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 에이지 백수 생존기-55화 (55/145)

# 55

“그냥 가요. 상대하면 기분만 망쳐요.”

겨우겨우 화을 억누른 이진성이었다.

좋았던 기분도 기분이지만 상심한 나현주를 데리고 쓸데없이 저들과 드잡이질하고 싶지 않아 나현주를 잡아끌었다.

나현주도 좀비가 아닌 사람들하고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둘은 살며시 스탠드를 내려와 허리 높이의 잡초를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꽈직~

이진성은 발에 밟혀 우그러진 맥주캔을 내려다봤다.

“아이. 왜 하필이면…….”

나현주가 던졌던 빈 캔 중 하나였다.

“뭐야? 무슨 소리 안 났어? 뭐 찌그러지는 소리 난 거 같은데.”

“김 선생님. 좀 가 봐요.”

“다 같이 가. 나 혼자 가서 뭘 어쩌라고?”

막 시체와 함께 스탠드 밑 창고에 들어가려던 사람들은 이진성이 밟은 캔 소리를 들었다.

시체와 장작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스탠드를 돌아 나온 그들의 손에는 식칼과 장작이 들려 있었다.

“하. 그냥 하던 거 하지. 그냥 가라. 그럼 우리도 그냥 갈 거니까.”

이진성과 나현주는 잡초 사이에 쪼그려 앉아 그들을 보고 있었다.

놈들은 몇 발 앞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고는 보이는 것이 없자 들었던 무기들을 내리고는 선 자리에서 잡담을 시작했다.

“휴! 사람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짐승이었나 보죠.”

“짐승이 저런 소리 안 내는데… 뭐 하여간.”

“그나저나 대령인지 나발인지 그놈도 사람 처먹는다는데 왜 우리는 숨어서 이래야 하는 거야? 씨발.”

“그 소문 들었어요? 나도 들었는데?”

“씨발놈이 반반한 여자는 다 건드린다면서? 아주 왕같이 군다며?”

“미선 씨는 좋겠어. 그런데 안 끌려가서.”

“뭐라는 거야? 이 아저씨가. 죽고 싶어?”

놈들은 한참 수다를 떨다 다시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나서 잘 좀 하라는 둥, 칼이 안 든다는 둥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서야 두 사람은 살며시 잡초를 뚫고 길을 나섰다.

“저것들은 먹을 게 없어 그런다 치고, 대령이라는 놈은 왜 그럴까요? 먹을 건 걱정 없을 놈이?”

“어쩌면 육식에 대한 욕구가 강할 때 인간 고기에 이미 맛을 들였는지도 몰라요. 저것들도 전원주택단지 그 노인들도 그럴 수도 있고요. 안산에서 봤던 그 사시미칼 말로는 인간 좀비들 고기가 아주 맛있었다고 했으니까.”

그놈을 생각하며 다시 몸을 부르르 떠는 나현주의 어깨를 이진성이 감싸줬다.

“어라? 누구 허락 맡고 어깨를 감싼데? 이제 막 용기가 생기나 보지?”

웃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나현주를 보며 이진성도 농을 쳤다.

“에이. 뭐 어깨 가지고. 이미 볼 거 다 본사인데.”

“뭘 볼 거 다 봐요?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해봐? 가만 안 둬요?”

막상 알몸을 봤을때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더니, 그때의 말은 꺼내지도 못하게 하는 나현주의 반응이 헷갈리기만 하는 이진성이었다.

나현주의 심리인지 여자의 심리인지 그도 아니면 원래 사람의 심리인지 고민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그들은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오. 산! 책! 잘했어요? 얼굴 좋아 보이는 거 봐. 형님 누님 뭐 좋은 일이라도?”

현관까지 달려 나와서 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장난치는 장동건에게 알밤을 한대 먹여주고 공원에서 들었던 얘기를 사람들에게 해줬다.

“식인이 여기만의 일은 아니겠죠? 여기저기 먹을 거 없는 사람 중 어쩌면 꽤 많은 사람이 그러고 살고 있을지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소. 식성이 변해 육식이 땡기던 그 시절에 이성을 놓아버린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 같소.”

생각에 잠겨있던 이진성이 뭔가 생각해 내고는 입을 열었다.

“ITL 발표내용에 이런 게 있었어요. 유전자변형이 60%를 넘기고 진행이 멈춘 동물 중 소수는 여전히 육식 의존도가 높다는 내용을 봤어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내용인데 지금 생각나네요. 저 사람들이 그런 상태라면 많지는 않겠어요.”

