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쌀 도둑질
도만수의 말에 의하면 정부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국토 수복에 나선다는 것이다.
현재 지방의 중소 도시 몇 곳을 점령하고 그 인근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 인구 50만 이상의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큰 도시는 현재 점령 후의 관리가 불가능했다.
점령지를 방어할 만큼의 병력을 배치하면 다른 곳을 공략할 인원이 부족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의견이 진화자와의 연계였다.
구체적 계획은 아직 없었다.
큰 골자는 점령과 사후 관리를 진화자들에게 맡기고 일정 지역의 자치권을 주는 안이었다.
이미 정부는 그것을 바탕으로 연방제 체제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정부의 힘을 키운다는 생각이었다.
“몇 명이나 된다고요? 우리도 아직 이 근방도 다 정리 못 했는데?”
“하지만 시간만 있다면 자네들 몇 명으로 이 근방을 다 정리할 수 있지.”
“그렇긴 한데, 다른 지역은요?”
“지금 각 쉘터에서는 진화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네. 용인의 김 소장은 자네들이 있으니 열심히 안 할 뿐이지”
“그럼 그렇게 한다고 쳐요. 경기 남부 지역은 김 소장이 책임자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김 소장은 실패할 거네”
도만수는 김 소장의 실패를 거의 확신했다.
경기 남부는 인구가 너무 많다. 수도권은 포기해야 하는데 김 소장은 욕심을 내고 있었다.
수도권에 들어가면 분명히 실패할 것이고, 수도권을 포기하면 김 소장은 실적을 낼 수가 없었다.
평택은 이미 이진성 일행이 차지하고 있다.
수도권 남쪽부터 평택 북쪽으로는 동탄과 오산 정도밖에 없었다.
나머지 지역은 너무 시골이어서 점령의 의미가 없었다.
가만 듣고 있던 관장이 물었다.
“그래서 저희가 김 소장을 치고 자리를 차지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닐세. 그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리될걸세”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들은 이미 정부에서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네. 정부에서는 자네들을 김 소장보다 더 가치 있게 보고 있네.”
갑자기 정부에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말에 이진성은 황당했다.
“왜요? 정부에서 우리를 어떻게 알고요?”
“지금 전국에서 이 정도 영역을 스스로 개척한 진화자는 자네들뿐이네.”
“이건 우리가 한 게 아니죠. 이 대위가 먼저 들어온 곳에 우리가 신세 지고 있는 거죠.”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이 대위가 자네들한테 의지하고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최소한 군수산업이 정상화 되고 군대가 다시 조직될 때까지는 군과 정부는 진화자에게 기댈 수밖에 없네.”
관장이 다시 물었다.
“그건 한시적 관계 아닙니까? 사회가 정상화 되면 다시 정부와 군이 상황을 통제할 것 아닙니까?”
“그게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십 년? 이십 년? 내 생각에 한 세대에서 두 세대는 지나야 하네”
사람은 뒷간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법이다.
모든 곳의 평정이 끝난 후 정부의 말을 안 듣는 진화자가 나올 수 있다.
몇 군데는 응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이 많다면 정부에서도 쉽게 하지 못할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결국 정부는 연방제로 서서히 힘을 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까 김 소장이 말한 자치권이 이런 거에 기반한 거였군요.”
“그렇네.”
“군인들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 양곡창고 얘기가 아니라 이거였습니까?”
“그렇지.”
“어차피 저희에게 주어질 것이라면 그냥 그렇게 흘러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권을 보면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야. 자네들이 제대로 안 하면 죽 쒀서 개 주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 당장 김 소장도 침 흘리고 있고.”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이권에 눈이 먼 사람이 넘쳐났다.
도만수는 이진성 일행이 미리 상황을 살피며 정부와 연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진성은 이해도 가고 고맙기도 하면서 문득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저희한테 왜 이런 걸 말씀하세요? 어르신은 누가 경기도를 먹어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아니지. 김 소장이라면 이권을 나한테 나눠 줄 이유가 없지.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먹는다면 역시 힘들어지는 거고.”
“저희는 드린다는 보장 있고요?”
“없지. 그래서 이렇게 양곡 창고로 거래를 하려는 거 아닌가?”
