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어느덧 피같이 붉었던 노을은 사라지고 하늘은 깜깜했다.
알렉스 일행의 현재 위치에는 불 켜진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가로등조차 꺼져있어 보이는 빛이라고는 하늘의 달빛과 별빛이 전부여야 했다.
하지만 한가지 빛이 더해졌다. 자신들을 쫓는 놈들 눈의 선명한 붉은 빛이었다.
알렉스 일행에게는 그 섬뜩한 눈빛이 보이는 게 오히려 고마웠다.
그 눈빛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대가리 위치를 표시하는 표적이었다. 놈들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해도 특등사수인 그들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전 놈들의 기습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지만, 아까의 골목은 이미 벗어났다.
놈들을 쏘며 방금 왕복 2차선의 차도로 들어온 그들은 하나로 뭉쳐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약 50m 앞에 길을 막고 있는 2층 건물이 하나 보였다.
역시 불은 꺼져 있었다. 정문은 철문이었고 정면으로 보이는 창문은 넷이었다.
알렉스가 달리면서 하나의 창을 쏴서 유리를 깼다.
로버트와 무하마드, 클락도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채고 각자 창을 하나씩 깨 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4열 종대로 진형을 바꾸며 달려나갔다.
한 창에 네 명씩만 들어가면 숨을 돌릴 수 있는 것이었다.
건물에 다다르자 클락, 무하마드, 김인식, 장소영이 돌아서서 쫓아오는 놈들의 미간에 한 발 한 발 먹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각 창문으로 세 명씩 몸을 던졌다. 그리고 들어간 인원이 엄호사격 속에 네 명도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놈 중 몇이 창으로 달려들다 대가리가 터져 나가자 나머지는 건물 앞 도로에 시체를 남겨놓고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각자 들어갔던 방에서 나와 정문 뒤에 모인 그들은 탄약부터 점검했다.
“12발입니다.”
“7발입니다.”
“전 다 썼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 봐야 탄창 하나 반이었고 대부분이 탄창 하나 분량도 되지 않았다.
서로 탄을 나눠 가진 후 잠시 숨을 돌린 그들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인간을 상대로도 이 정도 힘들었던 적이 없었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방심했어.”
“방심한 것도 있지만 저것들이 인간과 다르게 행동해서 당황한 것도 있어.”
“근데 저것들 영화의 좀비와는 많이 다른데? 그냥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불리하니까 피하는 거 봐.”
“변이체라고 하잖아. 좀비가 왜 나와. 저것들 살아 있는 생물이라잖아.”
“그럼 좀비는 뭐가 달라?”
“좀비는 죽은 거지. 그래서 생각이 없어.”
“니가 좀비가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쓸데없는 대화로 긴장을 푸는 대원들의 주의를 환기하며 알렉스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만. 클락, 무하마드, 인식, 소영은 각자 들어온 창을 사수한다. 나머지는 건물의 안전 확인 후 2층으로 모인다.”
2층에서 알렉스는 이동하면서 계속 들리던 짐승 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늑대 소리도 아니고 고릴라 소리도 아니야. 꽤 신경 거슬리는 소리였지. 그 소리가 나면 놈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진 것 같았고. 말이 되나? 저것들이 우두머리의 통제를 받는다? 에이 설마.’
대원들은 1층의 모든 창을 가구를 끌어다 막았다. 엉성했지만 분명히 놈들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할 것이었다.
창을 막은 후 놈들이 들왔을 때 움직일 동선을 상정해 최적의 방어위치를 잡아 나갔다. 그 나머지는 총알과 무기가 될만한 것을 찾아봤지만 총알은 커녕 무기로 쓸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결국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해가 뜨면 사령부로 움직이는 것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호는 이미 그들 가까이 와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 * *
1호는 인간들이 쉽게 잡히지 않자 인간을 쫓던 놈들을 불러 모았다.
계속하다가는 자신들의 숫자만 줄어 결국 저 인간들을 잡을 수 없게 됨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들에게서는 다른 인간들보다 좋은 냄새가 났다. 진하고 순수한 냄새. 강한 힘과 우수한 사냥기술을 가진 놈들의 냄새였다.
