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부모님과는 다음날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일행은 격투경기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보고 결정하라는 소장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글쎄요. 모르겠어요. 이 안에서 뭔가를 해야 생활이 가능하다면 하긴 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현주씨는 어때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일단 경기를 한번 보고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말대로 위험한 것이 아니라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난 말이오, 과연 나나 현주씨의 상대가 될 사람이 여기 있는지 의문이오. 만약에 있다면 난 하겠소. 좋은 수련 상대가 되지 않겠소?”
“없으면요? 그래도 돈이란 걸 벌어야 할 텐데요? 그리고 동건이랑 혜진 씨는 어떻게 하죠?”
장동건과 장혜진은 격투기에 나갈 수 없었다. 세 사람의 시선에 곤혹스러운 둘이었다.
그런 둘을 보던 이진성이 장동건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벌어볼게. 나도 요즘 꽤 하잖아.”
“형님. 고마워요. 그런데 별로 믿음은 안 가네요. 크크크.”
농담으로 응수하는 장동건은 히죽 웃었지만 얼굴은 그다지 펴지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본 나현주도 장동건의 어깨를 두드리며 거들었다.
“나도 하지 뭐. 아저씨는 못 믿어도 나는 믿지? 흐흐흐.”
“누나야 뭐, 보증수표죠. 흐흐흐. 우리 기분 전환 삼아 술이나 한잔해요. 아까 소주 있는 거 봤어요. 내가 찌개 끓일게.”
자기 때문에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일어선 장동건은 주방으로 가서 뚝딱뚝딱하더니 돼지고기 고추장찌개와 소주를 들고 왔다.
“냉장고에 고기랑 야채랑 있더라고요. 된장, 고추장도 있고.”
“오! 맛있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관장님. 현주씨도 어서 먹어봐요.”
“제가 찌개는 원래 잘 끓여요. 어서 드세요.”
19살이면 술 먹어도 된다고 우기는 장혜진까지 낀 다섯은 거의 자정이 될 때까지 소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에 모두는 취해서 하나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 *
눈이 부셔 잠에서 깬 이진성의 눈에는 자동으로 들어와 있는 천장의 조명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목이 칼칼하고 속도 쓰린 게 꽤 마신 것 같았다.
“얼마 마시지 않은 거 같은데… 물 없나?”
혹시나 물이 있을까 침대 밖 협탁을 봤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방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손을 짚는데 왼쪽 손에 침대가 아닌 무엇인가가 만져졌다.
왼쪽으로 돌아본 그곳에는 등을 내놓고 자는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장동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보이는 뒷모습의 사람은 나현주였다.
“헉. 이런.”
별로 많이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 방으로 들어왔고, 왜 나현주와 같은 방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얇은 이불을 살짝 들어보니 둘 다 아무것도 입은 것이 없었다.
“난감하네.”
나현주가 깰까봐 침대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이진성의 귀에 나현주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감하긴 뭐가 난감해요? 어젯밤에 사람들한테 자기는 나랑 한방 쓸 거라고 그렇게 바닥바닥 우기고 들어와 놓고선.”
“헉. 깼어요? 그리고 내가 그랬어요? 아오. 사람들 얼굴 어떻게 보냐?”
나현주가 확 돌아누웠다.
“죄졌어요? 못 보긴 왜 못봐? 왜? 혜진이 얼굴 보기 미안해서?”
“아니 혜진씨가 거기서 왜 나와요? 내가 거기에 미안할 거가 뭐 있다고? 그냥 쑥스럽다는 거지.”
“아이고. 낼모레면 40인 아저씨가 쑥스럽기는? 아무도 신경 안 써요. 잠이나 더 자요.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네. 어젯밤에 그렇게 못 자게 하더니 피곤하지도 않나 봐.”
그러고 다시 돌아누운 나현주의 매끈한 등을 보며 이진성에게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나 이제 코 뀐 건가?’
