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그동안 챙겨 놓은 라면이 38개, 쌀이 페트병으로 4개 반, 기타 통조림들, 그리고 물은 아껴 먹으면 한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용변이었다. 화장실이 문에서 나가서 바로 몇 발짝 안 되긴 하지만 거기를 갈 용기는 전혀 없었다.
‘대변은 비닐봉지에 싸서 꽉 묶어 놨다가 밤에 창밖에 던져 버리자. 어차피 몸이 이상해 지면서 양도 전보다 줄었으니까 큰 문제는 안 될 거 같고… 오줌은 어쩌나…….”
이진성은 빈 페트병을 들었다. 한참을 페트병을 쳐다보더니 페트병 하나의 아래 1/3 부분을 잘라내고 윗부분을 깔때기로 쓰기로 했다. 뚜껑에 구멍을 낸 후 순간접착제로 페트병 주둥이에 거꾸로 붙였다. 소변을 담을 페트병에 이 깔때기 뚜껑을 끼우고 소변을 보고 나서 다시 원래 뚜껑을 끼워 놓고 깔때기 뚜껑은 비닐봉지에 넣어서 묶어 놓으면 냄새는 거의 안 날 것 같았다.
소변 방법을 해결했다는 생각에 잠시간은 기분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나는 웃음에 키득거리며 이런 것도 소확행(주1)이 될 수 있구나 생각하는 이진성이었다.
방송에서는 종일 뉴스만 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119 고위직이라는 사람이 나와 재난 생존법에 관해 얘기하는데 뜬구름 잡는 말만 하는 것이 사무직으로만 고위직에 올라간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앵커는 두 시간씩 교대로 돌아가며 피곤한 얼굴로 앉아서 진행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자막은 어디에 변이체 발생, 어디 사망자 몇 명 발생이라고 흘러가고 있지만, 어차피 정확한 집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면서 이진성은 끝방 좀비에 대해 약간은 익숙해진 것인지 긴장감이 아까보다는 덜했다. 문에서 멀어져 창밖에 머리를 빼고 밖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들리는 비명은 낮에만 해도 한 시간에 한두 번씩, 결코 가깝지 않은 곳에서 작게 들리더니 저녁이 되면서 점점 그 빈도가 잦아졌다. 어떤 때는 꽤 가까운 곳에서 들리기도 했다. 늦은 오후가 될수록 앞에 보이는 대방로 6차선 도로에는 차들이 점점 많아졌다.
원래 퇴근 시간이면 정체가 심한 도로지만 오늘 같은 날 출근한 사람이 분명히 평소보다 적을 것임에도 차들이 밀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어디론가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면 안전하다고 저렇게 무작정 길로 나오나… 그러다 길 위에서 오도 가도 못 하면 맨몸으로 걸어야 하는데…….”
길 건너 다세대 주택의 1층 현관이 갑자기 열리면서 맨발의 아줌마가 소리 지르며 튀어 나왔다. 곧 뒤따라 피를 뒤집어쓴 아저씨가 쫓아 나와서 아줌마를 따라갔다. 아줌마는 대로로 달려들었고 정체되어 있던 차들은 일제히 클락션을 울리며 앞차를 들이받았다.
아줌마는 차들에 막혀 더 달릴 수 없었고, 뒤따라온 아저씨에게 목이 물리며 자신을 막았던 차 유리에 피를 뿌리고 쓰러졌다. 피를 뒤집어쓴 차는 ‘부아앙’ 소리와 함께 앞차를 추돌하고 헛바퀴를 돌렸다.
* * *
회사에 출근한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가시방석이었다. TV와 인터넷으로 접하는 변이체 발생 소식은 점점 더 많아졌다.
오후가 되면서 하나둘 없어지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만 갔다.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삼삼오오 모여서 걱정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비는 자리가 많아지면서 누군가 오래 돌아오지 않으면 집에 갔겠구나 생각했다.
그중에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이나 외진 곳을 찾아 들어가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그리고 그들 각자에게 정해진 시간이 되자 새빨간 눈을 뜨면서 회사에서, 쇼핑몰에서, 공장에서 공사장에서 살육이 시작되었다.
* * *
육군본부의 상황실에는 온통 별들로 가득했다. 장군들은 자리에 앉아 침통한 표정으로 전방의 대형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앞에서는 대령 한 명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해서 군은 더 이상 상황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의미도 없다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작계 XX12-z01에 의거, 금일 자정을 기해 거점 방어로 작전을 변경합니다. 지금 각 관공서에 나가 있는 인원은 18:00를 기해 각 부대에 할당된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며 20:00까지 거점 확보를 완료합니다. 24시를 기해 인가된 인원 이외의 어떤 인원의 진·출입도 불허합니다.”
……
“변이체와 민간인의 혼재 시, 민간인의 희생을 감수하고 사격하여 변이체를 섬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한참 동안의 작전 브리핑이 끝나고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장성들이 기다리던 내용이 드디어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 요인과 군 장성, 기타 그동안 유전자변형 검사에서 안전이 입증된 사회지도층 인사는 금일 자정부터 쉘터로 대피를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도별로 지정된 부대는 병력을 동원, 요인의 호위를 담당하고…….”
역시나 자신들이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한 대한민국 지도층이라는 작자들이었다.
* * *
18:00 시가 되자 주둔지인 각 관공서에 집결한 군 병력은 육공트럭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실탄 장전 상태의 개인화기를 소지한 장병들은 저마다 걱정이 태산이다.
