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형님. 오늘 경기 대진표래요.”
밖에 나갔던 장동건이 종이 하나를 보면서 키득거리면서 들어왔다.
“경마 찌라시야 뭐야? 본명도 아니고 다들 닉네임이야. 지옥의 왕자? 썬더볼트? 우와! 작명센스 죽인다.”
“어디 봐봐.”
이진성이 받아본 종이에는 세 경기의 시간과 출전 선수, 베팅 마감 시간, 예상 배당률 등의 정보가 적혀있었다. 경기는 1:1 경기 둘과 1:2 경기 하나였다.
“한 경기는 1:2네요? 관장님. 이거 좀 보세요. 이 사람은 엄청 센 사람인가 봐요?”
“1:2로 할 정도면 최소한 두 번 진화한 사람인가 보오?”
“이 사람이 배당률도 제일 낮아요. 혼자서 둘 상대로 이길 게 확실한가 봐요.”
관장이 들고 있는 종이를 슬쩍 본 나현주는 저녁 8시라는 시간을 보고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네. 재미는 있겠네요. 혼자서 두 사람 상대라면 제법 긴장감 넘치겠는데요? 좀 있다 나가서 자리 잡아요, 우리.”
그들이 도착한 공원의 한가운데는 언제 만들었는지 줄로 연결된 여섯 개의 말뚝이 육각형을 그리고 박혀있었다. 별다른 시설 없이 공간만 구분해 놓은 소박한 링이지만 그 크기는 이종격투기 링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링 주위의 땅바닥에는 벌써 꽤 많은 사람이 앉아서 잡담을 나누며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것이 보였다. 또한 한쪽에는 베팅을 받는 임시창구가 설치되어 배당정보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일행은 마치 휴양을 온 듯 평온한 사람들 속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멀뚱멀뚱 앉아 있어야 했다. 경기 시작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명상과 잡담으로 억지로 보내고 시간이 흘러 거의 경기가 시작할 무렵, 일행의 귀에 갑자기 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들 하시오?”
소리 난 곳에는 80 정도의 노인 한 명이 양손에 맥주와 안주 거리를 가득 들고 일행을 보고서 미소 짓고 서 있었다.
“누구… 세요?
장동건의 물음에 노인이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일행에게 맥주를 꺼내주며 인사했다.
“도만수라고 하네. 저기 저 도박장 주인이지. 자네 이름이 장동건이지?”
“에? 제 이름은 어떻게 아세요?”
“자네뿐만 아니라 여러분 이름을 다 알고 있네. 아! 한 사람은 아니구먼. 관장님 성함은 모르네. 흐흐흐.”
모르는 사람이 자신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일행이 긴장하자 노인은 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아. 긴장하지 말아요. 나쁜 사람 아니야. 도박장을 운영하려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야. 김 소장한테서 들은 거니까 놀라지들 마시고.”
명동의 사채업자면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부동산 부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은 이진성 일행이 앞으로 중요한 손님이 될 것이기에 미리 인사나 하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넉살 좋게 일행의 옆에 앉아 맥주와 안주를 꺼내 놓고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노인의 이야기는 어느덧 자기 자랑으로 넘어가 있었다.
“내가 비록 여기 이러고 있지만 말이야. 당신들도 내 땅 한 번씩은 밟고 살아왔을걸? 전국에 좋다는 지역에는 내 땅이 다 있단 말이야.”
“눼, 눼.”
“명동에서 말이야. 나 한번 만나겠다고 줄 선 정치인들하고 기업가들이 명동을 한 바퀴 돌았어.”
“어련하시겠어요. 대~ 단 하세요.”
노인의 바로 옆에 앉은 죄로 장동건은 노인의 말에 대꾸해 주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방금 시작한 경기로 쏠렸다.
“저 사람들은 진성 씨보다 기가 약하군요.”
“저보다요? 그럴 수도 있나?”
“진성 씨 자신이 전과 많이 다름을 자각 못 하는 것 같소. 처음 만났을 때의 현주 씨 보다 강해졌소. 그리고 저 사람들은 그때의 현주 씨 보다 약하고.”
링 안의 한 사람은 권투선수 출신 같았고 다른 한 사람은 30cm 정도의 사시미칼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둘 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혀봐야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지 경기는 그다지 박진감 있게 진행되지 않았다.
