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나현주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창밖의 깜깜한 세상을 내다보며 아까 그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했다.
물자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싶었다.
하지만 얼굴에서 보이는 공포감은 이해가 안 됐다.
“저 사람들 말이죠. 우리를 많이 경계하던데 왜 그런지 아는 거 있어요?”
나현주의 질문에 김인식은 주저주저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말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군인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될 겁니다. 여기 들어올 때 가진 것들을 거의 다 빼앗겼을 겁니다. 나중에 새로운 사람이 저 집을 차지하고 자신들은 쫓겨나갈 수도 있고요. 간혹 젊고 이쁜 여자는…….”
뒷말은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혹시 말이죠. 군인들이 원래 주민을 쫓아내거나 한 적도 있나요?”
“이모님 말씀이시라면, 저쪽 단지는 제가 알기로는 그런 적 없었습니다. 저기는 저희가 갔을 때 빈집이 이미 많았습니다.”
차는 금세 장교 숙소에 도착했고 대화는 끊겼다.
계단을 오르려던 나현주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김인식을 돌아봤다.
“저기, 부탁이 하나 있는데…….”
“헉. 부탁이라뇨. 말씀만 하십쇼. 목숨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니고…….”
차려자세로 말하는 김인식을 보고 나현주는 씁쓸하게 웃어야 했다.
“내가 그렇게 무서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온몸으로 무섭다고 웅변하는 김인식이었다.
“딴 게 아니고, 아까 거기 9초소 앞에 우리 차, 그거 좀 가져다줬으면 하는데요.”
“예? 차라면 여기도 많은데요?”
“거기 우리 짐이 좀 있어요. 남은 식량도 좀 있고, 장비랑 관장님 검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당장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급한 건 아니고 내일 날 밝으면 가도 돼요.”
* * *
집으로 돌아온 나현주는 갔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모두의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다.
침묵 속에서 모두가 어쩔줄 몰라 하는데 김현희가 이진성을 부엌으로 잡아끌었다.
“뭐 하는 거야? 이럴 때 위로라도 해 주고 그래야 할 거 아냐?”
“에? 제가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위로라면 같은 여자인 누님이 해 주시는 게 좋죠.”
“아이고. 이 답답한 양반아. 동병상련 몰라?”
“동병상련?”
“같은 처지잖아. 같은 처지. 진성 총각도 어머니 생사를 몰라. 현주도 부모님, 이모님 생사 몰라. 통하는 게 있는 사람끼리 위로를 해야 위로가 되는 거야. 그리고 남자가 왜 이렇게 답답해?”
“아니, 거기 남자 여자는 또 왜 나와요?”
“어이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눈치만 좋으면 절에서도 고기 얻어먹는다는데, 진성 총각은 어디 가서 굶어 죽기 딱 좋다. 어서 가서 산책이라도 가자고 해.”
김현희가 나현주의 방 앞으로 이진성을 질질 끌고 가서 방문을 두드리고는 도망쳐 버렸다.
“네?”
“어… 저기… 전데요. 잠깐 나와 볼래요?”
잠시의 침묵 뒤에 문이 열렸다.
문 옆에 선 나현주의 눈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다.
“저기… 딴 게 아니고요. 우리 잠깐 산책하러 나가요. 하늘에 별도 많고 바람도 시원하고 달도 화창하고…….”
달이 화장한 건 또 뭐냐며 이진성이 속으로 자신을 꾸짖는데 나현주가 방을 나서 현관으로 향했다.
“그래요.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네요. 산책하러 가요.”
김인식이 벌떡 일어났다.
“술! 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총알처럼 달려나간 김인식이 10분도 안 돼서 들고 온 비닐봉지에는 시원한 캔맥주 6개 한 팩이 들어있었다.
“쟤는 병장이 장교 물건을 잘도 가져온다?”
신기해하는 김현희의 말을 뒤로하고 이진성과 나현주는 맥주 봉지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 * *
“어디로 가야……?”
사방을 둘러보는 이진성의 손을 나현주가 잡아끌었다.
“좀 전에 보니까 저쪽에 공원 있더라고요. 거기로 가요.”
