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그러니까, 우리더러 나가 달라 그 말이란 말이죠?”
지하로 내려온 김 소장에게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일행은 난감했다.
이진성이 저질러 놓은 일이 있으니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없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무마는 하고 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런 분위기라는 것만 알고 계시라고요.”
“소장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저야 그동안 투자한 게… 아니 그게 아니고.”
헛기침을 한번 한 소장이 말을 이었다.
“저야 여러분들이 여기 계속 있길 원하죠.”
“이제 경기도 못 하잖아요?”
“그거야 또 모집하면 되는 일이지만, 그것보다 능력자들이 안 계시면 저 잘나신 양반들 지랄하는 거 금방입니다. 통제도 안 될 거예요.”
“군인들을 안으로… 들여놓을 수가 없구나.”
“그렇죠. 안에서 변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니까요.”
끙~
바닥에 빙 둘러 주저앉은 일행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자신들만이라면 더럽다 그러면서 나가도 그만다. 하지만 이진성의 노모와 나현주의 부모와 이모 때문에 쉽게 그러기도 곤란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일 방법은 없는 것 같소?”
“모르겠습니다.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지. 안전을 보장해 준다면 되기야 하겠지만 그게 방법이 없잖습니까?”
“우리가 지하로 내려가면 조용해지겠소?”
“에이 뭐 하러요. 그러실 거면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게 낫죠.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독립된 숙소도 없고…….”
“그래요. 관장님. 우리가 뭐 아쉬워서 지하에서 살아요. 형님. 확 다시 한번 변해서 저 인간들 전부…….”
“까분다.”
퍽~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나현주에게 등짝을 얻어맞고 장동건은 바닥을 굴러야 했다.
“제가 계속 설득은 해 보겠습니다. 뭐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동안 별다른 안 생기게만 해 주십시오.”
이진성을 바라보며 말하는 소장의 뜻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측은한 시선이 이진성에게 쏠렸다.
“참 나. 내 복에 무슨 편안한 삶을. 어째 좋은 일이 자꾸 생긴다 했다.”
풀이 죽어 자조하는 이진성의 등을 나현주가 톡톡 두드려 줄 뿐, 모두는 입을 닫았다.
* * *
1주일이 지났다. 이진성 일행은 일부러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지하에서 종일 대련만 했다. 식사는 장혜진과 부모님들이 지하로 가져와서 거기서 해결했다.
그렇게 눈의 안 띄고 시간이 지나면서 잘나신 양반들이 소장의 방으로 찾아와 강짜를 놓는 횟수도 조금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장도 꾸준히 당근과 채찍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기를 계속했다.
“김 소장. 세상이 정리되고 밖으로 나가면 우리가 당신 별 때버리는 거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그만 뻗대고 우리말 들어요.”
“네. 압니다. 잘 알죠. 대단하신 분들이신 거. 그런데 말입니다. 이걸 왜 생각 못 하세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여러분들은 바뀐 세상을 못 보실 수도 있다는걸?”
“뭐요?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험험.”
“아. 김 소장님. 왜 이러시나. 그런 말 마시고, 우리가 실언을 좀 했기로 그런 흉악한 말을 하시면 어떻게 하나…요?”
“저도 뭐 그런 일이 안 생기길 바랍니다만, 앞날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헐헐헐.”
“도대체 왜 그 사람들을 그렇게 끼고 도는 거요? 없어도 상관없는 사람들 아니오? 능력자는 새로 구하면 그만이잖소?”
“새로 구하면 그만이라? 그만한 사람들을 어디서 구합니까? 여러분도 보고 들어서 수준이 다른걸 아실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꼭 그만한 수준이 필요한 이유가 뭡니까? 그전에는 그 사람들 없이도 잘 살았잖아요?”
“군사상의 이유도 있어 다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 거지요.”
오늘도 답도 안 나는 말싸움과 신경전을 끝내고 사무실 소파에 퍼질러진 소장은 찬물로 속을 진정시켜야 했다.
* * *
후아 후아
무릎을 짚고 땀을 뚝뚝 떨어뜨리는 이진성의 앞에 역시 숨을 몰아쉬는 관장과 바닥에 큰대자로 널브러진 김진표가 있었다.
“난 더 못해요. 진성 씨. 관장님. 저 좀 빼 주세요. 헉헉.”
