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 에이지 백수 생존기-92화 (92/145)

# 92

쌀 + α

“에구. 일단 내려가 봐요. 양곡 창고도 확인해야 하는데 밑에 얼른 정리하고 가봐요.”

도끼를 챙겨 들고 일어선 이진성이 가방을 가리키며 장동건에게 말했다.

“동건아. 거기 크레모아 들었어. 놈들 더 오기 전에 밑에 설치하자.”

“아. 맞다. 아까 봤어요. 그런데 밑에 온통 뚫려 있어서 이거 가지고 될까 모르겠네.”

건물 외벽의 모든 유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막아야 할 범위가 너무 넓었다.

지금 있는 2층에서도 바깥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뻥 뚫린 그곳으로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 숭숭 불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크레모아는 다섯 개, 그것들과 수류탄을 챙기고 탄창을 넉넉하게 챙긴 장동건이 진화자를 포함한 생존자들 돌아봤다.

“혹시 소총 필요하신 분 계세요?”

진화자들이 비록 격투기 계열이 대부분이었지만, 혹시라도 총이 더 편한 사람도 있을 수 있었다. 여분의 소총 열 자루가 같이 왔다. 그런 사람은 총을 쓰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까처럼 떼로 몰려오면 잘 못 맞춰도 총을 쏘는 게 훨씬 빨랐다.

여기 사람들이 소총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자신들에게 뺐거나 할 것도 없으니 쥐어 줘도 상관없었다. 혹시라도 까불면 자신이 제압하면 그만이었다.

진화자 중 남자 다섯 모두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일반인 중에서도 세 사람이 손을 들었다. 손든 일반인 중 하나는 10대 소년이었다.

“학생, 총 쏴본 적 없잖아. 위험해서 안 돼. 나중에 배워서 쏘고 지금은 그냥 있어.”

“쏠 수 있어요.”

“안돼. 그러다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말고 가만있어.”

자신에게도 달라고 바락바락 우기는 학생을 무시하고 일곱 자루의 총과 탄창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나머지는 권투녀에게 맡겼다.

“위험한 물건이면서 동시에 우리 생명줄이니까 잘 관리해 줘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이진성, 관장과 장동건이 움직이는데 총을 받아든 진화자 다섯이 꼼짝을 안 하고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뭐해요? 안 따라 오고?”

“우리도요?”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한 남자의 모습에 장동건은 헛웃음이 났다.

“저기요. 그럼 우리가 밑에서 놈들 잡아 주는 동안 여기서 편히 계실 생각이셨어요? 그 총은 왜 받아 들었어요?”

“그게… 여기서 총으로 경계하고 있으라는 줄 알고.”

“이거 보세요. 이 안에 계실 거면 총이 왜 필요해요?”

“동건아. 빨리 가자. 싫다는 사람은 놔두고 갈 사람만 같이 가.”

입구를 막고 있는 가구를 빼내던 이진성의 말에 장동건이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려 가실 분 안 계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저도 갈게요.”

“저도.”

잠시 망설이던 사람 중에서 진화자 셋이 앞으로 나섰다.

나머지 넷은 겸연쩍은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다시 물었다.

“군대 다들 다녀오셨죠?”

넷 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여러분들은 바깥 경계만 해주세요. 오는 놈들이 있으면 쏴 주세요. 사격에 자신 없으면 총알 낭비하지 말고 그냥 계시고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나온 일행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은행의 1층 객장으로 통했다. 은행 손님이 2층의 외환창구나 VIP룸으로 가기 위한 계단이었던 것이다.

계단의 끝에는 콘크리트 파편이 쌓여 있어 밑에서 올라오려면 그것들을 타고 넘어야 했다. 반면에 내려가기에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파편을 빠져나온 일행은 남쪽 벽이 뻥 뚫린 은행 객장과 그 구멍 너머의 마트를 볼 수 있었다. 아까의 미사일 폭발 흔적이었다.

“이래서 거의 안 올라왔나 보네.”

일행이 들여다본 마트 안쪽은 제대로 서 있는 진열대는 하나도 없었다. 우그러진 고철덩이로 변한 진열대 파편이 널려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제자리에 곱게 서 있는 놈은 없었다.

유리가 있었던 뻥 뚫린 외벽 밖 길에도 당장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오고 있는 놈도 없는지 헬기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동건아. 이분들 하고 크레모어 설치하고 있어. 나랑 관장님은 창고 보고 올게.”

