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 자도 랭커 2부 49화
16장. 퍼시벌 데뷔(1)
푸욱, 푸욱.
팔이 무릎까지 빠지는 깊은 눈밭.
그곳을 묵묵히 걷는 순백의 기사가 하나 있었다.
붉은 망토와 순백에 포인트로 붉은 계열의 선이 그어진 풀플레이트 갑옷을 착용한 기사.
투구까지 완전무장한 채로 방패와 창을 쥐고 설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없이 홀로 산을 오르며 눈보라가 휘날리는 허공을 바라봤다.
순백의 기사, 아니, 현성은 그러면서 묵묵히 허공에 쓰여 있는 퀘스트 창을 바라봤다.
【레서 드레이크와 다온 마을의 위기】
-등급: A+
-설명: 설산 속 작은 마을, 다온 마을은 척박하지만 그럭저럭 살 만한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설산의 주인이 바뀌고 그 순간 다온 마을의 운명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몬스터인 설인들조차 산에서 쫓겨나 마을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 당신은 다온 마을을 도우려 합니다.
이미 힘을 증명하여 모든 마을 사람들은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레서 드레이크에게서 다온 마을을 구원해 주십시오.
-제한: 플레이어 ‘현성’
-보상: 신성력+80, 막대한 경험치, 랜덤 스킬북(영웅), 랜덤 아이템(영웅)
-실패 시 다온 마을의 멸망, 악명 +1000
설인 전사를 죽이고 마을로 돌아가 새롭게 받은 퀘스트.
처음 돌아갔을 때는 영웅이 나타났다며 얼마나 호들갑을 떨던지.
다시 생각해도 현성이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신의 권위 때문에 NPC들이 더 과도하게 현성을 찬양한다는 건 알고는 있지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이곳은 신들이 사라진 지 오래지 않나.
그런 만큼 신의 신성력을 가진 현성에게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라고 리베우스가 알려줬지.’
처음 신의 권위의 스킬 설명만 보고는 현성도 잘 모르긴 했다.
레이나나 다니엘 주교도 그렇고 대부분의 NPC들이 현성의 신성력을 맛보고 다들 맛이 가버리지 않았나.
이쯤 되면 신성력이 아닌 마약이 아닌가 싶긴 했지만.
뭐 나쁘게 맛이 가는 건 아니니.
아니, 맞나?
어쨌든 현성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퀘스트를 바라봤다.
‘A+등급…….’
상당히 높은 등급의 퀘스트다.
악명이 자자한 S급 바로 밑에 등급인 A+등급이지 않나.
깨기 힘든 걸 떠나서 웬만하면 깰 수 없다는 등급이었다.
물론 그런 만큼 보상이 장난 아니었다.
현성은 그걸 보면서 피식 웃었다.
하기야 등급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솔로 레이드인데 등급이 안 높을 수가 없지.’
레이드 보스.
보통 파티 대여섯이 와서 공대를 만들어 깨는 게 레이드 보스이지 않나.
한데 그걸 지금 홀로 깨겠다고 하는 거다.
현성이 말이다.
원래도 혼자 깨려 했는데 마침 좋은 기회까지 있지 않나.
다름 아닌 라이브.
그것도 새로운 아이디의 시작을 장식할 라이브다.
‘퍼시벌이라.’
퍼시벌.
원탁의 기사 중 하나로서 나중에 성배 원정으로도 유명한 기사 중 하나다.
도중에 성배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해 왕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성직자가 되기도 한 기사.
마침 성기사를 컨셉으로 정한 현성에게도 참 잘 어울리는 닉네임이기도 했다.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현성은 좀 껄끄러운 게 있긴 했다.
딱히 큰 건 아니었다.
인도 주신 중 하나인 시바가 발음 때문에 좀 곤란했는데, 퍼시벌도 딱히 발음이 다를 바가 없다는 것 정도?
현성이 생각해도 그 정도야 우습게 넘길 수 있지.
당장은 그것보다는 라이브 준비가 우선이었다.
이 정도 껄끄러움은 문제도 아니긴 하니까.
‘라이브라.’
처음이다 보니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방송 경력이 그리 짧지는 않았지만.
현성의 경력이 그리 길다고 할 수 있는 경력은 아니지 않나.
그러다 보니 라이브는 아무래도 떨리긴 했다.
게다가 아무리 재환이 홍보를 해준다 해도 설마 아무도 안 오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레서 드레이크 솔로 레이드이니.
어그로는 제대로 끌리긴 하겠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우우.”
긴장한 듯 허연 김을 내뿜으며 한숨을 내쉬자.
그런 현성을 보며 리베우스가 물어왔다.
“오우? 주인님, 긴장하셨습니까요?”
좀 의아하다는 듯 묻는 리베우스의 모습에 현성은 피식 웃었다.
하기야 리베우스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다.
라이브라는 걸 알지 못하는 리베우스는 현성이 그저 레서 드레이크에게 긴장한 거처럼 보였을 테니까.
레서 드레이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리베우스에게는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좀 난감하긴 했다.
그런데 그때.
리베우스가 슬쩍 올빼미의 얼굴을 딴 투구를 슬쩍 올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인님이 아무리 약해지셨다 한들! 위대하시니 아무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또한 저 리베우스가 있지 않습니까요! 이 한 몸 바쳐 어떻게든 돕겠습니다요!”
뜻밖의 정상적인 말을 들어서 그럴까?
현성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그래.”
“오우!”
“그래, 오우다! 오우!”
“오우우우우!”
현성이 오우라고 답해주자 기분이 좋은지 현성의 어깨에서 빙빙 돌며 신나 하는 리베우스.
그런 리베우스를 보며 현성은 피식 웃었다.