전역이 코 앞인 병장들은 속으로 욕을 쏟아 내고 있지만, 불만을 드러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갓 자대배치 받은 이등병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실탄 장전한 총을 들고 다니는 게 좀비보다 더 무서웠다.
어떤 곳에서는 이미 십 수명의 변이체를 사살했다는 둥, 어떤 곳에서는 군인 희생자가 서너 명 나왔다는 둥 풍문을 서로서로 전하며 육공트럭에 올라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빨리빨리 탑승한다. 너희들 피곤한 거 안다. 하지만 정신 바짝 차려라. 지금 너희들이 잘못하면 너희 가족이…….”
소대장의 뻔한 소리를 뒤로하며 피곤한 몸을 싣고서 두런두런 얘기하며 이동하던 중 한두 명씩 끔뻑끔뻑 졸기 시작했다. 변이체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은 아직 일반 사병들에게는 전파되지 않고 있었다. 간부들은 KR-SEOUL-0001의 발생과 함께 탄창 두 개씩의 실탄을 지급받았지만, 사병들에게는 비밀이었다.
군인은 항상 피곤한 존재들이다. 더군다나 온종일 초긴장 상태로 있다가 차량에 올라 이동하기 시작하니 깨어 있는 인원보다 조는 인원이 더 많았다.
“크아악.”
달리던 차 안에서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던 병사가 새빨간 눈을 뜨더니 바로 옆에 있던 전우의 목에 입을 박아 넣었다. 괴성과 비명에 졸던 병사들은 잠에서 깨면서 총을 잡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데, 전우의 목을 깊게 뜯어낸 그놈이 흔들리는 차량에서 앞을 향해 달려들었다.
“씨발 뭐야?”
“쏴. 쏴. 죽여.”
자기 쪽으로 튀어오는 좀 전까지 전우였던 변이체를 보고 놀란 몇 명의 병사들이 안전핀을 풀고 그대로 쏴 버렸다. 몇 명은 연사로 갈겨 버리기까지 했다. 차량의 급정거에 사격은 오발로 이어졌으며 변이체는 죽이지도 못하고 애꿎은 병사들만 총을 맞았다.
“씨발 누가 날 쏘는 거야? 다 죽어 버려.”
남은 병사들도 일제히 어둠 속에서 사격을 시작했고, 차량 속의 인원은 어처구니없게도 오발과 오인 사격으로 전멸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고는 이동 중이던 군 차량의 거의 12%에서 발생했다. 그중에서는 변이체도 없이 사병들끼리 오인사격을 시작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변이체가 터져 나오고 있는 시점에 차량에 인원을 그득 채워서 이동시키는 정신 나간 간부들 때문에 군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밤이 깊어졌다. 이진성은 여전히 밖을 보고 있었지만 이제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다. 어느덧 길에는 사고로 또는 고장으로 버리고 간 차들과 그 차들을 피하면서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가는 소수의 차 뿐이었다.
온종일 간간이 엄마한테 전화를 시도해 봤지만, 운이 지독히도 나쁜 건지 한 번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끝방 놈은 뭐 하고 있는지 아주 가끔 그러렁 소리를 낼 뿐 움직이지도 않는다.
종일 생라면 두 개와 한 줌의 생쌀 그리고 물 약 1리터를 먹었고 열심히 만든 소변기에 약 500mL의 소변을 채웠다.
그런 이진성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제까지와 다르게 낮잠도 자지 않았고, 아직 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끝방 놈의 냄새는 이진성에게 더욱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의 글을 읽고 나오면 이미 페이지가 넘어가 있었다. 올라오는 글을 다 읽을 수도 없었고 그 내용이 그 내용이라 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이진성은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끼고 TV 소리를 들으며 다른 한쪽 귀는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대충 인터넷 커뮤니티의 제목만 읽으며 새로 고침을 계속하는데 TV 화면이 갑자기 방송국 사정으로 방송을 일시중지한다는 자막으로 바뀌었다.
‘올 게 왔구나… 드디어 방송국 안에서도 시작됐구나….’
채널을 돌려 보니 다른 공중파 채널들과 종편들은 아직 뉴스 같지도 않은 뉴스를 라이브로 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얼마나 가려나….’
평소에 잘 보지 않던 KBC를 켜 놓고 다시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고 있기를 약 한 시간. 갑자기 한쪽 귀의 이어폰에서 들리는 비명과 ‘막아’라는 고함이 들렸다.
화면을 보니 뉴스 앵커와 패널은 자리에서 부랴부랴 일어나 화면에서 사라지고 카메라가 넘어졌는지 화면이 옆으로 돌면서 크게 튕기고는 어두운 스튜디오의 한쪽을 비췄다.
그리고 그 구석에는 여지없이 좀비 한 놈이 다른 사람을 뜯어 먹고 있었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 화면은 꺼지고 급하게 만든듯한 ‘방송 중단’이라는 간단한 자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변이체들이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둘째 날, 주택가 길거리는 여기저기 시체들이 널리기 시작했다. 도로는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방송은 끊겼고 치안을 담당하던 군경은 무너져갔다.
그 와중에 지도층 인사들은 조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사라지는 지도층 인사 중 일부 부적격으로 분류된 소수의 인원은 다시금 그들 사이의 어떤 강압에 의해 아무도 모를 곳에서 사살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