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와우! 엄청난데요.”
장갑차로 셔터를 밀고 들어간 창고에는 엄청난 양의 곡식이 쌓여 있었다. 천장까지 닿아 있는 앵글 구조물에는 칸칸이 마대자루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또 한쪽 벽면으로 경사로가 2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게차로 2층으로 올라가지 위한 구조로 보였다.
대충 둘러봤지만 터진 포대는 안보였다. 쥐의 침입은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건축 설계 당시부터 쥐에 신경 써서 지은 것 같았다. 군데군데 거미줄은 많이 보였지만 그것들이 곡식을 훼손하지는 않으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1층에는 전부 쌀인가 봐요.”
뛰어다니며 앵글에 붙은 명찰을 확인한 장동건이 통로를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때 2층에서 경사로로 고개만 빼꼼한 김현희가 외쳤다.
“2층도 전부 쌀이야.”
경계서는 군인을 제외한 사람들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의 모습도 1층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앵글 구조물이 있었고, 역시 빼곡하게 곡식이 들어차 있었다. 1층에 있던 하역 공간이 2층에는 없어서 더 많은 적재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3층으로 가 봐요.”
3층은 1층, 2층과는 달랐다. 그곳에는 건고추, 마늘, 콩, 땅콩, 양파, 배추, 무, 감자, 고구마 같은 것들이 있었다. 배추는 상당수 썩고 있었지만 나머지 작물은 대부분 멀쩡했다.
“김치 담아 먹을 수 있겠다.”
화사한 얼굴로 건고추와 배추, 무를 들고 나온 김현희였다.
“이런 것도 정부 수매해요?”
명찰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일부 포대를 열어 보던 이진성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감탄사 비슷한 것이었다.
“물가 조정용으로 수매했다가 풀었다가 그러지. 아마 여기 있는 것들은 품목이 계속 변할 거야. 양도 일정하지 않고. 물가가 오르면 비축분을 풀고, 내리면 사들여서 가격을 조정하는 거지.”
“올~. 그런 거 어떻게 아세요? 아저씨 기술자잖아요.”
“이거 보셔 동건 씨. 우리 집이 원래 농사짓는 집이잖아. 이 정도야 기본이지. 이것들이 말이지… “
이택진은 장동건을 붙잡고 정부 수매와 그것이 농가에 미치는 영향, 농가의 불만 등을 떠들기 시작했다.
“놔두고 내려 가자. 저 양반 아는 거 자랑하기 시작하면 끝없어.”
김현희는 그런 이택진을 보고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1층을 향했다. 이진성과 박두식도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장동건이 따라붙으려는데 이택진은 장동건을 끌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며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창고 내의 곡식의 양은 장갑차 열대로 한두 번에 옮길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 경계를 위한 장갑차도 남아 있어야 했다.
이진성은 장갑차 내부를 들여다보고 들어갈 수 있는 양을 가늠해 봤다. 많아 봐야 세 팔레트 정도의 양이었다.
“대포 달린 놈하고, 동서남북 하나씩 해서 다섯 대 남기고 다섯 대 밖에 못 움직일 텐데 장갑차로는 다 못 옮기겠어요.”
“기지에서 트럭 오라고 하면 되잖아.”
“트럭은 몇 대가 있는데요?”
병사 하나가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 30여 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거 밖에 없어요? 생각보다 적네. 그럼 몇 번을 왕복해야 할까나?”
“이삼일이면 되지 않을까?”
“일단 전부 보내 달라고 해 주세요.”
그 말에 병사는 장갑차로 들어가 기지와 교신을 시작했다. 그때 박두식이 의견을 냈다.
“이 근처 트럭 중에 움직이는 것들도 쓰면 되지 않을까요?”
“아. 그럼 조금은 빨라지겠네요. 근데 운전은 누가?”
“여기 생존자들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맞다. 그 사람들 잊고 있었네요. 아직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보지도 못했네. 기지로 간다고 할까요?”
“여기 꼴을 봐라. 있으라고 해도 안 있겠다. 건물은 다 부서지고 우리가 여기 식량 다 가져가면 자기들이 어쩔 거야?”
