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3월 말의 해는 아직 짧다. 저녁 7시가 지나며 하늘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불빛이 없는 서울의 밤을 처음 경험하는 이진성에게 그 모습은 낯섦을 넘어선 또 하나의 공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깥은 거대한 밀실에 혼자 갇혀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불을 켤 수 있고 없음에 따라 끝방 놈의 존재감은 확연하게 달랐다. 지금은 조금 전보다 훨씬 훨씬 무섭고 신경 쓰였다.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해 졌다. 모든 신경이 청각과 후각에 몰렸는지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라곤 했다. 그리고 저 저주받을, 아니 이미 저주받은 것일지 모를 끝방 놈의 냄새는 더 코를 찔렀다.
바깥의 비명은 더욱 선명하게 낮보다 훨씬 더 많이 들려왔다.
자동차라도 지나가면 차 소리라도 들리고 헤드라이트 불빛이라도 보일 텐데, 이 앞의 6차선 대방로는 이미 막혀버렸다.
오후에 급격히 차량이 정체되더니 저녁 무렵부터 사람들이 슬금슬금 차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고, 그걸 본 다른 사람들도 도주에 합류하면서 버려진 차의 주차장으로 변한 것이었다.
어둠에 떨고 있던 이진성은 휴대용 가스버너 사 놓은 것이 생각났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 가스도 새것이다. 가스 불이라도 켤까하고 더듬거려 침대 밑에 넣어 놓았던 가스버너를 꺼내 들고 불을 켜려다 멈칫했다.
‘이 암흑천지에서는 아무리 미약한 불빛이라도 멀리서 보일 거야. 좀비가 그 불빛을 보고 올 수도 있다. 아니 좀비는 불빛이 뭔지 모른다 쳐도 사람은 반응할 수 있다. 이미 약탈이 시작된 시점에서 사람도 좀비만큼 위험하다.’
결국 버너를 내려놓고 더듬거려 생라면을 찾아 뽀개 먹었다. 스프 뿌릴 정신도 없이 그냥 말 그대로 생라면만 꾸역꾸역 먹었다.
이진성은 지금 상황이 무섭고 이러고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이 처량하다는 생각에 결국 눈물이 찔끔 맺힌다.
그래도 그거라도 먹고 물이라도 벌컥벌컥 마시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다.
핸드폰은 내일을 위해 배터리를 아껴야 했다. 어쩌면 내일 하루, 길어야 모레면 이 핸드폰도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으로 아주 잠깐 화면을 켜고 이른 작별인사를 했다.
3월의 밤은 길었다.
특히 불편하게 쪼그려 앉아 완벽하게 아무것도 할 것 없이 밤을 보내는 이진성에게는 밤이 더욱 길었다.
그냥 멍하니 앉아서 밖에 들리는 비명에 한 번씩 깜짝 놀라고 빌어먹을 끝방놈이 한 번씩 그리렁 거릴 때마다 한 번씩 놀라며 시간을 보내던 그는 깊은 밤 어느 순간 다행히도 깜빡 잠에 빠져들었다.
지구의 상황은 나 알 바 아니라는 듯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떠올랐다.
눈을 뜬 이진성은 밝은 햇빛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게다가 빌어먹을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맑았다.
전기가 끊기고 채 하루가 안 됐으니 그동안 공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유가 어쨌든 아침의 공기는 상쾌했다.
공기 속에 퍼져있는 연한 피 냄새와 끝방놈의 시큼한 불쾌한 냄새를 제외하면 말이다.
핸드폰을 보니 8시가 조금 넘었다. 당연히 통신은 안 되지만 아직은 시간이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진성에게 중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침부터 챙겨 먹고 기운을 내야 했다. 특별히 참치 통조림 하나를 뜯고 가스버너를 켜고 라면도 하나 끓였다.
끝방 놈은 사람만 먹으니까 라면 냄새에 반응하지는 않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용감하게 끓였고 다행히 그 믿음은 적중했다. 참치 통조림의 기름과 라면 국물까지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
잠시 쉰 후 약간의 심호흡과 책상 위로 올라갔다. 핸드폰의 동영상 기능을 켜고 창을 통해 핸드폰을 살살 내렸다. 핸드폰이 뒤집어져서 쓸데없이 바깥쪽을 촬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벽에 붙인 채로 조심스럽게 천천히 밑으로 내려야 했다.
