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 자도 랭커 2부 29화
10장. 자유도시 파이튼(2)
자유도시 파이튼.
대륙의 중앙이자 룬 제국의 몇 안 되는 자유도시 중 하나.
지리적인 여건을 아는 유저는 많이 없었다.
굳이 알 필요도 없었고.
유저들에게 중요한 건 다름 아닌 이 주변 사냥터가 제일 중요했다.
상인 유저들에게는 또 다르겠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유저들에게는 그런 것보다 주변 사냥터에 가장 민감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파이튼은 상당히 괜찮은 도시였다.
레벨 30부터 80까지 폭넓은 사냥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룬 제국의 중앙 지역에서 시작했다면,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 많은 이들이 오가는 지역이라는 뜻.
그만큼 유저들에게 편의가 많이 제공되기도 했다.
호로록.
테이블 앞에 앉아 고급스러운 찻잔에 놓인 홍차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제복을 입고 있는 남성.
그리고 그런 남성 옆에서 제 몸과 비슷한 크기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뭔 사발 마시듯 홍차를 마시는 작은 집사 펫까지.
여유롭게 도시를 즐기는 중이었다.
“좋네.”
확실히 마을들과는 달랐다.
편의 시설도 많고 맛집도 상당했다.
예린과 데이트를 하다 보니 홍차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곳의 홍차가 상당히 향이 좋았다.
딱히 디저트는 시키지 않았지만, 디저트가 절로 생각나는 맛이었다.
현성이 그렇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 동안.
한편 그러지 못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야! 빠, 빨리 구해!”
“뭣들 하는 거야! 동쪽 지역이래!”
“미친! 몇 시간 뒤지?”
“2시간도 안 남았어! 빨리 안 가면 자리 다 뺏긴다!”
대부분 유저들이 분주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원래 NPC들이 제일 바쁘다.
현성도 게임을 오래 해봐서 알지 않나.
근데 유저들이 저리 바쁘다?
이런 경우는 뻔하다.
유저 간의 갈등이 번진 거다.
현성은 그렇게 판단을 내리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유저들이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몇몇 NPC들이 혀를 차며 아니꼽게 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뭐라 하는 그들.
현성은 그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하이고,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이방인들끼리 무슨 싸움이 났다더만.”
“길드끼리의 싸움이라지?”
“길드전을 한다는데 주민들에게는 피해가 안 오게 한다네요. 걱정 말고 일들 하시면 될 거 같아요. 모험가들, 그러니까 이방인들은 왜 저리 폭력적인 건지 모르겠네요.”
현성은 NPC들의 대화를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저들 간의 갈등이다.
검색을 해보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현성과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고.
딱히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어제부터 오늘까지.
꽤 여러 일들이 있지 않았나.
특히 오늘은 무슨 신전을 짓는다 난리를 치고 그거에 도망쳐 가다 성녀가 될 성기사를 꼬셔서 도망치게 만들지 않았나.
그걸 생각하니 현성은 가슴이 꽉 막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홍차만 마시는데도 체한 거 같다.
‘후우, 성녀가 될 애라는 걸 난들 알았냐고.’
자신과 연관이 있겠다고 혹시라도 찾겠나 싶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래서 이렇게 쉬고 있었던 거다.
가끔은 이런 여유도 중요하니.
거기다 이번에 스킬들을 너무 많이 받지 않았던가.
‘새로 얻은 스킬들에 적응할 필요가 있지.’
스킬을 굳이 실험하면서 적응하지는 않아도 된다.
현성 정도 되면 그냥 스킬들을 읽는 것만으로 감이 잡혔으니.
어디 이데아 처음 하나.
물론 여기는 이데아가 아닌 로스트 이데아지만.
구동은 같지 않던가.
스킬에 대한 건 보기만 해도 감이 잡히는 법이다.
여태껏 그래왔으니.
그렇다 해서 현성은 그걸로 끝낼 생각은 아니다.
자신의 이론을 세운 뒤 그게 맞는지 검증은 필수.
다만 그걸 실전에서 하려는 거다.
‘사냥터는 어디로 갈까.’
이번에도 파티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경험치를 먹는 게 늦기는 하겠지만.
이제 이틀 차에 레벨 50을 거의 달성해 가는 현성이 굳이 경험치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번 게임의 목표는 오로지 재미이므로.
파티를 한다 해서 엄청 답답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좀 높은 수준의 파티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기도 하고.
다만 좀 걱정되는 게 있었다.
‘아직 기면증이 발동 안 됐지.’
파티 중에 기면증이 발동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래서 최대한 시간을 버티는 중이었다.
차라리 이러다 기면증이 오면 꿀이니까.
그러고 파티를 찾아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고 홍차를 홀짝이고 있었을 때.
근처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아이! 갑자기 힐러를 어디서 구해!”
“교단에 가서 사제라도 불러와야 하나?”
“미쳤어? 길드전에 사제를 어떻게 데려와! 돈을 아무리 줘도 분쟁 간에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게 교단 새끼들 규율이야. 못 데려와. 유저를 용병으로 고용해야 해.”
한숨 섞인 목소리에 현성은 귀를 쫑긋거렸다.
듣자 하니 길드전의 관계자 같은데.
마침 힐러를 고용하려는 모양이다.
하기야 사제와 같은 힐러들은 몇이 있어도 부족하니.
게다가 수도 적다 보니 구하기도 쉽지 않다.