“저희가 나중에 안 지키면요?”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손해 볼 건 없네. 어차피 내 쌀도 아니거든. 그저 가능성이 가장 큰 자네들과 거래 하고 싶은 거네. 허허허”
이유를 알 수 없는 선의는 오히려 의심스럽다.
도만수의 의도는 충분히 명백했다.
이진성 일행에게 부담이 되거나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일단 식량의 확보가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시죠. 토지운영권 드릴게요. 창고 위치 알려 주세요”
“이거 왜 이러나? 아무리 상황이 이래도 계약인데 계약서는 써야지. 허허”
효력이 있든 없든 요식행위는 갖추는 게 좋다는 도만수의 고집이었다.
결국 세 사람은 밀약의 계약서를 작성하고 지장을 찍어 나눠 가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가지 약정이 더해졌다.
도만수가 이진성의 기획실장이 되는 것으로.
‘지금부터 부려 먹어야지. 크크크’
이진성은 도만수가 김민지만큼만 해 주길 바라며 속으로 기뻐했다.
* * *
그날 밤 이진성의 집에서 도만수의 진행하에 정부 양곡 창고를 털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혹시라도 말이 나갈까 참석인원은 이진성 일행으로 제한했다.
일단은 티 안 나게 한 사람이 가서 창고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혹시나 좀비 습격이 있을 경우를 대비, 총알만 있으면 가장 효과적으로 좀비를 잡는 장동건이 가는 것으로 결정 봤다.
“그러니까 동건이 니가 전단살포 한다고 하면서 헬기로 이 위치로 가는 거야”
“뭐라고 하고 거기 내려요?”
“이놈아. 수상한 것을 봤다고 하던지, 화장실을 간다고 하던지. 뭘 쓸데없이 묻고 그래?”
“할아버지. 확실히 하려고 그러죠. 할아버지가 기획하기로 했다면서요? 그런 분이 적당히가 뭡니까?”
“어허. 다 자네 능력을 믿으니까 하는 소리지.”
“됐네요.”
“넌 창고 비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면 돼. 있으면 박 준위님한테 말해서 무전 보내.”
“그리고 차량 올 때까지 거기서 대기?”
“그렇지”
“거기에 좀비들 있으면 나 혼자 다 잡으라고?”
“응. 총알 충분히 가져가. 한 200발이면 되니?”
“150발이면 장갑차 올 때까지 되겠지. 창고 건물에 둥지 튼 놈이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어? 아파트도 아니고.”
“그리고 박 준위님한테 이 도로 상태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고.”
이진성과 도만수가 지도를 집으며 길을 설명했다.
창고 서쪽으로는 서울 1호선 전철이 지나고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1번 국도가 지나고 있었다.
1번 국도로 내려오다 45번 국도로 갈아타면 기지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그 길을 장갑차가 지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길이 막혀 있어도 밀고 나갈 정도만 되면 충분했다.
“근데 그렇게 되면 김 소장한테 알려지지 않겠어요?”
“그건 상관없네. 그때가 되면 김 소장은 손 못쓰네. 자네들과 충돌할 일을 할 상황이 아니거든.”
“할아버지. 거기 다른 사람들 있으면 어떻게 해요?”
“허허. 현주 씨는 참 꼼꼼해.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여기 오면 안전한 집 준다고 꼬시는 것도 동건이 역할이지.”
“와. 내가 하면 쓸데없는 질문이고 누나가 하면 꼼꼼한 거고. 너무 하시네”
“뭘 너무해? 질문의 중요도가 다르잖아?”
“씨. 다들 나만 미워해”
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조용히 가서 창고를 확인하고, 곡식이 있으면 가서 실어 오면 그만이었다.
평택 시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좀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는 했다.
하지만 장갑차로 가서 싣고 올 것이다. 싣는 동안만 잘 방어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른 변수가 있다면 그곳을 선점한 인간의 존재 정도였다.
하지만 창고에서 사는 것보다 안전한 집에서 사는 것으로 회유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1호가 거기 있는 건 아니겠죠?”
“말이 씨 된다. 그런 말 하지 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택 시내까지 가 있을 확률은 적었다.
만약 있다 해도 장갑차와 함께 이진성, 관장, 김현희가 갈 것이었다.
단 모두가 기지를 비울 수는 없어 나현주가 남아 신입들을 통솔하기로 했다.
