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인간성?
“여보. 오랜만에 이렇게 안아보는군!”
“손 안 치워? 버리고 간다.”
이택진과 김현희가 한 오토바이에 끼어 앉은 채, 여섯은 개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42번 국도로 수원 방향으로 가다가 과천의왕고속도로를 타고 쭉 가서 북오산IC에서 빠져 동탄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길로 피난 갈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이용 차량이 별로 없을 거라는 이택진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일행은 점심까지 챙겨 먹고 느지막이 출발했다.
다시 개천 길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가 도착한 8차선 도로는 엉망이었다.
나현주 집으로 가던 그 밤, 그들을 공격했던 폭주족의 오토바이는 그대로 길에 자빠져 있었지만 그들의 시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중앙역으로 이어지는 좀비들의 시체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보지 못한 부서진 차들과 핏자국이 도로 곳곳에 널려 있었다.
관장이 반경 50m 이내 길에는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도로로 진입해 동쪽으로 향했다.
몇백 미터 앞의 42번 국도와 만나는 지점에는 역시 차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차들을 타넘어 앞으로 나가자 총알구멍이 숭숭뚫린 차들과 핏자국, 몸통을 잃고 떨어져 나가 썩어가고 있는 팔과 다리들이 사방에 보였다.
약 20m 앞으로 가자 제일 선두의 자동차들 앞에 와이어로 서로 묶인 바리케이드가 나왔다.
“와. 여기 애들은 작정하고 막았네. 여긴 탈영 안했나?”
장동건이 둘러보며 석수역에서의 자신들과는 너무나 다른 현장에 혀를 내둘렀다.
“차로 밀어야겠어요. 와이어를 끊을 장비도 없고.”
이진성이 바리케이드에 처박힌 한 대의 차를 보니, 운전석에는 하체만 남은 시체가 앉아있고 조수석과 뒷자리에는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가 안전띠에 묶여 있었다.
“이건 좀 심했는데…….”
“군인들도 패닉상태였나 보오. 어쩌면 차 안의 저들 중 하나가 좀비였을 지도 모르고.”
“그래도…….”
이택진이 부여잡고 토하고 있는 가로수 옆의 승합차는 다행히 운전석 문이 열린 채 시체도 없었다.
기어는 P에 있고 키는 꽂혀 있었다. 시동을 걸어보니 시동도 걸렸다.
총알 자국도 없는 것으로 봐서 군인들이 발포하기 이전에 이미 내린 것 같았다.
이진성이 바리케이드를 밀어 버리고 저 앞으로 차를 빼자 사람들도 하나씩 차를 빼기 시작했다.
시동이 안 걸리는 차는 중립으로 놓고 뒤차로 밀어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힘으로 밀었다.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고 오토바이로 돌아온 일행에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택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차로 이동하면 안됩니까? 앞으로 가는 길은 별로 막히지도 않을거고, 막히면 지금처럼 뚫으면 되지 않습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모두가 서로를 둘러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성이 가장 먼저 빼놓은 승합차로 달려가 기름을 확인했다.
“거의 가득 차 있어요. 이걸로 가요. 짐들 다 가져오세요.”
일행은 다섯대의 오토바이를 몰고 승합차까지 와서 배달통 안에 챙겨 놓았던 옷과 식량, 이진성의 잡동사니들을 차로 옮겼다.
“저기. 관장님은 오토바이로 이동하시면 어때요? 그건 버리기에 아깝기도 하고 혹시 오토바이로 정찰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고…….”
관장의 BMU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묻는 이진성에게 관장은 별 고민 없이 동의했다.
“운전은 제가 할게요. 앗싸. 드라이브 가는 기분이네.”
신나서 운전석에 앉은 장동건을 보고 모두는 피식하고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그들은 마침내 안산을 완전히 벗어났다.
“여긴 정말로 다이나믹하고 판타스틱한 곳이었어요. 제발 동탄은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장동건이 나직이 뱉은 혼잣말은 모두의 마음과 같았다.
* * *
봄의 풍광은 좋았다. 비록 군데군데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간혹 부서진 차량과 핏자국 또는 시체가 보이더라도 평화롭게 보였다.
어쩌다 배회하던 좀비를 장동건이 받아버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진성은 생각했다.
4월 5일에 대방동을 떠나서 겨우 1주일 동안 나현주와 김현희를 만나고 또 장동건을 만나고 이택진을 만났다.
그 1주일 동안 참 많이도 죽이고 두 번의 몸살을 했고 이제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정도까지 변한 자신의 모습이 신기했다.
“아저씨. 어머니 못 찾아서 괜찮아요? 너무 상심 마요. 어딘가 잘 계실거예요.”
조심스럽게 위로하는 나현주였다.
“괜찮아요. 처음부터 큰 기대는 없었어요. 만약 좀비가 되었다면 제 손으로 보내 드릴 생각도 했었는데요. 그런 일이 안 생긴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둘이 속닥속닥 거리는 것을 뒷자리에 보고 있던 이택진이 김현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둘이 사겨?”
