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 에이지 백수 생존기-17화 (17/145)

# 17

이진성은 무전기는 꼭 챙겨야 했다.

저놈 때문에 사무실을 포기하고 이 넓은 공사장을 다 뒤지고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거리만 충분히 가까워 진다면 놈의 위치를 특정할 자신감이 있었다.

이미 고시원에서 끝방놈의 위치를 보지 않고 알 수 있었던 것으로 증명은 충분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이진성의 잠시 멈춰 섰던 발걸음을 다시 내딛게 해 줬다.

전방에는 나란히 횡으로 붙어있는 세 개의 컨테이너가 보였다. 놈의 냄새는 가운데 컨테이너 쪽에서 흘러왔다.

놈은 한 곳에서 서성일 뿐 달려들기는커녕 공격 준비를 하는 낌새도 없었다.

‘컨테이너 안에 있는 거냐, 아니면 뒤에 있는 거냐? 저놈은 아직 내 냄새를 못 맡았나 본데. 좀비라고 나 정도 후각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닌가?’

조심스럽게 문이 열려 있는 왼쪽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그곳은 뒤쪽으로 컨테이너 벽을 뚫고 다른 컨테이너를 한 개 더 이어붙여 두 개 컨테이너의 공간을 쓰고 있었다.

몇 개의 책상과 컴퓨터 외에는 온통 서류와 도면뿐이어서 챙길 것은 아무것도 안 보였다.

밖으로 나와 가운데 컨테이너로 조심스럽게 향했다.

몸을 바짝 숙여 창문 밑에서 냄새를 맡았지만, 놈은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진성은 천천히 머리를 들어 창 안을 들여다봤다. 놈이 보이지 않았다.

안에는 뒤로 향하는 또 하나의 문이 있고 그 문은 열려 있었다.

‘저 뒤에 있나 보네.’

내부에는 책상 하나와 소파, 그리고 이런저런 가구와 집기가 있었다.

‘현장소장 사무실인가?’

책상 위에는 왜 세 개나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찾고 있던 반가운 무전기들이 보였다.

‘저 뒤 바깥에 있는 건가? 뒤에 또 다른 컨테이너가 있나? 다른 공간에 들어가 문 닫혀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당장 위험은 없는 것 같았다. 약간은 긴장이 풀린 이진성이 오른쪽 컨테이너로 향했다.

역시 문은 잠겨 있었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이쪽은 컨테이너 세 개를 뒤로 이어붙여 제법 컸다.

책상도 많았고 저 뒤쪽으로 사물함 같은 것들과 휴식공간 같은 것도 보였다.

컨테이너 옆으로 고개를 빼고 슬쩍 봤다.

뒤에 붙어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컨테이너 옆으로 난 문이 보였다. 그리고 세 번째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간 내부에는 한쪽 벽면으로 무전기 충전 크래들이 쭉 놓여 있었다.

대부분 비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꽂혀 있는 네 개가 눈에 들어왔다.

“심봤다.”

뒤의 놈이 들을까 나직하게 외치고는 무전기로 조심스럽게 달려갔다.

뽑아 든 무전기의 전면에는 액정이 있었고 버튼과 다이얼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버튼을 눌러보고 다이얼을 돌려봐도 도무지 무전기의 액정은 켜지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에구. 전부 방전이네. 이동형 발전기를 찾아야 하나?”

일단은 무전기와 함께 충전 크래들까지 전부 가방에 담았다. 그리고 혹시나 다른 쓸만한 물건이 있을까 책상을 뒤졌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어느 책상에서 껌과 초콜릿 몇 개를 찾아 가방에 넣고 돌아서는데 책상 밑에 안전화가 보였다.

관리직 직원들이 현장에 올라갈 때 신는 신발인지 깨끗한 편이었다. 들어보니 무게는 묵직했지만 딱딱한 것이 트래킹화 같기도 했다.

이진성은 자신의 캔버스화를 한번 내려보고는 안전화로 갈아신기로 하고 맞는 사이즈가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이게 날거야. 앞으로 졸라 걸을지도 모르는데.”

이것저것 신어보다 드디어 맞는 것을 찾았다.

“오! 의외로 편하네. 물집만 안 생기면 좋겠다. 잘 부탁한다 안전화.”

나머지 공간을 뒤졌지만, 아무짝에 쓸모없을 잡동사니만 잔뜩 있을 뿐이었다.

이진성은 이것저것을 뒤지다가 문득 자신이 바깥의 놈을 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의 냄새는 어느덧 컨테이너 뒤를 돌고 있었다.