“옛 설”

“아. 그리고 그 헤드셋 나 주라. 밖에서 박 준위님이랑 통신 좀 하게.”

이진성이 헤드셋을 받아서 착용하고 일행이 마트로 들어섰다. 자빠지거나 밀려서 겹쳐진 진열대에 깔리거나 끼어있는 좀비들이 꽤 보였다. 그리고 아직 돌아다니는 놈들은 몇 보이지 않았다.

그 몇 남지 않은 놈들이 사람들을 보고서는 난장판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엉망인 바닥 때문에 제대로 속도를 내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놈들은 몇 발의 총성과 함께 죽어 나자빠졌다. 이내 깔려있거나 끼어 있는 놈들을 사살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이진성과 관장은 창고로 향했다.

* * *

건물을 돌아 도착한 창고 입구의 대형 셔터는 카고트럭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그 옆에는 보통의 철문이 하나 있어 평소에 사람은 그리로 출입한 것 같았다. 그리고 셔터도 문도 모두 잠겨 있었다.

“여긴 약탈은 없었나 보네요. 하긴 아까 지점장이 여기서 곡식 꺼내다 먹었다니까…….”

“장갑차 빨리 오면 좋겠소. 까만 눈이 근처에 있다면 놈들이 또 몰려올 수 있는데.”

“박 준위님. 장갑차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 좀 하고 싶은데요.”

<잠깐만. 중계해 줄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김현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우리 진상이, 거기는 어때?>

“또. 또. 진상이 그만 좀 해요. 여긴 지금은 소강상태 같아요. 그래도 여기 사람들이 까만눈 소리 들은 거 같다고 하는데 빨리 올 수 있어요?”

<1호야?>

“몰라요. 1혼지 아닌지.”

<우리 아직 얼마 못 갔어. 이대로 가면 두어 시간은 더 걸린다는데?>

“그렇게나요?”

<워낙에 길이 막혀 있어서 뚫으면서 가느라고 그래>

김현희의 말과 함께 이진성의 헤드셋으로 폭죽 터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또 쏜다. 막 대포로 쾅쾅 쏘면서 나가고 있거든. 소리 들리지?>

“네. 들리네요. 잠깐만요.”

“박 준위님. 다 들으셨죠? 혹시 가셔서 다른 빠른 길 찾아 주시면 어때요?”

<그래도 되겠어? 여기 괜찮겠어?>

“동건이 총알도 충분히 있잖아요. 다시 오실 때 까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 헬기에서 잡는 거 얼마 되지도 않고요.”

<그렇긴 한데… 공중정찰 없어도 되겠어?>

“근처 높은 건물 올라가 있으면 되겠죠.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그래. 그럼>

“누님 들었죠?”

<어. 헬기 오면 가능한 빨리 갈게>

김현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헬기는 고도를 높이며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바로 앞에 보이는 5층짜리 다있소 건물 너머로 사라졌다.

관장과 이진성은 다시 건물 앞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봤다. 높은 건물로는 방금 헬기가 지나간 다있소 건물과 저 사거리 대각선 코너에 있는 6층짜리 그리스 모텔 건물이 있었다.

“내가 저 모텔로 가지. 진성 씨가 저 앞으로 가시오.”

“그럴까요?”

천천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눈에는 크레모어 설치를 막 마치고 인개선을 끌고 은행 쪽으로 가는 장동건과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2층까지 선을 끌고 갈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진성이 다있소로 가려고 차도를 건너려고 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투두두두두두~ 투두두~

기관총 소리와 함께 박 준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성 씨, 그쪽으로 놈들이 가고 있어. 건물 사이에 가려서 잘 안 보이는데 적지 않아>

박 준위의 말에 이어 이병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준위님. 동쪽에서도 옵니다.>

<진성 씨. 일단 내가 다시 그쪽으로 갈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로터 소리와 함께 나타난 헬기는 농협에서부터 고도를 높이더니 내려오면서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사방에서 오고 있는데? 어쩌지?>

“얼마나 많아요? 제일 가까운 건 어느 방향이에요?”

<숫자는 모르겠어. 건물에 가려서. 제일 가까운 건 북쪽>

북쪽이면 아까 놈들이 옥상을 넘어오던 그 건물 방향이다.