“몰라. 왜? 안 사귀면 니가 어떻게 해 볼려구? 아직도 젊은 여자만 보면 눈이 뒤집히냐?”
“뭔 소리야?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그래? 그때 어쩌다 실수 한 번 한거가지고 이혼까지 하고. 난 정말 억울해.”
“억울? 억울이 다 나가 죽었다. 니가 왜 억울해?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룸미러로 본 장동건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거 사랑싸움은 둘이 있을때 하세요. 운전 방해 돼요.”
“사랑싸움은 뭔 사랑싸움. 너도 맞을래?”
그때 그들은 이미 과천의왕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뻥 뚫린 길을 느긋하게 달리고 있었다.
“정말로 차들이 없네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서울에서 이 길을 탄 사람들은 이미 경부나 서해안, 영동고속도로 다 빠져나가고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거든요. 이 구간은 봉담이 개발되고 나서야 통행량이 많아질 텐데 아직 봉담은 시골이라…….”
“이 양반이 몇십 년을 전국에 안돌아 다닌 곳이 없잖아. 길은 내비게이션보다 더 잘 알아. 길 찾는 거 하나는 내 인정하지.”
“길 찾는 거만? 왜 이래? 내가 정력도…….”
퍽 소리와 함께 이택진은 입을 닫고 눈을 문질러야 했다.
“이 씨. 멍만 들었단 봐.”
“왜? 멍들면 어쩔건데.”
“아니. 어쩐단건 아니고.”
간만의 평화로운 여유였다.
사람들이 별것 아닌것으로 투덕거리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인지 이진성은 몇 년 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나무들은 세상과 상관없이 연두색의 새 잎사귀를 달고있다.
비록 잡초였지만 논밭에는 녹색의 풀들이 무성했다.
그런 경치를 즐기는 사이 어느덧 차는 벌써 평택화성고속도로에 접어들었고 동탄은 머지않았다.
저 멀리 아파트들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에 갑자기 차가 속도를 줄이고 멈춰섰다.
어느새 차를 추월한 관장이 오토바이를 세우고 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가야 할 것 같소. 지금이 5시 좀 안됐는데 오늘 동탄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근처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에 들어갈지.”
“현주씨. 아파트 이름이 동남우남이라고했죠? 저쪽 경부고속도로 동쪽에 있는 거 같은데.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관장님. 거기는 큰 주택단지 지나서 길따라 신도시를 빙 둘러가야 합니다. 일단 정찰을 하고 가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쪽 북쪽으로 전원주택 단지가 있어요. 그쪽에 자리잡고 밤에 정찰 가는게 어떨까요?”
이택진의 안내를 따라 간 동네는 크고 작은 전원주택들이 잔뜩 있었다.
최신 디자인의 집들은 모두 멋진 정원이 있었고 옥상에는 태양광발전기가 달려 있었다.
집집마다 주차장이 있었지만 보이는 차는 거의 없었다.
어떤 집에서는 좀비 냄새가 나고 어떤 집은 시체썩는 냄새만 풍기고 있었지만, 대부분 집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많은 집이 이미 털렸는지 유리가 깨져 있었다.
“형님. 빈집 아무데나 들어가요. 여긴 전기 쓸 수 있을까요? 태양광발전기 달린거 보면 될것도 같은데?”
“그럼 좋겠다. 그리고 물도 나오면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을 텐데…….”
주위에 사람의 기가 느껴지지 않는 한 집을 골라 깨진 거실창으로 안으로 들어간 일행의 눈에는 아깝게도 난장판이 된 거실이 들어왔다.
관장과 나현주, 장동건과 이진성이 집안을 수색했고 김현희와 이택진은 거실에서 대기했다.
“2층에도 아무도 없어요. 핏자국도 없는거로 봐서 난리나자마자 어디론가 갔나 봐요.”
“1층과 뒷마당도 깨끗하오. 주위의 다른 집에서 사람 기운도 안느껴지오. 여기서 지냅시다.”
그때 부엌으로 간 장동건이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와. 냉장고 살아있어요. 근데 음식은 물밖에 없네요. 씨불.”
“어딘가 뭐 좀 남아있지 않을까? 잘 찾아봐.”
장동건에게 주방을 찾아보라고 하고 나현주는 욕실로 향했다.
혹시나 안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물은 잘 나왔다.
온수로 돌리니까 약간의 시간이 지나 뜨거운물도 나왔다
“아. 좋아라.”
방긋방긋 웃으며 욕실에서 나오는 나현주를 보고 모두는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
* * *
세 개의 욕실에서 돌아가면서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사람들은 김현희가 전투식량으로 끓이고 볶아 만든 정체 모를 음식과 장동건이 지하실에서 찾아온 와인으로 피로를 풀며 수다를 떨었다.
좁디좁은 고시원에서 혼자서 몇 년을 산 이진성이었다.