“씨발. 뭐 하는 거냐 이 찐따야.”

놈은 이미 문과 불과 2~3m 정도까지 왔다. 문은 바깥으로 열려 있었다. 달려가 닫기에는 늦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있나 급하게 둘러 봤지만, 손에 있는 빠루보다 좋아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이진성은 문에서 가장 먼 책상 뒤로 달렸다. 책상에 도착해 뒤로 도는 순간, 놈은 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정장 바지와 신사화, 유니폼 점퍼를 입은 50대 아저씨는 중간 컨테이너의 주인 같았다.

입가의 말라붙은 핏자국과 옷에 잔뜩 있는 피 얼룩으로 봐서 이미 오래전에 사냥하고 계속 굶은 것으로 보였다.

“아저씨. 난 먹이 아니잖아. 나 달큰한 냄새라고! 그냥 가라 제발 그냥 가라고!”

놈은 이진성의 염원을 깨끗이 무시하고 그르렁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넌 독 안에 든 쥐야. 천천히 좀비로 만들어 주마’ 하고 여유 부리는 것 같았다.

거의 책상 앞으로 다가온 놈을 보며 이진성은 뒤로 물러섰지만, 등이 뒤의 책장에 닿았다.

앞에는 책상, 뒤에는 책장, 왼쪽은 컨테이너의 벽. 놈이 공격할 방향은 앞의 책상을 넘어오거나 오른쪽 공간뿐이었다.

최대 두 방향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빠루를 앞으로 내밀고 놈을 노려봤다.

먹이가 아니니까 죽이려고 덤비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그리고 그동안 계속 좀비들을 겪으며 생긴 익숙함 때문인지 전처럼 몸이 굳지는 않았다. 또 머릿속이 하얗게 될 정도로 긴장되지도 않았다.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몸의 근육은 적당히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이진성을 노려보던 놈이 책상 위로 뛰어오르려는 듯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지켜보던 이진성은 놈이 위로 솟구치는 순간을 기다려 온 힘을 다해 빠루를 휘둘렀다.

“좀비는 대가리~”

영화에서 본 좀비처럼 뇌를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내지른 기합과 함께 휘두른 빠루는 다행히 놈의 머리를 제대로 때렸다.

대가리가 옆으로 꺾이며 놈이 주저앉는 듯싶더니 금방 다시 벌떡 일어섰다.

“씨발놈이 그만 일어나!”

일어서는 놈의 대가리를 계속 내리쳤다. 놈은 맞기만 할 뿐 책상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손을 뻗어 이진성을 잡으려 했지만, 거리가 멀었다.

그런 놈을 얼마나 때렸는지, 어느덧 놈의 대가리에서는 선명하게 붉은 피가 흘러나와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대를 더 때리자 그때야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리다 주저앉아 버렸다.

이진성은 기회를 놓일 수 없었다. 책상 위로 올라서서 빠루의 쐐기 부분을 있는 힘껏 찍어 넣었다.

퍽 소리와 함께 놈의 오른쪽 가슴을 뚫고 들어간 빠루를 위에서 체중을 실어 내리눌렀다.

놈은 일어나려 버둥거렸지만 빠루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고 손과 발만 휘저을 뿐이었다.

재빨리 빠루를 놓고 뒤로 뛰어내려 책장 뒤로 돌아 들어가 책장을 밀어 버렸다.

책장은 넘어지면서 책상을 타고 넘어 다행히도 놈을 눌러 버렸다.

놈이 잭장에 깔려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좋았지만, 이진성도 책장 때문에 놈을 죽일 수가 없었다.

“헉헉. 씨발놈. 죽지는 않아도 최소한 빠져나오지는 못하겠지. 이 씨발 아저씨야. 거기서 계속 버둥거리고 있으세요. 나는 간다.”

뚝뚝 떨어지는 땀과 함께 밖으로 나온 이진성은 숨을 몰아쉬었다. 입은 바싹 마르고 타는 듯한 갈증이 몰려왔다.

동시에 처음으로 좀비를 잡았다는 희열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 물 좀 없나? 헉헉.”

잠시 숨을 고르고 나니 중간 컨테이너에서 본 생수통이 떠올랐다.

아까 본 중간 컨테이너의 뒷문으로 가기 위해 컨테이너의 뒤쪽으로 향했다. ㄷ 자로 배치된 컨테이너들의 가운데에는 한 대의 승용차와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뼈만 남은 시체 세 구가 보였다.

“새끼. 많이도 처 드셨네. 배는 안 고프셨겠어요.”