진심 어린 리베우스의 격려에 확실히 힘이 확 돋아났다.
하기야 걱정할 게 뭐가 있겠나.
재환도 리베우스도 말하지 않았나.
원래 잘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이 맞다.
그냥 평소처럼 하면 그만이다.
‘그래, 평소처럼,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만 더 잘 해볼까?’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늘 사고 치기 직전 짓던 그 미소를.
* * *
솔로 레이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한 엄청난 하드 컨텐츠 중 하나였다.
시도만으로도 많은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도전에 가까운 컨텐츠.
성공한다면 무한한 관심을, 실패한다면 무한한 조롱을 받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현성이 지금 도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자리였다.
누구라도 긴장할 법한 자리에 현성은 아무런 동요 없이 그대로 제자리에 서서 투구를 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발이 두터워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레이드하기에는 최악의 날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야는 확보되지 않고, 다리가 푹푹 빠지는 눈밭은 조금만 움직여도 체력이 빠지는 게 느껴졌으니까.
모든 게 악조건이라 할 만한 상황임에도 현성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올려다본 하늘.
얼마나 지났을까.
그런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재환: 세팅은 준비 다 됐다. 시작하려고 하면 신호만 주면 바로 라이브 시작이다.]
현성은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재환 역시 그걸 알아듣고 메시지를 보냈다.
[재환: 오케이 시작한다!]
현성은 재환의 메시지가 끝나기 무섭게 올라오는 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이브 중이라는 표시와 함께 생겨난 이런저런 표시들.
무엇보다 갑자기 생겨난 채팅창이 좀 신기하긴 했다.
-??뭐임?
-오! 라이브다!
-????아수란가?
-엥? 아닌데 성기사인 듯?
-갑자기?
-오 닉은 퍼시벌인가보네?
-퍼시벌 좋지.
순식간에 수백, 아니, 수천이 넘는 시청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채팅창의 수도 엄청났다.
현성은 그걸 보며 살며시 웃고는 채팅창을 보이지 않게 설정했다.
그 외에 거슬리는 것들도 모조리 껐다.
조금이라도 전투에 방해될 것들을 치웠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를 향해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처억─!
현성이 그렇게 자세를 잡자 멀리서 들려오는 육중한 울림소리.
쿠─웅! 쿵─!
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거대한 몸체.
도무지 레서라고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덩치였다.
적어도 7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이에 길이는 그 배를 넘어섰다.
그야말로 공룡을 연상시키는 지룡.
드래곤의 아류라 불리는 드레이크 중에서도 레서이지만, 그럼에도 레이드 보스다운 위용을 보여주었다.
녀석이 등장하자 가뜩이나 한기가 불어오던 설산이 한층 더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현성은 그런 레서 드레이크를 향해 창을 겨눴다.
당장에라도 움직일 수 있게.
크워어어어어어─────!
거대한 포효에 순간 눈보라가 멈췄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멈춰 든 눈보라.
그리고 그사이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이드 보스, ‘아이스 레서 드레이크’가 당신을 인지합니다.]
[파티 상태가 아닙니다.]
[솔로로 레이드에 참여합니다.]
시청자들도 모두 볼 수 있는 메시지.
이미 라이브 설정으로 설정했기에 모든 시청자들이 그걸 보고 난리가 났다.
물론 채팅창을 끈 현성은 알지 못했다.
그저 상대에게만 집중할 뿐.
아무리 현성이라 한들 현재 수준으로 레이드 보스를 상대하는 건 꽤 힘들다.
그것도 타나노스의 스킬들을 대부분 봉인한 상태로는 말이다.
‘적어도 야상곡은 사용할 수 없다.’
이미 길드전에서도 사용했기에,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타나노스 스킬들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성기사의 컨셉이라기에는 타나노스의 스킬들이 하나같이 기괴했기 때문.
컨셉에 어울리지 않는 스킬을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었으니.
다만 현성은 할 수 있는 버프는 모두 걸었다.
블래싱 같은 경우는 고등급 사제나 성기사, 몽크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스킬이었기에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블래싱, 샘솟는 용기, 솟구치는 빛, 미약한 기도, 신성 방패.’
헤븐즈 링은 이미 라이브가 시작되기 전 걸어두었다.
하늘의 은총은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회복 스킬도 겸할 수 있기에 위급할 때 쓰는 게 옳기 때문.
각종 버프를 사용한 현성을 보며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만 움직여도 순식간에 움직이는 거대한 덩치는 현성도 난감할 만큼 빠르게 땅을 박찼다.
단순히 뒤로 물러나기 위해 가볍게 땅을 박찬 발.
하지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콰──앙! 푸웅!
가볍게 박차자 자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고, 꽤 큰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아이스 레서 드레이크는 그걸 보며 빠르게 꼬리를 휘둘렀으나 이미 현성은 자리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땅을 거칠게 쓸어버리는 기다랗고 거대한 꼬리.
애꿎은 땅만 가격한 녀석의 꼬리는 그대로 땅에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콰가가가가!
현성은 그걸 보며 가볍게 몸을 풀곤 창을 강하게 꼬나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허공에서 스킬로 만들어낸 신성 방패를 그대로 쥐어, 허공을 박차고 녀석에게 도약했다.
대포마냥 빠르게 쏘아진 현성은 그대로 창을 쥐곤 강하게 뻗었다.
순간 녀석과 충돌하기 전 손목을 틀어 창에 강하게 회전을 걸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직!
크워어어어어어어───!
녀석의 한쪽 눈이 그대로 파열되었다.
-미친……
-헐?
-허……
-씨X 뭘 보고 있는 거지?
-지렸다.
퍼시벌의 강렬한 데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