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대위 이재규
“당소 7초소. 상황보고…….”
괴물 같은 마지막 좀비가 처리되고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무전기를 들고 상황보고 하려는 참이었다.
들려오는 차 소리에 돌아보니 소방서 쪽에서 군토나 한 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충성.”
군토나에서 내린 대위는 사병들의 경례는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후아! 이게 저 몇 사람이 한 거란 말이지?”
대위는 사거리 주위를 걸어 다니면서 자신의 눈으로 부서진 시체들을 확인한 후 사병들 쪽을 돌아봤다.
“거기 둘만 따라 오도록.”
이진성 일행에게 향하는 대위에게 급하게 김 병장과 사투리 상병이 따라붙었다.
“저 사람들 싸우는 것 다 봤나?”
“그렇습니다.”
“나중에 본부로 같이 가지. 보고서 작성해야겠어. 그런데 자네는 7초소 근무병이 아닌 것 같은데?”
“아. 저희는 2중대입니다. 어젯밤에 휘발유 추진 나왔다가 고립된 후 쭉 저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젯밤에? 그럼 그것도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일만 늘렸다고 후회하는 김 병장이다.
그런 김 병장에게 눈치를 주는 사투리 상병은 어느덧 대위와 함께 이진성 일행의 약 10m 앞으로 다가갔다.
대위는 자리에 멈춰서서 한 사람 한 사람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그런 대위의 행동을 쳐다보는 이진성 일행은 또 무슨 일이 생기려나 긴장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긴장 안 하셔도 됩니다. 전 이재규라고 합니다.”
대위에게서 특별한 적의는 느껴지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 손을 권총집 옆에 대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대위의 냄새는 달큰했다.
냄새를 맡은 이진성이 관장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느 정도예요?”
“진성씨 정도 크기요. 현주씨 쪽 느낌이고. 격투기 계열 같소.”
앉아있던 나현주가 일어나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진성도 고통을 참으며 서서히 도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대위가 다시 부드럽게 말을 걸어왔다.
“여러분들의 활약을 저 뒤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인사하러 온 겁니다. 긴장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우리보고 긴장할 것 없다면서 정작 대위 손은 권총 옆에 있구려.”
관장의 말에 대위는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모두의 활약을 보고 있었다는 대위의 말에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그건 따라온 두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보고 있었다는 것은 가까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끝나도록 지원도 안 하고 보고만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 보고 있었다고요? 사람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데 보고만 있었다고요? 지원할 생각이 안 들던가요?”
결국 따지고 나서는 이진성에게 대위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그게 말입니다. 저희가 병력이 충분했다면 지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가 왔을 때 이미 이쪽 사거리는 놈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병력이 협공하는 것보다는 제2 방어선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고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상부의 명령에…….”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럼 우리는 죽어도 된다는 거잖아요. 그래 다 좋아. 민간인 나부랭이는 죽어 나가도 상관없겠지. 그럼 저 병사들은? 병사들도 죽어 나가도 상관 안 해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안 그러면 희생이 더 커질 것 같아서…….”
“씨발. 잘났다.”
장동건의 혼잣말이었지만 모두는 들을 수 있었다.
대위도 이진성도 말을 멈췄다.
이미 지난 일을 따져봐야 소용도 없었고 또 자신들과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한테는 무슨 일로?”
“공을 세우신 분들께 포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시러 왔습니다.”
“포상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저희는 여기 이분 이모님 댁에 가서 가족들 생사만 확인하면 됩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다음에는…….”
이진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다음은 생각한 게 없었다.
나현주를 돌아봤지만 나현주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가족분들을 찾으시면 여기서 사셔도 되지 않습니까? 저희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집과 음식을 제공하겠습니다.”
“조건이 있을 것 같소만?”
가슴을 부여잡고 말하는 관장을 돌아본 대위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조건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다른 분들과 함께 도시방어에 힘써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결국 일행의 무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하긴 일당백의 무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섯이나 있는데 당연한 요청이었다.
