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 자도 랭커 2부 56화
18장. 지각변동의 전조(1)
비네샤가 현성에게 쪽지를 남기고 돌아갔을 때 그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로스트 이데아를 만들어낸 플라톤의 관리본부 블랙리스트 전담팀 이연희 부장.
이연희 부장은 피식 웃으면서 화면을 응시했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이연희 부장.
실력을 중요시하는 플라톤에서도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하는 부장이었다.
즉, 그만큼 실력이 인정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문석 팀장과 한배를 타고 있는 입장이니.
산업스파이에게 좋은 인재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쨌든 그런 이연희는 얼마 전 한문석 팀장의 연락을 받고 그 뒤로 현성을 모니터링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진짜 재미있는 사람이네.”
입술을 깨물며 다시 모니터를 봤다.
사제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성기사로서도 상당한 실력자인 걸 보고 솔직히 놀라긴 했다.
무엇보다 한문석 팀장의 일 중 하나인 마룬 마을에서도 일을 저지른 걸 보고 전투로는 상당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확실히 수상하다고 한 한문석 팀장의 말이 이해가 되긴 했다.
이렇게까지 굳이 정체를 숨긴다고?
하지만 의문인 부분들도 상당했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사람이 방송을 한다라.’
이 부분이 상당히 걸렸다.
한문석 팀장의 의견에 의하면 민유라 개발자와 조민우 본부장이 키운 자객이라고는 하는데.
이연희의 의견은 글쎄다? 였다.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그저 실력이 상당한 유저로밖에 보이지 않건만.
그러면 또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많다.
한문석 팀장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의심하는 이유는 있었고, 또 이연희가 보기에도 타당했다.
레벨 1로 캐릭터를 생성하자마자 거의 바로 전직한 신등급 전직.
무엇보다 한문석 팀장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벌써 두 개나 부수지 않았던가.
고작 둘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게 둘 중 하나가 핵심이라면 말 다 한 것 아니겠나.
다만 그걸 정말 알고 막았다면 이미 한문석이나 자신의 정체는 드러났을 텐데.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다는 게 가장 의문이었다.
‘위장인가?’
그게 가장 타당한 생각이긴 했다.
방송이나 이런 것들도 다 자신과 한문석 팀장을 속이기 위한 블러핑.
실력도 좋으니 부업으로도 할 만하지 않겠나.
퍼시벌과 비슈누.
그 둘이 동일인물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두 방송인으로서 벌어들이는 돈도 무시 못 하리라.
지금 가장 뜨거운 감자가 그 둘이지 않나.
이연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 막아볼까 고민했다.
‘흐음.’
힘으로 막으려고 해선 안 된다.
이미 한문석 팀장이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오히려 전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만 주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현성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힘으로 막으려 한다?
또 실패할 확률이 크다.
빌드업을 해야 한다.
어떻게든 자신들을 찾지 못하게 유인해야 한다.
무엇보다 며칠 뒤에 있을 파이튼 시장의 의뢰.
그것도 잘 흘러 들어가면 자신들과 연관 있는 부분까지 치고 올라올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까지는 막아야 한다.
다만 어떻게 막아야 할지.
‘꼬리를 보이는 일을 피하려면 다른 쪽으로 시선이 몰리게 해야겠지.’
이연희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파이튼 시장의 데이터를 살폈다.
마침 괜찮은 게 있었다.
자신들과의 연관 있는 곳을 자르고 대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우선 이렇게 해두고 살펴보자.’
이게 성공한다면 좋겠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다른 수를 써야 하니.
이연희 부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비네샤, 그X이 뭘 하지만 않으려면 좋으련만.’
하지만 설마 현성이 비네샤에게 연락을 하겠는가.
바보처럼 비네샤가 쪽지를 남기고 가긴 했지만.
설마하니 그걸 보고 연락할 리가 없었다.
위장 신분인 상태에서 다른 길드와 연락을 주고받을 리가 없으니까.
이연희 부장은 그렇게 확신하며 다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현성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 * *
한편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로 길드원들이랑 다시 길드 본부로 돌아가는 비네샤.
그녀는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길드 본부로 향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자기 컨셉이 풀린지도 모르고 있는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알 수 없는 두 길드원은 그걸 보며 조용히 속닥거렸다.
‘길드장님 왜 이렇게 기분 좋아 보이시지?’
‘컨셉도 풀렸는데 모르고 계시네.’
‘한번 물어볼까?’
‘아 물어봤다가 컨셉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닌가 무서워서 못 물어보겠어.’
그렇게 우물쭈물하면서 망설이고 있자.
비네샤가 그걸 알아차리고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응? 무슨 일이에요?”
“아, 그, 그게.”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근데 혼자 오셔가지고 무슨 일인가 해서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자.
비네샤가 개구쟁이처럼 미소를 지었다.
가지런하고 흰 이가 다 드러날 정도로 빵긋 웃는 비네샤.
어쩜 저렇게 웃어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보기 좋은 미소였다.
비네샤는 그런 미소를 지으며 푸르게 빛나는 벽안을 끔뻑거리더니 말했다.
“퍼시벌 님하고 접선에 성공했거든요!”
완전 들뜬다는 듯 말하는 비네샤의 말에 두 길드원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건 정말 들뜰 만한 일이긴 하다.
한데 왜 혼자 온 건가.