나현주의 뒤를 따라가는 이진성은 어색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단둘이 어딘가를 간 적도, 따로 개인적인 얘기를 한 적도 없었다.
미적미적 맥주 봉지를 들고 한마디 말도 없이 앞에 가는 나현주의 등만 쳐다보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원피스가 잘 어울리네. 이쁘다.’
공원은 굉장히 넓었다.
공원 한곳에는 호수인지 연못인지 모를 것었지만 물은 다 말라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원형의 콘크리트 스탠드가 둘러 있는 게 보였다.
“저기로 가요. 저기 스탠드 위에 앉으면 되겠네요.”
역시나 앞장서는 나현주는 이미 허리 높이로 자란 잡초를 뚫고 앞으로 나갔다.
쥐인지 길고양이인지 인기척에 도망가는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주위에서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아 이진성은 안심하고 뒤를 따랐다.
스탠드에 오른 두 사람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빛이 비치는 공원을 바라보았다.
인공적인 불빛 하나 없이 오로지 달빛만으로도 보이는 세상은 이진성에게 너무도 멋지게 보였다.
지금 분위기에 취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지, 아니면 남들에게도 이렇게 보이는 것인지 알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 맥주를 꺼냈다.
“이거 마셔요.”
이진성이 두 모금 마시는 동안 나현주는 한 캔을 원샷하고는 빈캔을 우그러트렸다.
“어? 저기… 너무 급하게 마시지는 말고… 이모님이랑 부모님은 어디 잘 계실 거예요. 너무 상심 마요.”
주절주절 자기를 위로한다 떠들어 대는 이진성을 한참 바라보던 나현주가 물었다.
“아저씨는 어머니 걱정 안 해요?”
“뭐…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요. 안산 스타디움에서 노인네가 살아남기는 힘들지 않았겠어요?”
두 번째 맥주를 반쯤 마신 나현주가 앞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재미있는 분이셨는데…….”
“누가요? 아버님? 어머님? 이모님?”
나현주가 가만히 이진성을 들여다봤다.
“아뇨. 아저씨 어머님.”
“아! 그 메모? 우리 엄마가 좀 터프하고 웃기기는 해요.”
나현주는 그런 이진성을 보며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또 하나를 뜯었다.
세 번째 맥주를 반쯤 먹었을 때였다.
“아저씨는 도대체 언제 기억할 거예요?”
“에? 뭘요?”
“저요.”
“저라뇨? 제가 현주씨 뭘 기억해요?”
어리둥절한 이진성을 보며 나현주가 얼굴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하더니 남은 맥주를 비우고 빈캔을 앞으로 던졌다.
“내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었나?”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나현주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이진성에게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저 중3 때였는데, 아저씨가 저 과외 했던 거 기억 전혀 안 나요?”
“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때 아저씨 대학 4학년 때 1주일에 두 번씩 저랑 제 친구들이랑 네 명 과외 했었는데?”
이진성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대학 내내 과외를 하긴 했다.
나름 K대를 다녔기에 안산에 살며 과외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15년이 지나가는 일이다.
그때 봤던 수많은 중학생 중 하나가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어버버 거리고 있는 이진성을 돌아보며 맥주캔을 기울이던 나현주가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발렌타인 때 초콜릿도 만들어 줬는데… 손편지도 쓰고…….”
생각났다.
여드름투성이의 여학생이 있었다. 그다지 이쁘지도 않았다.
공부는 곧잘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손편지를 준 학생은 그 학생이 유일했다.
“어? 그때 그? 어떻게 이렇게? 그땐…….”
“왜요? 못생겼었다고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
“의늬님의 손 빌린 거 아닌가 의심이라도 해요? 하나도 손 안 댔거든요? 라식하고 쌍꺼풀하고 코 조금 높인 거 말고는?”
그게 왜 하나도 손 안 댄 것인지 이해가 안 갔지만 지금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언제… 언제부터 알았어… 요?”
“처음에 아저씨가 안산 간다고 했을 때는 긴가민가했어요. 그리고 아저씨 집에 갔을 때 확실해졌네요.”
“왜 진작 말을 안 했어… 요?”
