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에구구 삭신이야. 좀 씻었으면 좋겠다. 물 안 나오겠지?”
“나올걸요? 아파트는 정전되면 비상 발전기로 물탱크부터 채우거든요. 근데 쓸 사람이 없잖아요.”
싱크대로 간 이진성이 물을 틀자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어머나. 진상 총각은 그런 거 어떻게 알아?”
“또 진상이란다. 제가요. 소행성 발표 나고 정말 열심히 한 게 생존법 공부였거든요. 인터넷하고 우툽을 얼마나 뒤졌게요.”
“백수라서 알 수 있었다는 말이네요. 크크크.”
뿌듯하게 말하는 이진성을 보며 장동건이 나현주에게 속삭였다
나현주가 웃으며 장동건을 툭 치며 일어섰다.
“옷도 구하고 씻기도 해야겠어요. 움직이죠?”
“같이 가. 씻는 동안 놈들이 오면 곤란해. 진상 씨가 냄새 잘 맡고 있어 줘. 흐호호홍.”
“아니 내가 경비견도 아니고 진짜.”
투덜거리는 이진성을 앞세우고 적당한 옷과 먹거리를 찾으며 가다 보니 어느덧 7층이었다.
깨끗한 집을 골라 밤을 보내기로 하고 흩어져 한 집씩 들어가 씻었다.
씻고 나온 관장은 나머지 검들과 숫돌을, 이진성은 랜턴과 가스버너를 밑에서 가지고 올라왔다.
나현주와 김현희는 찾아온 감자와 양파, 당근 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형님. 누나랑 아줌마 씻고 나니까 디게 미인인데요?”
“군인 눈에 안 예쁜 여자 없다며. 동건 씨가 오랜만에 여자 봐서 그래.”
“아니 제가 사병도 아니고 중사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진성에게도 제대로 씻고 좋은 냄새를 풍기며 깨끗한 옷을 입은 둘은 꽤 미인으로 보였다.
“거기 둘. 흰소리 그만하고 여기 감자나 까. 싹난 부분은 다 도려내고. 칼 모자라면 옆집 가서 가져오고.”
“눼 눼.”
* * *
식사를 끝내고 인스턴트커피를 즐기던 이진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누님 가족들은 어떻게 되셨어요?”
“나? 이혼한 지 몇 년 됐지. 올해 고3 아들 하나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랑 평택에 살아. 애 아빠는 기계기술잔데 워낙에 출장을 많이 다녀서 1년에 얼굴 얼마 못 보고 살았지.”
“그래서 외로워서 이혼하신 거예요?”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장동건에게 꿀밤을 먹인 김현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애 아빠 안 들어오는 건 익숙해지니까 편했지. 그런데 이 시키가 살림을 차렸네? 가서 두 연놈 머리를 다 뽑아버리고 이혼해 버렸지. 호호호.”
‘원래 터프했구나.’
모두의 생각이었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하늘에는 별들이 참 많았다.
전기가 사라진 세상에서 보는 하늘에는 난생처음 보는 별들로 가득했다. 달도 전보다 훨씬 밝았다.
주위 아파트들에는 드문드문 희미한 불이 켜진 집들도 보였다.
그런 광경들을 보며 서로의 가족 얘기를 도란도란하던 중이었다.
탕탕~ 타타타타타타타 타탕~
“와. 제대로 교전하나 본데요. 정확하지 않지만, 저쪽 약 300m에서, 그리고 저쪽 약 400m 쪽에서 사격 하고 있어요.”
“어라? 동건 씨 그런 거 어떻게 알아? 소리 들으면 진성 총각처럼 막 위치가 그려지고 그래?”
“어? 진짜 내가 이걸 어떻게 알지? 저 이런 적 처음이에요.”
오히려 자신이 더 놀라 반문하는 장동건이었다.
“동건 씨 거기 있어 봐. 소리 내 볼게. 맞춰봐.”
이진성이 뒤로 물러서며 손뼉을 쳤다.
“어디게?”
“어… 모르겠는데요? 왜 이러지? 총소리는 막 머릿속에 그려지는데 박수 소리는 방향만 대충 알겠는데요?”
“뭐야. 능력이 오로지 총에 집중된 거야? 별 희한한 능력도 다 있네.”
“아저씨가 할 소리는 아니네요.”
나현주의 일침에 이진성은 조용히 다시 베란다로 향했다.
기죽어 밖을 보던 이진성에게 뭔가가 조금 전과 달리 보였다. 아파트들이 전부 깜깜했다.
“집에 불이 다 꺼졌어요. 저 총 쏘는 사람들 위험한 사람인가 봐요.”
한쪽에서 정성스럽게 숫돌로 검날을 세우던 관장이 나현주를 쳐다봤다.
“현주씨. 아무래도 내일 야간에 걸어가야 할 것 같소. 오토바이는 약탈자들의 이목을 끌지도 모르오. 여기서 얼마나 머오?”
“얼마 안 멀어요. 차로 10분 정도?
