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여기 볼트는 풀고, 여기는 용접기로 절단해야겠네. 이 지지대 뽑으려면 콘크리트는 부숴야겠고…”
방음벽에 붙어 자세히 살피며 해체 과정을 혼잣말하던 이택진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내리지? 풀어서 떨어뜨려야 하나?’
그가 보기에 방음벽 한 칸의 크기로 봐서 무게도 만만찮아 보였다. 유지보수 사다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 지면을 내려다봤다.
‘여긴 15m 정도 되겠네. 이 정도면 지면에서 아무리 가까운 지점이라도 10m 정도는 될 거 아냐? 떨어뜨려도 되려나?’
좀 우그러지는 정도는 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대충 두드려 펴서 쓰면 그만이었다. 다시 방음벽으로 걸어간 이택진이 벽면을 두드려봤다.
“이 정도면 크게 우그러지지도 않겠네. 그나저나 이런 게 얼마나 있으려나?”
자신이 두드리고 있는 방음벽은 그 위치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50m 정도까지 밖에 이어져 있지 않았다. 그 너머로는 그냥 난간이 있는 구간이고 그 뒤로 다시 방음벽 구간이 보였다. 선로 전체에 방음벽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쓸 수 있는 방음벽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온 김에 확인하고 가야겠어’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아래로 군계천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그곳부터 북쪽으로 팬스를 설치해 나가면 됐다.
이택진은 남북으로 뻗은 철로의 양쪽을 다시 확인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북쪽으로 걸어 가려 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후다닥 사다리를 내려가 험비에서 소총과 탄창을 꺼내 들고 다시 올라왔다.
“혹시 모르니…”
소총을 어루만지며 걸어 나간 그는 결국 총을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안성천까지 왕복 12km를 걸어야 했다.
쓸만한 방음벽의 총연장 길이를 확인하면서 3km 만 되면 돌아오려고 떠난 길이었다. 양쪽으로 있으니 그러면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성천까지 가는 동안 쓸 수 있는 방음벽의 총연장 길이는 2km 가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보통의 난간 구간과 아크릴 방음벽 구간이었다.
그리고 철제 방음벽 구간도 두 종류였다. 처음 이택진이 봤던 것은 높이가 거의 4m에 육박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구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폭 50cm 정도의 철제 패널을 3m 정도 쌓아 올린 형식이었다.
‘짧게나마 있는 지상구간에 이어 붙여서 막으면 얼추 되겠어.’
콧노래를 부르며 털레털레 걸어 돌아오는 이택진은 아쉬움과 함께 뿌듯함도 느끼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그래도 상당 구간은 막을 재료를 찾아냈다는 뿌듯함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업적에 기뻐하며 그가 원래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다섯 시간이 지나서였다. 좋은 기분으로 도착한 그는 사다리를 내려가려다 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군인들을 발견했다.
‘뭐지? 좀비 왔었나? 총소리 못 들었는데?’
한 병사는 뭔가를 찾고 있는지 망원경으로 계속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차에서 내려 무전기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와 계속 통신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 주위로 몇 대의 차량이 서 있었다.
‘꽤 많이 왔나 보네. 무슨 일 이래?’
철로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싸우고 있다거나 하는 모습은 이택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흩어져 돌아다니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몇십 미터 떨어진 곳에 김현희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이진성도 다른 한쪽에 보였다.
‘뭘 찾는 거야?’
궁금한 이택진이 철로 위에서 외쳤다.
“여보~. 무슨 일 있어? 위험해? 나 내려가도 돼?”
그리고 이택진은 밑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봤다. 그다음에 들려오는 김현희의 고함도 들었다.
“야이 화상아. 어딜 가면 간다고 연락을 해야 할거 아니야? 어디서 죽은 줄 알았잖아.”
달려오는 김현희의 기세는 무서웠다. 이택진이 보기에 잘못하면 죽도록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씨… 도망가야 하나?”
다시 지나온 철로 저쪽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공처가 이택진이었다.
* * *
공사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느렸다.