“언제 기억하나 두고 봤지 뭐. 기억 못 하면 나만 알고 있으려고 하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은 좀 많이 섭섭하네요. 어떻게 그렇게 기억을 못 하지?”
이진성은 괜히 미안했다.
사실 미안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입만 벌리고 있자 나현주가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이제 알았으면 됐지 뭐. 안 그래요? 선생님? 크크.”
좋아서 웃는 것인지 그냥 웃는 것인지 알수는 없었다.
하지만 웃는 나현주를 보며 안심하는 이진성이었다.
“그러고 나 아저씨 어머니 누군지 알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놀라는 이진성에게 나현주는 천천히 설명했다.
나현주의 부모님과 이진성의 어머니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이진성 어머니가 권사, 나현주 부모님이 집사로 서로 왕래가 잦았다고 했다.
애초에 그녀가 과외를 하게 된 것도 부모님이 서로 알아서였다.
이진성 어머니가 나현주 집에서 그녀를 몇 번 보기도 했단다.
이진성의 안산 집에서 어머니 사진을 보고 누군지 알아본 나현주는 그때 이진성이 누군지 확실해졌다고 했다.
“아. 그랬구나. 맞다. 그때 엄마 교회 사람 딸이었지. 맞아.”
“나 그때 아저씨 많이 좋아했는데. 크크크.”
중3 사춘기 여학생의 첫사랑 비슷한 것이었다.
물론 나현주에게도 잊혔던 사람이고 그 이후 남자 친구도 몇 명 만났다.
별 상관없는 과거였지만 이렇게 다시 마주한 과거가 신기한 두 사람이었다.
네 번째 맥주를 다 비운 나현주가 이진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저씨 눈 감아봐요. 나 그때 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 해 볼래.”
이진성은 심장이 뛰었다.
이 여자가 뭐 하려고 이러나 싶었다.
만일 자신이 상상하는 그거라면 입에서 냄새는 안 나는지 걱정이 되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얼굴 앞으로 나현주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현주의 코에서 나오는 숨도 느껴지고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입술에 뭔가 촉촉하고 부드러운 게 닿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입술이 분명했다.
이진성의 입술은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앞으로의 일이 막 자기 맘대로 그려지고 있었다.
‘손은 어떻게 움직일까? 여기 누우면 아프지 않을까?’
순식간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몸의 피가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안타깝게도 살짝 닿았던 나현주의 입술이 갑자기 떨어져 나갔다.
이진성의 머리는 스탠드 바닥으로 나현주의 손에 의해 눌렸다.
그와 함께 그의 핑크빛 상상은 산산이 조각나 날아갔다.
“쉿. 누가 와요.”
이진성은 자책해야 했다.
정신이 나가서 누가 가까이 오기까지 냄새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스탠드 뒤쪽 풀밭에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이. 조심해. 들키면 다 죽는 거야.”
“들키긴 왜 들켜? 언제 여기 이 시간에 사람 있는 거 봤어?”
“그래도 조심하자고. 먹고 살자고 이 짓 하다가 골로 가면 억울하잖아.”
“그렇긴 하지. 크크크.”
“그나저나 이년은 먹을 게 많겠어. 먹고 남을 것 같아.”
“상관없어. 여기 쥐들도 많고 들개도 많아. 그것들이 다 처리할 거야.”
“여기가 좋긴 좋아. 저기 스탠드 밑으로 들어가면 불피워도 안 보여. 남은 건 동물들이 처리해.”
“어여 가. 졸라 무거워.”
목소리는 남자 셋에 여자 둘이었다.
들려오는 내용은 분명히 식인에 관한 것이었다.
“햐. 여기저기 식인이 판치는구나. 저렇게까지 하고 살아야 하나?”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건가 봐요. 조용히 저 위로 올라가 봐요.”
둘은 소리 없이 스탠드 위로 기어올랐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바라본 스탠드 너머에는 축 늘어진 여자 시체와 장작을 들고 오는 다섯 명의 남녀가 보였다.
“저 때려죽일 것들이…….”
이진성은 분노했다.
비록 그 이유가 식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핑크빛 상상을 날려버린 것 때문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