‘내 방바닥에서 창틀까지 높이가 대략 1.5m, 층간 두께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50cm는 넘지 않을 것이고, 그럼 2m 정도만 내리면 아랫방 창문 안을 찍을 수 있겠네.’
1분 정도 촬영 후 끌어 올려서 촬영된 동영상을 플레이했다. 화면은 푸른색 필터를 대고 촬영한 듯 퍼런색이었다. 아랫방도 역시 모기장 방충망이 처져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블라인드는 쳐져 있지 않아 방안이 보였다. 창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방안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사각 부분에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저렇게 방문을 열어 놓고 방 안에 있을 리 없었다. 최소한 이 방은 빈방이 확실했다.
‘이제 안전하게 내려갈 방법을 찾아야 해. 소방대원들이 자살시도자를 위층에서 발로 차면서 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간다? 창문이 열려 있는지 아닌지 동영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열려 있다 해도 내가 그런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뭔가로 허리를 묶고 내려가야 해. 긴 끈… 뭐가 있나?’
이리저리 둘러 보는 이진성의 눈에 이제는 아주 쓸모없어진 책상 밑의 멀티탭이 보였다.
마침 3m짜리 4구 멀티탭이 두 개나 있었다. 쓸데없이 긴 걸 샀다고 후회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때 선견지명이 있었나 싶으면서 스스로가 뿌듯했다.
꽂혀 있는 플러그를 다 뽑아내고 두 개를 튼튼하게 매듭지어 묶었다. 한쪽을 책상에 감아 고정하고 나니 약 4m 남짓 길이가 남았다.
허리에 둘러 고정하고 당겨 보니 탄탄하게 버티는 것 같았다. 방충망을 잘라낼 가위도 주머니에 넣었다.
창틀에 걸터앉아 바라본 밑은 까마득했다. 터질 듯이 뛰는 가슴에 포기하고 방문을 열고 나가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갈까 싶다가도 결국 끝방놈에게 목덜미를 뜯기는 모습이 상상됐다.
“가자… 이리로 가자… 죽더라도 떨어져 죽는 게 저놈한테 물려 죽는 것보다 낫다.”
혼잣말로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창틀을 잡고 몸을 내리기 시작했다. 창틀을 꽉 잡고 발로 벽을 밀며 조금씩 미끄러져 갔다.
몸을 완전히 펴자 발끝에 방충망이 느껴졌다. 이진성의 발끝에는 닫힌 창문이 느껴졌다.
일단 방충망을 뜯어내야 했다. 주머니의 가위를 꺼내 한 손으로 창틀을 잡고 한 손을 밑으로 뻗어 봐도 손끝이 방충망에 닿지 않는다.
두 손을 다 놓고서 줄만 의지하고 매달려야 할 상황이다.
“미치겠네… 아! 쫌… 쉽기 쉽게 가자. 하긴 내 인생에 뭐 쉬운 게 있나?”
내려져 있던 한 손으로 멀티탭 줄을 꽉 잡고 창틀을 잡고 있던 손까지 옮겨 잡은 순간, 순식간에 몸이 밑으로 떨어지면서 허리에 감았던 줄이 겨드랑이까지 올라왔다. 아파서 눈물이 찡하기는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보니 다행히 줄이 잘 버티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꺾으면 방안이 보일 정도의 높이까지 몸이 내려와 있었다. 가위를 꺼내 방충망을 찢었다. 그리고 창문을 옆으로 밀어 보니 잠겨 있었다.
“씨발 씨발 씨발… 한 번에 좀 되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다시 올라가서 창문을 깰 뭔가를 가지고 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손에 있는 도구는 오로지 가위 하나.
‘가위 끝으로 찍으면 유리가 깨질까? 제법 두꺼운 유리던데….’
유리를 찍기 시작했다. 건물 밖에서 나는 소리에 끝방 놈이 반응하지는 않았으니까 소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4층에 좀비 놈이 하나라도 더 있다가 이 소리 듣고 이 방으로 오면 다시 올라가면 됐고, 누군가 사람이 오면 문 열어 달라고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다섯 번쯤 찍었을 때 갑자기 줄이 출렁하면서 몸이 밑으로 약간 떨어졌다. 심장이 철렁했다.
이진성은 줄이 풀릴까 봐 더 세게 유리를 찍어댔다. 그리고 드디어 유리에 금이 가면서 팍 터져 나갔다. 다행히 안전유리였다.