“관장님. 북쪽 놈들이 제일 가깝데요. 관장님이 여기서 동건이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박 준위님. 총알 있는 거 다 쓰고 장갑차 한테 가 주세요.”

말과 함께 관장은 마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트에 있던 장동건은 갑자기 들린 기관총 소리와 다시 돌아온 헬기, 그리고 뛰어 들어오는 관장의 모습에 다시 놈들이 온다는 것을 알아채고 준비하고 있었다.

“크레모아 준비 다 됐소?”

“다 됐어요. 격발기만 준비하면 돼요.”

“격발은 저기 벽 뒤에서 합시다. 서두릅시다.”

헬기는 농협 건물을 넘어 북쪽의 사거리 상공에 자리 잡고는 사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이진성은 다있소 건물로 뛰쳐 들었다.

쾅~

옥상 문을 열어 재치고 뛰어나온 이진성은 숨돌릴 틈 없이 주위를 살폈다.

남쪽에서 차도를 따라오는 놈들이 보였다. 놈들이 오면서 골목으로 들락날락 하는 것으로 봐서 차도로 오는 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쪽에서는 남쪽보다 적게 보였다. 약 100m 앞의 건물 신축 현장 뒤로는 모텔 건물이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동쪽을 돌아봤다. 어지러이 있는 건물들 사이로 언듯 달려오는 놈들이 보였지만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게 없네. 저쪽으로 가야 하나?”

길 건너 그리스 모텔이 이곳보다 높았다. 그곳에서 동쪽을 살피기 위해 다시 내려가려던 이진성의 고개가 모텔의 옥상을 향해 돌아갔다.

“씨풀”

그곳에는 검은 눈의 좀비 하나가 이진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1호는 아니었다. 놈은 암컷이었고 덩치도 크지 않았다. 동탄의 그 암컷 까만눈 보다 작은 체구였다.

“준위님. 저 있는 곳 맞은편 모텔 옥상에 까만눈 있어요. 그놈부터 쏴 주세요.”

<그래? 지금 이쪽으로 몰려오는 놈들도 많은데?>

“그것들은 동건이랑 관장님이 잡게 놔두고 이쪽부터 해결해 주세요. 이놈만 잡으면 나머지는 쉬워요.”

박 준위는 대답 대신 급격기동으로 헬기를 상승시켜 모텔로 향했다. 그리고 모텔 옥상에는 기관총탄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놈은 사격이 시작되면서 바로 이진성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사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잡았어요?”

<맞추지도 못했어. 보통 빠른 게 아니야>

하긴 보통 좀비 놈들도 헬기에서 쏘는 기관총으로 잡기 힘든데, 까만눈을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그래도 놈을 잠시라도 묶어 놓는다면 다행이었다.

“제가 그쪽으로 건너갈게요. 그리고 장갑차에 무전 보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오라고 전해 주세요.”

<여기 총알도 얼마 없어. 이거 다 쓰고 그쪽으로 갈게>

이진성은 다시 계단을 달렸다. 기관총탄이 떨어지기 전에 저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총탄이 떨어지면 놈이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관장과 함께라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막 1층에 내려섰을 때 밖에서 연속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크레모아 소리였다.

다섯 번이 울린 것으로 봐서 한꺼번에 다 터트렸던 것이다. 그만큼 많이 몰려 왔다는 뜻이었다.

이진성이 다있소를 나섰을 때는 소총들이 불을 뿜고 있었다. 1층뿐만 아니라 총을 받은 2층의 네 명도 사격을 하는 것이 보였다.

빗발치는 총탄에 비해 죽어 나가는 좀비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쏘는 사람이 많아서 많이 죽고 있었다.

“씨발, 전쟁터야 뭐야?”

눈앞에는 농협 건물로 달려드는 좀비들과 농협에서 쏟아져 나오는 총탄, 가끔씩 터지는 수류탄, 공중에는 기관총을 쏴대는 헬기. 상대가 좀비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전쟁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관장과 같이 가는 것은 포기했다. 저 정도면 관장이 도와줘야 했다.

사거리 건너 모텔로 가려면 앞의 좀비와 총알을 뚫고 가야 한다. 좀비를 뚫고 가는 것은 일이 아닌데 걱정되는 것은 총알이었다. 장동건이라면 자신을 맞출 일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걱정이었다. 망설이던 이진성은 결국 달려나가며 소리쳤다.

“나 쏘지 마!”

총 쏘는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