“그럼 내일 가는 거로 하고 이만 끝내요”
“내일 봐요”
* * *
전투화에 전투조끼까지 챙겨입고 헬기에 오르는 장동건을 보고 박 준위가 웃었다.
“하하. 동건씨. 전단 뿌리러 가는데 뭘 그렇게 챙겨왔어?”
“습관이 돼서 그래요. 항상 이러고 다녔더니 안 그러면 불안해서. 헤헤”
“참나. 그래도 하늘에 있다 오는 건데 뭘 그렇게. 안심해. 어서 타”
헬기에는 기관총과 토우를 담당할 사수 한 명이 더 타고 있었다.
사수는 이등병이었다.
자대 배치받자마자 사태가 터졌다고 했다.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기회 되면 사격 시범 좀 보여 주십시오”
“하하. 시범은 무슨. 힘들죠?”
“아닙니다.”
신병 특유의 어리바리가 아직 남은 그와 얘기하는 동안 헬기는 평택 상공을 날고 있었다.
창고는 서정리역에 가까이 있었고 그곳은 평택 북서쪽에 있었다.
송탄역까지 올라가서 거기에서부터 전단을 뿌리며 전철길을 따라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목표 지점에 갈 수 있었다.
전단을 뿌리며 본 주택가는 엉망진창이었다.
불에 탄 곳이 셀 수 없이 많았고 많은 길이 차들로 막혀 있었다.
지상으로 접근하면 썩는 냄새도 강하게 올라왔다.
헬기 소리에 어디선가 튀어나온 좀비들도 있었다.
몇 놈은 사격 시범을 보인다고 미간을 뚫어 버렸지만, 대부분은 무시하고 지나갔다.
“이런 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래도 뿌리고 보는 거죠. 뭐”
송탄역 주위를 원을 그리며 살포하고 마침내 헬기는 서정역을 향해 남쪽으로 움직였다.
아래를 유심히 보던 장동건의 눈에 목표로 하는 농협 건물이 보였다.
건물은 듣던 대로 컸다.
옥상도 넓고 장애물이 하나도 없어 헬기가 착륙하기에 충분했다.
서정리역 가까이에 그런 건물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준위님. 저 배가 아파서 그런데 잠깐 착륙 부탁드릴게요”
“에? 급해?”
“네. 쌀 거 같아요”
“하. 참. 위험한데. 어디 착륙하나?”
장동건이 농협 건물을 지목했고 박 준위가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기수를 그쪽으로 향하고 고도를 천천히 낮추며 안전을 확인하는 박 준위였다.
그런데 헬기가 농협 건물의 남쪽 도로가 보일 위치에 접근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거 좀비 습격 중인데요?”
박 준위가 말하기 전에 장동건과 기총사수는 이미 좀비들이 떼로 모여 건물 입구로 들락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쌀 거 같아? 저쪽 역 너머에 공터로 갈게. 거기서 볼일 봐.”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고요. 저 이 건물에 내려야 해요.”
“왜?”
“무조건 그래야 해요. 일단 옥상에 저 좀 내려 주시고 저 문 앞에 있는 놈들 좀 잡아 주세요”
박 준위는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기수를 돌려 옥상 상공으로 진입하고 서서히 고도를 내렸다.
장동건이 소총을 챙기고 헬기 헤드셋을 벗고 작전용 헤드셋으로 갈아 차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살려 주세요”
사람들은 공황상태로 보였다. 그대로 두면 헬기에 매달릴 기세였다.
박 준위는 착륙을 포기했다. 착륙하다 사고 날 위험이 너무 컸다.
“뛰어내려요.”
박 준위의 지시에 장동건은 옥상으로 점프하고 헬기는 급하게 기수를 돌리며 떠올랐다.
그런 헬기를 허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며 난감해하는 장동건은 곧 헬기에 터져 나오는 기관총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시에 건물 남쪽의 입구 주위에 모여있던 좀비들과 건물 유리창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씨. 유리창까지 깨면 어떻게? 어? 어?”
헤드셋을 통해 조심해서 사격하라고 말하려는 도중에 토우 미사일이 날아가 정문 앞에 꽂혔다.
그리고 그 충격에 깨지지 않았던 다른 유리까지 다 깨져 버렸다.
‘아. 시작부터 엄청 꼬이네. 이런 건 시나리오에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