본능은 놈들을 자신의 부하로 만들라고 충동했다. 1호는 순수하게 그 본능에 따랐다.
인간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1호가 직접 움직여야 할 때인 것이다.
1호가 움직이자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나머지 변이체들이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1호가 냄새로 느끼기에 놈들은 아래에 더 많았고 위에는 아래보다 적었다.
건물의 1층에 있는 창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왠지 그것들은 거리꼈다. 위험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건물 옆에 건물보다 키 큰 나무가 보였다. 1호는 은밀하게 나무로 다가가 손가락을 나무에 박아 넣었다.
나무에 올라 굵은 가지 위에 섰다. 건물은 내려다보였다. 창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보이는 인간이 없었다.
다른 곳을 둘러봐도 더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다. 잠시 후 1호는 그 창으로 점프해 버렸다.
유리가 깨지며 안으로 들어온 1호는 한 바퀴 구르고 일어나자마자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렸다.
작전을 짜던 중위와 네 명은 창문 깨지는 소리에 총을 들고 달렸다.
선두의 알렉스 바로 뒤에서 씬디와 정진이 전방을 조준하고 뒤를 따랐다. 로드리게스와 로버트는 좌우를 살피며 달렸다.
막 두 개의 방을 지나자 복도는 2m 앞에서 끝나고 T자로 갈라졌다.
복도 끝은 달빛조차도 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복도의 오른쪽에서 무엇인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시할 필요도 없이 모두 자리를 잡고 사격준비를 마치자마자 뭔가가 훅 튀어나왔다.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전투경험은 지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모두는 놈의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겨다.
다섯 발의 총알 중 두발은 빗나갔다. 그리고 실망스럽게도 세 발을 몸에 맞은 놈의 움직임은 맞기 전과 차이가 없었다. 놈은 점프해서 가장 왼쪽에 있던 로드리게스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쓰러지는 로드리게스를 뒤로하고 점프한 놈은 로버트를 안고 옆으로 굴렀다.
로버트가 당하는 그 순간에 나머지 세 명의 총탄이 로버트가 있던 위치로 날아갔다. 총구 화염으로 보이는 놈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후퇴, 후퇴!”
알렉스, 씬디, 정진은 왔던 길로 내달렸고 놈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빨랐던 정진이 복도 중간에서 뒤돌아서니 이제서야 달빛에 놈의 윤곽이 보였다.
정진은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당겼다. 하지만 놈이 한발 빨랐다.
들고 오던 로버트를 던지는 통에 순간 시야가 가려졌다. 총알은 로버트만 맞출 뿐이었다.
알렉스와 씬디는 그대로 전방에 보이는 창을 뚫고 바깥으로 뛰면서 1층 인원들에게 소리쳤다. 정진도 그 뒤를 따랐다.
“전원 탈출!”
1층의 11명은 정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들 앞에 떨어진 알렉스, 씬디, 정진과 함께 벽을 등지고 서서 달려오는 놈들을 향해 한발 한발 조준사격을 가했다.
놈들은 서른이 약간 넘었다. 놈들이 먼저 죽는지 아니면 총알이 먼저 떨어지는지의 긴박한 순간이었다.
철컥 철컥~
누군가의 총알이 떨어졌다. 그리고 연이어 울리는 철컥 소리.
남은 놈들은 일곱이지만 저 위에는 총알도 안 먹히는 놈이 하나 있다. 마음이 급했다.
알렉스의 총에서도 철컥 소리가 났다. 대검을 꺼내 드는 순간이었다.
저 앞 건물의 뒤가 밝아지더니 거친 엔진음의 보병장갑차 한 대가 이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꺾어 달려왔다.
그리고 장갑차 위에서는 MK19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었다.
* * *
석양이 짙어질 무렵, 잠깐 들어왔던 무전이 끊어지고 들리는 총소리에 사령부의 캘리 소령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의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들이 오지 않자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비전투병들인 자신과 행정병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에 있던 병사 하나가 일어섰다.
“소령님. 저 장갑차 운전해 봤는데요.”