사람이 많이 동원되기는 했지만 단순하게 인원으로 해결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중장비를 써야 하고, 용접기도 써야 했다.
철로 위의 방음벽 해체 같은 경우는 더욱 느렸다. 해체하는 동안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잡고 있을 로프를 먼저 연결하고 볼트를 풀고, 용접기로 몇몇 부위를 절단하고 등등 할 일이 많았다.
어차피 잡고 있기 위해 로프를 연결하기로 했으니 내리는 것도 그냥 떨어트리지 않고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떨어트리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요소였다.
이택진이 철로에서 방음벽을 발견하고도 4주가 지났다. 그날 밤에 생긴 눈가의 멍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공사는 아직 지지부진했다.
선로 밑은 아직 20% 밖에 진행되지 않았고, 하천변의 2중 철책은 완료했다가 다시 뜯어서 아크릴을 덧댄 1중 철책으로 바꾸고 있었다.
약 1주일 전이었다.
해가지고 공사를 끝낸 사람들이 모두 철수하고 나서 두어 시간쯤 지나 비상이 걸렸다.
군계천 팬스에 설치한 진동센서가 울린 것이었다. 넓은 지역은 아닌 것으로 봐서 대규모 군집은 아니었다.
출동한 병사들은 아직 철망을 넘지 않고 있는 놈들 10여 마리, 두 철망의 사이에 있는 10여 마리, 그리고 이미 둘 다 넘어온 20여 마리를 볼 수 있었다.
경보가 울리고 출동하는 시간 동안 반 정도는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전체 50여 마리의 좀비들은 기관총과 한 개 분대의 화력 앞에 금방 녹아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야. 저기 철책 사이에 있는 것들은 어떻게 치우냐?”
“그렇지 말입니다.”
2중 철책을 세울 때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철책과 철책 사이 2m 공간에서 죽은 좀비의 시체를 꺼낼 방법이 없었다. 중간중간 문을 만들어 놨어야 했는데 누구도 그 생각을 못했다.
놈들이 올 때마다 저 안에 시체를 쌓고 거기서 썩게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만드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문이 아니면 팬스의 방어력만 약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결국 2중 팬스를 포기하고 자재를 철로 밑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 결정은 아크릴 방음벽의 존재 때문에 가능했다. 철책에 아크릴 방음벽을 덧대 세우면 놈들이 쉽게 타 넘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아크릴판이 부분 깨져도 철책이 뒤를 받쳐 완전히 뚫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한 기술인력이 철제 방음벽 해체 설치, 아크릴 방음벽 해체와 하천변 팬스 재설치로 나뉘어 시간이 공사기간이 더 지연되게 되었다.
* * *
철로 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동시에 네 개의 방음벽을 해체했다. 방음벽 하나에 로프를 잡고 있는 사람만 넷이었다. 거기에 기계기구를 다루는 사람, 뭔가를 나르는 사람까지 한 작업 구간에만 스물 남짓의 사람이 모여있었다.
이미 7월 말의 한낮은 뜨거웠다. 더군다나 그늘 하나 없는 철로 위였다. 바닥의 자갈과 콘크리트, 선로는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비록 하루 작업시간이 6시간밖에 안되지만 연일 계속된 작업에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어이. 거기. 로프 잘 잡아.”
“걱정 마셔. 잘 잡고 있어.”
“잘 묶어 논 거지?”
“아. 걱정 말라니까. 저번에는 실수였다고.”
이 씨는 안 그래도 지치고 힘든데 자꾸만 저번에 로프를 잘못 묶어 매듭이 풀린 실수를 상기시키는 최 씨가 짜증 났다. 그가 보기에 최 씨는 정도가 심했다. 매번 그러는 게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한번 당해봐’
제일 끝 줄을 잡고 있는 이 씨는 방음벽을 내릴 때 자기 로프를 슬쩍 놓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럼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최 씨는 자기 몫까지의 힘을 써야 했다. 잠깐 놀래키고 다시 로프를 잡아당긴다는 반 장난 반 심술의 계획이었다.
“어이. 내려”
마침내 해체가 끝나고 로프를 내릴 때가 됐다. 천천히 잡고 있는 줄을 풀어 3m쯤 내렸을 때였다.
