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 자도 랭커 2부 21화
7장. 복귀 준비(3)
현성은 일단 진정하긴 했다.
진짜 당장 보자고 한 것도 아닌데 너무 과하게 긴장한 감이 있긴 했다.
누구라도 긴장할 상황이긴 했지만.
예린의 아버지가 어디 그냥 아버지던가.
그룹 총수이시지 않나.
긴장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재벌집 딸과 연애를 하는데 어느 누가 긴장을 안 할 수가 있겠나.
어쨌든, 그건 접어두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더 긴장이 될 테니 차라리 이야기를 돌려보자는 게 현성의 의견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수라는 복귀할 생각은 없는 건 여전한 거 같고.
“그거는 그렇지.”
-쩝, 아깝긴 한데. 로이는 해봤어?
“당연하지. 안 그래도 예린이한테도 로이 한다고 얘기했다.”
-하긴 예린 씨가 그런 걸로 막을 타입은 아니시긴 하지.
현성도 재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알고는 있었는데 미안해서 비밀로 하려던 것도 있었다.
근데 그걸 예린이 먼저 흔쾌히 말해주니 더 편하게 말을 꺼낸 것도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누가 더 연상인 건지.
-그럼 영상은 올릴 거야?
로이를 하기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부계정을 파서 영상은 올릴 거냐고.
이미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때는 너무 가볍게 이야기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재환은 그래서 확실하게 하고 가자고 말을 꺼낸 거였다.
현성도 그걸 알기에 잠시 고민했지만.
“좋아. 이미 영상은 찍고 있었지.”
-오! 역시 프로긴 프로야.
“뭐 그런 편이긴 하지.”
현성의 잘난 척에 재환은 피식 웃었다.
반박할 말이 있어야 뭐라 하지.
세계 최고의 게이머보고 잘난척하지 말라고 해봐야다.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게이머인데.
-그럼 어제 하루 종일 한 거야?
“응, 그랬지. 10시간 꽉꽉 채웠다.”
-어우, 미친놈. 어땠냐? 이데아 때보다 어렵지? 아무래도 그때처럼 신등급 직업은 없을 테니 더 빡센 것도 있을걸?
마치 현성이 고생하는 걸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
하긴 여태 현성이 고생한 적이 없긴 하지 않았던가.
그걸 기대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예상과 달리 너무 쉽게 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냥 말해주면 재미가 없는 법이지.
현성은 재환을 골려줄 생각으로 살짝 연기를 더했다.
“어렵긴 하더라.”
-으하하!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레벨 몇인데? 10시간 했으면 뭐 너라면 시련의 동굴은 클리어했을 테니까, 한 14? 16?
하루 만에 레벨 14? 16?
저거 자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현재 로스트 이데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게 하루에 최대 8레벨이었다.
그만큼 레벨 올리기가 극악이라는 것.
한데 그것의 두 배를 부르는 재환.
그만큼 현성을 인정한다는 거였다.
최고 기록의 2배 이상의 결과.
한데 이게 웬걸.
“아니, 레벨은 23이야.”
-……? 야 나 순간 못 들었는데 뭐라고 했냐?
“23이라고.”
-……진짜? 아니지, 이 새끼가 게임으로 구라 깐 적은 없으니까 진짜라는 건데… 그게 말이 되나?
진심으로 고민하는 재환을 떠올린 현성은 피식 웃으며 사실을 말해줬다.
이데아를 깨고 난 뒤 특전이라고 얻은 게 바로 타나노스였고, 거기에 리베우스까지 펫으로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재환은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아다리가 맞을 수밖에 없다.
이러면 오히려….
-그러면 오히려 레벨이 좀 낮은 거 아니냐?
“뭐 이것저것 일이 있어서, 영상 보내주면 어차피 볼 거 아니냐?”
-좋네, 아수라의 신작을 내가 제일 먼저 본다는 게 진짜 오랜만의 특권이네.