“그렇긴 하네. 그럼 일단 그 사람들 한테 가 봐요.”
일행이 2층에 도착했을 때 입구를 막았던 가구는 이미 치워 통로를 뚫어 놓고 군인 몇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은행에서 쓰는 양식지가 담긴 박스와 기타 자질구레한 사무용품들이 담긴 쇼핑백 등이 들려 있었다.
이진성이 그런 그들 중 하나를 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아. 뭐든 쓸만한 물건 있으면 다 담아 오라는 명 받았습니다. 특히 전단 만들 A4 종이 많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곳뿐만 아니고 근처 건물 다 수색 중입니다.”
“아. 네. 수고하세요.”
병사를 보낸 이진성에게 김현희가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이 대위도 은근히 챙기는 거 잘해. 하긴 저런 것들이야 누가 약탈이나 했겠어? 대부분 그냥 남아 있겠지.”
이진성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 시간, 주위 건물에서는 별별 잡동사니가 다 수거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이름 모를 약품과 주사기, 거즈뿐만 아니라 의사 가운, 입원실 침대보 등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다 챙겨지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식칼, 도마, 조미료, 물통, 수저 등이 챙겨지고 스포츠용품점에서는 줄넘기, 아령 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물건들까지 전부 담기고 있었다.
일행이 생존자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장갑차와 군인의 존재 때문인지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이었다.
단지 군인들이 잡동사니를 쓸어 담아 가는 것을 보면서 언짢은 얼굴을 보이는 사람도 몇 있었다.
“저기… 여기가 이렇게 돼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저희 철수할 때 같이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진성은 혹시라도 그 근처에 다른 피난처를 찾아 남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했다.
사실 그의 안중에 일반인 생존자는 없었다. 그들은 남아도 그만이었다. 아이들이 있었지만 어른들과 함께 남는다면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그들이 좀비가 된다 해도 고작 스무 마리 남짓일뿐더러, 이곳 서정역 근처의 놈들이 기지에 영향을 줄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여덟 명의 진화자였다.
“당연히 가야죠. 저희는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어요.”
60대 아주머니 한 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이진성의 손을 잡고 고맙습니다를 계속 외쳤다. 그 모습을 본 이진성은 조금 전까지 이들은 죽으나 사나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던 게 조금은 미안해졌다.
큼큼~
헛기침을 한 이진성이 아주머니의 팔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여러분을 이런 곳에 왜 버리고 가요? 큰일 날 말씀을 하세요.”
말하면서 자신이 많이 뻔뻔해졌음을 느끼는 이진성이었다.
* * *
기지 내 주요 인물들이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농협 창고를 털어 온 날로부터 1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안건은 평택에서 가져온 곡식과 잡동사니에 대한 현황보고와 생포한 검은 눈의 검사 결과였다.
“이로서 쌀은 현재 저희 인원이라면 2년 이상을 충분히 먹을 양입니다. 그리고 가져오신 다른 작물 중 일부는 파종용으로 쓸 수 있다는 말에 따라…….”
이 대위가 하는 얘기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실제로 그것들을 가져온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향후 경작 같은 것은 그들의 관심 밖 일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다른 지역에 가시면 종자로 쓸 작물을 꼭 가져오시기 바라며…….”
언제 어딜 갈지도 모르고 이제 곧 여름인데 뭐가 남아 있기나 할지 모를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발표를 끝낸 이 재규가 자리에 앉고 박인화가 나왔다. 그동안 동태눈을 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지난 한주 동안 생포한 그 검은 눈 개체를 검사해 봤습니다. 아시다시피 시설 대부분이 못 쓰게 된 관계로 많은 검사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아직 검은 눈이 되는 개체가 다른 개체와 어떤 차이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는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실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들리는 박 소장의 말에 일제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놈이 어떤 조건에서 몸의 방어력이 떨어지는지는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이어진 박 소장의 말에는 이미 일행이 알고 있는 것도 있었고, 몰랐던 것도 있었다.
놈이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으면 정상적인 방어력이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박인화 소장은 거기에 구체적인 숫자를 더했다.