“그렇다면 그 나름대로 다행인 건가? 하여간 진성 총각은 참 박학다식해. 호호호.”

놀리는건지 아닌지 모를 말을 하는 김현희를 한번 째려준 이진성이 김인식과 박대성을 돌아봤다.

“두 사람. 뭐 아는 거 없어요? 있으면 털어놔 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앞으로 여기서 지낼 거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 줘야 할 것 같은데?”

이진성의 말에 김인식과 박대성이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건 저도 소문만 들은 겁니다. 저도 사실은 알지 못하는 건데요…….”

김인식과 박대성이 전해준 내용은 나현주 이모 집이 있는 그쪽 아파트의 사람들이 한둘씩 없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종된 사람 중 일부는 장교들이 데려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주민들도 군인들을 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부분 젊은 여자들이 실종되었지만, 성인 남녀도 있고 10대 청소년도 꽤 있다고 했다.

그 이후 둘은 본부가 있는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대령이라는 자가 어떻게 사치를 하고, 어떻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를 한참을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한마디로 왕이라예. 미친 자슥. 왕도 폭군 중에 폭군이라예. 사병들도 벌씨 몇이나 총으로 쏴 직있다 하는데…….”

“다시 가 봐야겠어요. 가서 사람들한테 좀 자세히 물어보고 올게요.”

“나도 같이 가요. 여러분은 여기 계세요. 동건아 너도 가자.”

나현주를 따라 이진성과 장동건이 일어났다.

* * *

다시 나현주 이모집에 도착한 일행은 피난민들을 한참을 설득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가씨 이모님이 원래 이 집 주인이라니까 하는 얘긴데…….”

그들의 이야기는 오래 걸렸다.

자신들이 왔을 때 이미 이 집에는 다른 피난민들이 있었지만 자신들이 들어오면서 그 사람들이 쫒겨나 그 이전의 상황은 모른다고 했다.

사람들이 없어 지는 것은 지금도 1주일에 두어명씩을 대령과 장교들이 직접와서 데려간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그냥 사라지는 사람도 종종 있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다른 집 사람들한테 들었다며 해 준 말이 가장 중요했다.

이곳 원래 주민들도 초창기에 많이 잡혀 갔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현주 이모도 그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런 씨발 것들이…….”

이진성이 벌떡 일어섰다. 그런 이진성을 잡아 앉히며 나현주는 오히려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셋밖에 못 움직여요. 그나마 동건이는 총이라서 소리 때문에 불리해요. 일단 돌아가서 계획을 짜요.”

돌아온 셋이 그곳에서 들은 얘기를 모두 전해주고 일행은 생각에 잠겼다.

본부가 있다는 클럽하우스 내 인원은 40에서 50 정도라고 했다. 외곽 경비는 사병이 서지만 많지는 않다고 했다.

한참을 생각만 하던 관장이 김인식과 박대성에게 물었다.

“아까 그 이재규 대위라는 사람은 어떻소? 그 사람도 한패요?”

“이 대위는… 아닐 겁니다. 대령과 그다지 가까운 사람은 아닙니다. 부대에 있을 때 업무만 잘하고 대령 눈 밖에 난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우리 도와줄 가능성은 없소?”

“잘 모르겠습니다.”

“제압해서 물어보죠. 여기로 불러와서 족치면 불지 않을까요?”

장동건의 말에 이진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진화한 사람이야. 나 정도 된다는데? 넌 총알도 없잖아. 나랑 현주씨가 해야하는데 그놈이 총이라도 있으면 힘들어.”

“그럼 술이라도 먹여서?”

“이 대위는 술 안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 어려운 놈이네.”

“일단 불러올 수는 있어요? 말로 해 보고 안 되면 그때 내가 어떻게 해 볼게요.”

어떻게 한다는 나현주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일단은 그러기로 하고 김인식은 이재규 대위를 부르러 나갔다.

“괜찮겠어요? 아까도 권총에 손 가까이 대고 오는 거 보니까 조심성도 많은 놈이던데.”

“놈도 남잔데 여자가 살살 구슬리면 되지 않을까요? 호호.”

그러면서 방으로 들어가 편한 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와서는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 나현주였다.

* * *

이재규가 김인식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약 30분이 지나서였다.

“무슨 인사를 한다고 그러십니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오. 인사할 건 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부탁도 좀 있고.”