“크흐흐, 그럴 줄 알았다. 근데 이번 컨셉은 전과는 좀 달라.”
-컨셉? 그런 것도 정했냐?
“응, 사제 컨셉으로 나가고 있어.”
-오, 사제?! 서포터로? 이거….
이젠 어엿한 영상 제작 회사 사장이지 않나.
현성과 공동대표이긴 하지만.
실질적 운영은 재환이 모두 하는 중이다.
다시 말해 이 분야에서는 재환도 상당한 프로라는 거다.
그런 재환의 감에 이건 대박이라는 신호가 왔다.
컨트롤이 꽤 좋은 사람이 해도 대박 컨텐츠라 생각이 드는데 그걸 아수라인 현성이 한다?
이건 미쳤다.
대박도 아니다, 대박 중에서도 대박.
초대박이 틀림없다.
-이거 느낌 좋다. 그럼 일단 영상 보내봐.
“오야. 안 그래도 전송 중이었다. 지금 갔네.”
-오케, 나 그러면 영상 보러 간다. 나중에 연락하마.
재환과 통화를 그렇게 끊고 현성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 걸 보면 늘 본받고 싶은 친구였다.
영상을 보내고 대충 씻고 나오니 시간도 좀 애매하긴 했다.
데이트가 점심시간에 있었어서 딱 저녁을 먹을 시간인 6시였다.
그러고 보니 현아도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나간다 했다.
데이트를 하면서 좀 체한 건지 속도 더부룩해서 저녁 생각이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로이나 하자!’
역시 생각을 비울 때는 게임만 한 게 없지!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바로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으니.
바로 간다.
* * *
현성이 예린과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아침.
플라톤에서는 정지환 대리가 잔뜩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꿀꺽.
이제 보고서를 내야 하는데 차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앞에 있는 문을 바라봤다.
떡하니 룬 제국 담당팀 팀장, 한문석이라 적혀 있는 문.
언제 봐도 부담스럽고 불편한 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앞에서 서성일 순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보고서도 이미 다 작성하지 않았나.
그것도 기깔나게 잘 쓴 보고서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변명을 늘어놓은 것도 아닌 최대한 팩트를 기반으로 작성한 보고서.
정지환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용기를 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문에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똑똑.
“한문석 팀장님, 룬 제국 중앙 부분 관리자 정지환 대리라고 합니다.”
용기 내어 한 말.
그리고 얼마 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정지환 대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나이가 그리 많지 않지만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있는 남성을 볼 수 있었다.
나이는 대략 30대 초반 정도는 되었을까?
하지만 튼튼한 체구와 강인한 인상이 정지환 대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슬쩍 쳐다보는 눈빛조차 너무 매섭지 않나.
정지환 대리는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십니까.”
“예,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한문석 팀장의 말에 정지환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정지환 대리가 팀장인 그에게까지 올 일은 없긴 했다.
직속 상관인 과장이나 차장, 부장을 건너뛰고 팀장에게 올라오는 일은 드물긴 했으니까.
의문을 가진 한문석 팀장에게 정지환 대리는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든 한문석 팀장은 이게 뭐냐는 듯 쳐다봤고, 정지환 대리는 긴장했으면서도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바로 어제 나타난 한 유저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흐음, 저에게 가져온 걸 보면 심각한 사안인가 보군요.”
“예, 우선 보고서에도 정리를 했듯이 유저의 이력 자체가 너무나도 특이합니다. 바로….”
“어제 생성한 캐릭터인데 신등급 직업 전직, 거기다 열람 불가?”
“예, 그렇습니다.”
확실히 이만한 사안이라면 자신에게 다이렉트로 올라오는 게 맞다.
심각한 사안이긴 하다.
캐릭터를 생성하자마자 신등급 직업 전직이라니.
해킹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해킹이 가능할까?
아니, 그럴 리가.
한문석 팀장은 그거만큼 불가능한 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데아가 지켜보고 있는 이상 불가능하다.
