걱정이 동조하는 얼굴.
그것을 보며 허허 웃으며 물어왔 다.
“예.”
“허어,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었던 게냐?”
말을 하며 망치를 내려놓는다.
제련을 멈춘다는 건 이 무구를 포 기한다는 뜻과 같다.
최적의 타이밍을 놓친 거니.
거기에 월은 죄송스럽다는 표정이 더해 졌다.
“윌아, 걱정하지 마라. 철이야 다시 녹이고 만들면 그만인 것을. 그것보 다 너의 걱정을 신경 쓰는 게 옳 다.”
역시 현자다운 말이다.
거기에 탐복한 월이 고개를 숙였 다.
“스승님은 아무렇지 않으신가요?”
“무어가?”
“그 엘프가 여기 와서 장난을 친다 고 피해를 주는 것이 말입니다. 거 기에 황제는 협박까지 하지 않았습 니까!”
말을 하면서 분노가 이른다.
그럴 수밖에.
분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당했다 생각하니.
그러나 스승, 듀라셸은 껄껄 웃어 재 꼈다.
“그리 보이더냐?”
“ 예?”
“엘프 그 꼬맹이가 와서 장난을 치 고 황제가 협박을 하는 것으로 보이 더냐?”
“예, 예에.”
그게 아니면 무어인가.
엘프는 와서 피해를 주고, 황제는 그 피해를 수습하기는커녕 협박을 한다.
윌이 보기엔 그랬다.
“허허허, 배워가는 중이구나.”
어리둥절한 윌.
그 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엘프 꼬맹이는 장난을 친다. 맞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사실이 지. 하지만 그 엘프 꼬맹이도 그냥 그러고 가진 않는다.”
“ 예?”
처음 듣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렇다.
처음 얘기해 주니.
“늘 그러고 가서 미안한 것인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더구나. 이를테면 이 공방을 뒤덮고 있는 온 도 유지 마법. 누가 건 것 같으냐? 설마 나?”
“아, 아니. 그건 아니죠.”
“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마도사 가 누구더냐.”
“그, 그건.”
“그저 심심해서 그러는 거야. 그러 고 미안해서 수습하고 말이야. 이번 밤에도 뭘 두고 갔는데 에잉, 심심 하면 놀아달라고 하면 될 것이지, 와서 왜 그러고 가는지 모르겠어.”
살짝 투덜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윌은 그걸 듣고 꿀꺽 침을 삼켰다.
설마 그럴 줄이야.
황제는?
그럼 황제는 무어였던가.
“황제는요?”
“그분은 대단하신 분이지. 우리에 게 지원을 주는 쿠크다슨 왕국. 그 들의 지원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렇게 뛰어난 광석들을 모두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이 변방의 왕국에서?”
“아.”
“알게 모르게 사과하고 도와주고 있는 거다. 황제는 체면 때문에, 엘 프 꼬맹이는 자존심 때문에.” “어른들의 세계인가요?”
“으음, 황제는 그럴 수 있지만, 엘 프 꼬맹이는 어른의 세계라 보긴 힘 들지.”
인자한 미소.
그리 말하며 미소를 지으니 현자가 따로 없었다.
그 미소에.
“저, 저도 사과해야겠어요.”
누구에게?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뻔했으니까.
그저,
“조심해서 다녀오려무나.”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배웅을 해줄 뿐.
허겁지겁 뛰어가는 저 작은 드워프 를 보라.
하나 배워 그 깨달음을 실천하러 간다.
보기 좋지 않은가.
‘보기 좋구나.’
스승들은 서로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모르게 도와주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는 그 증오가 사라지고, 서먹 해졌다 하나, 아직 그 응어리가 남 은 자도 존재한다.
그러기에 제자들끼리는 사이좋게 지냈으면 했다.
부디.
그러나 한 놈이 떠올랐다.
전에 제자들끼리 겨뤘을 때 심상치 않게 당했었던 뮤벨.