“실험에 의하면 놈이 방어력을 높인 부위가 다시 정상으로 풀리기까지는 20초 정도가 소요됩니다. 그리고 10초 내에 스무 곳 이상의 지점에 일정 충격량 이상의 공격을 받으면 방어력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또한 한 부위에 초당 30회가 넘어가는 타격에도 방어력이 급격히 떨어졌고요.”
박 소장이 말한 충격량은 이진성과 관장, 나현주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크기였다. 박 소장이 이해하기 쉽게 든 예는 지름 30Cm의 생나무를 부러뜨리는 것이었다. 이진성과 나현주는 그 정도는 부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터트릴 수 있었고 관장도 검으로 한칼에 벨 수 있었다.
하지만 10초 내에 스무 곳의 동시 타격이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 사람 모두 최대 스피드로 공격할 때 10초에 스무 번 이상도 가능하지만 그 스무 번의 모든 공격이 요구되는 충격량을 담을 수는 없었다.
그 충격량을 담아서 그런 숫자의 공격을 하려면 역시 협공 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셋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더 많은 사람이 협공해야 하지만 서로 동선에 방해받지 않고 공격하려면 최대가 넷이었다. 결국 다른 진화자들의 능력을 최대한 빨리 키워야 한다는 말이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다른 검은 눈도 비슷할지 아니면 더 강할지 아직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에 잡아 온 개체가 10대의 암컷이었다. 외관상으로 동탄의 암컷보다 근육의 크기나 덩치가 작았다. 1호는 물론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1호 정도 되면 훨씬 더 큰 공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가 저번에 1호랑 붙었을 때, 놈이 동건이 총에 팔을 다친 덕을 봤거든요. 그때 겨우겨우 약간의 부상을 입히긴 했는데 총격 또는 포격과 병행하면 어떤가요?”
“포격에 직격 한다면 분명히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포격에 직격 당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죠. 이번에 잡은 개체도 쏟아지는 박격포탄을 거의 다 피하고 다리에 약간의 부상을 입고 피부에 화상 같지도 않은 화상을 입은 정도니까요.”
장동건과 알렉스가 동시에 같은 내용을 물었다.
“총탄은요?”
“소총탄은 직격 한다면 몸통 같은 부위는 연발로 반경 10cm 이내 부위를 열 발 이상 맞아야 탄알이 근육층을 뚫고 들어갑니다. 아니면 가죽을 조금 뚫는 정도입니다. 저번에 1호 팔이 뚫린 것도 운이 좋았습니다. 어쩌면 그때 팔의 방어력을 높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장은 1호의 탈출 당시 이야기를 덧붙였다.
“1호가 연구소에서 탈출할 때 등에 소총탄 몇 발을 맞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1호는 아무런 대미지를 입지 않았었습니다.”
* * *
이진성은 맥주 한잔을 하며 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며 아까의 회의 내용을 복기하고 있었다.
검은 눈에게 대미지를 줄 구체적인 방법을 짤 수 있는 자료가 나온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충분한 식량도 확보했다. 거기에 더불어 이곳에서 새로 발굴한 진화자와 농협에서 따라온 진화자들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강적을 상대할 방법이 나오기 시작했고,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은 없어졌다. 그리고 함께 싸울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회의 막바지에 도만수가 던진 의제도 좋았다.
“소극적으로 이 주변만 정리하면서 1호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보다 평택 같이 좀비가 많은 곳을 선제 타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놈들은 필요에 의해서 군집의 크기를 불립니다. 만약에 검은 눈이 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검은 눈들끼리 군집을 합친다면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수를 한 번에 상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검은 눈이 또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그들의 수를 줄여 놓아야 합니다.”
그 의견에는 반대도 많았지만, 결국 투표에 의해 그렇게 하기로 결정되었다. 앞으로 신규 인원의 능력 향상과 전단을 통한 인원 모집이 어느 정도 된다면 평택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여태까지 세상에 휩쓸려 흘러가는 데로 살아온 이진성이었다. 그런 그가 비록 바지사장일지언정 한 집단의 대표가 되었고, 사람을 얻었다. 그리고 앞으로 능동적으로 세력권을 넓혀 갈 것이다.
만감이 교차하며 가슴에 뭔가가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달을 보는 그의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흥분과 함께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