* * *
일행은 늦은 아침을 먹고 거실에 모여앉아 뭘 해야 하나 쑥덕이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보는 것 같아 혼자 민망한 이진성만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이 불편했지만 그런 이진성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장혜진마저도 둘이 한방에서 자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아무 내색도 안 하고 사람들과의 대화에 스스럼없이 끼어들고 있었다.
‘왜 다들 속으로 비웃고 있는 거 같을까?’
그런 생각에 혼자 쭈뼛거리고 있는 이진성을 드디어 장동건이 슬슬 놀리기 시작하려는 바로 그 때, 문에서 나는 벨 소리가 이진성을 살렸다.
“누구세요?”
“저에요.”
현관으로 달려간 이진성이 확인한 스크린에는 김민지의 얼굴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준 문으로 김민지는 들어오지 않고 이진성과 나현주를 불러냈다.
“두 분 지금 저랑 같이 가세요. 부모님과 같이 점심 드시게 준비했어요.”
드디어 부모님을 만난다는 사실에 얼굴이 활짝 피는 나현주와, 거기에 더불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다는 기쁨 한 가지가 더해진 이진성이 기쁜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김민지는 그런 둘을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입구로 데리고 가서 번호를 눌렀다.
“저기요. 이 번호는 저희는 알 수 없나요? 부모님을 뵈러 가려면 항상 민지 씨가 같이 가야 하나요?”
“지금은 그래요. 하지만 여러분이 저희와 메니지 계약을 하신 후에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 드릴 거예요.”
“메니지 계약이라면?”
“그건 다음에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말하지만, 지극히 사무적이라고 느껴지는 김민지였다.
할 말만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선 김민지를 따라 지하 1층을 지나 다시 그만큼의 깊이를 내려가자 지하 2층이 나왔다. 그곳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고 김민지는 그중 하나의 문으로 가 번호를 입력했다.
“저 문은 어디로 가는 문이에요?”
“저쪽 문은 신경 쓰지 마세요, 언니. 지금은 쓰지도 않고 언니나 일행분들하고는 상관없는 공간이에요.”
역시 미소로 나현주의 물음에 대답한 김민지는 다시 일행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의 모습은 1층이나 지하 1층과는 아주 달랐다. 한쪽의 문 안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 흘러나왔고 공기도 그다지 쾌적하지 않았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50대 이상으로 보였다. 다행히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안 보였고 무거운 짐은 전동카트 같은 것으로 나르고 있었다.
일행이 가는 방향의 저 앞으로는 단체식당인지 음식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중간중간 총을 들고 순찰을 도는 군인도 몇몇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저 군인들은 이 안에서 뭐 하나요?”
“안전 관리죠. 혹시라도 변하는 사람이 발생하면… 아시죠?”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며 갈 길을 가는 김민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역시 단체식당이었다. 그녀는 식당 한쪽에 임시로 만든 것 같은 작은 방으로 둘을 안내하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나가 버렸다.
“아저씨. 여기 환경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안 좋아요. 위하고 너무 비교돼요.”
“그렇죠? 70 넘은 노인네가 힘든 일은 안 하고 있나 걱정인데 환경까지 그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위로 갈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부모님을 1층으로 모실 방법이 있을까 궁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를 약 5분쯤 지나자 문이 열리면서 4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이진성의 노모와 나현주의 부모님 그리고 이모님이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고? 반가운 사람이 왔다 하드만 니가 어찌 여 있나?”
놀란 이진성의 어머니는 이진성에게 달려와 손을 붙잡고 몸이 성한지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자슥아.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나? 몸은 성하나? 다친 데는 없나?”
몸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아들이 행여 다친 곳은 없는지 두드려보고 만져보는 노모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나현주의 부모님과 이모님도 다르지 않았다.
“아. 엄니. 좀 앉아요. 나 멀쩡해. 멀쩡하니까 여기까지 왔지. 사람들 보는데 창피하게 왜 이러신데. 이리 좀 와요.”
억지로 어머니를 끓어다 의자에 앉힌 이진성은 자기가 궁금한 내용을 묻기 시작했다.