관중들도 그런 경기가 익숙한지 그저 조용히 보면서 자신들의 잡담만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진성이 도만수에게 물었다.
“저러고도 도박이 됩니까? 관중들로 별로 흥미가 없어 보이는데요?”
“클클. 저 사람들은 비인기 선수야. 재미있는 경기를 안 해. 그런데 다 그런 건 아니거든. 여기 능력자가 몇 명이 있는지 아나?”
“서른 몇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중에 피튀기게 싸우는 사람들이 몇 명 있지. 나머지는 그냥 시간 보내기 정도랄까. 오늘 마지막 1:2 경기가 하이라이트고 앞에 두 경기는 그냥 그래. 이다음 경기는 내 경호원이 나가는데 거기 전단에 블랙캣. 이 경기보다는 볼만할 거야.”
“블랙캣 vs 지옥의 왕자?”
“그렇지. 지옥의 왕자는 거구의 남자, 블랙캣은 호리호리한 여자거든. 둘이 네 번을 싸웠는데 세 번을 블랙캣이 이겼단 말이지. 그래서 거기는 베팅이 좀 있지.”
앞의 지루한 경기에서 나현주도 눈을 돌리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할아버지. 여기 도박장 운영하시면 여기 김 소장하고 박 의원, 장 지사라는 사람들 잘 아시겠어요. 자기들하고 계약하고 선수로 뛰어 달라는데 혹시 어디가 좋은지 추천 좀 해 주세요.”
“허허. 그놈들이 대전료로 베팅액의 20% 제시했다지? 생각해 둔 곳은 있는가?”
“아직 딱히…….”
“음, 나는 김 소장을 추천하네. 셋 중에는 가장 여러분한테 이득이 될 거야.”
“왜요?”
도만수는 세 사람의 권력자에 관해 설명했다. 셋 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그나마 나은 것이 김 소장이고 가장 조심해야 할 인간은 박 의원이라는 것이다.
박 의원은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으로 여기서도 인신매매, 성매매에 아주 지저분한 것까지 다 하고 있으며 항상 음흉하게 뭔가를 꾸미는데 속을 알기 어려운 놈이라는 것이다.
장 지사는 한마디로 금수저 무능력이라도 정의했다. 배경이 좋아 지사가 되었었지만 지금도 박 의원에게 휘둘리고 심지어 자신 밑의 능력자에게도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비록 이 쉘터의 부지를 제공하면서 식량 공급권을 받았지만, 그것도 박 의원에게 뺏길 거 같다고 전망했다.
“그럼 김 소장은요?”
김 소장은 돈을 엄청나게 밝히지만 버는 만큼 뿌릴 줄도 아는 사람이며 또 뒤로 장난질을 하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별 둘도 돈으로 달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돈 버는 것에도 재주가 있음과 사람들에게 나쁜 소리 안 듣게 하는 것에도 재주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김 소장도 마냥 좋게 볼 사람은 아니네요?”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어요. 나한테 이로운 사람이냐 아니냐지. 그리고 박 의원의 힘이 너무 커졌어. 그걸 여러분들이 김 소장한테 붙어서 조금 견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힘이 커졌다뇨?”
“그게 말이지, 여기 능력자들이 자네들 빼고 전부 서른하고도 여섯인데 한 명은 내 경호원이고 박 의원이 스물다섯을, 장 지사가 열을 가지고 있네. 레벨 2 능력자라고 다른 능력자보다 월등히 강한 사람들이 그중에 넷인데, 넷 중 셋이 박 의원 밑에 있지. 있다가 1:2로 할 그놈이 바로 레벨 2 능력자야.”
“에? 그렇게 힘이 쏠리도록 김 소장은 뭐 했데요?”
“클클클. 김 소장은 능력자에 대해 별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동탄과 거래에서 커미션 붙여서 돈 버는 것만 신경 쓰고 있었지. 처음에는 능력자 보다 자신의 병력을 믿었거든. 그런데 병사들이 자꾸 변하고 그 와중에 멀쩡한 병사도 죽으면서 병력이 자꾸 줄었네? 그러다 이제 발등에 불 떨어진 거지.”
일행은 내부 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됐다. 도만수의 설명은 세 권력자가 어떻게 힘을 나누고 있는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이곳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주의할 사람은 누군지 등의 정보와 함께 경기를 통해 벌 수 있는 돈의 액수와 일행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한 달에 최소한 세 경기는 해야 한다는 점도 알려 줬다.