앞으로 매일매일이 오늘 같기만 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미소와 함께 수다 중이었는데, 관장이 긴장한 목소리로 모두의 말을 끊었다.
“서쪽에서 사람들이 오고 있소. 7명이오. 약 50m 거리요. 혹시 모르니까 동건씨는 마당 저쪽에 숨어서 이쪽을 견제해 주시오. 이택진씨는 이층으로 올라가 방안에 계시고, 우리는 준비 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총을 들고있다면 상황봐서 제압해 주고.”
장동건은 총과 탄창을 챙겨 마당 한쪽 구석에 숨어 거실 쪽을 겨냥했다.
거실에는 관장만 남은 채 나머지는 안 보이는 위치로 몸을 숨겼다.
사람들 소리는 금방 들렸다. 마당 입구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던 그들이 안쪽으로 외쳤다.
“거기 누구요? 이 동네 더 털 집도 없소. 도둑이면 조용히 가 주시오. 여긴 우리 노인들 밖에 안 남았소.”
야구방망이를 들고 제일 앞에서 나타난 사람은 60대의 온화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 뒤로 줄줄이 들어온 할머니, 할아버지는 식칼, 야구방망이, 쇠꼬챙이 등을 들고있었다.
장동건은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이 안보이자 그냥 지켜 보기만했다.
“저희 강도 아니오. 내일이면 가족을 찾아 저쪽 신도시로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피해 끼치지 않을테니까 걱정 않아도 되오.”
관장이 조용히 두 손을 들고 적의가 없음을 표시하자 남자는 거실안을 둘러보고 물었다.
“나머지는 어디 있어요? 분명히 차와 오토바이가 오는 것을 봤는데.”
“여러분들이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 다른 사람을 꼭 볼 이유가 있소? 조용히 돌아가시면 끝나는 일이오.”
“그 말을 어떻게 믿고 돌아가요? 전부 몇 명인데?
“네 명이오. 남자 둘 여자 둘이오.”
일부러 네 명이라고 말하는 관장의 말에 장동건과 이택진은 계속 숨어있고, 나현주와 김현희 이진성이 거실로 나왔다.
“가족이오?”
“네. 가족이에요. 내일 저희 이모집으로 갈거니까 안심하세요. 저희 위험한 사람들 아니예요.”
나현주가 나서며 말하자, 노인들은 그제야 안심했는지 들고있던 무기들을 내려놓으며 거실 쪽으로 다가왔다.
“그래 보이오만 지금 세상이 이러니 이해해줘요. 우리 늙은이들이 무서워서 그래요.”
“네. 이해해요. 걱정마세요.”
한 할머니가 불쑥 들어오더니 일행이 먹던 음식을 보고는 안됐다는 듯 돌아보며 말했다.
“에구. 먹는 게 저게 뭐야. 그동안 저런 것만 먹고 살았어요?”
“저건 잘 먹는 편인데…….”
“아니 저게 잘 먹는 편이라니? 여기 있어 봐요. 내가 집에 가서 음식 좀 가져다줄게.”
“괜찮은데…….”
나현주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다른 둘과 함께 돌아갔다.
남은 네 명의 노인이 안으로 불쑥 들어와 소파에 앉아 나현주와 김현희에게 말을 시켰다.
이진성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조용히 관장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나현주와 김현희가 거실에 남아있자 노인들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관장님. 저 노인들 이상해요.”
“뭐가 말이오?”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의 고소한 냄새가 나는데, 거기에 좀비들의 시큼한 냄새가 섞여 있어요.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오?”
“저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이상해요. 몽둥이 들고 왔다가 처음 보는 우리한테 음식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한데… 일단 돌려보내 봅시다.”
다시 거실로 나간 두 사람이 노인들의 어디서 왔냐는 둥 이런저런 질문에 어쩔 수 없이 응대하기를 잠시, 아까 그 할머니가 음식 통을 가지고 왔다.
“이거 불고기야. 데워서 먹어요. 이런 세상에 먹는 거라도 잘 먹어야지. 원장님. 우리는 갑시다. 사람들 불편하잖아요. 편하게 먹게 갑시다.”
“그럴까요? 그럼 맛있게 먹고들 가요. 또 보진 맙시다.”
그러면서 순순히 자리를 털고 나가는 그들이 이진성은 더욱 수상했다.
침입자나 마찬가지인 자신들에게 음식을 주고 편하게 먹으라고 자릴 피해주는 것이 꼭 그 음식을 먹으라는 뜻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후 관장은 그들의 기를 계속 주시했다.
집에서 나간 그들은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자 왔던 길로 넷만 가고, 셋은 옆집으로 들어가 움직이지 않았다.
“셋이 안 가고 있군요. 뭔가 꿍꿍이가 있나 본데…….”
그들의 의도가 뭘까 다섯이 의아해하며 이런저런 추측을 하던 그때 2층에 있던 이택진이 우당탕 뛰어 내려오며 외쳤다.
“그거 먹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