“엄니는 어디 아픈 데 없슈? 여기서는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안 힘들어? 여기 밥은 어때? 잠은 어떻게 자고?”
“이놈아. 하나씩 물어라. 내는 다 좋다.”
이진성의 어머니가 하는 세탁소일은 크게 할 것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 세탁물을 기계에 넣고 빼서 정리하는 것만 하면 되는데 10명이 하루에 세시간 정도만 근무한다는 것이다. 노동강도는 크지 않은 일이고 여유시간에는 한쪽에 텃밭에서 야채도 키운다고 했다.
나현주의 아버지는 식당에 식자재를 나르고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데, 이 역시 크게 힘든 일은 아니라고 했다. 나현주의 어머니와 이모님이 하는 청소 일이 1층의 집들 내부와 시설 전체를 관리하는 것이라 가장 시간을 많이 쓰는 일이지만, 노동강도가 큰 것은 아니라는 말에 이진성과 나현주는 약간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니는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말해봐라. 그라고 현주랑은 어떻게 같이 왔나?”
“그 얘기는 길어요. 나중에 기회 되면 천천히 해 줄게. 어떻게 왔는지보다는 왔다는 게 중요하지. 현주씨랑은 우연히 만나서 동행하게 됐어.”
이진성을 미심쩍게 보던 이진성의 어머니가 나현주에게 물었다.
“이 할미 기억하지? 느그집에서 몇 번 봤는데 기억나나? 니가 우리 모지리 여기까지 무사히 데리고 왔나?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 니덕에 내 소원 풀었다. 죽기 전에 이 반편이 소식이나 알고 죽는 게 소원이었는데 니가 내 소원 풀어 줬어.”
나현주의 손을 잡고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는 이진성의 어머니에게 나현주는 당황스러웠다.
“아니에요. 제가 데리고 오다뇨. 아저씨한테 도움 많이 받으면서 왔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앉으세요. 어머니.”
“어머니? 호호호. 전에 어려서는 할머니라 하드만 이제는 어머니라네. 내가 다 안다. 저 지 앞가림도 못하는 모지리가 우찌 여기까지 살아왔는지 다 안다. 현주 니가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그 무술도 잘하고…….”
“아. 엄마. 쫌. 말만 하면 모지리고 반편이래. 나 그냥 가요?”
더 놔뒀다가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어머니의 말을 막은 이진성이 화제를 돌렸다.
“엄니. 내가 1층에서 살게 됐거든. 그니까 거기서 같이 살 수 있게 방법을 찾아볼게. 좀만 기다려 보셔.”
“무슨 말이고? 니가 어떻게 1층서 사나? 거기는 특별한 사람들만 사는 곳이라 하던데?”
큼큼 목을 풀고 이진성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 내가 그 특별한 사람이야. 그니까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리셔. 이미 집도 받았어. 그리고 엄니가 같이 살게 되면 집 하나 더 받아 낼 거야. 엄니가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허락만 받아 내면 되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시간 많이 안 걸릴 거야.”
이진성의 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또 뭔가 사기를 당한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헛소리 말고 여기서 내랑 같이 일이나 하그라. 니도 이제 뭔가 밥벌이를 하고 살아야 된다. 이제는 내가 니 밥 해결 못해준다. 이제 전처럼 뜬구름 잡고는 못산다. 이놈아. 정신 좀 차려라.”
이진성의 어머니는 아들의 터무니 없는 말에 답답했다. 평생을 뜬구름 잡고 허송세월하더니 아직도 그런 것 같아 보였다.
이진성은 그런 어머니가 혹시라도 걱정할까 봐 하지 않으려던 말로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입을 열었다.
“엄니. 나 여기서 일 안 해도 되. 1층에서 격투기 같은 거 한다며. 그거 하면 돈 많이 받는다고 들었어. 여기 책임자인 김 소장이라는 장군이 약속했어. 내가 격투기 해서 돈 벌어서 엄마랑 같이 살 수 있게 할 거니까 걱정일랑 마셔.”
이진성의 말에 어머니는 한참을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 나현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물었다.
“이놈 혹시 미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