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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에이지 백수 생존기-23화 (23/145)

# 23

밤이 깊어지며 각자의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관장은 검을 닦으며 사이비 도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이진성은 한쪽에서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나현주와 김현희는 편의점과 상점들에서 뭐라도 건질 것이 있는지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 관장이 살며시 일어나며 나직이 말했다.

“모두 잠깐 모이는 게 좋겠소. 누군가 올라오는데,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 두 명이오.”

관장의 말에 세 사람은 안내센터 앞으로 모였다. 그리고 관장이 바라보는 어두운 계단을 바라보길 잠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까 그놈들 잡을 때 말이야. 칼이 푹 들어가는데, 그 기분 뭐라 해야 하냐? 씨발. 하여간 죽였다. 존나 흥분되는데. 와 씨.”

“오빠는 왜 칼질만 하면 하고 싶어 해? 온몸에 피칠하고 그게 하고 싶어?”

“야! 씨발. 흥분은 이어가야 하는 거야. 너도 싸우고 나서 하는 게 더 잘 느낀다며. 하기 싫냐? 그럼 왜 따라 왔어?”

“아니 그건 아니고. 헤헤헤. 근데 가까운데 많은데 왜 여기까지 와? 여긴 침대도 없는데.”

“있다 다구리치러 간다고 분위기 살벌한데 걸리면 좆되는거야. 형님이 너랑 나랑 정찰 내보내지 않았으면 거기 골방에서 눈치 보면서 손장난이나 해야 했어, 씨부럴.”

들리는 대화에 네 사람 모두는 인상을 썼다.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두 사람이었다. 딴에 안전한 곳에서 즐기려고 온 것 같은데 하필이면 장소를 잘 못 골랐다.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역사 내부가 희미하게 밝았다. 누군가 불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세상에서 지나가는 사람이 역사에서 밤을 보낼 수는 있다. 그런데 하필 지금, 한번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누가 있다는 것에 남자는 짜증이 확 올랐다. 남자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사시미칼을 뽑아 들었다.

조폭이 놈의 정체였다. 뒤를 따르는 여자는 자신이 관리하던 한 업소의 에이스였고 지금은 자신의 애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서서히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눈에 장검을 들고 있는 노숙자 같은 50대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 뒤로 바이크 슈트를 입은 채 이상한 무기를 든 30대로 보이는 남자도 보였다.

그 옆에는 20대 또는 30대일 것 같은 여자 하나와 가마솥 뚜껑을 들고 있는 40대의 아줌마 하나가 서 있었다.

계단을 다 올라 개찰구를 넘어 사람들의 약 10m 앞까지 오는 동안 사람들은 별 반응 없이 자신들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씨벌. 넷이나 있네. 어이. 누구 허락 맡고 여기 있는 거야?”

놈은 조폭답게 일단 어거지로 시작했다. 동네 양아치 삥 뜯는 자세와 말투로 얼토당토않은 말을 뱉어냈다.

이진성이 한마디 하려다 놈이 들고 있는 사시미칼과 목까지 올라온 뭔지 모를 문신에 쫄아 조용히 뒤로 한발 물러서는데, 관장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자네한테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나?”

몇 발자국 더 가까이 오던 놈은 관장의 말을 듣고 시비를 걸려고 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관장의 눈을 보는 순간 소름과 함께 몸에 한기가 쫙 뻗치며 뇌에서 위험신호가 울렸다. 그 느낌은 자신이 다른 조직과 전쟁을 할 때, 자신의 목숨을 여러 번 살려 줬던 바로 그 신호였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인사한 겁니다. 인사. 하하하. 거기 형님, 생활하시는 형님 같아 보이진 않는데 어디서 오셨소?”

놈은 바로 형님이라면서 말을 올렸다. 그것이 놈이 몸을 사리는 것이란 걸 알아챈 여자도 더 다가오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바라만 봤다.

“어디서 왔는지 자네가 알 건 없고 여기는 우리가 먼저 자리 잡았으니 오늘은 다른 곳에서 즐기시게. 우리는 내일 조용히 갈 사람들이니 신경 쓸 것 없네.”

“아 네. 뭐 그럽시다. 저도 그 정도 예의는 아는 놈이오. 그럼 좋은 시간 가지쇼.”

하면서 놈은 침을 한번 찍 뱉고는 순순히 뒤돌아 여자 손을 잡고 계단으로 향했다.