“필요한 것 있으면 여기 이 두 친구한테 언제든 말씀하시면 됩니다. 모든 것을 최우선 지급해 드리도록 조치해 놨습니다. 저한테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아. 옷하고 맥주하고 그렇게 온 거구나? 고맙게 잘 받았어요. 호호호. 이쪽으로 좀 앉아요. 지금 보니까 잘 생겼네. 결혼은 했수?”

김현희가 이 대위의 손을 잡아끌면서 거실로 향했고 김인식과 박대성은 주방에서 음료수를 챙겨 나왔다.

김현희의 넉살이 빛을 발했다.

온갖 쓸데없는 얘기로 이 대위의 혼을 빼놓고 중간중간 나현주도 살살 웃어가며 말을 거들었다.

남자들은 가끔 맞장구만 칠 뿐, 두 여자의 쉴새 없는 수다에 이 대위의 긴장도 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이 대위가 편하게 말하기 시작하자 나현주가 슬쩍 운을 띄웠다.

“제가 아까 저쪽에 갔을 때, 거기 사람들한테 들은 건데요.”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나 나현주를 쳐다보는 이 대위는 아직은 미소 띤 얼굴이었다.

“혹시 저희 이모나 부모님이 본부에 계신가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이 대위의 표정이 굳었다. 본부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다른 내용도 알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하며 이 대위의 오른손이 탁자에서 허리춤으로 슬며시 움직였다.

이 대위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김현희가 멀쩡한 왼팔로 그런 이 대위의 오른팔을 잡아챘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현주는 몸을 날려 이 대위의 가슴으로 다리를 꽂아 넣었다.

팔이 잡힌 이 대위는 김현희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팔은 포기하고 날아오는 나현주의 발을 향해 발을 차올렸다.

가까스로 나현주의 발을 막아낸 이 대위가 다시 발을 들어 나현주를 막고 왼손으로 김현희를 때리려 하는데, 어느새 목 밑으로 관장의 검이 들어왔다.

“내가 비록 갈비가 부러졌지만 잡혀있는 사람 목 베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소만…….”

이 대위는 손을 들어 올리고 다리에 힘을 뺐다.

“알겠습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동건이 이 대위의 권총을 빼 들고 난 후, 김현희도 팔을 풀었고 관장도 검을 물렸다.

“원하시는 것이 이모님과 부모님이 거기 계신가란 말씀이시죠? 혹시 더 아시는 것이 있나요?”

“뭘 말씀하시는 거죠?”

이 대위는 한참 뜸을 들였다.

이들이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지만, 대령의 만행도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혹시 대령에 관해 들으셨나요? 그렇다면 서로 도울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서로 돕다니 무슨 말이죠? .”

일행을 둘러 본 이 대위가 한참 만에 어떤 결심을 하는 듯하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해왔다.

“대령을 죽여 주실 수 있습니까?”

* * *

클럽하우스의 한 화려하고 전망 좋은 방에는 머리가 반쯤 벗어진 대령 하두정과 소령계급의 군복 입은 남자 하나가 로얄살루트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뭐가 좋은지 연신 키득거리며 대화 중이었다.

남자는 바로 동탄을 점령하고 있는 대령 하두정 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대부분 부상을 입어서 며칠은 쉬어야 할 겁니다.”

“내가 만날 필요는 없다고? 어째 내가 만나는 걸 꺼리는 것 같네만?”

“아닙니다. 장군님. 제가 꺼릴게 뭐 있습니까?”

“자네 자리가 위험해 질까 봐 그러나? 허허허. 걱정 말게. 내가 허 소령 아니면 누굴 믿나?”

“장군님께 도움이 될 사람이면 당연히 장군님 옆에 있어야죠. 그런데 그냥 무술 좀 하는 사람들입니다. 직접 만나실 정도는 아닙니다.”

“이 사람 장군 장군 하지 말라니까. 거 나 참.”

“하하. 장군 하면 어떻습니까? 이 지역의 영도자이신데.”

“어허. 이 사람. 가만있자. 자네도 이제 대령은 해야 하지 않겠나?”

대령은 일수 건달이나 하고 있을 만한 굵은 체인 금목걸이와 팔찌에 잘 맞지도 않는 명품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손목에서 반짝이는 명품 시계는 투박하고 거친 손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대위 말이야. 요즘 불만이 많은 것 같아? 꼭 사고 칠거 같단 말이지…….”

장교숙에에서 이진성 일행과 이 대위가 뭔가를 모의를 하는 동안, 클럽하우스에는 이대위에 대한 또다른 모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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