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계단은 현관문을 나가 왼쪽으로 꺾어 다시 왼쪽이다. 안쪽이 5층으로 통하고 바깥쪽은 3층으로 통한다.
놈이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두 번 꺾어야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속도가 줄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적 상황이 이진성으로 하여금 약간의 자신감을 더 가지게 해 줬다.
현관문 안쪽에 왼발을 남겨두고 오른발만 나간 채로 고개를 빼고 계단 위쪽을 쳐다봤다.
소리를 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용기를 짜내어 겨우 한 마디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야~”
놈에게 들리지도 않았을 소리를 내고서는 바짝 긴장하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한심해 한숨이 푹 나왔다.
어차피 여기서 돌이킬 수는 없다. 5층 방에는 챙겨 놓은 식량과 가스버너 그리고 물이 있다. 반드시 끝방놈을 끌어내고 5층을 확보해야 했다.
한 발 더 내디뎌 계단을 막아서서 손에 들고 있는 칼로 계단 난간을 내리쳤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쨍 쨍 쨍 소리가 계단 통로로 울려 퍼져 나갔다. 놈의 그르렁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아직 안 움직이는 듯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야 이 새끼야… 나와! 나오라고… 나와서 날 뜯어 먹어. 이 씨발 새끼야.”
갑자기 방언 터지듯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소리에 자기가 놀라 흠칫했지만, 한번 터진 입은 계속 소리를 뱉어냈다.
“나오란 말이야… 씨발 한 번만 나 좀 도와 달란 말이야…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 건데.”
사실 끝방놈이 직접적으로 힘들게 한 것은 없었다. 그냥 같은 공간에 존재했을 뿐.
이진성의 외침은 끝방놈에게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존재하는지 모를 신에게 하는 푸념과 원망이었다.
칼로 난간을 내리치며, 정신없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게 계속 소리치던 이진성의 코에 끝방놈의 냄새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경험이었다.
‘냄새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다니… 이거 뭐야? 나 개 코가 된 건가? 동물들은 이렇게 냄새로 상대방의 위치가 변하는 걸 알 수 있는 건가?’
생경한 경험에 놀라면서도 소리는 계속 지르고 있었다.
‘저놈… 달려 나오지 않고 있다.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다가올수록 냄새가 미세하게 강해진다. 와… 씨…이걸 구분하는 내 코가 미친 건가…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끝방놈은 그동안 저쪽 벽 넘어 존재하던 달큰한 냄새의 인간이 갑자기 없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
보통의 고소한 냄새의 인간이었다면 벌써 어떻게 든 공격을 시도했을 테지만, 달큰한 냄새의 인간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저놈은 먹이가 아니란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주치면 한번 물어 주면 되는 그런 존재였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본능으로 그렇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달큰한 냄새의 인간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먹이가 아니기에 그냥 놔뒀는데, 저 소리는 짜증을 유발했다.
몸을 부스스 일으키고 조용히 구멍으로 나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포식자로서 본능에 따라 목표물에 충분히 접근할 때까지 서서히 소리를 죽이고 움직였다.
양쪽에 벽이 막혀 있는 공간을 거의 벗어 났다. 달큰한 냄새 인간은 이 밖의 왼쪽 아래에서 시끄럽게 하고 있다.
몸을 낮추고 살며시 아래도 통하는 길로 다가갔다.
‘저놈 거의 계단 입구까지 왔다. 냄새로 알 수 있다. 그동안 내 몸이 변하더니, 이렇게 됐구나. 좀비 놈들은 다 이런가? 나도 이제 저놈처럼 되는 건가?’
입으로는 고함을 치고 손으로 난간을 내려치면서 이진성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도 조만간 빨간눈을 하고 사람을 뜯어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중 이진성에게 놈이 슬쩍 보이는 듯싶더니 갑자기 계단을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5층과 4층의 중간에 다다랐다. 실제로는 보통 사람의 속도지만, 바싹 긴장한 이진성에게는 눈 깜빡할 사이로 느껴졌다.
뒤로 돌아 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놈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고, 몸은 굳어 버렸다.
놈은 계단 중간에서 몸을 돌리며 자기 속도에 몸을 제대로 못 가눴는지 한번 벽에 부딪혔다.
움찔한 것도 잠시, 아래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다시 달려 내려왔다.
놈의 빨간 눈과 번들거리는 이빨, 피에 절은 옷과 손이 보였다. 이제 몇 걸음만 더 내려오면 잡혀 버린다.
무의식 속에서 이진성은 자기 혀를 물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찌릿하면서 겨우 발이 움직였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놈에게 던졌지만, 칼은 허무하게 놈의 몸에 맞고 퉁겨져 떨어지고 말았다.
뒤로 물러서며 오른손을 뻗어 허우적대자 손에 현관문의 모서리가 잡혔다.
놈은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급했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한 발이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몸은 현관 밖이었고 손은 문손잡이를 겨우 찾았다.
문을 잡아당기며 몸을 뒤로 뺐다.
놈의 손이 뻗어 온다. 몸을 밑으로 내리며 두 발을 다 현관 안으로 넣는 데 성공했다. 놈의 손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으려 했다. 문손잡이를 더 움켜잡았다.
엉덩방아를 찧는 덕분에 놈의 손을 피할 수 있었고 문을 더 빨리 닫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닫힌 문에는 놈의 손이 끼어 버렸다.
“아아아악! 씨발놈아 손 빼. 손 빼란 말이야.”
두 손으로 문고리를 부여잡고 발버둥 치며 고래고래 소리 질러 대던 이진성은 이렇게 문을 당기고 있으면 저놈도 손을 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자기 힘으로 문을 당겨서 저 손을 끊어낼 수도 없고 문을 느슨하게 한다고 저 손이 빠져나간다는 보장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문을 사이로 하는 대치는 1분, 2분을 지나 5분을 넘기고 있었다.