“진표 씨도 처음보다 훨씬 오래 버티고 있잖소. 헉 헉. 스스로 실력이 느는 걸 느끼잖소? 약한 소리 말고 조금만 쉬고 또 합시다.”
“아 정말. 이만하면 진성 씨 폭주 안 하는 거 확인한 거잖아요. 이제는 제가 폭주할 판이예요. 제 창도 이미 거덜났잖아요. 쇠파이프로 이게 뭐예요?”
김진표의 낭창낭창한 창은 이미 박살 난 지 오래였다. 자신의 창 대신 쇠파이프로 대련을 하자니 유연함이 생명인 우슈를 제대로 펼칠 수 없어 두 배로 고생하는 김진표였다.
“그럼 진표 씨는 잠깐 쉬고 수찬 씨 들어오시오. 수찬 씨도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지요?”
“무슨 말씀이세요? 2:1이면 저는 제대로 손발도 못 써요. 참아 주세요. 3:1이라야 겨우겨우 버티는데.”
이진성의 기는 거의 안정 되었다. 그 결과 관장도 1:1 대련으로는 이진성에게 몰리기 일쑤였다.
파워와 스피드는 관장을 압도한 지 이미 며칠 전이고, 관장이 압도하던 정교함도 많이 따라온 이진성이었다.
거기에 나현주의 격투 동작과 관장의 검술이 융합된 듯한 이진성만의 기술이 하나둘 완성되며 관장을 위기에 몰아넣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김진표, 정수찬도 대련에 참여해서 2:1 또는 3:1의 대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련의 성격은 어느덧 개개인의 실력향상으로 바뀌어 갔다. 오늘도 아침부터 2:1의 대련 후 김진표가 더는 못한다고 나자빠진 것이었다.
덕분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쉬고 있는데 장동건과 장혜진이 키득거리며 지하로 들어왔다.
“형님. 나 위에서 재미있는 소리 들었네?”
“뭔 소리?”
“듣고 화내기 없기.”
“또 뭔 헛소리 하려고?”
“아. 일단 약속부터.”
“저게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그래 약속.”
다가와서 손가락까지 건 장동건이 다시 서너 발 물러서서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위에서 잘나신 양반들이 형님보고 마녀 서방이래. 원래 밖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였는데 사이코패스 마녀를 만나서 돌아 버린거래. 한번 돌아 버리면 사람 백정이 되는데…. 아야. 왜 꼬집고 그래?”
옆구리를 쓰다듬으면서 자신을 꼬집은 장혜진을 보자, 장혜진이 옆을 보라고 눈짓을 했다.
그제야 옆에서 따가운 기운이 쏟아지는 것을 느낀 장동건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의 나현주가 있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고?”
“아니, 그게 누나한테 한 말이 아니고.”
“내가 싸이코패스 마녀? 나 때문에 돌아?”
“아니, 중요한건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아니! 중요한 건 그거야.”
장동건과 이진성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이진성이 욕먹는 것에 화가는 줄 알았는데 화난 포인트가 달랐다.
이상한데서 열 받은 나현주를 보며 기가막한 둘이었다.
“저기 현주씨. 화를 내야 할 건 나 같은데…….”
“그러게. 누나, 누나가 이러면 형님이 뻘쭘해 질 거 같은데…….”
“닥쳐!”
팩 돌아 나가는 나현주를 보며 어찌할 줄 모르는 두 사람에게 장혜진이 혀를 끌끌 찼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여자를 몰라요? “
“그건 또 무슨 말?”
“자기 때문에 자기 남자가 욕먹어서 미안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자기가 화내서 아저씨가 화 못 내게 선수 치는 거잖아요.”
“그런…건가?”
“그렇…다는데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얼른 언니 따라가서 나는 괜찮다. 마음 쓰지 마라 그러고 위로해 줘요.”
“그래야 하는 거야?”
“당연하죠.”
그 말에 어정쩡하게 걸어 나가는 이진성을 보고 장동건이 장혜진을 쿡 찔렀다.
“근데 넌 19살이 별걸 다 안다?”
“19살이면 여자 아니래요?”
겨우 몇 점 따 놓은 점수를 다시 입방정으로 날린 장동건이 팩 돌아 나가는 장혜진을 쫓아 나갔다. 그리고 실내에 남은 남자들은 눈만 끔벅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을 깬 건 대련하기 싫어 기회만 보던 정수찬이었다.