그냥 보내는 사람이 바보였다.
일행은 서로를 둘러 봤지만 당장 누가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그건 상의해 봐야겠소. 그건 그렇고, 그쪽도 이미 몸살을 겪은 것 같소만?”
관장의 말에 대위는 갑자기 표정이 굳었다.
뒤의 병사들을 잠깐 돌아본 대위는 조용히 관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말씀이신지?”
“신체의 변화 말이오.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 않소?”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는 방법이 있소만 지금 할말은 아닌 것 같소.”
“좋습니다. 그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하시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절대로.”
“알겠소. 그럽시다. 대신 기회가 되면 가진 능력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겠소?”
“그러겠습니다.”
왜 숨기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관장이 다른 군인들에게 일부러 말할 이유도 없었다.
관장의 약속을 받은 대위는 다시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저희가 제공하는 집으로 가서 좀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좀 씻기도 하셔야 하고요.”
“물이 나오나요?”
“저희 장교 숙소를 제공할 겁니다. 거기는 아파트신축 현장에서 지하수를 끌어서 쓰고 있습니다. 발전기도 돌리고 있어서 전기도 쓰실 수 있습니다.”
“저희 머무르는 곳 있어요. 저희는 거기가 편할 것 같네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어요.”
얘기를 듣던 사투리 상병이 나현주에게 귀띔했다.
“저, 장교 숙소라면 누님 가시려는 곳과 멀지 않습니더. 엎어지믄 코달데라예. 그라고 갔다 오시다 또 싸우게 되믄 또 옷 버리실긴데.”
상병의 말대로라면 그리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행이 한곳에 모여 상의하길 잠시, 일단은 대위가 제공한다는 아파트로 향하기로 했다.
“좋아요. 그럼 일단 그곳에서 씻고 저희 이모 댁으로 가겠어요. 거기서 가족의 생사만 확인하고 거취는 그때 결정할 거에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저쪽으로 가시죠. 차량으로 이동하겠습니다.”
* * *
대위와 함께 도착한 장교 숙소라는 곳은 경부고속도로 우측에 위치했다.
서쪽으로는 아직 개발 전인 초지를 끼고 있고 남쪽으로 한 개 블록만 지나면 골프장이 있는 산이었다.
북쪽과 동쪽으로도 아파트 신축 현장이어서 좀비들의 공격에서 비교적 안전한 위치였다.
일행은 그곳의 방 다섯 개짜리 집 한 채를 받았다.
“와! 안전한 곳은 장교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 보소.”
장동건이 툴툴거렸지만 너무나 일반적인 일이라 모두는 별다른 감상이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별말 없는 일행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신난 두 사람이 끼어 있었다.
병장과 사투리 상병이 사람들의 시중을 들라고 남겨졌다.
시중을 든다고 하지만 감시역으로 남겨진 것이다.
하지만 그 명령을 실행할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은 좋은 숙소가 생긴 것이 마냥 좋기만 했다.
“선배님. 말해 뭐합니까? 이렇게 된 세상에 이만한 숙소 생긴 것 감사하게 생각하십쇼.”
“맞심더. 장교들 그라닌거 어제오늘 일도 아이고, 고마 신경 끄시소.”
“이렇게 같이 지내게 됐으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김인식입니다. 저 녀석은 박대성이고요.”
“어 그래요. 난 장동건이고…….”
장동건이 모두의 이름을 알려주고 각자 머무를 방을 정하고 나자, 박대성이 보고를 위해 본부에 갔다 오겠다고 일어섰다.
“야. 너무 자세히 다 말할 필요 없다. 적당히 적당히 알지?”
씩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손을 흔들고 나가는 박대성의 모습을 보며 김인식이 일행을 돌아봤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놈이 저래도 눈치 하나는 끝내줍니다. 여러분께 곤란한 일 안 생기게 잘할 겁니다.”
