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 자도 랭커 2부 48화
15장. 고결한 성기사(3)
작게나마 붉은 선으로 포인트가 되어 있던 순백의 갑옷은 이제 넝마가 된 듯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파손된 부분들도 상당했다.
현성은 그것들을 살피면서 방금의 전투를 떠올렸다.
사실 전투 자체는 크게 이렇다 할 평가를 내릴 만한 건 아니긴 했다.
설인 전사.
강하기는 했지만, 생각 이상은 아니었다.
‘꽤 괜찮긴 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지.’
그런 생각을 하는 주제에 꽤 화려하게 당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성의 원래 실력을 안다면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리라.
애초에 익숙하지 않은 전투법이었다.
그래도 현성이니, 이건 그렇다 치더라도 쓸 수 있었음에도 기본적인 버프를 제외한 모든 버프를 쓰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현성에게 의도가 있었다.
하르칸에게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다.
현성이 그런 거에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무리 컨셉이라도 거기까지는 좀.
나름의 핸디캡을 주고 싸운 이유는 간단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었기에.
‘성혈의 무구는 이런 식이구나?’
성혈의 무구가 가진 내구도가 궁금했다.
우선 내구도는 합격.
현성은 그리고 또 다른 기능에 매우 흡족해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줄어드는 자신의 HP를 살폈다.
상처는 이미 다 나았는데 HP가 조금씩 달고 있었다.
현성은 그러면서 눈 한편에 놓인 메시지를 읽었다.
[현재 성혈의 무구가 자가수복 중입니다.]
[HP가 지속적으로 소폭 감소합니다.]
‘마음에 드네.’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수복되는 갑옷이라.
주인의 생명력으로 스스로를 회복한다는 게 좀 마갑 같기는 했지만.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런 실없는 생각에 현성은 피식 웃었다.
어느새 꽤 자가수복이 된 갑옷들.
현성은 그걸 보며 대략 계산하니 마을에 도착할 쯤엔 모두 수복될 거 같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정말이요.”
“…….”
“신의 기사란 기사님을 두고 하는 말이군요!”
“…….”
“정말 고고하고, 고결하신 그 모습에 저 역시 감복했습니다!”
“…….”
현성이 묵묵히 길을 걷고 있노라면 계속해서 들려오는 말소리.
과묵한 인상을 위해 굳이 대답해 주진 않았다.
한데도 계속해서 떠드는 하르칸.
뭔가 느낌이 싸했다.
현성은 그런 하르칸을 살짝 힐끔거리며 봤다.
동경의 눈과 동시에 걱정 어린 눈이 보이긴 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호언장담을 한 현성이 설인 전사를 상대로 꽤나 치열한 전투를 보였기에.
걱정을 할 만하다 생각했다.
하르칸은 그걸 확인하기 위해 따라 온 것도 있지 않던가.
부모의 원수인 녀석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가장 컸겠지만.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하르칸이 운을 뗐다.
“……성기사님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레서 드레이크는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군.”
이 말마저 무시할 수 없었기에.
현성이 짤막하게 대답해 주긴 했다.
한데 이게 답이 될까?
현성도 의문이 들 만한 대답이었건만.
하르칸은 아닌 모양이다.
“예! 그렇습니다!”
“…….”
무슨 정말 신앙심이 새겨진 아이처럼 순수하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현성이 무슨 말을 하든 믿을 기세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는 건 좋지 못할 거 같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며 현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서 드레이크는 훨씬 강한 모양이군.”
“……아! 네! 산을 군림하던 설인 전사를 가볍게 몰아냈으니. 아무래도…….”
말끝을 흐리는 하르칸.
현성은 그런 하르칸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르칸은 지금 현성을 영웅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영웅이 레서 드레이크에게 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런 영웅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하나 보다.
현성은 그런 하르칸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오해를 풀어주기도 좀 그랬다.
굳이 설인 전사와 싸울 때는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봐라.
아무리 봐도 허새를 부리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모양 빠지긴 해.’
그냥 오해를 풀지 않고 가는 쪽으로 선택했다.
더 말해봐야 구질구질해질 게 뻔하니까.
현성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묵묵히 걷고 있자.
여태 그래왔던 거처럼 먼저 하르칸이 말을 걸어왔다.
조금은 진중하게.
“부디, 성기사님이 승리하시길.”
하르칸의 그 말에 현성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곤 속으로 피식 웃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론이다.”
현성이 그리 말하자 하르칸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현성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묵묵히 길을 걸었다.
좀 뻘쭘할 수도 있었지만, 중간중간 말을 거는 하르칸과 리베우스가 있어서 그리 뻘쭘하진 않았다.
특히 리베우스가 문제였다.
언제나 그렇듯.
“오우, 그 불신자 마을도 주인님을 섬기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군요. 오우!”
평소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건지.
의문이 가득한 발언이었다.
그러던 중.
현성은 지금은 새로 분장하고 있었지만, 엄연히 리베우스는 인간형 펫이었다.
문득 검은 머리의 올백인 걸 떠올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 금발이지 않았나?’
순간 그런 생각으로 리베우스에게 물었다.
당연히 하르칸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리베우스, 너 금발 아니었냐? 왜 갑자기 흑발이 된 거야?”
진짜 궁금했기에 순수하게 물어본 질문.
한데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으웍? 오우우우? 제 머리가 흑발입니까요? 오우!?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요!?”
“으잉?”
너무나 당혹스러워하는 리베우스의 모습을 보며 현성은 생각했다.
‘이 새끼 여태 모르고 있었던 거였어?’