“오늘 대련 끝난 거면 그만 올라갈까요?”
* * *
“응 응. 그래 알았어. 그럼 거기는 이제 안정화 된 건가?”
“그래? 그럼 아직 위험이 없어진 건 아니군?”
“응. 그래? ITL 사람들한테 얻은 정보 정리되면 나도 알려 주는 거 잊지 말고.”
“아, 거기 미군들 통해서 미국 소식도 들을 수 있다고? 미국은 어떻다는데?”
“그래? 별 차이도 없는 건가?”
“알았어.”
“말도 마. 그 사람들 때문에 여긴 난리도 아니야. 차라리 안 받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어.”
“응. 또 연락하자고.”
전술정보통신망 단말기를 내려놓는 김 소장을 바라보고 있던 김민지가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평택 상황은 많이 좋아졌나 봐요?”
“그런가 보네? 주민들은 어느 정도 안정화 됐는데, 문제는 거기에 특수한 좀비가 있다는군.”
“특수한 좀비라면, 전에 이진성 씨 일행이 동탄에서 상대했던 그런 거 말씀인가요?”
“그런 거 같아. 거기 ITL 있잖아. 거기에 고립된 사람들 구조했는데 거기 연구소장도 있었나 봐. 아직 많은 내용은 전해 듣지 못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포획된 좀비가 전혀 다른 존재로 변이했다고 하고, 다른 좀비들을 지휘하고 있다나 봐.”
“미국 말은 또 뭐예요?”
“남아 있던 미군도 구했다네. 그 사람들은 미국하고 위성통신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데, 미국도 뭐 별반 다르지 않나 봐.”
간략하게 통화 내용을 전해 듣고는 궁금한 부분에 대해 더 확인했다.
“기지 내 좀비들은 더 공격이 없다는 거죠?”
“전혀 없는 건 아니고, 드문드문 있긴 한데 막기에 어려운 수준은 아니라네.”
“그 특별한 좀비를 잡을 방법은 아직 없고요?”
“워낙에 신출귀몰하데. 직접 나서지도 않고 좀비들만 조정하는데 좀비들이 거의 죽어서 요즘은 조용하데. 한 번씩 어디서 만들어 오는지 민간인들 옷 입은 좀비들로 공격하기는 한다는군.”
“이 대위는 대책이 있고요?”
“글쎄, 군인들로는 힘들 것 같아. 어디 있는지를 찾지를 못해 기습을 당한다는 거야. 그 이선정 씨? 그리고 이진성 씨 같은 사람들은 동탄에서 좀비들을 감지해서 쉽게 잡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고생이 많다네.”
이런저런 궁금증을 해결하던 김민지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군님. 진성 씨 일행 전부 평택으로 보내는 건 어때요? 여기 있어 봐야 사람들하고 편하게 될 거 같지도 않은데?”
“평택에? 만약에 우리가 필요하게 되면?”
“헬기로 얼마 걸리지도 않잖아요. 왔다 갔다 하면 되죠.”
“거기 한번 가면 우리가 도움 필요할 때 와 줄까?”
“흠… 그건 뭔가 핑계를 만들어 봐야겠죠?”
“보내야 하나? 여기 분위기도 조금은 가라앉았는데?”
“잘만하면 여기 사람들에게, 이진성 씨 일행에게, 그리고 더불어 이 대위에게도 생색낼 수 있잖아요?”
“여기 사람들이랑 이진성 씨 일행까지는 알겠는데, 이 대위한테 생색 낸다는 건 무슨 말이지?”
김민지는 이 대위가 좀비들을 찾지 못해 고생하고 있고, 이진성과 관장이 좀비들을 감지했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들을 보내서 이 대위가 더 빨리 좀비들을 정리하게 도와주면 이 대위에게 하나의 빚을 안기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평택의 도움이 필요할 때 더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설명을 김 소장에게 들려줬다.
“그렇게 되면 이래저래 편해질 것 같기는 한데 말이지. 좋아. 한번 구실을 만들어 봐.”
“알았어요.”
“중요한 건 이진성 씨 일행이 기분 나쁘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우리랑 끈이 끊어지면 안 돼. 알지?”
“네. 그럼요.”
김 소장 자신은 어쨌거나 이 쉘터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를 수복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평택을 정리하면 그들의 도움을 받아 동탄과 용인지역을 정리할 계획을 김민지와 머리를 맞대고 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