안으로 들어간 이진성은 생수통으로 입을 대고 한참 물을 마신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밖에서 본대로 소파와 책상, 그리고 다른 곳에는 없는 가구와 집기들이 있었지만 챙겨갈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책상 뒤에는 공사장에 있기에는 쓸데없이 좋아 보이는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책상을 한 번 손으로 쓱 쓸어보고 서랍에는 뭐가 있을까 하며 서랍을 열려는 찰나, 무전기의 충전 크래들에 파란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뭐야? 왜 전기가 들어와 있어?”

충전 크래들의 전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한구석에 놓인 아파트 조감도 뒤로 UPS(무정전 전원장치)를 발견했다.

옛날 IT 사업한다고 깝죽댈 때 엔지니어 놈이 꼭 필요하다고 해서 한 대 썼던 경험으로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공사장 현장사무실에 UPS가 왜 있어? 여기 무슨 서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유가 뭐가 됐든 UPS는 동작하고 있었다. 연결된 멀티탭에 꽂혀있는 것들은 달랑 노트북 한 대와 인터넷 공유기 하나, 그리고 세 개의 무전기밖에 없었다.

전기를 쓰는 것이 없으니 UPS는 아직 살아 있었고 무전기들도 충전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전기의 아무 버튼 하나를 눌렀다. 액정에 불이 켜지며 이런저런 문자와 숫자가 떠올랐다.

우툽에서 무전기 사용법도 찾아봤었다. 거기서 본 기종이랑은 다르게 생겼지만 같은 M 사의 제품이니까 비슷할 거란 생각으로 이것저것 눌러 봤다.

‘보통 사용시간이 10여 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본 거 같은데, 이건 얼마나 가려나? 아직 오전이니까 지금 검도관 앞에 가져다 놓으면 최소한 오늘 밤까지는 쓸 수 있으려나? 칼잡이 아저씨가 금방 받아 줘야 할 텐데.’

액정에 표시된 채널 숫자는 세대가 다 달랐다. 동영상에서 본대로 다이얼을 돌려 세 대를 전부 같은 채널로 맞췄다.

“아! 아!”

서로 통신이 되는 것을 확인한 후, 가방 속의 방전된 무전기와 바꿨다. 그리고 컨테이너를 나서려던 이진성은 다시 돌아와, 혹시나 또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방전된 것들을 빈 크래들에 꽂아 넣고서야 컨테이너를 나섰다.

밖으로 나온 이진성이 냄새를 맡아 봤지만, 아직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책장 밑에 깔린 소장 놈의 울부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혹시라도 그 소리에 다른 놈들이 올까 봐 주위를 둘러보며 코를 킁킁거리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던 공사장 팬스의 문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문을 나설 때까지 다른 좀비 놈이 튀어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후. 힘들었다. 나도 이제 좀비슬레이어다 이거지?”

죽이지도 못하고 슬레이어 운운하면서 으쓱하는 이진성이었다.

조심스럽게 차들을 다시 타고 넘어 대방로로 나온 이진성이 검도장이 있는 오른쪽 두 번째 건물을 올려다봤다.

깨진 창문은 사람이 죽어 나갔던 건물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이게 했다. 인도에는 끝방놈 일당이 미쳐 챙겨가지 않은 팔 세 개와 다리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전기가 켜져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 조심스럽게 건물로 향했다.

검도장은 5층 건물의 3층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2층과 3층 중간까지 올라가 위를 살폈다. 깨져있는 검도관 입구 유리문이 보였다.

귀를 기울여 봤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특별히 없었다.

‘올라가 볼까? 에이. 아서라. 걸리면 죽을 수도 있는데.’

올라가서 문 안을 들여다볼까 하던 이진성은 이내 포기하고 냄새에 집중했다.

사람의 냄새는 약해서 잘 맡아지지 않지만, 문이 뚫려 있으니까 사람이 있다면 느껴질 것이라는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그것도 이진성과 같은 달큰한 냄새가.

‘저 아저씨도 나랑 같은 과구나. 그런데 냄새는 못 맡는 건가? 아니면 알고서 모른 척하는 건가? 아까 소장 좀비도 확실히 내 냄새를 못 맡은 거 같긴 했는데.’

이진성은 가방에서 무전기 하나를 꺼냈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살짝 올려놓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뒷걸음질로 2층까지 내려갔다.

다시 한번 아무도 안 옴을 확인했다. 그제야 몸을 돌려 빠르게 1층으로 내려가 길 건너 고시원으로 달렸다.

“칼잡이 아저씨. 좀 있다 나랑 얘기 좀 해봅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