놈은 놈대로 버둥대고 있었고 이진성은 이진성대로 사력을 다해 문을 당기고 있었다.
그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두 손 중에 왼손을 놓으며 바로 끝방놈의 손목을 잡았다.
끝방놈의 손이 이진성을 잡으려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지만,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왼손을 밀면서 오른손의 힘을 약간 풀었다.
놈의 팔이 조금은 밀려났다.
낚시에서 큰 고기를 끌어 올릴 때, 한 번에 릴을 감을 수 없다. 당겼다가 풀어주면서 릴을 감고 당겼다가 풀어주며 릴을 감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놈의 팔을 밀어내고 문을 꽉 잡아당기고, 다시 문을 약간 풀고 놈의 팔을 밀어내기를 반복하길 수차례. 드디어 놈의 팔은 다 빠지고 손목과 손만 남았다.
순식간에 손을 놓으면서 문을 살짝 열었다가 강하게 닫았다.
쾅 소리를 닫힌 문에 손목이 문에 끼인 놈은 고통의 소리로 생각되는 괴성을 질러 댔다. 바로 이어서 한 번 더 여닫는 와중에 스스로 손을 빼던 놈의 손가락이 문에 걸려 뼈가 부러지고 손가락들은 멋대로 꺾여 버렸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아까보다 약간 더 크게 열고 모든 힘을 다해 닫아 버렸다.
굉음과 함께 철문은 닫혔고 놈의 손가락 두 개가 끊어져 발치에 떨어졌다.
문을 잠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진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두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놈은 철문을 두드리며 포효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놈의 손가락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피인 양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긴… 저것들이 죽었다 살아난 좀비는 아니고, 산 채로 좀비가 된 것들이니까 피가 붉을 수도 있겠네.”
손가락을 보며 쓸데없이 쉽게 납득해 버린 이진성은 퍼뜩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닫고 비상 탈출구로 내달렸다.
“거기서 계속 문을 치고 있어라. 씨발놈아… 5층하고 6층 현관문 닫을 때까지…….”
사다리로 5층에 올라온 이진성은 복도를 달렸다.
달리면서 벽에 뚫린 구멍을 얼핏 보니, 거의 뼈만 남은 시체가 보였다.
5층 현관에 도착할 때쯤, 놈이 4층 문을 두드리다 멈추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는 게 냄새로 느껴졌다. 머리가 쭈뼛 서면서 온몸이 찌리리 했지만, 다시 얼어붙지는 않았다.
놈이 막 계단 중간에서 몸을 돌리는 순간, 5층 문을 닫고 잠글 수 있었고 바로 다시 비상 탈출구로 달려 6층으로 올라갔다.
6층의 상황은 아직 모른다. 6층 베란다에서 문을 열지 않은 채로 혹시나 좀비 냄새가 나는지 맡아 봤다.
그다지 강하지 않은 냄새가 났지만 그건 저 5층 놈의 냄새라고 생각됐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 졌다.
다른 냄새는 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 6층도 안전한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철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사정은 비슷했다.
대부분의 방문은 열려 있고 역시나 인기척은 전혀 없었으며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현관으로 달렸다. 몇 발자국 움직이자 놈도 눈치를 챘는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현관까지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였지만, 원래 거리의 두 배는 되는 듯 느껴졌다.
겨우 문손잡이를 잡으니 놈도 계단 거의 끝에 다다랐다. 채 2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놈의 냄새가 다시 한번 훅 들어왔다.
손가락이 잘린 손을 뻗어 오는 게 보였지만 이번에는 이진성이 더 빨랐다.
문은 굉음을 내고 닫혔고, 놈은 또다시 놓인 분노로 문을 쳐대고 있었다.
주저앉아 멍하니 문을 쳐다보고 있던 이진성은 갑자기 몰려오는 타는 듯한 갈증에 화장실로 가 수돗물을 틀고 마시려다 멈칫했다.
“이거… 마셔도 되나? 어차피 좀비로 변해 가고 있는 거 같은데 물이 이상하다 해서 별일 있으려나? 아냐. 70% 정도는 변하다 만다 그랬어. 아직은 안전하게 가자.”
5층 자기 방의 생수를 생각하며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시 비상탈출구의 사다리로 내려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며 아까의 그 시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보는 진짜 사람의 사체, 그것도 심하게 훼손된 시체를 보면서도 지금 당장은 아무 감흥도 들지 않았다.
방 앞에 오니 현관문 밖에서 놈의 소리가 들리고 냄새도 난다. 놈도 5층 현관 앞에 내려와 있는 것이었다.
“니 손가락 잘랐다고 따라다니는 거냐? 그냥 니 갈 길 가라. 난 절대로 너한테 안 잡힌다.”
방에 들어가 쪼그려 앉아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나자,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몰려오는 피곤함에 앉은 채로 깊은 잠에 스르르 빠져들었다.
눈을 뜨니 이미 아침이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운동이라고는 언제 했는지 기억에 없는 이진성이었다. 그나마 뒷산 산책이라도 하면 다행인 그런 몸뚱이였다.
그 몸으로 초긴장 상태로 백병전하듯 뛰어다녔으니 안 아프면 그게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고통조차도 충분히 감내할만한 벅찬 희열도 같이 밀려왔다.
무엇인가 추진해서 성취라는 것을 이뤄 본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대학 졸업 후 계속된 실패로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져 살며 38살이 되도록 이런 짜릿한 감정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었다.
이진성은 벅차오르는 뿌듯함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