‘지금이다’
이 씨는 로프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뺐다. 로프가 급격하게 손을 미끄러져 나가며 방음벽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바로 옆 줄을 잡고 있던 최 씨는 갑자기 당겨지는 줄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마침 운도 나쁘게 그의 발은 턱에 걸렸고 그는 자빠져 버렸다.
나머지 두 사람의 힘으로 방음벽을 지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것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고 불행에 불행을 더해 그 밑에 있던 설치 인원 중 한 명이 그것에 깔려 버렸다.
이택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떨어진 방음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방음벽을 치우고 나니 밑의 사람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이택진은 난감했다. 공사 중 첫 사고가 사망사고가 되어 버린 것이다.
더운 날씨에 육체노동을 해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과로하고 있다. 앞으로 공사는 한참 남았는데 또 사고가 안 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크레인 특장차를 구해와야겠어요”
사망자의 장례가 끝나고 수뇌부는 회의실에 모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이택진이 요구한 것은 공사장에서 볼 수 있는 크레인 차량이었다. 이삿짐센터에서 쓰는 그런 약해빠진 크레인차가 아닌 제대로 된 크레인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걸 어디서 구해요?”
“찾아야죠. 동탄에도 평택에도 아파트 신축 현장이 많습니다. 거기에 분명히 버려진 것들이 있을 겁니다.”
“동탄에서 그런 거 본 사람 있어요?”
“글쎄… 관심 두고 안 봐서 있는지 없는지…”
“있다 치고, 여기까진 어떻게 가져옵니까?”
“기름만 충분하면 여기까지는 운전하고 오면 됩니다. 특장차 운전이 해보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습니다. 워낙 크기 때문에 커브 돌 때 조금만 주의하면 됩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있는 곳에 여기까지 길이 안 뚫렸으면 길도 뚫으면서 와야 해요. 좀비들이 있으면 잡으면서 와야 하고요.”
“그래도 해야죠. 그것만 있으면 공사기간도 단축하고 사고도 안 나게 할 수 있어요.”
이택진의 주장이 맞는 말이고 크게 무리한 요구도 아니었다.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일단은 찾아보고 운송방법은 뒤에 생각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찾아보겠습니다. 그동안은 어렵더라도 지금처럼 해 주세요. 헬기가 한대밖에 없으니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요.”
엄밀하게는 헬기 조종사가 한 명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하여간 운항 가능한 헬기는 한대였다. 그 한대가 평택시 전단 살포와 정찰을 하면서 공사장의 크레인을 찾아야 했다. 만약에 평택 시내에 없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그렇게 회의를 파하고 일어서는 이진성을 이택진이 불렀다.
“진성 씨, 저번에 도끼 부러졌다면서?”
“네. 왜요? 다른 도끼 구해 놨는데.”
“아. 내가 진성 씨 주려고 도끼 하나 만들어 봤지.”
“바쁘신데 언제 또 그런 걸? 어디 있어요? 안 보이는데?”
“공방에 있어요. 같이 가요. 혹시 무게중심이 안 좋으면 손 봐야 하니까.”
도착한 공방의 구석에서 이택진이 꺼내 준 도끼를 받아 든 이진성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일단 전체가 쇠로 되어 있었다. 도끼머리는 소방 도끼 두 개를 용접으로 붙인 양날 도끼였다.
그리고 자루는 쇠파이프도 아닌 통짜 철봉을 끼어넣어 용접한 것이었다. 거기에 양쪽 끝은 뾰족한 창이었다.
“우와! 끝내줘요”
받아 든 도끼를 휘둘러본 이진성은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엄청난 파공성에서 도끼의 파괴력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거 한방이면 까만 애들도 휘청휘청하겠는데요?”
비록 살상 무기지만 평생 받은 어떤 선물보다 더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이택진은 이진성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다음에는 마누라 방패를 만들어 봐야겠어. 홍수진 씨 활하고 화살도 강철로 만들어 볼까? 에이 그건 재료가 없어서 못하겠다.’