하기야 자기도 긴가민가해서 여태 물어보지 않긴 했으니까.
그래도 자기 머린데 저렇게 무신경하다니.
역시 리베우스라 해야 할지.
현성은 오히려 저런 반응이 좀 신선하긴 했다.
저리 놀랄 줄은 몰랐는데.
허둥대는 모습이 좀 웃기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오우! 이게 다 주인님의 은총이겠군요!”
“…….”
내가 언제? 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성은 참았다.
그래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았으니.
다만, 그냥 넘기지는 않았다.
머리카락 색이 달라졌다는 건 무슨 떡밥이 될 수도 있으니.
혹시 모른다.
스토리 퀘스트에 영향이 있을 만한 것일지도.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의미 없이 그냥 바뀌진 않았을 거야.’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갑자지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 문구는 아니었다.
다름 아닌…….
[재환: 현성아, 메시지 보면 바로 답 줘라.]
‘급한 일인가?’
보통 게임 속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보니.
다르게 말하면 바로 연락달라는 얘기기도 했다.
현성은 그 메시지를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상을 아까 보내긴 했지만.
이게 그렇게 급한 일인가?
그럴 리가.
다른 무슨 일이 있을 게 분명하다.
재환이 뻔하지 않나.
현성과 십수 년 지기 친구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아무튼 현성은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답장했다.
[현성: 무슨 일?]
[재환: 오! 바로 연락했네.]
[현성: ㅋㅋ아니 바로 연락하라 해서 했더니 또 뭐라 하네.]
[재환: 얀마, 뭐라 하는 게 아니잖아 ㅋㅋ]
[현성: 아무튼 그래서 무슨 일?]
현성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피식 웃곤 답을 기다렸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재환: 너, 지금 라이브 가능하냐?]
[현성: 어? 라이브?]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
현성은 그럴 보며 순간 멍했다.
라이브라니.
생각해 보니 라이브로 했던 적이 없긴 했다.
이데아 때는 원래 불가능했고, 그 다음 게임이자 예린의 아버지가 만든 게임인 판시아에서는 할 수는 있었지만 지향했다.
그때는 현성이 혼자 다니는 것보다 길드로 많이 움직였기에.
실수가 있을 수 있는 라이브보다는 영상 편집을 주로 했다.
현성의 이미지가 깎일 수 있다는 판단으로 말이다.
한데 지금은 솔로로만 다니기도 하고.
시스템적으로도 라이브가 문제가 없다.
‘어?’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라이브가 가능하다는 걸!
당연히 해보지 않았으니 떠오르지 않는 게 당연하긴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좀 아까웠다.
길드전도 라이브로 내보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아쉽긴 하지만 괜찮았다.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는 거니까.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재환에게 메시지가 왔다.
[재환: 그래서 지금 당장 찍을 수 있는 라이브용 보스 없냐? 너 그 성기사 컨셉 죽여주던데?]
그 메시지에 현성이 살며시 웃었다.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연락이 올 수가 있나.
마침 레서 드레이크 레이드가 있지 않은가.
그것도 현성 홀로하는 솔로 레이드.
현성은 그러면서 순간 이 레벨 대에 솔로 레이드가 있었던가를 떠올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성의 기억 속에는 없다.
그렇다면 최초?
이거 역시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다만.
[현성: 그런데 괜찮은 거야? 아직 성기사 쪽은 뭐 없잖아.]
영상도 없고 채널조차 없었다.
그런데 대뜸 라이브를 킨다 해서 효과가 있겠냐는 거다.
하지만 상대는 재환이지 않나.
현성이 걱정하는 부분은 이미 고려하고 있었다.
[재환: 그거는 우리 회사 채널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면 된다.]
[현성: 어! 미친!]
[재환: 우리 회사 채널이 어떤 유저 덕분에 엄청 커져서 무려 천만 구독자나 있다 이 말이야.]
현성이 한창 아수라로 활동하던 시절.
판시아의 영상은 대부분 재환의 채널에서 운영을 했다.
현성 혼자 찍히는 영상이 아니었기에.
수익 분배가 좀 까다로워져서 재환 채널에 올려 정산을 했었던 탓.
덕분에 회사 채널이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었다.
판시아가 주춤함에도 여전히 천만 이상의 구독자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현성은 그 메시지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는 된다.
무엇보다 재환의 회사 채널에 여러 유저들의 영상들이 올라오지 않던가.
그리고 그 영상에 대한 수익금을 계약에 따라 나눠 먹는 식의 매니지먼트 형식도 겸임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성기사 영상이 올라와도 모두가 이상해하지 않을 터.
[현성: 좋은데!? 가자가자!]
[재환: 영상아이템은 있고? 당장 잡을 보스.]
[현성: 아, 이걸 말 안했네. 나 레서 드레이크 레이드 솔로잉 간다.]
[재환: 미친! 이거다!]
재환 역시 대박의 느낌을 받았는지 메시지에 잔뜩 흥분한 게 느껴졌다.
솔로인 레이드는 못 참기는 한다.
현성은 그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고 넘어가려던 순간.
가장 중요한 게 떠올랐다.
[현성: 야 그런데 성기사 닉은 뭘로 하냐? 또 인도 신화에서 따오게? 그럼 시바 말고 없는데 어감이 좀 그렇지 않냐?]
걱정 어린 듯이 메시지를 보낸 현성.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재환이 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재환: 걱정ㄴㄴ 이미 정해놓음 개간지난다.]
[현성: ?? 뭔데?]
현성의 물음에 재환은 잠시 뜸을 들였다.
메시지를 보냈다.
[재환: 퍼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