내려가는 놈을 보며 안심한 세 사람은 선 자리에 그대로 앉았지만 관장은 계속 서서 지켜보며 경계를 풀지 않았다.

놈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마치 자기가 쫄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듯 계속 떠들어 댔다.

“야! 내가 아까 저녁에 둘이나 죽였는데 또 네 명을 죽이기는 그래서 그냥 가는 거다. 존나 너 딴생각 하면 안 된다.”

“이 오빠 뭐래? 뭔 딴생각 한다 그래? 아까 그 영감 존나 무서워. 빨리 가기나 해.”

“씨발 무섭긴 뭐가 무서워. 내가 작정하고 덤비면 칼침 두 방이면 끝나. 뒤에 있는 얼빵한 새끼는 말할 것도 없고. 씨발. 그 담에 거기 있던 두 년도 너랑 같이할 수 있었지만 내가 좀 있다 있을 전쟁 때문에 참은 거라고.”

“지랄~”

“씨발 좆도. 우리 아지트 좀비들한테 털리지만 않았어도 전쟁 안 해도 되는 건데.”

이진성은 멀어져 가는 놈이 하는 얘기가 뭔가 이상하게 들렸다. 저녁에 죽인 둘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물어보려는 찰나 김현희가 조용하게 나현주에게 말했다.

“너 방금 저 여자 매고 있던 백팩 봤어? 그거 진숙 씨 가방 맞지? 진숙 씨 정찰 나갈 때 가져가는 그 가방이잖아. 거기 달린 그 인형! 진숙 씨 가방이 확실해.”

“저도 봤어요. 진숙 씨 가방을 왜 저 여자가 가지고 있을까요?”

얘기를 들은 이진성은 확신했다. 저들이 죽였다는 사람 중에 최소한 진숙 씨라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 진숙 씨라는 사람도 오늘 같이 정찰 나왔었어요?”

“네. 근데 진숙 씨는 다른 조예요. 저희랑 다른 방향으로 갔어요.”

“그 조는 몇 명인데요?”

“아홉인가? 열인가?”

잠시 뜸을 들인 이진성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놈이 저녁에 죽였다는 게 아무래도 사람 같아요. 아마도 그 진숙 씨라는 사람일 수 있고요. 저놈 혼자 열 명을 습격하지는 않았을 거고 아까 그 여자도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최악의 경우에는 그 조 사람들 모두 당했을지도 몰라요.”

말은 들은 나현주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잠깐만요. 저 사람들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저 밑에 있는 유흥가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 같은데 왜 사람들 죽여요?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이 판국에 돈이 필요하겠어요? 제일 중요한 게 안전한 장소와 식량이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놈 자기네 장소 좀비들한테 털렸다고 했고 전쟁한다고 했어요.”

“전쟁이라는 게… 무슨?

“조폭들이 전쟁이라고 하는 건 다른 조직을 친다는 건데 지금 조직 싸움을 할 일은 없을 거고요. 그렇다고 좀비랑 싸운다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그럼요?”

“만약에 정찰 나온 사람들을 습격해서 미리 인원수를 줄인 거라면, 저놈들 목표는 아마도 두 분이 생활하시는 곳 같은데요.”

이야기를 듣던 관장은 ‘이놈 제법이네!’라는 생각을 하며 이진성에게 약간은 놀랐다.

김현희와 나현주는 자신들의 숙소가 위험 다는 소리에 놀라서 당장 달려갈 듯 일어섰다. 그걸 본 관장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둘이 지금 가는 것은 위험하오. 가는 길에 놈들을 만날 수도 있고 좀비들을 만날 수도 있소.”

“하지만 거기가 잘못되면 저희는…….”

“잠시 기다리시오. 우리 둘이 같이 가보는 거로 합시다. 거기 남은 인원이 몇 명이오?”

“나갔던 사람들이 다 당했다고 하면 남아 있는 인원이 열둘이네요.”

“저 조폭 놈들이 자기들 아지트를 좀비한테 뺏겼다면 그 도중에 사상자도 많았을 거요. 어쩌면 저들도 인원이 많지 않아서 정찰조를 먼저 습격했는지도 모르오. 아마도 많아 봐야 스물이 안될 것 같소. 일단은 그쪽 사람들이 건물 안에서 버티는 것이니 크게 불리하진 않은 것 같소만.”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는 관장을 나머지 셋은 말없이 따라 내려갔다.