그의 스승이,
‘엘고르스 녀석,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했다.’
나태하고, 오만한 녀석.
그 녀석이 움직였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
‘에잉, 늙으면 이게 문제라니까.’ 늙어서 잔걱정이 늘어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은 신경 쓰지 말자. 그냥
황제에게 이미 이 사실은 전달했 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대륙, 아니, 이 세계에서 가장 강 력한 황제에게 말이다.
‘부디 별일 아니길
동쪽 대륙.
미국 서버라고 불리는 곳에.
잠의 사도가 생글거리는 미소와 함 께 나타났다.
한 남자를 데리고.
백금색 털이 팔과 가슴, 그대로 목 과 얼굴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남 자.
결정적으로 꼬리가 달려 있었다. 아름다운 백금의 꼬리.
천공의 사도가 그를 보고 감탄한 건 외형 때문이 아니다.
“오호, 이분이……
“아하하, 데려오는 데 힘들었습니 다. 워낙 말을 안 듣는 분이시라.”
“인사가 늦었습니다. 천공의 신의 사도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천공의 사도.
그 인사를 거만하게 받는 그 인물 은 인상을 찌푸렸다.
〈용건.〉 말조차 강력하다.
소리를 들은 것에 불과할 뿐인데 데미지를 입었다.
꿀꺽.
이것이 대륙오천.
대륙최강의 생명체.
“다름이 아니오라, 중앙 대륙의 황 제와 싸워주셨으면 합니다. 대신 에……
조건을 말하려 했을 때.
눈썹이 꿈틀거린다.
〈애송아, 그 제안이 매혹적이지 않 았더라면 네놈은 죽었다.〉
단언.
그리고 천공의 사도는 느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그 증거로,
[천공의 신이 위험하다 알립니다.]
[천공의 신이 언행을 조심하라 경 고합니다.】
신조차 경고를 했으니.
절로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체의 정점. 최강의 생명체.’
수왕, 엘고르스.
대륙오천 중 최강의 생명체였으니.
가장 강한 건 황제이긴 하다.
하지만, 단순 육체만 따지자면 황 제가 가장 강한 게 아니다.
순수한 육체의 힘.
생명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육체의 힘은 황제도 한 수 접어줘야 한다.
그게 엘고르스이며, 수왕이다.
모든 수인들의 왕.
〈황제와 싸워 달라 했느냐.〉
“예, 폐하.”
폐하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위압감.
그것이 현실에서 왕처럼 사는 천공 의 사도조차 굽실거리게 만들었다.
〈싸워 달라는 것으로 나에게 무엇 을 주려 하느냐.〉
“신좌에 오를 수 있는 잊혀진 신의 정수를 드리겠나이다.”
잊혀진 신의 정수.
희귀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아이템.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그 아이템. 이름 잃은 신의 정수와 비슷하다.
이것만 있다면 신이 될 수도 있다. 탐이 나는 아이템.
그럼에도 수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만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놈을 죽여주면 무엇을 주겠느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싸워주는 것만으로 준다는 아이템 이 신의 정수이다.
그런데,
‘죽여준다고?’
꿀꺽.
〈자, 제시해 보거라. 놈을 죽여주 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깊은 눈.
수왕의 눈을 본 천공의 사도는 부 르르 떨었다.
이게 왕의 기운을 가진 자의 모습.
오만함이 절로 어울리는 자의 모 습.
아아,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마주한 천공의 사도가 입을 열었다.
“황제를 죽여주신다면 ……을 드리 겠습니다.”
그 말에.
〈좋다.〉
왕이 윤허했다.
거래는 완료되었다고.
왕의 오만일지.
자신감일지.
그건 결과로 드러날 터.
황제가 최강이라는 것을 과연 깰 수 있을지.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아수라를 막을 수 있다.’
그 광경을 보는 잠의 사도는 그저 방긋거리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재미있게 되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