장갑차는 지휘부 건물에서 약 100m 거리에 있었다. 망설임 끝에 마침내 캘리 소령, 운전할 한 명, 그리고 위에서 견제 사격할 한 명, 그렇게 셋이서 목숨을 걸고 장갑차로 달렸다.
다행히 장갑차까지는 금방 무사하게 도착했다. 그런데 운전을 할 줄 안다는 놈의 버벅거림에 약 10분을 날려 먹었다.
출발한 후에는 알렉스 일행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해 엉뚱한 곳을 헤매야 했다.
“총소리입니다.”
유탄발사기를 잡고 있던 병사가 총소리를 듣고 겨우겨우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애초에 이들은 MK19로 놈들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훈련받은 사수도 이동 중인 장갑차에서 사격하기 힘든데 처음 쏴보는 놈이 아군과 섞여 있는 놈들을 맞춘다는 것은 기대조차 안 했다.
그저 소리에 도망가기를 빌었을 뿐이다.
건물 2층을 쏘아대는 유탄의 강력한 타격에 건물 벽이 터져나가며 파편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그 커다란 소리는 놈들을 주춤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달려오던 장갑차는 변이체들을 들이받고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2층에서 그 모습을 보던 1호는 커다란 소리를 질렀다. 변이체들은 그때야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장갑차의 후방 해치가 열리고 알렉스와 씬디, 정진 그리고 네 명의 병사는 겨우 장갑차에 올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 * *
밖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가운데 ITL 내부에서는 박인화 소장의 지휘 아래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난장판이 된 연구실에서 치울 수 있는 것들은 치우고 쓸 수 없는 방들은 폐쇄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시체들은 소각로에서 태웠고 중상자들은 의무실로 옮겨졌다.
대충 정리가 끝난 후 회의실에 모여 앉은 박인화 소장과 책임 연구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몇 명이나 죽었나요?”
“중상자 포함 생존자가 72명입니다. 151명이 죽었습니다. 중상자는 17명입니다.”
“연구는 계속할 수 있나요?”
“시설 손실이 커서 어려워 보입니다.”
회의실 내 인원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모두 앞으로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소장이 조용히 말했다.
“여러분이 못 본 1호의 얘기를 해 드려야겠네요. 1호는 다시 한번 변이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변이체가 최종적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소장은 1호의 눈과 1호가 독방에 있던 사람들을 변이체로 만들 수 있게 된 것, 1호가 변이체들을 지휘하던 것,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 줬던 것까지 모두 얘기했다.
연구원들은 1호의 변화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토론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화이트보드에는 곧 이런저런 날짜와 숫자들이 적히고 소장은 다시 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소장님 뭐 하시나요?”
“앞으로 언제까지 변이체가 나올까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인원 중 가장 늦게 유전자 변형을 시작한 사람이 4월 3일이었죠? 인간이 보통 6~7주 걸렸으니까 변이한다면 5월 말이 되겠네요. 유전자변형 진행 중이던 세 명은 모두 살아 있나요?”
“셋 중 둘은 죽었고요. 남은 한 명이 가장 늦게 시작한 사람입니다.”
“미안하지만 그 사람은 격리하고 6월 초까지 경과를 보세요. 지금은 유전자검사를 못 하니까 그 방법밖에 없어요.”
“그리고 식량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요?”
“인원이 줄긴 했지만, 한 달 반 정도입니다. 배급을 줄이면 두 달 남짓입니다.”
“그 후가 문제군요. 그 전에 바깥 사정이 해결되어야 할 텐데. 발전시설과 정수시설의 유지보수에 문제없도록 하시고요.”
ITL 내부의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동녘의 하늘은 밝아오기 시작했다.
여명 속에서 사령부의 한 창가에서 알렉스는 1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호는 자기를 내려다보는 알렉스를 향해 그르렁대다 서서히 몸을 돌려 기지 어딘가로 향했다.
나머지 변이체들은 모아 놓았던 시체들을 양손에 잡고 끌면서 1호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본 캘리 소령과 알렉스 일행은 그제야 주저앉아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그날 이후 평택미군기지 내에는 스스로 격리한 비전투 인간집단과 서로를 죽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두 전투집단이 공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