“패밀리플러스 근처라고 했죠? 한 3km 정도 되겠네요. 이 옆에 개천 길 따라 내려가다 중앙역에서 한 정거장만 가요. 그럼 거기도 개천 길 있어요. 그리로 가면 사람 안 마주칠 거에요.”
모두에게 피곤한 하루였다. 사람들은 곧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두 여자와 장동건에게는 정말 오랜만에 편히 잠든 밤이었다.
* * *
날이 밝고 부스스 일어난 모두의 몸은 가뿐했다. 몸이 변하고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자고 나면 멀쩡했다.
내심 몸살을 기대했던 관장을 멀쩡함에 실망했지만, 네 사람은 상쾌한 기분으로 상쾌한 아침을 만끽했다.
언제 또 할지 모를 샤워를 하고 따뜻한 아침 식사도 했다. 다섯 사람의 갈아입을 옷도 돌아다니며 챙겼다.
오토바이는 아파트 상가의 편의점 안에 넣고 셔터를 내려 숨겼다.
어디선가 찾은 미지근한 캔맥주도 마시고 낮잠도 자며 느긋함을 한껏 즐겼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선두는 동건 씨가 맡아 주시오.”
“총알 얼마나 남았어?”
“62발이요. 충분할 거 같아요.”
“사람 쏠 수 있겠어?”
“뭐, 전쟁이라고 생각해야죠. 전쟁 맞잖아요?”
아파트를 떠난 일행은 계획한 경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사람의 기척은 관장이, 좀비의 기척은 이진성이 알려 줬다.
훌륭한 두 탐지기 덕에 일행은 무리 없이 전철길 앞 8차선 도로에 닿을 수 있었다.
차도에 진입해 중앙선을 막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타타타타 타타타타 타타타탕~ 타타타탕~
약 500m 떨어진 상업지구 안쪽이었다. 총소리와 함께 오토바이 불빛이 8차선 도로로 튀어나와 일행 쪽으로 꺾는 게 보였다.
“뛰어요. 저 전철선로 기둥 밑에 숨어요.”
오토바이 네 대가 뒤쪽으로 총을 쏘고 도망치고 뒤에서 여섯이 총을 쏘며 따랐다.
“한대에 둘씩 타고 있나 봐요. 저것들 총 쏘느라 빨리는 못 달리나 본데.”
그래도 달리는 사람보다는 훨씬 빨랐다.
막 마지막 차선을 건너는데 재수도 없이 놈들의 헤드라이트가 일행을 비췄다. 놈들은 이진성 일행을 미끼로 삼으려는 듯 4차선으로 붙었다.
그 덕에 뒤따르는 놈들의 총탄이 일행의 근처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씨불. 하나도 맞추지도 못하면서 쏘기는.”
장동건을 제외한 넷은 앞으로 달려 선로 기둥 뒤로 숨었다.
장동건은 인도 위의 변압기박스로 달렸다. 가까스로 몸을 숨기자 눈먼 총알이 근처로 날아들었다.
대부분은 엄한 곳으로 날아갔지만 몇 발은 변압기 박스에, 몇 발은 장동건의 얼굴 바로 옆을 날아가기도 했다.
놈들은 아직 약 200m 앞. 장동건의 총에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한 박자씩 끊어 다가오는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 바로 위를 노렸다.
총알은 운전하던 놈들의 가슴을 정확하게 뚫고 들어갔다. 자빠져 구르고 미끄러지는 오토바이 뒷자리의 놈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하나하나 차례로 모두를 쓰러트린 후, 들리는 것은 몇 놈의 신음과 비명뿐이었다.
엄폐물에서 나온 여섯이 장동건을 선두로 놈들에게 향했다.
달빛에 보이는 놈들의 얼굴은 아직 10대 후반, 많아 봐야 20대 초반의 남녀가 섞여 있었다.
운전하던 열 놈은 전부 가슴에 총상을 입고 즉사했다.
뒤에 탔던 열 놈 중 넷도 복합골절로 몸이 뒤틀려 죽어 있었고 여섯은 중경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햐. 아무리 겁 없는 나이라지만 아주 영화를 찍네.”
“동건 씨. 얼른 총알 챙겨. 소리가 너무 많이 났어. 다른 놈들 몰려오면 골치 아파.”
관장과 김현희가 주위를 경계하고 나머지 셋이 놈들의 총에서 탄창을 빼냈다. 몸을 뒤져 나오는 탄창도 모았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나를 죽이려 했던 놈들이고 죽지 않기 위해 죽였을 뿐이다.
장동건의 말대로 전쟁이었다.
막 마지막 놈의 몸을 뒤지는데 이진성의 코로 시큼한 냄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냄새는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뒤에서도 오고 있었다.
거리는 아직 50m 이상. 숫자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다는 것은 확실했다.
총이 나돌면서 여기저기서 좀비들을 많이도 잡았는지, 구로에서 보다 훨씬 많은 놈이 뭉쳐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 중앙역으로 달려요. 좀비들에게 둘러싸이고 있어요. 싸우기에는 너무 많아요.”
