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세력화의 시작
회의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이진성, 나현주, 김현희, 장동건과 장혜진이 있었고 맞은편에 이재규와 알렉스, 씬디, 장진이 있었다.
ITL에서는 소장과 두 명의 연구원이 나와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이진성 일행은 처음 보는 캘리 소령이 병사 둘을 데리고 앉아 있었다.
원래 주인인 미군임과 동시에 최상급자인 캘리 소령이지만 그녀는 시설관리 책임과 미국과의 연락만을 담당할 뿐, 기지의 실질적인 운영은 이미 이재규 대위가 담당하고 있었다.
알렉스 일행은 캘리 소령도 관여하지 않는 독립된 전투병으로서 이재규 대위를 서포트하는 어정쩡한 위치였다.
이진성과 일행은 기지 내 전력을 세밀하게 재확인했다. 남아있는 병사는 107명. 탄약은 동탄에서 가져온 것이 7만 발 가량 남았지만 원래 기지 내 있던 미군의 M4 소총용 탄약이 약 100만 발 가량 있었다. K2 탄약과 동일 규격으로 같이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밖에 미군이 남기고 간 크레모어와 수류탄과 이런저런 폭발물이 있었고, 별 쓸모는 없을 것 같지만 토우미사일도 좀 있었다.
개인 무기들은 충분해 보였다. 기타 장비들은 당장 소용이 없는 것들이 많았다. 아파치 헬기가 30대 있었지만, 조정할 사람이 없으니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 외에 전술 장갑차 10대와 험비 30여 대는 지역정찰을 하기에 충분한 수량이어서 다행이었다.
“장비는 그렇고 인력 측면에서요, 군인 중에 진화자는 이 대위님이랑 미군 세 명 밖에 없나요? 그동안 더 나왔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민간인 중에서도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확인 안 하셨죠?”
이진성의 생각에는 어느 정도 진화자가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은 때였다. 나왔는데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투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 아니어서 무시하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미군 중에서는 저희 셋이 전부입니다. 다른 병력이라고 몇 명 되지도 않고요”
정진 하사의 대답에 이진성이 물었다.
“몸살은 한 번씩 하셨나요? 아니면 그 이상? 어떤 능력이 좋아지셨어요?”
“한 번씩 했습니다. 셋 모두 육체적으로 파워와 스피드가 좋아졌고요, 씬디 상사는 저격능력이 좋아졌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추격능력이 좋아진 것 같고요”
“추격능력이요?”
“네. 그게 어떤 거냐 하면 적이 남긴 흔적을 찾아서 추격하는 스킬인데, 몸살 이후에 그쪽으로 어떤 느낌이 좋아졌다고 할까요? 같은 흔적에서 전보다 더 많은 정보가 머리에 떠오르더군요”
장동건이 끼어들었다.
“씬디 상사님은 원래 저격수였나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희 팀 내에서 저격 담당 중 하나였습니다.”
“음… 나중에 기회 되면 저랑 한번 비교해 보면 좋겠는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씬디는 장진에게 무슨 말인지 물었고 몇 마디 말을 나눴다.
“그 쪽분도 저격 능력이 있는지 물어보네요?”
“전… 저격과 속사 능력이 있어요. 어떤가 하면…”
신나서 떠드는 장동건을 놔두고 이진성이 이재규에게 한국군과 민간인의 상황을 다시 물었다.
“한국군 내부에서는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부터 격투는 안 하고 총만 사용하다 보니 그쪽에 신경을 안 썼어요. 병사 중에 나왔다 해도 마찬가지 일 겁입니다.”
“그럼 동건이 처럼 사격이 갑자기 좋아졌다거나 하는 사람도 없어요?”
“글쎄요… 그런 것까지 신경을 안 썼네요.”
잠시 생각하던 이진성이 말을 이었다.
“대위님. 저희가 병력 전부를 확인해 볼게요”
“예? 어떻게요? 대련이라도 하시려고요?”