그렇게 설명을 하는 동안 어느덧 두 번째 도만수의 경호원과 거구의 남자 경기도 끝났다. 결과는 도만수 경호원이 승리였다.
“에이. 이기면 뭐하나. 승률이 높으니까 배당률이 낮아.”
“직접 베팅도 하세요? 그것도 영감님 경호원한테?”
“해야지. 돈은 벌 수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벌어야 하는 거야.”
“와. 그러면서 남들한테 돈에 집착한다 어쩐다 하신 거예요?”
“이거 보세요. 장동건 씨. 이건 집착이 아니야.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게 집착이지.”
노인과 장동건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드디어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레벨 2 능력자는 현재의 관장 정도의 기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에 있는 칼자국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여, 과거에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아온 사람 같았다.
“저 친구가 지금 이 안에 있는 능력자 중에 가장 강하지. 그래서 1:2로 싸우는데 그래도 승률이 60%가 넘어.”
“뭐하던 사람인지 아세요?”
“조폭 출신이라던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는 오래 걸리지 않고 끝났다. 유도를 했는지 잡기 기술에 능했고 파워도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 스피드도 손색이 없었다.
두 사람의 협공을 피하면서 하나를 잡아 순식간에 팔을 부러트리고 나머지 하나는 조르기로 죽기 직전까지 몰고가 항복을 받고 끝내 버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경기가 시시하네요.”
“그렇지? 앞으로 저놈은 1:3으로 하던가 해야겠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아. 내가 술 한잔 살 테니까 같이들 가겠나? 할 일들도 없잖나?”
일행은 어쩔까 머뭇머뭇했지만 도만수에게 좀 더 들을만한 얘기가 있을까 싶어 그를 따라 일어섰다.
“와. 술집도 있었구나.”
도만수가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자신들의 숙소와 같은 크기의 유닛 하나를 술집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내부는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냥 숙소로 쓰던 유닛의 방들을 헐어 공간을 틔우고 테이블과 의자만 가져다 놓은 정도였다.
그래도 술집이 운영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여기도 어르신이 하시는 곳이에요?”
“아니. 난 물장사는 안 해. 여기도 박 의원 놈이 하는 곳이지.”
자리에 앉은 도만수가 웨이트리스를 불러 위스키와 간단한 안주를 시켰다. 그런데 웨이트리스는 눈만 나오는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주위를 둘러본 장동건은 다른 웨이트리스도 마찬가지임을 확인했다.
“저 사람들 마스크는 왜 쓰고 있는 거예요?”
“혹시라도 일하는 중에 변할까 봐 그런 거지. 처음에 몇 명이 그렇게 되고 저렇게 하기 시작한 거야.”
“헐. 기분 거시기 하네요.”
술은 금방 나왔다. 모두의 잔을 채워준 도만수가 건배 제의를 하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몇 순배가 돌았다.
이진성과 나현주가 궁금한 것들을 물었고 관장과 장혜진은 거의 듣기만 했다. 평소에 말이 많던 장동건은 기분이 가라앉은 듯 혼자서 술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 모두가 어느 정도 취했을 때, 입구로 아까의 그 흉터 능력자가 네 명의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저기 저 사람이 박 의원이야. 뚱뚱한 50대 남자.”
모두가 들어온 사람들을 돌아보자 그쪽에서도 이쪽을 보고서는 박 의원이 일행을 이끌고 다가왔다.
“아이고. 도 회장님 여기 계셨네요. 같이 계신 분들은 누구신가요?”
“거 왜 있잖나. 이번에 동탄에서 오신 분들.”
“아! 안그래도 내 한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반갑네. 누가 이진성이고 누가 나현준가? 내가 전한 말을 들었지? 부모님 일 안 하게 해 줄 테니까 군말 말고 나한테 와.”
박 의원은 대놓고 하대였다. 말투에서 거만함이 뚝뚝 털어졌다. 이진성과 나현주가 황당해서 그 얼굴을 쳐다보는데 장동건이 자기 앞의 술잔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씨발. 언제 봤다고 반말지거리야? 국회의원이 지금도 국회의원이야? 저 새끼도 선거 때는 굽신거리고 다녔으려나?”
혼잣말하듯 했지만,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심지어 박 의원의 뒤에 있던 놈들도 다 들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박 의원을 대신해 한 놈이 나섰다.
“어이. 죽고 싶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