관장은 사람들을 이끌고 부동산으로 가서 남은 검 중 한 자루를 더 꺼내 등에 X자로 매고 나와 셔터를 내리고는 두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했다.

앞장선 세 사람을 따라가는 이진성에게 좀비가 아닌 조폭과 싸운다는 것은 새로운 두려움이었다.

평생을 약자로 살아온 이진성에게 조폭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공포감이 있었다.

과연 싸울 수 있을까 걱정을 하며 억지로 사람들을 따라서 약 20분을 걸으니, 저 앞에 보이는 5층짜리 건물을 가리키면서 그곳이 자신들의 숙소라고 김현희가 말했다.

그리고 그곳은 이미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지, 비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 밖으로 좀비들의 시큼한 냄새가 너무도 많이 나오고 있었다.

너무 많아 알 수 없지만, 건물 전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봐서 최소한 스물은 넘는 것 같았다.

“건물 안에 있는 게 사람이 아니에요. 좀비들이 들어가 있어요. 더 가까이 가봐야 알겠지만 스물에서 서른 정도?”

“에? 조폭들이 습격한다고 했는데 왜 좀비들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래니?”

이진성의 말을 듣고 황당하다는 듯 김현희가 대꾸했고 나현주는 조폭 놈들이 오기 전에 빨리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달려나가려 했다.

그때 관장이 덧붙였다.

“거친 기운의 사람들이 여러분들 숙소 앞 저 건물에 모여 있소. 스물이 조금 넘는 것으로 보이오. 조폭 놈들도 이미 와 있는 것 같소. 잠깐 상황을 살펴보고 움직여야 할 것 같소.”

안에 들어가서 좀비들과 싸우는 도중에 저놈들이 뒤를 치면 곤란했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바로 옆의 건물로 들어갔다. 2층의 한 사무실에서 창을 열고 앞을 바라보기를 약 5분쯤, 밑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우리 너무 늦은 거 아냐? 벌써 시작했나 본데.”

“씨발 걱정하지 말라니까. 유인할 좀비 새끼들 찾다가 못 찾아서 늦었다고 하면 된다니까. 그리고 벌써 시작했는데 우리한테 신경 안 써. 오빠만 믿어.”

“그런데 어디서 잘도 유인해 왔네. 유인하러 나간 오빠들 다 뒈지진 않았나 봐.”

아까 전철역에 왔던 그 둘이었다. 그들의 얘기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저놈들이 이 동네의 좀비들을 유인해 와서 건물에 넣은 것이다. 보이는 1층 입구는 깨끗한 것으로 봐서 아마도 지하 입구로 들어갔을 텐데 뭘 하느라 지하 입구가 뚫리도록 안에서 모르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지하 입구는 뭐로 어떻게 막아 놨었어요?”

“그게… 승합차로 문 못 열게 막아 놨었어요.”

“설마 차를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놓아둔 건 아니죠? 고장을 내놓는다거나, 뭐 어떻게든 했죠?”

“아뇨. 나중에 또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그냥 운전 가능하게 해 놨죠. 급하면 타고 가려고 키도 꽂아 놓고 가끔 시동 걸어 방전 안 되게도 하고.”

“사람들이 공격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 안했소?”

“저희는 아무도… “

“순진한건지 아니면…….”

관장은 말을 아꼈지만 모두는 뒷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어서와 주세요 하고 준비 해 놓은 꼴이었다.

몇 놈이 미리 와서 차를 치우고 몇 놈은 유인해온 좀비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놈들이 살아 있다면 어딘가에 숨어서 나머지 조폭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저기 있는 이십여 명이 전부 조폭은 아닌가 봐요. 싸우지 못하는 여자들도 많은가 봐요. 그러니까 사람들과 좀비들과 싸우게 하고 어부지리를 노린 거 같은데요.”

이진성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듯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 이제 조폭을 먼저 치느냐 아니면 좀비를 치느냐 결정해야 했다.

조폭을 치자니 저 중에 몇 명이나 싸울 수 있는 인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관장이 느끼기에 기의 강도가 다른듯했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반면, 두 여자의 숙소 쪽 인원은 합류한다면 아군이 되는 것이다. 더 피해를 보기 전에 구하는 편이 좋았다. 결국 좀비를 먼저 치고 조폭과는 수성전을 하기로 한 네 사람은 그곳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숙소건물의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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