“저희가 처음에 대위님 진화자인거 바로 알아본 거 기억 안 나세요? 제가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아… 맞다. 그거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동탄에서도 결국 말씀 안 해 주시고…”
이진성은 말을 할까 고민했다. 육체적 전투력 외에 자신만의 특이한 능력으로 동료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특이 능력을 가진 사람은 기를 느끼는 관장과 안산의 사시미칼 이외에는 아직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더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고민하던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같이 지내고 같이 싸워야 할 그들에게 말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음… 이건 ITL 박사님들께서 흥미를 느끼실지 모르겠네요. 전 냄새로 사람과 좀비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첫 몸살을 겪기 전부터…”
이진성은 고시원에서 겪었던 몸의 변화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서로 다른 냄새, 좀비들의 서로 다른 냄새에 관해 설명했다. 자신이 사람의 냄새보다는 좀비의 냄새를 훨씬 강하게 맡는다는 것과 1호와 같이 까만눈들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말해줬다.
“역시 제 추측이 맞는군요. 그런데 믿기지는 않네요. 하하하”
병사들에게 동탄에서의 전투 상황을 보고받고 유추하고 있던 이 대위는 자기 생각이 맞음을 확인하면서 신기해했다.
“혹시 관장님도 냄새를 맡으십니까? 그때 처음 뵀을 때 관장님도 절 느끼시는 것 같던데”
“관장님은 좀 다릅니다. 좀비는 감지하지 못하고 사람의 기를 느끼세요. 기의 종류와 강도로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갖췄고, 어느 정도 강한지 감지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군들은 정진 하사의 통역에서 기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자기들끼리 얘기해야 했다.
정진 하사 자신도 마땅하게 설명할 비유가 없었다. 결국 도움을 요청한 정진에게 장동건이 깔끔하게 한마디로 정리해 줬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전투력이라고 하세요. 드래곤볼 안 봤으려나?”
장진의 통역을 들은 알렉스와 씬디, 캘리와 두 병사는 단번에 이해해 버렸다.
“냄새라…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네요. 저희 샘플 중에서도 유전자 변형이 80% 이상에서 변이체가 되지 않은 동물들이 있었어요. 그럼 그런 개체들도 뭔가 다른 능력을 가진 개체였겠군요”
“소장님. 전에 드미트리가 담당했던 그 개는 근육이 커지고 이빨이 자라지 않았습니까? 다른 개체들도 조금씩은 외형적 변화가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운동능력의 변화를 측정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네요. 케이지 안에서 꺼낼 생각을 안 했으니까…”
“아직 남아 있는 샘플들이 있나요?”
“있을 겁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ITL의 박사들은 자신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눈을 빛내며 토의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주제에 빠져 얘기하는 것을 한참 쳐다보던 이진성이 이 대위에게 물었다.
“그동안 1호가 얼마나 자주 공격해 왔어요?”
“우리가 여기 오고 나서는 이번에 세 번째네요. 여기 정리하면서 밖으로 도망쳐 나가고 1주일 좀 안 돼서 한번, 그리고 또 그 정도 있다 한번, 오늘이 그러고 2주 정도 된 건가?”
“매번 그렇게 좀비들이 많았어요? 오늘 저희가 처리한 게 거의 400은 되는 거 같은데?”
“에이. 아니죠. 처음에는 한 50 정도? 그다음에도 150이 안됐어요”
“소장님. 1호가 물면 사람이 금방 변한다고 하셨죠?”
“네… 그렇죠. 한 10여 분 만에 변이했죠.
“놈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좀비로 만드나 봐요. 있는 좀비를 모아오는 거면 좀 더 자주 왔을 텐데 띄엄띄엄 오는 거 보면 근처에 좀비도 사람도 많지 않나 봐요?
“아무래도 인근이 농촌이라서 인구밀도도 낮으니까요. 그리고 평택시까지는 거리도 좀 있고요”
“인근 마을 사람들을 전부 기지로 소개시키면 어떨까요? 놈이 좀비로 만들 사람들을 없애버리는 거죠”
이 대위는 캘리 소령과 잠시간 상의하더니 우려되는 부분을 말했다.
“얼마나 사람들이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기지 내 숙소는 수용 능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앞으로 변이할지 어떨지 모른다는 점도 있고요. 무엇보다 식량이 문제입니다. 지금 인원도 가을에 추수하기 전까지 먹을게 간당간당하는데…”
이진성이 소장을 바라보았다.