이진성의 외침에 모두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약 350m 정도. 1분 정도를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100m쯤 달리자 오른쪽 길 건너 상가건물 사이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략 30여 마리. 다시 50m 정도를 더 가자 왼쪽 뒤에서 선로 밑에서 쫓아오는 놈들도 보였다.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앞으로 200m를 더 달려야 중앙역 입구다.
중앙역을 50m쯤 앞에 뒀을 때, 오른쪽 놈들의 선두가 거의 10m 정도 거리로 따라붙었다.
장동건이 속도를 냈다. 우사인 볼트처럼 앞으로 치고 나갔다.
중앙역 입구에 도착한 그가 벽을 등지고 선 채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달리며 놈들을 베던 관장의 옆에서 달려들던 여섯 놈의 대가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방패로 막으면서 달리는 김현희에게 뛰어드는 네 놈의 대가리도 터져 나갔다.
이진성은 귀 옆으로 지나가는 총알 소리를 듣고 바로 뒤에서 무엇인가 터져나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나현주에게 달려들다가 정권을 맞고 비틀대는 놈도 대가리가 터져 나갔다.
일행이 약 5m 앞에 왔을 때 장동건은 전철역의 유리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로 뒤를 이어 모두가 뛰어들자 장동건이 잡고 있던 문을 닫고 손잡이에 총을 끼워 넣었다.
“빨리 문에 낄 것 찾아와요. 어서.”
넷은 숨돌릴 틈도 없이 역무원 사무실에서 마대 걸레 두 개를 찾아왔다.
걸레 자루를 문손잡이에 끼워 넣고 총을 빼낸 후 문에서 물러난 그들 앞에는 문으로 몸을 부딪쳐 오는 약 50여 마리의 놈들의 보였다.
휘청이는 유리문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전부 세 방향으로 출입구가 있다. 나머지 두 군데는 막기에 이미 늦었다. 놈들이 코너만 돌면 저쪽 출입구로 올 수 있었다.
“계단으로!”
이진성의 외침에 개찰구로 달렸다. 막 모두가 개찰구를 넘는 순간이었다.
와장창~
크아아아~ 콰르르르르~
뒤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와 놈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씨발. 우리는 니네들 먹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지랄이야.”
이진성이 소리쳤지만, 그런다고 돌아갈 놈들이 아니었다.
달리면서 탄창을 갈아낀 장동건이 세 계단씩 뛰어올라 위치를 잡고 쏘기 시작했다.
네 명이 한 걸음 달리는데 둘 셋씩 죽어 나갔다. 막 계단을 다 오르자 30발 탄창 하나가 비었다. 잡은 놈들은 스물넷.
일행은 플랫폼의 끝으로 달렸고 장동건은 다시 달리면서 탄창을 갈았다.
플랫폼의 끝에서 선로로 뛰어내린 다섯은 약 서른 마리의 좀비 꼬리를 달고 달렸다.
모두의 숨이 턱 밑까지 찼다. 이진성과 김현희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고잔역은 아직 저 앞에 있었다.
슬슬 이진성의 다리에 힘이 빠지려는 찰나, 장동건이 돌아서더니 뒤의 놈들을 쏘기 시작했다.
분명히 단발로 쏘는데 마치 연사로 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한 발에 한 놈씩.
막 장동건을 지나치자 장동건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헉. 고마워.”
“헉. 헉. 말하지 말아요. 힘 빠져요.”
“몇 마리?”
“스물?”
고잔역 플랫폼이 보였다. 여기서 해결해야 했다. 고잔역에서 플랫폼에 뛰어오르다 속도가 떨어지면 놈들에게 잡힐 수가 있다.
“관장님. 스물.”
관장은 이진성의 소리를 듣고 바로 알아들었다.
멈춰서서 검을 들고 놈들을 기다렸고, 나현주도 몸을 돌려 섰다.
나머지 셋이 그들 사이를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의 선두와 두 사람은 격돌했다.
이진성과 김현희가 숨을 돌리는 동안 장동건도 사격을 개시했다.
관장과 나현주가 다섯을 잡으며 놈들을 막아선 동안, 뒤에서 장동건이 나머지 모두를 잡아 버렸다.
“헉. 헉. 소리 듣고 또 어디서 몰려올지 몰라요. 일단 고잔역을 나가야 해요.”
다섯은 다시 달렸다.
다행히 고잔역에서 나현주의 집까지 약 600m 동안에는 어떤 인간도 좀비도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는 조용했다. 단지 전체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흘렀지만, 그녀의 집까지 올라가는 동안 좀비의 위협은 없었다.
삐삐삐삐… 띠리릭
문을 열고 들어간 집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나현주는 뛰어다니며 방들을 확인했다. 모든 방을 확인한 그녀는 거실로 나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시체도 없고 핏자국도 없어요. 최소한 집에서 좀비가 되거나, 죽진 않았네요. 내일 날 밝으면 뭔가 단서가 나오겠죠. 일단 잠부터 자요.”
그리고 나현주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은 저렇게 둬도 되나 싶었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