접선에 성공했다면서.
두 길드원이 의문이 가득한 채로 비네샤를 봤다.
이건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표정을 하며 두 길드원이 물었다.
“아, 아니, 어떻게 된 건데요?”
“접선 성공했으면 영입은요?”
“하다못해 친구 신청은 받으셨나요?”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의 세례.
길드원들이 저리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퍼시벌만 영입한다면 정말 12 길드에서 7대 길드 중 하나를 쳐내고 7대 길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을 테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으랴.
퍼시벌의 영향력은 정말 어마어마했으니까.
지금 그 어떤 신성들 중에서도 가장 화두가 되는 인물 중 하나 아닌가.
다른 하나는 비슈누였고.
하지만 파급력 자체는 비슈누보다도 퍼시벌이 더 컸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비슈누는 아무리 그래봐야 사제일 뿐이지. 골렘을 파괴할 위력을 가졌다면 최소 전설 등급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사제는 사제니까.’
강력한 사제.
아주 전황을 뒤흔들 요소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강력한 딜러보다는 조금은 떨어지는 게 맞긴 했으니.
퍼시벌의 가치가 그래서 더 높다고 판단한 거였다.
그래서 두 길드원이 안달이 난 거고.
누구보다 빠르게 퍼시벌과 접선했다.
이건 엄청난 이점 아니겠나.
하지만 비네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비밀이라는 듯 검지로 입술을 가리며 말했다.
“비밀~”
“예에?”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에헤헤헤! 비밀이라면 비밀이에요! 그래도 연락 절대로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비네샤는 그렇게 컨셉이 풀린지도 모르고 빠르게 도망쳤고, 그런 비네샤를 보며 두 길드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비네샤를 허망하게 봤다.
무슨 일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 길드장이라니.
망연자실해졌지만, 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귀여우시니까.’
‘참아야지.’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 말을 들을 생각이었다.
궁금하지만 어쩌겠나.
저 상태면 절대 안 알려주는 걸 둘 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길드장님! 같이 가요!”
“저도요!”
멀어져 가는 비네샤를 따라가는 두 길드원.
그런 길드원들의 말을 들은 비네샤는 히히 웃으면서 현성을 떠올렸다.
‘아직은 비밀로 해드리죠!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무언가 자신만의 비밀을 얻은 소녀가 장난을 치는 모습은 꽤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 * *
다시 눈이 수북이 내리고 있는 설원.
눈 내리는 설원 가운데 눈이 쌓이지 않는 산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괴상한 소리.
“으갸으거으어우윽!”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몸을 푸는 순백의 갑옷을 입은 기사.
퍼시벌로 유명한 현성이었다.
주변에 눈이 내리는 걸 리베우스가 모두 막아주고 있었기에 포근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현성은 그렇게 주변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둘러봤으나.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던 거 같다.
몬스터가 왔으면 리베우스가 쫓아내 줬을 테니.
아무튼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걸 본 리베우스가 현성을 보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오, 오우! 오우! 주, 주인님!”
“으, 으응? 왜 그래, 리베우스.”
“주인님이! 주인님의 본연의 모습을 보이고 계셨을 때 엄청난 성기사가 다녀갔습니다요!”
“엄청난 성기사?”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청난 성기사가 왔다 갔다?
무슨 말인가 싶어 리베우스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러자 리베우스가 뒤이어 말을 해댔다.
“주인님이 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성기사더군요!”
“내가 신이라는 걸 알았다고?”
들을수록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착각일까.
현성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리베우스를 봤다.
언제나 호들갑은 심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지금처럼 이성을 잃으면서 잔뜩 흥분한 거는 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현성과 관련된 일이나 다른 사도에 관련된 일일 때는 또 그랬는데.
무슨 일이 진짜 있었던 건가?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몸을 훑었지만, 이상은 없었다.
몽유병이 발동한 건가 싶어 살폈음에도 별다른 메시지도 없었고, 전투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가.
좀 답답하는 듯 현성이 리베우스를 바라보자.
리베우스는 올빼미의 모습을 한 채로 날개를 이용해 있는 힘껏 설명하려 했다.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성기사였습니다요! 지금의 주인님과 제가 함께 덤벼도 이기기 힘든 상대였습니다요!”
“그런 상대가 여기까지 왔다고?”
“바로 그렇습니다요! 다행히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서 그냥 보고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저에게 다가와서 주인님이 신 아니냐고 묻지 않겠습니까요!”
진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긴 하다.
도대체 뭘 들은 거지?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하면 이랬다.
현성과 리베우스가 동시에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성기사가 찾아오더니 대뜸 리베우스에게 현성이 신이지 않느냐고 했다?
일단 유저인지 NPC인지 구분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리베우스에게 물었다.
“그 성기사 이방인이었어?”
“예! 그렇습니다요! 아! 그리고 이걸 주인님께 전해 달라 했습니다요!”
리베우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비네샤에게 받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쪽지를 받은 현성은 그대로 표정이 굳어졌다.
쪽지에 적힌 말은 간단했다.
『비네샤라고 합니다! 로이 아이디 코드 남겨놓을 테니 부디 쪽지 보시면 연락 주세요! 퍼시벌&비슈누 님께
PS- 연락 오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아무래도 정체를 들킨 모양이다.
“아.”
“굉장하지 않습니까요!?”
“굉장하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