“소장님. 인간 변이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저희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확신은 못 하겠네요. 더 많은 데이터가 있다면 좀 더 높은 신뢰도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아. 캘리. 미국에 미국 사정과 다른 나라 사정을 좀 물어봐 줘요. 각국의 미군기지에서 취합되는 정보가 있을 거잖아요?”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 정보를 공개할지 어떨지는…”
“일단 물어나 봐 줘요. 그리고 이쪽의 1호 정보와 오늘 여기서 새로 들은 정보들을 미국 정부에 알려주는 조건으로 요청하면 주지 않겠어요?”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온 이진성 일행의 능력에 대한 정보와 1호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어차피 미국에 보고할 캘리였다.
소장은 그런 것들을 그냥 알려주지 말고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라는 뜻이었고, 캘리도 알아들었다.
“시도는 해 보겠어요. 하지만 결과는 기대하지 마세요”
장진의 통역을 들은 이진성은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식량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부족한 식량은 사냥을 통해 보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병력이 밖으로 나가기 곤란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저희가 밖에서 사냥해 와도 되잖아요”
“어디 가서 무슨 동물을 잡아 온다고요?”
“고라니, 멧돼지 같은 것들이요. 사람이 없어진 세상입니다. 산에서 먹이 찾아 많이 내려오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자주 보이기는 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멧돼지는 좀비 멧돼지가 더 많이 보이던데…”
좀비 멧돼지라는 말에 이진성 일행의 얼굴이 일제히 밝아졌다. 입에 고이는 침을 넘기며 장동건이 나섰다.
“어디서 봤어요? 그놈들부터 잡아요”
“왜요? 사람들한테 위험한가요?”
“위험? 그런 게 아니고, 얼마나 맛있는데요. 아직 안 먹어 보셨어요?”
“에? 그걸 먹어요?”
장동건의 말에 기지 사람들은 기겁했지만, 이진성 일행 전부가 나서서 극찬하는 말에 점차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렉스와 씬디, 장진은 자신들끼리 숙덕였다.
“혹시 저 사람들 좀비 먹고 더 능력이 좋아진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요. 우리랑은 너무 차이가 나잖아요”
“음… 우리도 먹어봐요. 당장 오늘 저녁에 나가서 찾아봐요”
그날 밤, 셋이 정찰 나간다는 거짓말로 나가서 밤새 멧돼지를 찾아 돌아다니다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알렉스 일행이 딴생각하는 동안, 회의는 주변 마을을 어떻게 확인할지의 내용으로 넘어가 있었다.
회의실의 스크린에는 기지 주변 지도가 떠 있었다. 그리고 이진성과 이재규 대위는 스크린 앞에서 지도를 짚어가며 구역을 나누고 인력 운용 계획을 짜나갔다.
어느덧 이진성은 자연스럽게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대위도 이진성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계획은 차곡차곡 수립되어 갔다.
“그럼 이렇게 두 팀으로 움직이고 수색할 때는 헬기로 공중정찰 지원하는 거로 하고요. 1호가 발견되면 즉시 차량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헬기에는 기총 사수와 토우 사수가 함께 타는 거죠?”
“네. 그렇게 하는 편이 공중에서 발견했을 때 선제공격할 수 있잖아요”
“형님. 팀별로 험비랑 장갑차 세대씩 같이 움직인다고 했는데 장갑차 운전은 누가 해요?”
“대위님. 병사 중에 장갑차 운전할 사람 있죠?”
“있습니다. 그런데 예비군들로 수색 인원 괜찮을까요?”
“아니면 예비군들이 기지 내부 경비하고 그 자리 인원들이 외부 수색 나가도 되고요”
“음… 그편이 더 안전할 것 같네요”
어느 정도 계획이 세워지고 이진성이 사람들 앞에 섰다.
“1호는 상처 입고 도망쳤으니까 당분간 시간은 있을 겁니다. 저번 공격과 이번 공격이 2주 정도 텀을 두었다니까 앞으로 그 정도 아니면 그 이상 텀을 두고 다시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하지만, 그전에도 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장 며칠 내로 오기는 힘들 겁니다. 앞으로 사흘 동안 1팀과 2팀이 각자 시가지 수색과 전투 및 인명 구출 훈련을 하겠습니다.
1팀은 저와 현주씨, 현희 누나, 동건이가 맡고 2팀은 관장님과 알렉스 중위님 일행이 맡습니다. 그리고… ”
앞에서 회의를 정리하는 이진성의 모습을 보며 나현주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