자신에게 오면 받아줘야 하나?
현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설마 자신에게 오겠느냐는 식의 생각이었다.
“어!? 야 저기 봐봐. 사제 아니야? 게다가 유저 같은데?”
“어?”
현성을 발견한 건지 멀리서 말을 하는 그들을 보며 현성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설마 진짜 자신에게 올 줄이야.
용병으로 고용하려 하나?
돈은 딱히 필요 없지만.
적당히 받아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현성에게 다가왔다.
“저…….”
“예?”
마치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거처럼 무관심한 표정을 짓곤 대답하는 현성.
역시 연기 하나는 기깔나게 잘했다.
이것도 컨트롤에 속하는 거라고 봐야 하나?
어쨌든.
그들은 좀 쭈뼛거리는 표정으로 현성에게 물었다.
“저희가 길드전을 하는데 힐러가 부족해서 그러는데 혹시 용병으로 참여해 주실 수 있나요?”
현성은 그 말에 수십 가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하고.
하지만 그 고민은 의미가 없어졌다.
다름 아닌 현성의 어깨 위에서 홍차를 사발 마시듯 마시던 리베우스 덕분에.
“후후후, 우리 주인님을 고용하시려면 상당한 대가를 치르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요?”
“어, 어? 펫?”
“후후후, 맞습니다요. 저는 주인님의 충직한 펫이지요. 그런데 그쪽에서 과연 저희 주인님을 고용할 능력이 있으려나 싶은데요?”
이 새끼가 뭐 하는 거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여기서 막는 것도 좀 모양 빠지는 일이기에.
현성은 저도 모르게 홍차에 집중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치 리베우스가 자신을 대변한다는 듯한 태도.
그 모습에 현성에게 다가온 유저 티미는 흠칫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분위기에 맞춘 현성의 모습이 너무나도 고풍스러웠기에.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흰 사제복에 귀공자와 같은 외모.
무엇보다 힘이 있어 보이는 펫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뭐,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해 보인다.’
근거는 빈약했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사람을 고용한다면 분명 길드전에서 큰 성과를 이룰 수도 있을 거 같다.
어떡해서든 잡아야 하는데.
길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티미는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듯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후우, 그러면 저희 길드에서 가지고 있는 스킬북 두 개를 드리겠습니다.”
“흐음.”
스킬북 두 개?
현성은 고민한다는 듯 흐음거렸지만.
상당히 높은 보수이긴 했다.
그냥 일반 등급의 랜덤 스킬북의 시세가 100만 원이 넘어가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 용병 한 번에 200이나 버는 거다.
이것만으로 허락하려 했으나.
티미가 말을 이었다.
“그것도 둘 다 희귀 등급입니다.”
“……?”
현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티미를 바라봤다.
뭘 믿고 저렇게 지르는 거지?
현성이 물론 비싼 척을 하긴 했지만.
진짜 그게 먹힐 줄이야.
아니, 애초에 이게 먹히는 거였나.
아무튼 이 정도면 좋긴 하지.
현성이 그렇게 좋다고 허락하려 한 순간.
리베우스가 화가 났다는 듯 찻잔을 세게 내려놓고는 언성을 높였다.
“지금 우리 주인님을 물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보시는 겁니까요!?”
“……?”
왜 네가 난리인데.
딱 그 심정으로 현성이 리베우스를 봤지만.
리베우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을 했다.
“그리고 스킬북 두 개? 희귀 등급으로 말씀이신 겁니까요? 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요! 고작 그걸로 우리 주인님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요!”
“……아.”
탄식을 내는 티미를 보며 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글렀다.
길드전은 무슨.
좀 쉬었다가 기면증 발동되면 파티 하나 구해서 사냥이자 하자.
현성이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티미가 리베우스에게 살짝 고갤 숙이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해서 그랬습니다.”
“알아들으셨다면 다행입니다요.”
그제야 좀 화가 누그러졌다는 듯 말하는 리베우스.
현성은 리베우스를 보며 생각했다.
‘얘 뭔데 협상을 이리 잘하냐.’
역시 악마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현성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리베우스는 티미에게 마치 그래서 더 뭘 줄 수 있느냐는 듯 바라봤다.
그러자 티미가 그런 리베우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길드전이 끝나고 내일 파이튼 지역 시장이 의뢰한 퀘스트가 하나 있습니다. 그중 저희 길드가 총 세 자리를 확보했는데 한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분명 좋은 기회이실 겁니다.”
“호오, 그건 꽤 들을 가치가 있어 보이는군요.”
“예, 다만 이건 저희에게도 중요한 기회인지라 조건을 붙여도 되겠습니까?”
티미의 말에 리베우스는 누가 봐도 절대 갑에 위치한 표정으로 말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나오는 티미의 말.
“희귀 등급 스킬북 두 개는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길드전이 그 길드에서 시장의 의뢰 자리를 원하는 것인지라, 뒤의 보상은 승리했을 시 지급하는 보상으로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계약서도 물론 써드릴 수 있습니다.”
“흐음.”
리베우스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성은 그런 기깔난 리베우스의 모습에 그냥 할 말을 잃었다.
가만히만 있는데 알아서 보상을 늘려오네.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현성을 뒤로하고 리베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요, 우리 주인님을 고용했다는 것부터 승리한다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현성은 찻잔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이제 뭐 어떻게 되든 모르겠다.’
그래도 재미있는 걸 가져와서 내심 마음에 드는 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