한데 이미 일어난 일이지 않나.
무엇보다.
“후우우우, 결사대의 일 중 하나가 망쳐졌군요.”
“…예, 그렇습니다.”
“쯧, 이런 유저라면 아마 막기도 힘들었겠죠. 보고서를 보니 타당한 대처를 했고요.”
“아.”
이걸 알아주는 건가!
정지환 대리의 얼굴에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보고가 차라리 어제였으면 좋았겠지만, 어느 정도 욕심 때문에 그러지 못하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인사에 반영하도록 하고 일단 알겠으니 물러나세요.”
“예, 감사합니다.”
정지환 대리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팀장실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 한문석 팀장은 미간을 주무르며 인상을 썼다.
하필이면 비밀 결사대의 프로젝트 중 하나를 망칠 줄이야.
이건 꽤 손실이 크다.
‘아직 유저들 중에서 접근한 유저가 없는 걸로 알건만.’
이게 이렇게 드러나게 됐다.
그것도 어제 막 캐릭터를 생성한 유저에게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현성이라는 이 유저에게 제재를 먹이고 싶지만, 그럴 권한도, 권리도, 명분도 없다.
무엇도 없다.
부디 저 유저가 더 깽판을 치지 않길 바랄 뿐.
조금 잘못되면 거대한 프로젝트 전체를 망칠 수 있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
무려 룬 제국.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고 뛰어난 나라의 프로젝트 중 하나지 않나.
‘그걸 망칠 수야 없지.’
현성이라는 유저는 집중 관리를 해야겠다.
다만 이건 본부장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거다.
보아하니 정보 열람이 본부장과 민유라 회장에게만 권한이 주어져 있는 코드였다.
플라톤의 실세라 할 수 있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만이 열람을 할 수 있는 유저?
한문석 팀장은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실세 두 사람만이 열 수 있는 정보.
그런데 그게 이제 막 프로젝트 중 하나를 망쳤다?
이거 설마.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최대한 은밀하게 준비했는데.
아니다.
그랬다면 직접적인 푸시가 들어왔을 거다.
한데 그게 없다는 이야기는….
‘아직은 심증만 있는 거다.’
확실히 숨기고 숨겨 최대한 은밀하게 만들었으니.
비밀 결사대라는 것 역시 위장이다.
그 안에 더 중요한 게 있었지만.
아직 실세인 두 사람은 모르는 모양.
그거까지 알았다면 정말 한문석이 이대로 있을 순 없었을 거다.
‘이 유저가 두 사람의 비밀 요원 같은 거겠군.’
한문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조금은 사려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다 해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 한문석도 아는 게 너무 적었다.
어떻게든 떠보긴 해야 하는데.
민유라 회장에게 연락을 닿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끈도 얇았다.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우선 조민우 본부장을 어떻게든 떠봐야겠어.’
실세라고는 하지만 힘은 많이 없는 조민우 본부장에게 바로 직통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예, 조민우 본부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룬 대륙 관리팀 팀장, 한문석입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딱딱하고 사무적인 목소리.
하지만 주눅은커녕 오히려 우습다는 듯 한문석 팀장은 말을 이었다.
“혹시 위쪽으로 보고가 들어간 게 있나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이번 비밀 결사대 프로젝트 중 연결점 하나가 소실되다 보니 다른 팀에서도 연락 온 게 있나 하고요.”
-아니요, 딱히 그런 보고는 없었습니다.
조민우의 음성을 들어보니 확실히 없는 모양.
그러면 다른 걸 떠봐야 하나?
아니다, 여기서 더 떠보면 들킬 수도 있다.
“답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수고하십시오.
그렇게 끝난 통화에 한문석 팀장은 다시 인상을 찌푸리곤 미간을 주물렀다.
건진 게 하나도 없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현성의 유저 정보를 바라볼 뿐.
‘네가 누구든지 상관없다. 내 목적을 이룰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