창틀에 발을 딛고 안으로 몸을 조금 집어넣으니 감고 있던 줄이 걸린다. 매듭을 풀려고 해도 꽉 조여있는 탓에 풀어지지 않았다.
결국 가지고 있던 가위로 두꺼운 전선을 겨우겨우 잘라내고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위 안 가지고 내려왔으면 좆 될뻔 했네…….”
한동안 숨을 몰아쉬고 정신을 차리고 일단 냄새부터 맡았다. 5층 끝방놈에게서 나는 그런 냄새는 4층에서 나지 않았다.
“여보세요.”
나직하게 누군가 불러봤지만 아무 대답은 없었다. 복도로 살짝 나가 보니 4층 대부분의 방문은 열려있었다. 4층 현관문은 닫히지 않게 문 밑에 쐐기가 박혀 있었다.
“와… 5층에서 저놈 유인해서 뛰어 왔으면 이거 때문에 문도 못 닫고 잡혀 죽을 뻔했네.”
겁이 나서 택한 작전이 오히려 이진성을 살렸다.
쐐기를 빼버리고 4층 현관문을 닫고서 차근차근 방들을 살펴봤다. 문이 열린 방은 역시나 물건들이 흩어져 있고 아무도 없었다.
문이 닫힌 방들 앞에서 작은 소리로 “여보세요.”라고 불러 봐도 대답은 없었다. 손잡이를 내려 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마도 사태가 터지기 나갔다가 못 들어왔거나 안 들어온 것으로 추측됐다.
4층에는 5층에는 없는 부엌이 있다. 라면과 쌀을 조금씩 훔치던 그곳.
냉장고에는 정전된 지 반나절밖에 안돼서 그런지 아직 냉기가 있었다. 사람들이 먹던 개인 반찬 조금과 냉동실에 열려 있는 누군가의 소시지. 소시지가 아주 반가웠다.
부엌 옆에 있는 비상 탈출구로 나갔다. 나중에 5층으로 올라갈 방법을 찾아 놔야 했다.
비상 탈출구로 나가 5층을 올려 보던 이전성은 맥빠지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하 씨! 비상 사다리도 있잖아. 모든 층에 다 있네. 여태 빨래 널면서 어떻게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냐.”
6층에서는 5층으로, 5층에서 다시 4층으로, 비록 사다리가 하나로 쭉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각 층의 베란다에는 완강기와 함께 바로 아래층까지 이어지는 금속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걸 모르고 완강기 줄을 타고 내려갈 생각을 했었네. 1층에서는 다시 못 올라올까 봐 그 걱정을 하고… 병신!”
지금이라도 다시 계획을 바꿔 끝방놈을 건물 밖으로 내보내는 최초 계획을 진행할까 싶어 밑을 둘러봤다.
고시원 건물 대각선 방향 일반 주택 내부가 보였다. 열린 창문 안으로 보이는 작은 공간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리고 그 집 마당에는 좀비 한 놈이 사람 다리로 보이는 것을 들고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놈도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고시원 건물 1층의 공간은 어떤지 보이지 않지만, 저 집에 좀비가 있는 것을 보니 1층에 내려갈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래. 고시원만 확보하자. 어차피 3층 사무실과 2층 학원은 쓸모도 없다.”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 스스로 합리화시켜 버린 이진성이었다.
이제 5층 끝방놈을 유인해 밖으로 나오게 할 차례다.
지금부터는 잘못되면 갈기갈기 찢겨 저놈의 뱃속으로 들어갈 수도, 아니면 저놈에게 물려 검붉은눈의 강력하다는 좀비가 될 수도 있다.
고기가 되거나 좀비가 되거나, 인간 이진성이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순간 어느 쪽이 덜 아플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죽는 쪽의 생각을 털어 냈다. 아니 털어 내려고 했다.
부엌으로 가서 식칼 중 가장 큰 놈을 하나 꺼내 들었다. 칼로 사람을 찌르다 잘못하면 자기 손을 다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맨몸으로 나서는 것보다는 식칼이라도 들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식칼을 들자 덜 떨리기도 했다.
닫아 두었던 4층의 현관문을 열기 전에 혹시라도 냄새가 나나 싶어 잠시 킁킁거려도 냄새는 없었다.
문을 살짝 열고서 밖을 보니 역시나 깨끗했다.
드디어 이진성은 놈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큰마음 먹고 여전히 한 발을 차가운 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