“곤란한 일 생길 게 있소?”
“아뇨. 뭐가 딱히 있다기보다는, 그 왜 있잖습니까? 군대라는 게 아무래도 민간인들한테는 좀 그런 거.”
박대성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기로 한 일행이 집을 뒤져 봤다.
원래 살던 사람이 남기고 간 옷 몇 벌이 나왔지만 입을만한 건 없었다.
“갈아입을 만한 옷이 없네요. 전원주택 가서 모아 놓은 거 가져와야 할까 봐요.”
나현주의 말에 김인식이 벌떡 일어나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 나갔다.
나간 지 30분쯤 지났을까, 김인식이 여행용 가방 하나 가득 옷을 담아 끌고 왔다.
“사이즈는 대충 담아 왔습니다. 맞는 것만 골라 입으십시오.”
가방 안에는 남녀 속옷부터 바지, 티셔츠, 셔츠, 블라우스, 치마에 원피스 같은 것들도 있었다.
“이것들 다 어디서 난 거예요?”
“여기 장교들이 이 아파트단지 전체에서 모아놓은 옷 중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여기 수색할 때 저희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것들 어디 있는지 압니다. 필요하시면 더 가져오겠습니다.”
분명 옷만 모아 놓은 것은 아닐 테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이런 식이면 지내기 나쁘지 않은데요? 현주씨 부모님 찾으면 여기서 같이 지내도 되겠어요. 집 하나 더 달라고 하죠. 뭐.”
이진성의 말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각자 입을 옷을 골라 씻으러 들어갔다.
관장은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끙끙거리며 겨우겨우 씻었다.
오른팔이 부러진 김현희는 이택진의 강권에 결국 같이 씻기로 하고 욕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던 남은 사람 모두가 이택진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줬다.
이택진은 뒤돌아 웃으며 V자로 화답했다.
그리고 조금 뒤 욕실에서 들려온 소리는 들어갈 때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까불면 죽는다.”
“아우. 안 할게. 때리지마.”
* * *
씻고 나온 나현주는 김인식이 운전하는 승용차로 이모 집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아파트 신축 현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이었다.
두 단지의 거리는 채 300m도 안 됐다.
순식간에 도착한 아파트의 거의 모든 집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장교 숙소와 비교되는 모습을 올려보는 나현주의 마음은 착잡했다.
“촛불이나 랜턴입니다. 이곳은 전기가 공급 안 됩니다. 원래 주민들하고 빈집을 배정받은 피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나현주는 설레는 마음으로 김인식과 함께 계단을 걸어 올랐다.
제발 부모님과 이모가 무사히 있기를 바랐다. 계단을 오를수록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도착한 이모 집의 현관문을 바라본 나현주는 기분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도어클로저와 도어락은 이미 제거되어 있으나 마나 한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으로는 낯선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부모님은커녕 이모네 식구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 보이는 사람들은 피로에 절어있고 행색은 꾀죄죄했다.
씻지 못해서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집안에 절어 있었다.
집에 있는 네 개의 방에 방마다 한 가족씩 네 가족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들어오는 군인 한 명과 깨끗하게 원피스를 입은 한 아가씨를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한 엄마를 아이를 잡아 뒤로 숨겼고, 한 젊은 여자는 후다닥 구석으로 달려가 쪼그려 앉았다.
“여기 원래 사시던 분들은 어디 갔는지 아시는 분 있나요?”
나현주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오셨을 때 혹시 메모나 그런 거 발견하신 것 없어요?”
역시 모두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잠시 방들 들여다볼게요.”
나현주는 사람들의 허락을 구할 생각도 없었다.
그대로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선 방 안에서 나현주가 본 것은 발 디딜 틈 없이 널려있는 물건들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는 바싹 마른 사람들이었다.
그 상태의 방에서 어떤 흔적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실망한 나현주는 방을 나와 현관을 나섰다.
김인식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